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해저기지 출근일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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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기지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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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서 결재를 올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어느덧 퇴근시간이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패드를 꺼내 내일자 예약 환자들에게 알림 메시지를 전송한 뒤, 마감 업무와 뒷정리를 마치고 치과 문을 나섰다.

 

  오후 내내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쓴 탓인지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중앙동 식당가를 향해 곧장 걷기 시작했는데, 늦게 도착하면 줄을 오래 서야 했기 때문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교대 근무로 인해 분산되는 인원을 감안하더라도 저녁 식사 시간 무렵에는 늘 대기 인원이 많았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자 이윽고 식당 만한전석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기 줄의 끝부분으로 다가가니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강수정, 서지혁, 백애영, 그리고 엔지니어 가팀으로 보이는 초면의 얼굴 3명도 함께였다.

 

  "선생님, 여기에요."

 

  강수정이 나를 손짓해 부르자 무료하게 기다리던 대기인원들의 이목이 잠시 나에게 쏠렸다가 흩어졌다. 강수정을 비롯한 엔지니어 가팀 팀원들에게 간단히 인사한 다음 대기줄 맨 끝에 선 서지혁의 뒤에 서자, 그가 알은 체하며 내게 말을 붙였다.

 

  "의사 선생님, 쉬다 오시더니 얼굴이 훤해지셨네요."

 

  "그런가요. 휴일동안 잠을 너무 많이 잤더니 얼굴이 부었나봅니다."

 

  “최고의 휴일이네요. 저도 잠을 좀 푹 자고싶어요. 요새 불면증 때문에 잠을 통 못자거든요.”

 

  서지혁이 마른 세수를 하며 교대근무의 해로움에 대해 토로하는 와중에 서지혁 앞에 서있던 백애영이 뒤를 돌아보며 불쑥 끼어들었다.

 

  “아까 전엔 잘만 잤잖아 잠탱아. 네 코고는 소리 때문에 강당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

 

  "난 억울해. 아니 글쎄 의사 선생님 들어보세요. 대한도 강당에서 무슨 외부 인사 초빙 강연을 한다는데, 참석 인원이 부족하다는거에요. 머릿수 채우러 갔다가 피곤해서 아주 잠깐 눈만 감았던 것 뿐인데, 얘가 어떻게 한줄 아세요?"

 

  서지혁이 팔을 걷자 팔뚝에 빨간 손바닥 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자 백애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엄살 피우지 마. 그리고 눈만 감긴, 뭘. 아주 달콤하게 숙면을 취하시던데. 바로 옆에서 고통받은 내 섬세하고 불쌍한 귀는 생각 안하냐? 그래도 넌 내 덕분에 깨서 퀴즈 풀고 상품이라도 받았잖아."

 

  그러자 서지혁이 그깟 상품따위로 상처입은 자신의 몸과 마음은 치료될 수 없다며 가련한 표정을 짓다가 백애영의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았다.

 

  "에휴. 평소대로면 우리 팀장이 칼같이 쳐냈을텐데, 운영팀 신입 직원이 울상으로 부탁하러 와서 어쩔수 없이 가게 된 거에요."

 

  서지혁이 지금도 자기는 전도유망한 인재인데 이런 식으로 직원 교육을 자꾸 듣다가 너무 유능한 인재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다며 아무 말을 하자, 백애영이 한번만 더 쓸데없는 말을 해서 자신의 귀를 오염시킨다면 당장 그 입을 꿰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내가 세탁실에서 있었던 백애영과의 날카로운(유혈이 낭자한) 첫만남을 잠시 추억하는 동안 대기줄은 금세 줄어들었다.

 

  식당 입구에서 바코드 리더기에 사원증을 찍고 식판에 음식을 담은 다음 엔지니어 가팀 팀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해저기지에 처음 입사할때만 해도 한식은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 외국 음식들 위주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에서 지내보니 적어도 하루 한번씩 뜨끈한 쌀밥과 김치를 먹지 않으면 제대로 뭘 먹은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초면의 엔지니어 가팀 직원들과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이지현이 윗니가 약간 시리다며 곧 치과에 찾아가겠다고 하기에 언제든 환영이며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정상현은 통성명을 할때 건성으로 이름을 말한 것 외에는 딱히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기 바빴다. 김재희는 내 의안에 관심을 보이더니 자신이 착용한 손가락 의수와 의족을 보여주길래 그에 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엔지니어 가팀 팀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하던 중에 엔지니어 팀장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들어왔다. 팀장 회의가 늦게 끝난 모양이었다. 각자 식판을 채운 후 뿔뿔이 흩어져 식사하는 것을 보니 팀장들간의 사이가 그다지 친밀해 보이지는 않았다. 신해량 팀장이 식판에 음식을 가득 담고서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팀장님 얼른 오세요. 회의가 많이 길어졌네요."

 

  강수정이 말하자, 신해량이 약간 피곤한 안색을 하고 대답했다.

 

  "인력 재배치와 근무 시간 조정 관련으로 각자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해저 구조물 안전성 평가에 대한 내용은 내일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묵묵히 밥을 입에 퍼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팀장님. 아, 그리고 여쭤볼게 있어요."

 

  "네, 부팀장님. 말씀하십시오."

 

  "이번 주 금요일에 헬기가 들어온다고 해서요. 그 날 저희 팀 티타임을 하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신해량의 시선이 팀원들을 한차례 훑고 나서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네, 좋습니다. 이번에 의사 선생님도 새로 오셨으니 함께 가시도록 하죠."

 

  "저도 팀장님께 그걸 여쭤보려고 했어요.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선생님께서 처음 오셨으니 환영회를 겸해서 티타임을 하려고 해요. 선생님, 부담 가지지 마시고 시간 되시면 오세요."

 

  "저야 너무 좋죠.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강수정의 설명에 따르면, 엔지니어 가팀은 대한도에 헬기가 도착하는 날 종종 택배로 주문한 간식들을 가지고 모여서 티타임을 가진다고 했다. 함께 과자를 나눠 먹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비록 한국 국적이기는 하지만 엔지니어팀 소속 직원도 아닌데, 이렇게 신경써주니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감사하다고 말하며 진심을 가득 담아 미소짓자 신해량은 내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더니 ‘별것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서 다시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강수정은 마주 웃으며 그날 먹고 싶은 메뉴가 있는지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 서지혁, 백애영, 김재희가 저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얘기했는데,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메뉴 선정은 단체 채팅방에 투표로 부쳐졌다. 나도 어느샌가 단체 채팅방에 초대되었길래 얼른 부대찌개에 한표를 행사했다. 그런데 필요한 식재료들을 전부 구하는게 가능한가? 어쨌든 뭔가 방법이 있겠지. 잠깐 의문이 생겼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나저나 빈손으로 티타임에 참석하려니 어째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금요일이 되기 전까지 나도 간식 같은 걸 좀 마련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백호동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아까 낮에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근육이 놀랐는지 뒤늦게 목이 뻐근했다. 다시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며 찜질팩을 목 뒤에 붙인 다음 내 방 침대에 걸터앉아 인터넷 쇼핑몰에서 생필품과 간식 몇가지를 결제했다. 어수선한 방을 치우고 나서 뉴스와 예능 클립 영상을 몇 개 보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하루가 다 가고 있었다. 목 상태가 좀 나아진다면 내일부터는 운동도 좀 하고 부지런히 살아야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어느샌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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