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성장통1

여름 제철 청게 젹량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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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서지혁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총을 잡았던 날. 엉성한 자세로 당긴 방아쇠에서 쏘아진 탄환은 정확하게 과녁의 한 가운데를 저격했다. 주변의 낯선 이들은 서지혁이 적군 수장의 대가리라도 날린 양 감격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에 떨떠름하게 웃던 서지혁은 입부 첫날부터 사격 동아리의 에이스가 되었고, 천재 명사수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탕탕탕― 탕탕―

"……하. 씨."

"야. 지혁이 너 괜찮냐? 어디 아파? 오늘 왜 이래?"

"예? 아, 아뇨. 그냥 팔이랑 다리가 좀 아파서요."

신경질적으로 귀에서 귀마개를 빼낸 서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팔꿈치와 무릎을 두들겼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코치는 서지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벤치에 앉혔다. 코치가 건네준 물을 마시던 서지혁의 시선은 방금 자신이 저격한 과녁을 향했다. 평소 대충 쏴도 가운데에만 몰렸던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서지혁에게 쏠렸다. 팀의 에이스인 서지혁의 부진한 결과에 부원들 또한 놀란 눈치였다. 서지혁은 자신을 향한 눈들을 무시하며 고개를 숙였고, 코치는 앞에 있는 과녁에 집중하라며 부원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팔과 다리가 빠질 듯이 아팠다. 특히 팔꿈치나 무릎에 있는 연골을 누군가 억지로 잡아 당기는 것처럼 아릿했다. 손가락은 마디마다 얼얼했고 손끝의 감각도 낯설었다. 맨날 쥐던 총의 그립감도 어색했고 시야조차도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다. 내가 병에라도 걸렸나?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을 주무르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온 듯 바닥에 조용한 그림자가 졌다.

"성장통이야?"

"아, 주장. 어…….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동아리 주장인 신해량이었다. 방금까지도 감독의 옆에서 훈련을 지켜보고 있더니 소리도 없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성장통인가? 신해량의 말을 듣고 보니 뼈끝이 유독 아프긴 했다.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니 신해량은 서지혁의 옆자리에 앉아 아픈 후배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데? 팔다리 다 아프긴 한데 무릎이 제일 아파요. 나도 그랬어. 주장도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키가 몇이랬지?"

"마지막으로 쟀을 때가 190cm였습니다."

"아마 더 컸을 거야. 그래서 시야가 낯선 거고. 짧은 시간에 눈높이가 달라지니까 네가 적응을 못해서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예. 감사합니다."

서지혁이 꾸벅 인사를 하니 부원들을 봐주던 코치가 돌아왔다. 신해량은 코치에게 서지혁의 상태를 보고했고, 코치는 성장통이라는 말에 키 큰 놈들이 왜 더 크는 건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해량이 네가 잘 좀 챙겨줘. 예. 어휴- 해량이도 그때 엄청 고생했는데 지혁이 너까지 난리냐. 서지혁이 모르는 과거를 떠올린 건지 코치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저 멀찍이 서 있던 감독 근처로 갔다. 코치에게 이야기를 듣던 감독은 서지혁의 과녁과 서지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쉬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서지혁은 불협화음을 내는 총소리를 들으며 훈련 중인 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남들 다 총질할 때 혼자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자신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잘 알았지만 만족 못한 결과물을 낸 서지혁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러다 뒤처지면 어떡하지? 사격을 시작한 이후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이었다. 그 속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옆에 앉아 있던 신해량은 서지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지혁의 어깨가 순간 움찔대며 움츠러들었다.

"신해량!"

"예."

신해량의 훈련 차례가 되고, 짧았던 위로의 손길이 거둬졌다. 신해량은 곧바로 일어나 서지혁을 지나쳐 라인 앞에 섰다. 여유롭게 자세를 잡은 신해량은 공기권총을 손에 들었고, 그를 지켜보며 서지혁은 잠깐의 온기가 머물렀던 제 어깨를 감싸 잡았다.

탕탕탕탕탕―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 일정하고 안정적인 총소리가 울렸다. 신해량이 쏜 총알들은 모두 정확하게 과녁의 가운데에 명중했다. 주변에서 감탄사나 환호성이 들려왔다. 넌 실력이 진짜 안정적이다. 우리 해량이는 얼굴값 주장 값을 하지요~ 부원들의 호들갑에 신해량은 웃었고, 서지혁만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숨을 골랐다.

그와 닿았던 어깨가 뜨거웠다. 이 또한 성장통일까.

아릿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서지혁은 신해량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존층이 고장 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지구의 여름은 더럽게도 더웠다. 점심을 먹으러 교실에서 급식실로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땀이 줄줄 흘렀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서지혁에게 여름은 그리 괴로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올해만큼은 달랐다. 성장통으로 인해 뼈와 뼈 사이에 불이 붙은 듯 뜨거운 열이 올랐다. 피부가 아닌 관절에서 느껴지는 열감이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점심 밥을 싹 비운 서지혁은 적당한 포만감을 안고 곧바로 부실로 향했다.

부실에 도착한 서지혁은 곧바로 에어컨 전원 버튼을 누르고 구석의 소파에 발라당 누웠다. 점심시간의 훈련은 필수가 아니었기에 이 시간의 부실은 대부분 공실이었다. 서지혁 또한 평소엔 친구들과 축구나 농구 같은 공놀이를 했었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부실은 낯설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서지혁은 은근한 행복을 느꼈다.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격 동아리인 주제에 말도 안 되는 것을 바라는 스스로가 웃겨 작게 웃었다.

점차 공기가 차가워지고 성장통 또한 잠시 멎은 듯 잠잠했다. 시원한 부실에서 편하게 누워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지금 잠들면 예비종도 못 듣는 거 아닌가? 서지혁은 크게 하품을 하고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비볐다. 정신마저 가물가물해지려던 때, 밖에서 누군가 부실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3학년 선배 놈이라도 온다면 싸가지 없는 2학년이 감히 부실에서 처자고 있다고 한 소리 들을 게 뻔했기에, 서지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에어컨을 끄고 소파 뒤로 숨었다.

"야~ 신해량! 빨리 말하라니까?"

"감독님이 말한 차트는 저기 있어. 저거 가지고 가면 돼."

"말 돌리지 말고~ 진짜!"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신해량과 어떤 여자였는데, 같은 부원 선배인 3학년 강아영이었다. 강아영은 신해량이 가리킨 차트를 들고 그의 옆에 붙어 계속 쫑알쫑알 말을 걸어댔다. 부실 안쪽까지 걸어 들어온 신해량은 에어컨 앞에 서더니 잠시 주변을 살폈다. 소파 뒤에서 그들을 몰래 구경하던 서지혁은 신해량의 고개가 돌아가기 전에 몸을 제대로 숨겼다. 이 귀신 같은 인간이 설마 눈치챘나?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행히 신해량은 곧바로 에어컨을 틀고 서지혁이 숨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강아영도 신해량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물러터진 3학년들이면 안 숨어도 됐는데. 그냥 지금 장난인 척 튀어 나갈까? 놀란 신해량의 표정을 상상하던 서지혁은 이어 들려온 강아영의 말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누굴 좋아하는데? 응? 나한테만 알려주라."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며! 누군데? 현아? 유진이? 설마 채연이?"

"글쎄."

신해량의 짧은 대답에 강아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답답하다는 듯이 소파를 팡팡 쳐댔다. 그 이후에도 강아영은 온갖 여학생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했고 신해량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 알겠다. 그럼 나밖에 없네. 나지? 나네. 그치?"

강아영의 농담 같은 질문에 신해량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어? 웃겨서. 진짜 나야? 장난스러웠던 강아영의 말투는 점차 차분해지더니 순간 침묵이 돌았다.

"……진짜 너 나 좋아해?"

"감독님 2층 강당에 계셔."

"진짜 말 돌리지 말구!"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모르겠는데."

"야! 그걸 누가 안 궁금해하겠어?!"

신해량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거나 고민할 때 늘 이렇게 말을 줄였다. 소파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초 뒤에 강아영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론데."

"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어? 야! 신해량! 아 진짜 또 어딜 가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신해량은 몸을 일으키더니 부실 밖으로 나갔고, 강아영도 그를 따라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 다시 텅 빈 부실에 혼자 남겨졌지만, 서지혁은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거지? ……정말 신해량이 강아영을 좋아한다고?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서늘한 공기 속에도 다시 무릎이 뜨겁게 아렸다. 분명한 통증이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를 열감을 느끼며 소파 뒤에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던 서지혁은 예비종이 울리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부실을 나가려던 서지혁은 아직도 에어컨이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해량이 이런 걸 깜빡할 사람이 아닌데. 서지혁은 멍한 표정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에어컨을 껐다.

삐빅 소리와 동시에 에어컨이 꺼졌고 그와 동시에 부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어."

"……어. 안녕하세요."

강아영이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는 듣지 못 했는데, 계속 부실 앞에 서 있었던 건가? ……대체 왜? 서지혁이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자 강아영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부실의 문을 닫았다. 복도를 달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가운 바람의 부재에 곧바로 숨이 턱 막힐 듯한 더위가 느껴졌다. 무거운 공기는 서지혁의 뼈마디를 압박했고 순식간에 몸에 열이 올랐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숨을 쉬기 어려웠고 시야가 흐려져 바닥과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아프다. 원래 성장통이라는 게 이렇게 아픈 건가.

흐린 눈을 비빈 서지혁은 더 자랄 리 없는 심장을 움켜쥐며 한참을 부실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한여름에 시작된 서지혁의 성장통이었다.


여름방학과 동시에 전지훈련이 시작되었다. 9월의 전국사격대회를 앞두고 집중력과 체력을 키우기 위한 합숙 훈련이었다. 하계 스포츠로 분류되는 사격은 산탄총 종목을 제외하곤 실내에서 경기를 치른다. 그렇기 때문에 공기권총이 전공인 동아리 부원들은 계절과 상관 없이 훈련 중에 땀을 흘릴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지훈련은 체력증진이 주된 목표였기에 땡볕의 로드워크 중인 부원들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평소 사격 외에도 다른 운동을 취미로 하고 있던 서지혁에게 로드워크는 동네 산책 같은 거였다. 서지혁은 전지훈련 때마다 너덜너덜해진 선배들을 제치고 늘 신해량과 1, 2위를 다투며 경쟁했다. 하지만 이번 로드워크는 서지혁에게도 쉽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뼈마디에 열이 올라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벅찼다. 몸에 열이 오르자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갈리는 듯한 통증에 몸이 휘청거렸다. 헉헉대면서도 꾸준히 달리는 부원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서지혁을 지나쳐가는 부원들은 괜찮냐며 한마디씩 던졌지만 그에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서지혁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안정적으로 달려가는 신해량의 뒷모습을 보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신해량의 옆에는 강아영이 있었다. 강아영은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신해량의 팔뚝을 가볍게 때리며 웃고 있었다. 여유롭게 대화까지 하며 달려가는 두 사람과 서지혁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강아영은 평소 신해량에게 관심이 많았다. 신해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강아영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해량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렇기에 신해량도 강아영을 좋아하는 게 맞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그날 이후에도 계속 붙어 다니는 걸 보면 결국 둘이 사귀는 건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부술 듯 주먹으로 쳐가며 달리고 달렸다. 조금이라도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럴수록 뜨거운 공기가 서지혁을 방해하듯 숨을 막고 다리에 매달렸다.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늪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졌다. 바닥과의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디를 밟고 어떻게 달리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관성으로 달리던 자세가 흐트러지자 발이 꼬였고 결국 서지혁은 맨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지혁아! 너 왜 그러냐? 야, 많이 아파?"

"……괜찮습니다."

"그놈의 성장통은 언제 끝난다냐. 아휴."

뒤에서 자전거를 타며 뒤따라오던 코치가 멈춰 서 바닥에 구른 서지혁을 일으켜 세웠다.

"안 다쳤어? 무릎은 괜찮고?"

"예. 다치진 않았어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어. 야! 해량아! 너 잘 왔다. 지혁이 좀 데려가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엉성하게나마 계속 달렸기 때문인지 그의 이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신해량이 숨을 고르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아영도 함께 있었다.

"아. 더 뛸 수 있습니다. 다치지도 않았고……."

"넘어졌어? 몸이 아직도 안 좋아?"

"……괜찮아요."

괜찮다는 대답에도 신해량은 서지혁의 몸을 살폈다.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을 아는 서지혁은 바닥에 구르면서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서지혁의 반바지 아래의 무릎이나 다리에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보며 멍하게 있으니 신해량은 직접 서지혁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을 확인했다. 울퉁불퉁한 길바닥에 손을 짚으며 쓸리고 까진 상처가 그대로 드러났다. 신해량은 인상을 쓰며 서지혁의 손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다 까졌잖아."

"아이고~ 안 다치긴 뭘 안 다쳐? 해량아. 지혁이 데리고 숙소로 복귀해라. 이놈 지금 달릴 상태가 아니다. 내가 감독님한테는 말해둘게. 둘이 가서 쉬어."

"아니, 정말 괜찮은데요……."

쪽팔린 꼴을 보인 것도 모자라서 짐까지 되고 싶진 않았다. 훈련에 누구보다 진심인 신해량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해량은 옆에 있는 강아영과 함께 로드워크를 끝내는 것을 더 원할 것 같았다. 자신과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게 당연했다.

연신 괜찮다며 고집을 부리던 서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아영은 신해량의 팔뚝을 작은 주먹으로 톡 쳤다. 신해량이 강아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양손으로 힘껏 신해량을 밀었다. 신해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강아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가 미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옆에 서 있던 서지혁의 어깨와 부딪혔다.

"이번 로드워크는 내가 일등이다! 넌 지혁이랑 숙소에나 가세요~"

"그래? 일등 하려면 당장 뛰어가야겠는데."

"우씨. 알거든? 이따 봐!"

강아영은 이미 꽤 멀어진 부원들의 뒤를 따라 열심히 달려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코치도 세워뒀던 자전거에 올라탔다.

"저 진짜 괜찮은데요."

"그냥 가라 지혁아. 해량이가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땡땡이를 쳐보냐? 그럼 해량아 부탁한다. 둘이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마음 같아선 자전거라도 주고 싶은데 나도 살아야지. 이해하지? 힘내고! 파이팅!"

"예. 이따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앓는 소리를 내던 코치도 저 멀리 달려가는 강아영의 뒤를 쫓았다. 야 아영아 같이 가자! 아 저도 자전거 태워주세요! 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빠른 속도로 앞선 부원들에게 합류했다.

"가자."

"……예. 죄송해요."

신해량의 말에 서지혁이 뒤를 돌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온 몸이 뜨겁고 아파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었다. 서지혁이 비틀거리며 걷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해량이 서지혁의 팔을 붙잡았다. 뭘 하는 거냐며 바라보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감았다. 신해량의 서늘한 목덜미에 닿은 팔이 움찔거렸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 뭔 부축까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진짜."

"너 그렇게 걸어가다간 부원들보다 늦게 도착할걸."

"……."

할말이 없었다. 차라리 민폐가 되더라도 최대한 빨리 숙소에 도착해 신해량을 쉬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서지혁이 순응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신해량이 손을 뻗어 서지혁의 허리를 감싸 잡았다. 그와 닿는 모든 부위가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속이 타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여름이 이렇게 더웠던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더럽게도 맑았다.

한참을 걸어도 길이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었나? 얼마 못 가 넘어진 줄 알았는데. 선크림도 녹여버리는 뜨거운 햇빛에 땀이 절로 났다. 옆을 슬쩍 보니 서지혁의 팔과 닿아있는 신해량의 목덜미도 땀에 젖어 축축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신해량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고, 서지혁은 재빨리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눈을 피했다.

"여기서 잠깐 쉬자."

"예."

나름 사거리 같은 작은 갈림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덩그러니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벤치에 앉히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 외곽의 개발되지 않은 동네라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서지혁은 제 앞에 서 있는 신해량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주장도 앉아서 쉬어요. 잠깐만.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줘도 신해량은 앉을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서 어딘가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어디 가시게요?"

"잠깐이면 돼.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신해량은 앉아 있는 서지혁의 머리를 헝클이더니 그대로 어느 갈림길로 뛰어갔다. 숙소 그쪽 아닌데요! 크게 소리치니 신해량은 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대충 흔들었다. 어딜 가는 거지? 따라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기에 서지혁은 신해량의 말처럼 얌전히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통증은 여전했다. 무릎이 타는 듯한 고통에 서지혁은 다시 주먹으로 무릎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좀 해. 어딘가 야구배트나 망치라도 있다면 제 무릎에 휘두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바닥에 갈아버리면 좀 낫지 않을까? 고통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있으니 귀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신해량이었다. 어디를 뛰어갔다가 온 것인지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차가운 것의 정체는 캔 음료였다. 신해량은 마시라는 듯 캔을 서지혁에게 건넸다. 오렌지 맛 탄산음료였다. 서지혁이 음료를 건네받자 신해량이 서지혁의 옆에 주저앉으며 페트병에 든 물을 마셨다.

"편의점 다녀왔어요?"

"아니. 찾아봤는데 편의점은 숙소 근처 외에는 없었어. 자판기가 있더라."

"자판기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요?"

"1학년 때 전지훈련으로 왔었어."

"아."

서지혁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따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한 탄산음료가 목을 톡 쏘았다. 몸에 시원한 것이 들어가니 좀 더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신해량은 페트병의 반을 비웠다. 그리고 신해량은 서지혁의 무릎을 살짝 덮은 반바지를 허벅지 위로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서지혁이 당황했지만 신해량은 개의치 않고 서지혁의 무릎 위에 차가운 물병을 가져다 댔다.

"좀 대고 있어. 나을 거야."

"아……. 예. 감사합니다."

"나도 성장통이 심했어."

"……정말요?"

"그래. 딱 1학년 이맘때 그랬어. 그때 일주일 사이에 5cm가 컸거든."

물병을 댄 무릎의 온도가 점점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서지혁은 무릎의 통증이 점점 멎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를 두 모금 더 마신 서지혁은 비어있는 무릎에 캔을 가져다 댔다. 시원하다.

"갑자기 키가 크면 적응이 잘 안돼. 안경을 새로 맞추고 난 후랑 비슷하다는데, 너도나도 안경 맞춰본 적이 없으니까 처음 느끼는 감각이겠지."

"예에. 그렇죠."

"난 그때 그걸 몰랐어. 그냥 내 실력이 갑자기 바닥을 친 줄 알았지. 바닥도 멀어 보이고 과녁이랑 거리 가늠도 잘 안됐어. 남의 총을 쥔 것처럼 손도 어색하고 자세를 잡을 때 다리를 얼마나 벌렸는지, 무게중심을 어떻게 잡았는지도 죄다 헷갈렸어. 여태 해온 감각으로 영점을 맞춰도 계속 어긋났으니까. 그래서 그만둬야 하나 생각했는데 성장통이 멈추고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감각이 돌아오더라. 그냥 계속 성장 중인 몸에 적응을 못 하고 있는 거였어."

서지혁은 몰랐던 신해량의 시간이었다. 신해량이 말한 모든 것이 지금 서지혁의 상황과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감각이 서서히 걷어지고 서지혁은 성장통을 앓은 이후 처음으로 희망을 느꼈다.

"……저도 다 크면 괜찮아질까요?"

"응. 내가 장담해."

신해량은 서지혁의 무릎에 대고 있던 물병 뚜껑을 열어 남은 물을 다 마셨다. 더 이상 냉찜질 효과를 내주지 못하는 페트병은 벤치 근처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신해량은 땀에 젖어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서지혁의 무릎에 손을 올려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방금까지 물병을 들고 있던 덕분에 손바닥이 시원했다. 서지혁은 순간 숨을 참다 작게 공기를 내쉬었다.

"약 사서 발라."

"예?"

"안 바르면 이렇게 돼."

신해량은 자신의 바지를 들어 올려 무릎을 가리켰다. 신해량의 무릎에는 관절 옆 피부에 하얀 실선 같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게 뭔가 싶어 유심히 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작게 웃었다.

"튼살이야."

"아. 갑자기 많이 커서 생긴 거예요?"

"그래. 몰랐는데 이런 거 방지하는 크림 같은 게 있다더라. 넌 발라. 보기 안 좋잖아."

그리 말한 신해량은 올렸던 바지를 내려 무릎을 덮었다. 보기 안 좋다니. 그렇지 않은데.

"……모르겠는데요. 딱히 그런 건 못 느끼겠어요."

"그래?"

"예. ……주장은 그런 게 신경 쓰이세요? 의외인데요."

"나도 신경 안 써. 네 무릎이니까 말해준 거지."

서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서 쉰 덕분인지 열기를 식힌 덕분인지 통증은 가라앉았다. 서지혁은 무릎에 대고 있던 음료를 입에 모조리 털어 넣었다. 무릎의 열 때문에 약간 미지근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달달하고 맛있었다. 탄산음료라 갈증이 풀리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왜 저는 탄산음료예요?"

"이온 음료가 없었어."

"선배는 물이잖아요."

"그래. 근데 넌 그거 좋아하잖아."

서지혁은 제 손에 쥔 음료 캔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이걸 좋아했나? 그러고 보니 최근 자주 마시긴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던 것도 아닌데. 서지혁은 고민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좋아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말 한 마디에 가슴이 턱 막힐 듯 답답해졌다. 목구멍에 뭔가가 틀어 박힌 것처럼 먹먹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무릎을 마사지하던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셨으면 이제 가자. 신해량의 말에 서지혁도 벤치에서 일어나 푸른 하늘을 보고 섰다.

신해량은 다시 서지혁의 허리를 감싸 잡았고, 서지혁은 멎은 통증을 숨긴 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총을 쥐고 라인 앞에 서면 잘만 이완되던 심장 근육이 또 말을 안 들었다. 가까운 그의 숨소리가 들릴 때면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통증이 성장의 증거라면, 이 또한 아직 자라진 못한 마음의 성장통인 걸까.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얼마나 더 커지는 걸까.

좋아합니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서지혁은 자꾸만 튀어나오려 하는 말을 삼키며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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