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시켜줘 명예공청기 - 3
어느새 다다른 제 숙소 앞에서 짧게 감사인사를 하고 익숙한 공간에 돌아온 박무현은 문득 생각했다.
‘나… 반했나?’
뭔소리야. 차가운 이과남성 박무현은 금세 제 생각을 부정했다. 미디어가 주입한 사랑의 방정식이 뇌에 어지간히도 스며들어있구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박무현은 보다 논리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했다.
해저기지에 와서 놀란 것 중에는 폭력사태와 치아파절환자의 비율 말고도 건조함이 있었다. 해저기지는 물 속에 있는데도 모든 공간이 대체로 건조했다. 박무현은… 습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인 열 명 중 두 명이 앓는다고 하는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였기 때문이다.
처음 치과에서 기자재 박스를 뜯으며 이 상자 안이 차라리 습도가 높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의 일터는 절대 그의 비염에게 친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 치료를 할 땐 그야말로… 쾌적하다 못해 싱그러웠다. 양 쪽 콧구멍이 동시에 호흡에 임하는 것이 얼마만이었던가?
무슨 조화일까? 엔지니어 팀장이 개인적으로 들고다니는 휴대용 가습기나 공기청정기 같은게 있을 리는 없고… 혹시 밤에는 좀 습도가 올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아, 칫솔 딥블루에 두고왔네… 박무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다시 막혀가는 코를 느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날 박무현은 오랜만에 병원 생활을 하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에스퍼 능력이 발현된 후, 박무현의 재활 치료 루틴에는 가이딩이 추가되었다. 주치의의 말로는 에스퍼 특성을 보유한 환자의 경우 가이딩을 진행하면 통한 에스퍼 에너지의 회복 과정에서 상처나 염증도 함께 회복되어 재활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이는 박무현의 재활 치료 기간을 상당히 단축해 주었다. 박무현은 그 시간을 꽤 좋아했는데, 힘들게 어딜 움직여야 하거나 고통이 동반되는 치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이딩 치료는 은행 창구처럼 한 뼘 정도 구멍이 있는 가림판 앞에 앉아서 20분정도 가이딩 치료사에게 팔꿈치를 내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과묵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친구들이 없어서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동생이나 조카가 생각난다며 귀여워하는 치료사도 있었다. 재활운동을 하느라 잔뜩 소모된 체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가이딩 시간은 끝나 있곤 했다.
꿈 속에서 박무현은 휠체어에 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북적이던 가이딩치료실은 어쩐지 텅 비고 조용했다.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왔나? 박무현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나아갔다. 딱 한 군데,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얼른 그 앞에 나아간 박무현은 병원복 소매를 걷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너무 늦게 왔나요? 왜 아무도 안 계시죠.’
대답은 없었다. 내가 너무 늦어서 기다리느라 피곤하신가봐. 치료사는 말없이 박무현의 팔꿈치를 잡았다. 박무현은 눈치를 보며 가이딩이 시작되길 기다렸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뭐지? 그 순간, 박무현은 가림판 너머의 치료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신해량이었다.
“흐억!”
박무현은 벽에 머리를 박고 잠에서 깼다.
미친, 신해량 꿈? 나 진짜 신해량한테 반했나? 아니, 그럴리가…. 아침부터 혼란한 머릿속에서 박무현은 어느 순간 진실이 그를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아마 뇌는 아직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가이딩을 받으면서 느꼈던 감각을… 박무현은 어떤 상냥한 치료사가 해줬던 말을 떠올려냈다.
‘에스퍼와 가이드 간에 상성이 좋거나 정말 가이딩 등급이 높은 가이드의 경우는 이렇게 붙잡고 있지 않아도 가이드가 될 때가 있어요. 학생도 운이 좋으면 그런 가이드를 만날 거예요.’
박무현은 깨달았다. 꿈으로 반추할 정도로 달가웠던 곳. 아픔과 고통이 멀어지던 감각.
알고 있는 형태의 안온함.
가이딩이었어.
신해량이… 가이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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