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30(完)
마지막
"자, 주목! 서지혁의 '신해량 소유 프로젝트' 발표 시작합니다."
안경을 올려 쓴 서지혁이 패드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더니 화면을 공중에 띄웠다. 한 시간 넘게 방에 틀어박혀 있던 서지혁은 갑자기 혼자 멀끔한 차림으로 나왔는데, 뜬금없이 시작된 발표에 신해량은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말고 멍하니 제 앞에 띄워진 PPT 화면을 응시했다. 서지혁이 말한 것처럼 '신해량 소유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성의 없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배경에는 신해량의 화보 사진 몇 개가 대충 콜라주 되어 있었다.
"해봐."
"자, 첫 번째로 신해량이 누구인가? 신해량이란? 연애는 허락해도 본인 소유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아주 극악무도한 심성을 가진 도라이인데……."
"본론만 말해."
"이렇게 친히 증명을 해주시네요. 성질이 아주 드러운 제 애인입니다. 아무튼! 이 싸가지 없는 남자친구를 소유하는 50가지 방법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자, 다음 장!"
50가지나? 신해량이 중얼거리자 서지혁이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두 번 두들겼고 그와 동시에 PPT 화면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50가지라고 한 것이 무색하게 두 번째 화면도 형편없이 커다란 글자만 몇 개 떠 있을 뿐이었다. 화면을 보고 신해량이 헛웃음을 짓자 서지혁은 다시 한번 안경을 올려 쓰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방법! 역시 법적 구속력이 있는 방법이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서류에 이름이 나란히 올라가는 방법을 좀 생각해 봤죠. 그건 바로바로~ '입양'입니다. 찾아보니까 성인이 성인을 입양할 수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입양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이 많은 신해량씨가 어린 지혁이를 입양하는 방법밖에 없더라구요."
"나더러 네 아빠가 되어달라고?"
"그냥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가족이 된다는 거지 뭐 굳이 부모자식관계로 정의를 해야 합니까? 실제로 이렇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난 너 같은 아들 두기 싫어. 다음 거로 넘어가."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도 당신 같은 아빠라니 벌써부터 비행하고 싶은 마음만 듭니다. 자, 그럼 다음!"
톡톡. 워치를 두들김과 동시에 화면이 넘어갔다. 여전히 성의 없는 글자 몇 개가 제대로 정렬도 되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이 신해량은 뜨개질하는 손을 놀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까 거는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래도 애인을 입양한다는 게 다른 관계로 변질 될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이번엔 아주 간단하게 정하는 겁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을 가지는 거죠.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서지혁의 기습 가위바위보에도 신해량은 대바늘을 잡고 있던 손을 재빨리 내밀었다.
"악!! 미친! 어떻게 이걸 이기세요? 진짜 독심술이라도 합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다음으로 넘겨."
"허튼수작 안 됩니까? 그럼 더 발표할 게 없는데요."
"나머지 48가지가 다 허튼수작이라는 거야?"
"48가지도 없습니다. 사실 이게 끝이에요."
서지혁의 뻔뻔한 고백에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신해량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서지혁은 되려 뭐가 문제냐는 듯 넓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 시간 넘게 생각한 게 고작 이거야?"
"5분 정도 생각했고 40분 동안 당신 사진 고르고 배경 지우느라 고생했는데요. PPT는 20분 동안 만들었고. 안경이랑 옷 고르는 데에 15분 정도 썼네요."
"저걸 20분 동안 만들었다는 게 더 충격이군."
"폰트 다운로드에 10분 정도 쓰긴 했죠."
"다 기본 굴림체 같던데."
"저장할 때 뭘 잘못했는지 패드로 옮기니까 저렇게 됐어요. 원본은 저거보단 나았습니다."
신해량은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실을 마무리 지었다. 엉망진창 발표를 듣는 사이 뜨고 있던 양말이 완성된 것이다. 노란색 줄무늬가 포인트로 들어간 양말을 옆에 앉은 서지혁 머리 위에 올려둔 신해량은 피곤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 누르다 서지혁을 쳐다봤다. 서지혁은 양말을 머리 위에 올린 채 신해량을 멀뚱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저 안경 잘 어울리죠? 제가 그렇게 잘생…… 악!"
서지혁의 안경을 가만히 노려보던 신해량이 기습적으로 서지혁의 눈을 찔렀다. 별안간 공격당한 서지혁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리며 제 눈을 감쌌다. 그런 서지혁을 신해량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 갑자기 사람 눈을 찔러놓고 저렇게 당당하고 뻔뻔한 표정이라니. 하여간 진짜 미친 도라이!
"갑자기 사람 눈을 왜 찔러요?!"
"알이 있나 확인해본 거야. 왜 알도 없는 걸 쓰고 있어?"
"발표할 때 에티튜드가 중요한 거 모르세요? 발표자는 이렇게 예의를 갖추는데 듣는 사람은 이렇게 교양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발표 내용에 예의를 더 갖추는 게 나았을 거 같은데."
"남자친구한테 자기 어떻게 가질 건지 굳이 굳이 묻고 답 들으려고 하는 건 어느 나라 예의입니까? 사귀면 그냥 니꺼내꺼 없는 거지. 뭐 그렇게 비싸게 구세요? 그냥 좀 주십쇼. 닳는 것도 아닌데."
"넌 쉽게 가져봤자 고마움도 모를 놈이야."
"허……. 제가 언제 쉽게 가졌다고 그래요? 지금도 돌아버리겠구만."
"됐어. 더 생각해봐."
"아오 진짜. 안 가지고 말지."
머리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는 양말을 손에 쥔 서지혁이 투덜거리자 신해량이 작게 웃었다. 웃긴 뭘 웃어? 남은 속이 터지겠는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시위를 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그런 서지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름 발표에 예를 갖추고자 입은 검은색 셔츠와 남색 넥타이를 빤히 쳐다보던 신해량이 서지혁의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신해량의 코앞까지 상체가 끌려간 서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신해량이 그대로 서지혁에게 입을 맞추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타이밍을 모르겠다니까. 뭐에 꼴린 건지는 몰라도 신해량의 뜬금없는 키스에 서지혁은 절로 마음이 사르르 풀려버렸다. 바로 직전의 대화는 모조리 잊기라도 한 것인지 서지혁은 고개를 꺾으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안경을 쓴 게 취향인가? 아니면 셔츠? 넥타이? 그러고 보면 바텐더 놀이를 할 때도 꽤 마음에 든 눈치였는데. 이런 상황극 같은 게 재밌는 건가? 혀와 입술을 움직이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안경이 덜그럭거렸다. 거슬려서 잠시 입술을 떼고 안경을 벗으려 하니 신해량이 고개를 저었다. 뭐야 뭐야? 진짜 안경이 취향이야? 15분 동안 고르고 고른 보람이 있네.
서로의 타액으로 젖어가는 입술이 더욱 진득하게 맞붙었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상의 속에 손을 넣고 옆구리를 더듬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넥타이를 더 끌어당기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대낮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온기가 둘 사이에서 피어났다. 서로 하나가 된 듯 신해량을 끌어안으며 서지혁은 생각했다. 역시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이 인간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야 겠다고.
"비행기는 진짜 오랜만인데요."
"괜찮겠어?"
"컨디션 좋고, 약도 챙겼고. 여차하면 기절시켜줄 애인도 있고. 완벽한데요?"
"그럼 됐어."
이 날이 오긴 오는 구나. 뜬금없이 계획했던 여행 날이 드디어 왔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 창문 밖 공항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퇴사를 하고 한국에서 머물렀던 지난 3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쩌면 서지혁의 인생에 있어 가장 굴곡이 많았던 3개월이었을지도 모른다.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보다 긴장되고 그 어떤 임무보다 어려웠던 지난 3개월이었다. 단 디저트보다 달콤했고 총상 보다 아팠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과 나란히 여행을 가고 있다니. 사람 인생이란 게 아무리 모르는 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정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될 수가 있나? 서지혁이 피식 웃으니 옆에 앉은 신해량이 서지혁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쳐다봤다.
"당신이 제 인생 참 많이도 바꿔놨네요."
그 말에 서지혁의 인생을 모조리 바꿔놓은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인생도 저 때문에 바뀐 게 있을까요?"
"많지."
"그래요?"
"그래."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
신해량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남이 못 바꾼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서로가 작은 계기가 되어 스스로를 변화시킨 거겠지. 당신은 언제나 내가 더 나은 사람이고 싶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더 오래 옆에 있어 주세요. 서지혁이 손을 내밀자 신해량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손을 맞잡았다.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겠다는 듯한 이 든든한 안정감이 좋았다.
이륙을 준비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렸다. 질리도록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신해량은 서지혁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었다. 걱정과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에 서지혁은 괜찮다는 듯이 신해량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기체의 흔들림이 멎고 안정적인 비행이 시작되었다. 신해량이 화끈하게 퍼스트 클래스로 예매를 해준 덕분에 벌써부터 좌석에 반쯤 누운 서지혁은 신해량이 영화를 트는 것을 확인하고 들고 온 책을 꺼내 들었다. 신해량에게 선물 받은 '의사가 범인이다' 책이었다. 집에 있을 때 늘 신해량과 붙어 꽁냥거리느라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던 서지혁은 결국 비행기에서 다 읽을 작정으로 책을 들고 왔다. 반은 넘게 읽었기에 긴 비행시간 동안 읽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는 와중에 슬쩍슬쩍 옆을 쳐다보니 신해량은 서지혁이 추천해준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저 장면 중요하지. 추천해준 것은 뭐든 열심히 봐주는 사람이 참 귀여웠다. 하여간 뭘 해주든 아깝지 않게 만든다니까.
서지혁도 책에 집중했다. 범인의 윤곽은 의외로 진행하는 초반에 나왔지만, 반전이 있다고 했으니 앞서 나온 증거나 추리들은 모두 페이크일 가능성이 높았다. 평이 좋은 베스트셀러답게 지루한 파트 없이 몰아치는 전개가 재밌었다. 고전 추리소설의 패턴들을 의도적으로 짜깁기한 듯한 연출도 마음에 들었다.
남은 페이지가 대충 30장도 안 된 듯한 무렵, 기내식이 나왔다. 테이블 위로 스테이크와 수프, 샐러드와 빵이 담긴 접시 몇 개가 놓였다. 서지혁이 기내식에 감탄을 하자 신해량이 서지혁의 접시에 빵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감동받은 서지혁은 눈을 반짝이며 신해량의 접시에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구운 방울토마토 두 개를 얹어주었다. 신해량이 작게 웃었다.
"책은 재밌어?"
"예. 그런데 뒤에 요만큼 남았는데 아직 범인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어요. 범인 바꿀 기회 한번 드릴까요?"
"됐어. 그대로 가."
"무슨 자신감이래? 오케이. 저도 의사 그대로 갑니다. 영화는 재밌어요?"
"재밌어. 아 참. 너 대한도 갈 거야? 나만 잠깐 다녀와도 되는데."
"당신 혼자 보내는 게 더 불안해요. 차라리 같이 가는 게 낫지. 괜찮습니다."
"알겠어."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은 서지혁이 행복해하며 포크를 든 주먹을 파르르 떨자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행기에서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하는 거지? 서지혁이 연이은 감탄에 신해량은 샐러드에 있던 새우 하나를 또 서지혁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왜 자꾸 주는 거지? 서지혁이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신해량은 많이 먹으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고민하던 서지혁은 벌써 비어가는 자신의 접시를 쳐다보다 신해량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서지혁의 손짓에 신해량이 목을 사슴처럼 쭉 빼서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서지혁은 귓속말을 하듯이 큰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신해량의 귓가에 다가갔다. 그리곤 쪽! 몰래 입을 맞추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접시 위에 놓인 새우를 집어 먹었다. 제 접시에서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서요. 서지혁이 작게 속삭이니 신해량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행은 계속됐고 신해량이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 서지혁은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후 잠에서 깬 신해량이 서지혁에게도 잠깐 잘 것을 권했지만 서지혁은 잠 대신 신해량의 손을 잡고 함께 영화 보는 것을 택했다. 중간에 또 배가 고파 라면을 주문해 먹고 몇 시간 뒤 마지막 기내식까지 먹고 나니 착륙을 준비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착륙을 하며 기체가 흔들리는 동안 신해량은 또 서지혁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오랜시간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하와이 땅을 밟은 두 사람은 곧바로 숙소에 가 짐을 풀고 대한도로 가기 위해 헬기장으로 향했다. 각종 신분 확인을 마친 뒤 헬기에 오른 두 사람은 또 오랜 비행 끝에 대한도 헬기장에 내렸다. 서지혁과 신해량을 태웠던 헬기는 해저기지의 미국인 직원 몇 명을 태우고 다시 하와이로 향했다.
점처럼 멀어지는 헬기를 멍하게 보던 서지혁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이 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끔찍했던 옛 직장과의 재회였지만 의외로 나쁘진 않았다. 물과의 인연을 끊겠다며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온통 바다에 둘러싸인 이곳을 내 발로 다시 돌아오다니.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인사 안 할 거야?"
"작별 인사는 이미 했는데 또 뭘 합니까? 됐어요. 저는 대충 여기서 놀고 있을 테니 인사하고 오십쇼."
"알겠어.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예이 예이."
홀로 해저기지로 향하는 신해량에게 손을 흔들어준 서지혁은 곧바로 해변으로 향했다. 정 많고 마음 여린 옛 팀장은 신해량이라는 방패막 없이 해저기지에 내던져진 옛 팀원들 걱정이 많이 되는 것 같았다. 여차하면 이 치외법권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주먹 한 번 쓸 생각인 거 같던데. 그래도 사이비 놈들은 다 조졌으니 이전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이 들었지만 애영이 이야기를 들으면 엉망인 건 똑같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애영이가 내일 퇴사랬지. 만나면 분명 얻어맞을 텐데 어떻게든 잘 피해 다녀야겠군.
"악!!"
누군가 파도치는 바다를 멍하게 구경하고 있던 서지혁의 머리를 노리고 기습했다. 분명 발소리가 안 들렸는데? 귀신 아니면 갈매기인 게 분명해 쌍욕을 준비하고 뒤를 돌아보니 목젖까지 나왔던 욕을 그대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서등신새끼. 혼자 똥폼잡고 뭐하냐?"
"아오……! 왜 머리를 때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뻔하지 뻔해. 둘이 화해했는데 팀장님 혼자 여행 왔겠냐? 등신 같은 거머리 붙이고 왔을 게 뻔하지."
"……그. 뭐. 그래. 그렇게 됐다, 애영아."
"기껏 왔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인사나 할 것이지."
"원래 작별 인사하고 딱 깔끔하게 헤어져야 멋진 이별인 거야. 인사 두 번 해봤자 구질구질하기만 하지."
"멋진 이별은 개뿔이. 구질구질하게 팀장님이랑 다시 만나놓고."
"……그건 좀 봐주라."
백애영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서지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봐도 이 성질머리는 여전하군.
"백상아리. 내일 드디어 퇴사하지? 축하한다."
"그래. 참 고맙네."
"햐. 지긋지긋한 용병 생활 또 시작이네."
서지혁이 한탄하듯 말하자 백애영의 표정이 미묘했다. 왜 저런 표정이지?
"왜 그렇게 보는데?"
"등신 같아서."
"아오 진짜. 됐다, 됐어. 애영아, 너 안 바쁘냐? 내일 퇴사라고 이렇게 땡땡이쳐도 돼? 심심하면 내가 뭐 어디 배관 하나 부숴줄까?"
"응. 바빠 죽어도 너 죽일 시간은 충분해."
"……내일 퇴사 하는데 성질이나 좀 죽여."
스트레스가 심해 보이는 백애영은 서지혁을 잡아먹을 듯이 겁만 주다가 해저기지로 돌아갔다. 그게 나름의 인사라는 걸 잘 아는 서지혁은 찰랑이는 말총머리에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참 한결 같은 풍경이었다.
서지혁은 홀로 대한도를 거닐며 오랜만에 마주한 곳곳을 살폈다. 퇴사 날에 도망치듯 헬기에 몸을 실었기에, 정작 3년 넘게 지냈던 장소와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해변이나 풀숲, 멀리 보이는 본부 건물과 해저기지를 눈으로 훑으며 마지막을 기념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여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천천히 대한도 전체를 돌아보고 다시 헬기장에 도착하니 저 멀리서 신해량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솟아오른 해를 뒤로한 채 걸어오는 장면이 낯익어 웃음이 나왔다. 서지혁은 눈부심에 눈을 찌푸리며 신해량에게 달려갔고 그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 몇 개를 빼앗아 들었다.
"이건 뭡니까?"
"팀원들이 줬어. 선물이라던데."
"당신이 꽤 그리웠던 모양인데요. 퇴사한 지 몇 개월이나 지난 옛 팀장 선물까지 챙겨주고."
"너도 왔으면 네 선물도 있었을 거야."
"햐. 제가 갔으면 다른 팀원들한테도 선물 왕창 받아왔겠죠."
서지혁이 뻔뻔하게 말하자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의 뒤로 솟아오른 태양보다 더 눈부신 미소였다.
"여기 있으니까 저 퇴사하던 날 생각나지 않아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주변의 바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진짜 당신 안 볼 생각이었는데요. 이렇게 같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도 그래.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지."
서지혁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멀리서 날아오는 헬기가 점처럼 보였다. 이 장면도 익숙하고.
"그래서 소원이 뭡니까?"
"세 번째 방법으로 해."
"예?"
"뒷장이 더 있던데."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서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해량을 바라보았다. 여행을 오기 전 '신해량 소유 프로젝트' 발표 때 서지혁은 만들어둔 마지막 페이지를 발표하지 않았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길래."
"……저 거짓말 탐지기를 진짜. 근데 그걸 어떻게 봤는데요? 바로 지웠는데?"
"못 봤어."
"허.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자는 겁니까? 제가 뭘 적어뒀을지 알고요?"
"네가 지레 겁 먹고 발표 안 한 거 보면 뻔하지."
"누가 겁을 먹어요? 그냥 ……시기상조니까 그런 거지. 애초에 진지한 자리도 아니었잖아요."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 화면이 반짝였다. 또 심박수가 올랐군. 진정하자. 진정해라. 서지혁 진정해! 서지혁은 자신을 다독이며 신해량의 뒤에 배경처럼 자리 잡은 해안을 바라보았다. 일정한 속도로 파도치는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은 서지혁이 한숨을 푹 쉬며 제 앞에 서 있는 신해량과 시선을 맞췄다.
"책은 또 언제 읽었어요? 범인 소설작가인 거 알고 있었죠?"
"네가 읽을 생각을 안 하길래 E북 샀지. 운동할 때 들었어."
"허. 요즘 무슨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듣나 했더니. 그래서 계속 나보고 책 읽으라고 눈치 준 거예요? 자기가 정답 맞혔으니까?"
"그래."
"하하하!"
서지혁이 크게 웃었고 그 사이 헬기는 엄지손가락 만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바닷가의 바람에 신해량의 까만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푸른 바다에 그려진 인물화처럼 근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서지혁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신해량은 하늘의 헬기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자신의 목을 더듬었고, 옷 안쪽에 있던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내 풀었다. 서지혁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신해량은 목걸이에 걸린 두 개의 은색 반지를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이거 혹시."
"그냥 커플링이야. 김칫국 마시지 마."
확 깨는 신해량의 말에 서지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타이밍이 이래서 프로포즈인 줄 알았잖아요."
"굳이 여기서?"
"하긴 그렇죠. 대한도는 좀 아니지."
서지혁이 웃으며 신해량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꼭 맞춘 듯이 딱 맞는 모양새가 잘 어울렸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손에 남은 반지를 가져가 손에 들었다.
"그래서 소원 들어줄 거야?"
"……따지자면 그건 제 소원이긴 한데요. ……까짓것 그래봅시다. ……그럼 세 번째 방법 발표는 여기서 할게요."
"해봐."
"……그, 당장 그러자는 건 아니구요. 언제든 간에 금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느 방면으로 좀 안정적이게 되면……."
"본론만 말해."
쿵쿵쿵쿵. 심호흡을 해도 가라앉지 않는 심장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끝에 심장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지를 든 서지혁의 손이 떨렸다.
"……마지막은 제 마음대로 한다고 그랬잖아요. 기억나세요?"
"그래."
"제 마지막을 당신한테 줄게요. ……그러니 당신을 나한테 주세요."
"……."
"……저랑 결혼해주실래요?"
서지혁은 끝내 하지 못했던 발표를 마무리 지었고 신해량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떨어진 허락의 신호에 서지혁은 신해량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꼭 맞게 들어간 반지가 햇빛을 받아 파도처럼 반짝였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그래. ……내가 널 사랑하니까."
어디서 들어본 듯한 대사의 인용에 서지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 말 들으면 꼭 해주고 싶었던 대답이 있었거든요."
"뭔데?"
"제가 더 사랑해요. ……좀 유치하죠?"
"그래."
하하하하. 지체 없는 대답에 서지혁이 소리 내며 웃었다.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시작이 되었던 비슷한 날이 절로 떠올랐다. 그때, 또 뭘 했더라? 곰곰 생각하던 서지혁이 씨익 웃더니 신해량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코 닿을 거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 오늘은 담배 안 폈어요."
서지혁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신해량이 웃으며 서지혁에게 입을 맞추었다.
두두두두두.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가까이 다가온 헬기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이마에 닿는 까만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감았던 눈을 떠 보면 언제나 그렇듯 블루홀처럼 깊은 까만 눈동자가 서지혁을 향한다. 그 속이 공기 한 점 없는 동굴이라고 해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도 또 아름다웠다. 하지만 서지혁은 이제 안다. 신해량이라는 바다는 서지혁을 살아가게 만드는 집이라는 것을.
"지혁아."
"예?"
낯선 부름에 깜짝 놀란 서지혁이 당황하자 신해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또 뭔데? 왜? 또 뭐가 남았는데? 왜 또 마지막에 불안하게 만들지? 착륙을 준비하는 헬기 소리 때문에 신해량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쳐다보니 신해량이 미소 걸린 입술로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뭐라 말했다.
난 용병이랑 결혼 안 해.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신해량의 진짜 소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서지혁이 허탈하게 웃으니 신해량이 이어 말했다.
네 마지막은 내 마음대로 하라며.
……이래서 백애영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군. 이미 나만 모르게 다 계획해둔 거였어. 망할.
보기좋게 걸려든 서지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헬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서지혁은 배가 찢어져라 웃었다. ……전부터 계속 시간 많다고 하더니 이 뜻이었군. 대체 언제부터 계획된 미래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지혁은 잡은 신해량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두두두두두. 헬기가 땅에 닿고 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르며 두 사람은 헬기에 올라탔다. 서지혁이 마지막으로 대한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여긴 진짜 마지막이네. 잘 있어라. 서지혁이 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자 헬기의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을 태운 헬기는 다시 하늘 위로 떠올랐고 미련 없이 대한도를 떠나 더 넓은 바다 위로 날아갔다. 대한도에서 바라보는 헬기의 크기가 점처럼 보이며 점점 더 멀어졌다.
예.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해봐요.
그게 당신이 정한 미래라면 기꺼이 따라줄게요.
1화 BGM들으면서 썼는데 감회가 새롭더라구요.
제 첫 글연성이었던 '7월의 애정촌'이 드디어 끝났네요.
글 쓰기 전에 메모해둔 걸 봤더니 7정촌 스토리를 정확하게 2023년 3월 9일에 써뒀더라구요. 메모만 해두고 고민하다가 1화를 쓴 게 2023년 6월 4일이고 오늘 2024년 5월 14일에 드디어 완결...!
작년에 글을 처음 써본 탓에 제 글 스타일을 전혀 몰라서 이렇게 길어질 거라 예상을 못 했는데 어찌저찌 30화까지 왔네요. 저는 정말 길어봤자 10화 안에 끝날 줄 알았습니다...(되겠냐고) 정확하게 3배 길어졌네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전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생각 중인데 몇 편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제 정확하게 몇 편이라고 단언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를 못 믿기 때문에... 외전 쓰기 전에 단편(아마도) 하나(인데 한 편은 또 아닐 수도) 또 쓸 거 같은데, 외전도 너무 늦지 않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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