어바등 2차

[해량무현] 시켜줘 명예공청기 - 6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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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이드의 사정



해저기지는 온통 변수로 가득찬 퍼즐 같은 곳이다. 그리고 그 변수의 대부분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몇 년간 해저기지에서 생존 게임을 해 온 신해량의 감상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입사한 치과의사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신해량을 곤란에 빠뜨렸다. 해저기지에 산적한 변수들과는 속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저기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는 너무나… 정상인인데다, 이웃으로 두기에 기꺼운 타입이었다. 백호동 복도에서 박무현과 처음 대면한 후, 신해량은 자신이 정상 시민을 대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사하면 한동안 사회화 기간이라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고민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언제든 불러도 괜찮다는 말을 한 뒤 치과의사(“박무현이라고 합니다.”)는 정말로 자주 그를 불러냈다. 대개는 치료용 도구나 자잘한 수리를 요청했는데, 그렇게 불려나가면 치과의사는 으레 어디서 받았다는 간식을 내밀거나(“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을 함부로 드시면 안 됩니다.” “어, 연구동의 김가영 씨가 준 건데요.” “그건 괜찮습니다.”) 커피 같은 음료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러면서 계속 말을 걸었는데, 사람이 두 명 이상 있을 때 발생하는 침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타입으로 보였다. 대화는 으레 바쁜 와중에 불러내어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되었고, 신해량은 점점 꽤 긴 답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박무현은 훌륭한 사회화 훈련 도우미였다. 그는 좋은 청자였고, 상냥했고, 이런저런 개인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반응도 솔직한 편이라 스스로의 발화 수위를 가늠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상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그러나 유의할 만한 것은 아니라 여겼다. 거짓말로 무엇을 치장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물리적 갈등으로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 없는 대화 시간에 신해량은 저도 모르게 정을 붙였다. 

도를 넘은 화를 내고 압박을 한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과했어.’

늘 부드럽던 박무현의 목소리로 듣는 이용했다, 라는 말은 유독 까끌했다. 치과의사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근거를 모를 배신감이 신해량을 부추겼다. 가이드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는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자신조차도 오랜 시간 잊었던 비밀 아닌 비밀이었으므로. 겁에 질린 표정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신해량은 망설였다.

그리고 망설임과 동시에 박무현은 그의 눈 앞에서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에스퍼였나.’

지나온 전장에서 무수히 보았던 광경을 오랜만에 목도했다. 순간이동 능력자는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였다. 등급이 높을 수록 난이도는 올라간다. 환경에 따라 상대가 엄폐물 뒤나 지하, 상공으로 순간이동하는 경우는 특히 일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여기는 벽 너머에는 해수 뿐인 심해 3천미터 아래의 해저기지이고, 상대는 훤히 뚫려 있는 복도에서 능력을 사용했다.

기민한 판단으로 양 옆을 살피려는데 문 안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다.

불안감이 등을 타고 달렸다. 신해량은 다급히 팀장 권한으로 38호실의 문을 열었다. 몇 주간 담소를 나누었던 상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사이 흐른 코피가 박무현의 볼을 적시며 둥그렇게 고였다.

“선… 박무현 씨.”

신해량은 치과의사의 이름을 부르며 박무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에스퍼 에너지를 바닥날 정도로 사용한 건가? 

‘…겨우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한 것 만으로?’

메딕을… 불러야 할 지도 모른다. 다행히 호흡은 있었다. 맥을 확인하기 위해 박무현의 경동맥을 짚는데, 얕은 맥박 너머로 어떠한 힘이 팔을 타고 신해량의 심장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놀라고 당황했지만 갈증과도 같은 간절한 느낌이 전해져 손을 뗄 수 없었다. 괴롭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마치 신경이나 힘줄을 잡아채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건, 아마도 정황상… 

‘가이딩인가.’

가이딩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무현의 맥이 정상 범위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색도 나아졌고, 코피도 멎었다. 콧등을 눌러 지혈하려던 손이 갈 데 없이 흔들렸다. 박무현의 상태가 나아지며 아이가 손을 잡아 끄는 듯한 감각도 점점 약해졌다. 가이딩을 받아 괴물같이 일어나는 에스퍼를 수없이 보며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오히려 더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손이 좀 닿은 것 만으로 이정도로 회복된다고?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그는 마치….

신해량은 박무현을 조심스레 안아들고 침대로 그를 옮겼다. 얼굴에 묻은 피를 제외하면 이제 치과의사는 그냥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에스퍼 에너지가 고갈된 에스퍼의 끝은 늘 부상으로 인한 이탈이었다. 경험 많은 용병으로서, 그리고 일종의… 가해자로서, 신해량은 박무현의 상태를 해결해야 할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용병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때 그 녀석들이 가이딩을 어떻게 했더라.


박무현은 포근하고 푹신한 감각에 잠에서 깼다.

대학 시절 필수 전공 8시 강의를 잊고 늦잠을 잤을 때보다 더 푹 잔 기분이었다. 온 몸이 개운하고 정신이 맑았다. 여기가 해저기지가 아니었다면 분명 새 소리 같은 게 창 밖으로 들렸을텐데. 박무현은 기분 좋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으악!!!”

그리고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서 튀어올랐다. 정확히는, 튀어오르고 싶었는데 신해량이 상의를 탈의한 채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푹신한 게 지금….

아니, 왜 벗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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