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해저기지 출근일지 (1)
※ 방수기지 AU - 무현쌤 첫 휴가 후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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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기지 입사 후 첫 번째 휴가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느즈막히 일어나 인공해변에서 따뜻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이며 햇볕을 쬐고, 백호동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식사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보냈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나도 모르게 많이 긴장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마음 놓고 쉬었던 게 얼마만인가.
***
꿈같은 휴일이 끝나고, 출근을 하려고 하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 치과 가기 싫다. 하지만 가야하겠지. 내가 의사선생인데. 출근하자마자 붉은 산호에서 테이크아웃해온 쓰리샷 라떼를 수혈한 뒤 업무에 돌입했다. 오늘자 예약 환자들을 보고 남는 시간에는 월간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치과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모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는데, 환자 진료와 치과 행정사무를 모두 나 혼자 처리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아직 예약 환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낮게 웅- 하는 소리와 조금씩 흔들리는 해저기지의 진동을 느끼며 한창 통계 자료를 입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깜빡. 하고 전등이 꺼졌다가 켜졌다.
뭐지? 자동반사적으로 손가락이 Ctrl + S키를 눌렀다. 한참 전등을 쳐다보고 있자니 또 멀쩡하기에 별 일 아닌가 싶어 다시 작업을 시작했는데, 업무에 몰입하기 시작할때쯤 또다시 전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등을 수리하거나 교체해야할 것 같다.
패드를 켜서 사내 메신저를 살펴보았다. 엔지니어팀에 아는 직원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지혁과 백애영을 비롯한 엔지니어 가팀의 다른 팀원들은 전부 다른용무중 상태로 되어 있고……. 유일하게 온라인 상태인 강수정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 강수정 부팀장님, 안녕하세요. 지난 번에는 티타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연락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치과 전등이 고장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금방 답변이 돌아왔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저는 곧 보고 들어가야해서 팀원들한테 말해둘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희 팀원들 잠깐 시설 점검 나갔는데 곧 돌아와요.
강수정에게 감사하다는 답변을 보낸 후 또다시 엑셀 함수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깜빡. 깜빡. 잊을 만하면 깜빡거리는 전등이 거슬리고 신경쓰여 작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치과 안을 서성거리다 벽과 캐비닛 구석 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간이 사다리를 발견했다.
도대체 어떤 상태인거야. 가까이에서 한 번 살펴보기나 할 요량으로 사다리에 올랐는데, 높이가 약간 모자라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전등 쪽을 살펴보며 불안정한 자세로 이리저리 몸을 돌릴때마다 부실한 간이 사다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안되겠군. 그냥 얌전히 도움의 손길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다리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휘청. 하고 사다리가 흔들리며 발이 미끄러졌다.
어?
바닥과 부딪히며 받을 충격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짧은 찰나에도 수술한 척추에 대한 걱정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곧이어 물건이 바닥에 쿵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에 탁. 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몸이 떠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서 멍한 상태에서 몇 초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닫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누군가가 사다리에서 추락하던 멍청한 치과의사를 운좋게 받아낸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감사, 감사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런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대답을 쥐어짜냈다.
“사다리를 사용하실 때는 반드시 2인 1조로 작업하셔야 합니다. 혼자서 작업하시다가 사다리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추락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내 몸을 떠받치고 있는 남자의 훤칠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신이 몇날 며칠을 고심해서 빚어 놓은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남자의 두상과 턱, 이목구비가 환상적인 황금비율을 이루며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었다. 설마 내가 천국에 온 건 아니겠지.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이 사다리에서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마음의 준비 없이 잘생긴 얼굴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충격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와중에도 내 척추의 은인은 ‘사다리 최상부 발판 위에서 작업해서는 안된다’는 등 몇 가지 조언을 덧붙이고는, 나를 바닥에 내려두고 다친 부위가 없는지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리고 나서 별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수를 청해왔다.
“신해량 팀장입니다.”
신해량 팀장? 그 이름을 들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 강냉이 추수꾼을 말하는 건가. 나를 구해준 은인이 공교롭게도 내 환자들의 치아 건강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주범이었다니. 귀를 의심하면서도 악수를 청하는 손을 마주 내밀어 잡았다.
“박무현입니다. 초면에 이런 꼴을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다치신 곳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네, 덕분에요. 팀장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안전에 좀 더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그럼 이제 전등을 수리해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방금 일어날 뻔한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기 위해 신해량이 장비를 급하게 내팽개치며 뛰어든 모양인지 상담실 바닥에 작업용 사다리와 안전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물건이 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사용했던 간이 사다리도 근처에 사이좋게 나동그라져 있었다. 신해량이 챙겨온 작업용 사다리를 설치하고 안전모의 끈을 조이는 동안 나는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간이 사다리를 고이 접어 원래 자리에 두었다.
“PC로 작업하고 계시던 것이 있다면 저장하고 전원을 꺼주십시오.”
신해량의 요청에 얼른 작업하던 문서를 저장하고 PC 전원을 껐다. 그가 패드로 뭔가를 조작하자 치과 안이 어둠에 잠겼다. 전기를 차단한건가? 곧이어 신해량이 안전모에 붙어 있는 헤드랜턴을 켜고 사다리 방향으로 불빛을 비췄다.
“여기를 잡으시면 됩니다.”
내가 A자로 벌어진 사다리의 양 옆을 붙잡고 있는 동안 신해량은 발판을 딛고 올라가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허리춤에 찬 공구 주머니에서 전동 드라이버를 꺼내 조명 커버를 열고 부품을 교체하는 일련의 과정 동안 짧게 이야기를 나눈 바로는, 엔지니어 가팀의 다른 팀원들은 시설 점검 후 사내 행사의 머릿수 채우기에 동원되어 대한도 강당으로 향했고, 신해량은 팀장 회의 전에 잠깐 남은 시간 동안 짬을 내어 전등을 수리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팀장이 직접 온 거였군.
신해량과의 짧은 대화 후에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아까의 상황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내가 체격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인 남성인데, 가뿐하게 들고 있다가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다니. 그 덩치와 돌처럼 단단했던 팔뚝을 보면 그정도로 힘이 셀 만하군', '그런데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치과의사의 멍청한 모습을 보고도 나의 진료를 신뢰할까?' 따위의 생각들이 두서 없이 떠오르며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턱을 인정사정 후려치고 다닌다는 괴한이 다비드 조각상의 현신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니,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하얀 말티즈 같은 강아지’ 같은 상상을 했던 걸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소문 속 인물을 실제로 마주치니 엄청난 괴리감이 드는군.
짧은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신해량은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치웠다. 그가 패드를 조작하자 다시 치과 내부가 환해졌다.
“다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시간 되실때 스케일링하러 들르세요. 잘 해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신해량은 곧 회의가 있다며 내가 건넨 치실을 쥐고 장비를 챙겨 바람처럼 사라졌다. 천장을 보니 깜빡거리던 전등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 내원하면 특별히 신경써서 진료해줘야겠다. 앞으로 주먹질을 할 때는 얼굴을 피해달라고 은근슬쩍 얘기해볼까.
서류작업을 하기 위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시계를 보니 퇴근까지 시간이 1시간 남짓 남아있었다. 잘 하면 보고서는 오늘 안에 끝낼 수 있겠는데. 할 수 있다 박무현. 나는 퇴근 시간 엄수를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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