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솔] 팬이 아냐! & 팬이 맞아!

팬이 맞아!

잇솔

* '팬이 아냐!(https://penxle.com/youngill/153642916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레드벨벳 - 친구가 아냐

 어제 명호 형에게 고백받았다.

 그리고,

 형이랑 잤다.

 ... 그런 것 같다. 멀뚱히 내던져진 시선이 작업실 소파에 닿았다. 그곳에 검은 민소매 차림의 디에잇이 담요를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별수 없이 시선이 팔뚝으로 옮겨갔다. 형 요즘도 나시 좋아하는구나. 예전보다 훨씬 올록볼록해졌네. 운동 진짜 열심히 했나 보다... 가 아니라. 들어올 때는 다른 옷이지 않았나? 그제사 컴퓨터 의자에 걸쳐진 청자켓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저걸 입고 왔다. 근데 지금은 왜 벗고 계시지...? 곰곰이 생각하던 최한솔이 퍼뜩 양손으로 제 온몸을 더듬었다. 일단은 온전히(?) 입고 있는 것 같다. 후욱, 안도의 콧김을 뿜었다.

 디에잇이 자켓 하나 벗은 것쯤 큰일이 아니다. 아직은 찌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므로 아마 더워서 벗어뒀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어제는 술도 마셔서 몸이 더웠다. 그러니까, 디에잇이 옷을 한 꺼풀 벗었다는 게 지난 밤이 뜨거웠다(중의적 의미)는 방증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최한솔은 디에잇과 잤다고 단정했다. 왜냐하면,

 아, 형. 안 돼요...

 툭 끊긴 필름 너머에 이딴 기억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최한솔은 눈을 번쩍 뜨자마자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부정부터 들어갔다. 하하하. 이건 내가 아니다. 내가 저랬을 리 없어. 내가 명호 형한테, 받침에 이응을 추가해도 문제 없을 애교스러운 발음으로, 야망가 주인공 같은 대사를 쳤을 리가...

 도무지 정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최한솔은 깨질 듯한 두통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의 편린들을 샅샅이 뒤졌다. 자, 어제 작업실에 명호 형이 왔다. 웬일로 먼저 연락을 해서(번호는 진작 주고받았다) 날짜를 잡고 왔다. 형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가급적 버논 씨가 여유로운 때에 보고 싶은데, 괜찮은 날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었다.

 아무래도 고백 각이었다. 이렇다 할 연애 경험이 전무함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지 자의식과잉성 추측이 아니라, 근거가 무성했다. 디에잇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팬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디에잇의 여러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직진남이라는 거였다. 디에잇은 티를 많이 냈다. 생일이 언젠지 묻더니 내년 생일은 꼭 챙겨주고 싶다 하질 않나, 연애관이 어떤지를 묻질 않나, 아무 말 없이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보이질 않나. 디에잇이 그럴 때마다 최한솔은 잠자코 있었다. 디에잇의 직설적인 애정을 받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실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았다. 디에잇이.

 디에잇에게 플러팅 폭격을 맞던 초기에는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팬으로 만난 사이가 아닌데 뭐 어떠냐는 그의 주장에 수긍하게 됐다. 아무렴 어떠랴. 우린 따지자면 일로 만난 사이고, 그러다 친구가 됐고, 친구와 연인 사이의 사이? 로 발전한 게 아닌가? 여기서 내가 떳떳하지 못할 게 뭐냔 말이다. 어쩜 분위기를 탄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타고 싶었다. 이대로 분위기를 타고타고, 흘러흘러서... 뒷말 생략.

 아무튼. 최한솔은 디에잇에게 푹 빠졌다. 애초에 디에잇의 팬이 되었던 것도 그가 취향에 맞아서인데, 취향에 맞는 사람이 들이받아오는 걸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다만 불안했던 건 지금 이 마음이 디에잇의 팬이던 때와 질적으로 다른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디에잇을 보면 설레기야 했지만 그건 5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여보세요?"

 "버논 씨."

 "네. 무슨 일로..."

 "뭐해요?"

 번호를 주고받고 간간이 카톡만 나누던 시기였다. 샤워하고 나왔더니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 발신자는 디에잇. 뭐지? 혹시 일 때문인가? 식겁해서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디에잇 또한 바로 받아들었다. 그리곤 저리 물었다. 일 때문은 아닌가 보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

 "그냥 쉬고 있어요. 디에잇 씨는요?"

 "나는 회식하고 들어가는 중인데-."

 "..."

 "보고 싶다."

 그때 최한솔은 리터럴리 입을 떡 벌렸다. 취기가 도는지 살짝 뭉개지는 말투만으로 다분히 자극적이거늘, 보고 싶다니! 차마 상상조차 못해본 말에 깜짝 놀란 한편... 황홀했다. 뭐랄까, 마치 다른 세계로 빨려간 것 같았다. 얘들아 여기가 어디야. 여기 지구 맞아...? 말문이 막혀 휴대폰을 붙들고 입술만 뻐끔대고 있자니 디에잇 특유의 느른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어요?"

 "어... 작업 쫌 하고. 집에서 영화 봤어요."

 "혼자서?"

 "네."

 "왜 혼자 봤어요. 나랑 봐요."

 어쩐지 칭얼거리는 투였다. 최한솔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얼굴이 화끈 달았다. 아씨, 어떡해.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최한솔의 눈이 질끈 감겼다. 와중에 입꼬리는 좋다고 비죽비죽 꿈틀대며 가만 있질 못했다. 이 모든 신체적 증상들 중 제어가 되는 게 없었다. 최한솔은 살짝? 죽을 것 같았다. 좋아서. 디에잇이 존나 좋아서.

 "좋죠. 대신."

 "대신?"

 "저도, 좋아하시는 찻집... 데려가주세요."

 디에잇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고요하지는 않았다. 온몸의 맥박이 밖으로 튀어나와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것마냥 방안이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응, 같이 가요. 머잖아 돌아온 디에잇의 기쁜 목소리를 듣고도 방을 메운 소음은 가라앉질 않았다.

 집에 도착했다며, 꿈꾸지 말고 푹 자라는 당부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웅크려 있던 최한솔이 끙 소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문득 몸이 싸늘했다. 아, 옷도 안 입고 이러고 있었네. 이건 또 신박한 데자뷰다. 화장실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옷가지를 주우러 이동하던 최한솔은 무심코 전신거울에 비친 제 하체를 보았고... 아이씨. 짧은 탄식과 함께 다시 주저앉았다. 홧홧한 뺨을 붙들고 다소간의 현타를 만끽하다가 고분고분히 화장실로 향했다. 여러모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팬으로서와는 명백히 다른 감정임을 알게 된 순간이자, 소위 썸을 타고 있음을 자각한 순간이자, 디에잇에게 꼴림을 확인한 순간.

 돌아와서. 최한솔은 긴장이 됐다. 어젯밤, 평소와 같이 멋스럽게 차려입은 디에잇은 평소와 같이 술병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표정이 평소와 같지 않았다. 시종일관 일정한 각도로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평소의 여유 대신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최한솔을 가장 못 견디게 한 것은 적막이었다. 디에잇은 그날따라 그윽한 눈으로 최한솔을 머금었다. 그 눈빛은 대화 중간중간 적막이 찾아들어도 물러가지 않았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최한솔은 어쩐지 당당하질 못하고 몸을 배배 꼬게 됐다. 디에잇과 저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와 점성이 높아진 것처럼 숨이 막혀온 탓이다. 어떤 청각적 요소도 없이 오로지 디에잇과, 자신과, 자신을 향하는 그의 눈빛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이 최한솔에게는 다소 버겁고 무거웠다. 그래서 최한솔은,

 마셨다.

 계속 마셨다...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믿기지 않게도.

 일단 사귀자고 했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정적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냅다 술을 들이킨 최한솔이 정신을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리기 직전이었다. 거침없이 잔을 비우는 최한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도 템포를 맞춰 함께 마셔주던 디에잇이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놨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제 울대를 문지르다가, 입을 뗐다.

 "저는 버논 씨 오래 보고 싶어요. 서로 응원이 되고, 휴식이 되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

 "나랑 그런 사이 되어줄 수 있어요?"

 정말이지, 기억해서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고선 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디에잇의 목소리는 참으로 달콤했다. 지금까지의 직설적이고 능글맞은 플러팅과 대조되면서 당도가 배가 됐더랜다.

 회고하던 최한솔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꿈 같다...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고백 장면을 흐뭇하게 곱씹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나는 뭐라고 했더라?

 씨발 당연히 되죠.

 ... 이렇게 천박하게 답했다고? 최한솔은 이번에도 현실부정부터 들어갔다. 그러나 뇌리에서 울리는 욕지거릴 내뱉는 목소리는 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제정신인가?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 서로 응원이 되고 휴식이 되자는 로맨틱한 멘트에다가 저따위 소릴 돌려줄 수가 있어? 아니다. 저건 다른 말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머릿속을 헤집어 부득불 찾아낸 다른 기억 조각 중에도 그럴싸한 답변은 없었다. 끝내 가슴아픈 진실을 받아들인 최한솔은 잠시 눈을 감고 묵념했다. 사망자는 자신의 사회적 체면.

 뭐, 불순물이 섞이긴 했으나 긍정적인 회신을 준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럼 나 형이랑 사귀는 거... 겠지? 기억이 드문드문해서 어째 확언이 안 됐다. 이쯤 되니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답지 않게 과음을 해서는. 살면서 필름이 끊긴 게 처음인데 그게 하필 썸남에게 고백받은 날일 때의 심경은? 미쳤네 걍... 최한솔은 잠든 디에잇을 슬쩍 흘겨 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 멘탈이 색종이 조각처럼 산산조각난 와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이 또한 술의 여파였다. 혹여나 디에잇이 깰까 뒤꿈치를 들고(5년 전에 디에잇이 잠귀가 밝다고 했던 걸 또 기억했다) 살금살금 움직여 겨우 화장실에 도달한 최한솔은... 꽥 소리가 새지 않게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팬티가 없다!

 썅! 이거 뭐지? 최한솔은 변기 앞에 우뚝 서서 텅 빈 바짓속-사실 텅 비어 있진 않다. 비어 있으면 큰일이다-을 째려봤다. 너무 황당한 상황을 마주하니 되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가만 보자. 내가 작업실에 노팬티로 출근했을 리는 없고. 그럼 내 팬티 어디 갔지? 두리번대던 최한솔은 대충 벗은 양말처럼 돌돌 말려 화장실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는 제 팬티를 발견했다.

 와, 이건 빼박이다. 최한솔은 강렬한 좆됨을 느꼈다. 심증만으로 충격적이었거늘 이제 물증까지 있다. 더 이상 현실부정할 여지마저 사라진 셈이다. 최한솔은 초점 없는 눈으로 구겨진 팬티를 바라보다가 주워 들었다. 그리고 팬티를 팡팡 펼쳐 다리를 한쪽씩 꿰어 넣었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몸놀림이 급해져 자꾸만 다리가 꼬였다. 간신히 바지까지 갖춰 입은 최한솔은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앉아 바닥 타일 세기에 돌입했다. 자, 정리하면. 어제 명호 형이 나한테 고백했고, 걷다 대고 내가 쌍욕 섞어가며 좋다고 했고, 화장실에 팬티 벗어놓고 취중섹스까지 해버렸는데... 하나도 안 떠오른다는 거지 지금.

 이런 개막장이 또 있나 싶다. 최한솔은 울고 싶었다. 디에잇과 교류하는 내내 울고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냥 눈물 또륵 흘리고 말 정도가 아니었다. 땅을 치며 오오열열을 해도 모자랄 만큼 단단히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토막난 기억들 속 디에잇은 술을 적잖이 마신 만큼 얼굴은 좀 붉었으나 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그말인즉슨 디에잇은 지난 밤을 기억할 확률이 높다는 거다. 아니? 백타 기억한다. 최한솔은 양손으로 안면을 감싸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중요한 날의 기억을 홀로 간직할 디에잇에게 미안한 것도 미안한 거지만서도, 진짜 괴로운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나... 처음인데.

 디에잇이랑 처음이란 얘기가 아니라, 걍 처음이었다. 스물넷 최한솔은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않았고 당연히 섹스도 해본 적 없다. 첫경험을 술김에 해치우고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게 말이 되나 싶은데 정황상 다른 결론이 보이질 않았다. ... 어떻게 했지? 최한솔은 제 몸 상태를 체크(?!)해보려다가 말았다. 눈앞에 놓인 끔찍한 현실을 직시할 자신이 아직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기상해 보니 자신은 라꾸라꾸 침대 위에, 디에잇은 소파 위에 있었다. 라꾸라꾸도 소파도 1인용이라 엎치락뒤치락 맨몸 레슬링이 가능한 환경이 아니다. 그럼 테이블에서? 남자 둘이 뒹군 것치곤 깨끗하던데. 아님 의자에서? 의자도 말끔했던 것 같고. 설마... 화장실에서? 오, 제발. 이것만은 아니길...

 차가운 타일을 딛고 별별 생각을 다 한 최한솔이 드디어 화장실을 벗어났다. 작업실로 돌아오니 디에잇은 여전히 담요에 돌돌 감긴 채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담요에 가려진 부위 아래로 디에잇의 가느다란 다리 두 짝이 엉켜 있었다. 혹시 형도 바지 안 입고 있는 거 아냐? 어제 디에잇이 반바지를 입고 왔어서 긴가민가했다. 디에잇의 맨다리를 한참 들여다보던 최한솔이 슬며시 담요를 쥐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굳은 결심을 내리고 담요를 들추려던 순간이었다.

 

 "으응..."

 "아이고."

 "어, 일어났네."

 "..."

 "잘 잤어?"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 디에잇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디에잇은 주먹으로 눈을 부벼 간이 세수를 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담요가 흘러 내려갔다. 바지가... 잘 있었다. 최한솔의 안에서 안도감과 실망감이 동시에 솟았다. 엥? 실망할 건 뭐람? 엄마야 나 변탠가 봐.

 그런데 무언가 달라졌다. 디에잇이 반말을 하고 있었다. 사적으로 알고 지낸 지 어언 수 개월이 지났음에도 디에잇과 최한솔은 여즉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나 견고하게 정중했던 사이가 하룻밤 새 뒤바뀌어 있었다. 최한솔이 잠시 꼬인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말을 놨던가? 알쏭달쏭했다. 만약 놓기로 했는데 존댓말을 써버리면 기억을 잃은 게 탄로나고 말 테다. 고뇌하던 최한솔은 일단 던져보기로 했다.

 "어. 형은?"

 손갈퀴를 세워 제 머리를 빗질하던 디에잇이 눈만 굴려 최한솔을 응시했다. 찔리는 게 있어선지 더럭 긴장이 됐다. 일단은 뻔뻔하게 눈을 마주하는데, 디에잇이 빗질을 재개하며 웃음기 낀 투로 물었다.

 "이제 반말하기로 한 거야?"

 아씨, 이건 아닌가... 최한솔이 낭패감에 입안을 씹거나 말거나 다시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디에잇은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어쨌거나 아침이 열렸다. 둘은 일단 밥을 먹기로 했다. 물론 밥은 디에잇이 샀다. 디에잇은 최한솔에게 중국 음식을 잘 먹냐 묻더니 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디다 걸었는지는 모른다. 디에잇은 작업실 밖에 나가서 전화를 했으니까. 최한솔은 소파에 앉아 디에잇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금방 돌아온 디에잇은 최한솔의 옆에 낑겨 앉았다. 1인용치고 널찍하다고는 하나 어쨌건 1인용이라 성인 남자 둘이 앉기는 제법 비좁았다. 덕분에 다리를 힘껏 모았음에도 자꾸만 종아리가 부대꼈다. 게다가 디에잇과 최한솔 모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맨살이 닿았다는 거다. 자연히 최한솔의 온 신경이 종아리로 쏠렸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서 더울 리가 없는데도 디에잇과 닿는 부위가 후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급기야 머리가 팽팽 도는 가운데에서 최한솔은 의아해졌다. 다리 좀 스쳤다고 이 난린데 어제는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결국 슬쩍 다리를 치우려던 찰나, 종아리를 적시던 온기가 떨어져나갔다. 동시에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

 디에잇이 최한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디에잇은 한 다리를 안으로 접어 넣고, 마찬가지로 접어 넣은 팔에 턱을 괴고서는 꽤나 본격적으로 최한솔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척추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나쁜 자세였다. 형, 척추 수술 1700만원인데... 최한솔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나머지 이딴 실없는 생각이나 했다. 아무래도 디에잇의 시선에는 가시가 달렸는가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선 좀 받았다고 옆얼굴이 따끔거리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정면만 보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간간이 옆을 보거든 어김없이 디에잇과 시선이 닿았다. 그는 매번 농염한(이건 최한솔의 사견이다) 눈빛을 매달고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귀엽다는 듯이 웃기? 최한솔은 그런 디에잇이 영 적응이 되질 않고 당혹스럽기만 해서 눈이 닿는 즉시 재깍 고개를 돌리게 됐다. 그 동안 디에잇의 입매는 반원에 가깝게 휘어지고 있었다.

 사실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왜... 손을 안 잡지? 실로 디에잇은 쳐다보기만 할 뿐 일말의 터치도 않았다. 만일 최한솔이 연애 경력이 있었더라면, 최소한 썸이라도 타봤더라면 연인의 꿀 떨어지는 눈빛이 주는 설렘을 기분 좋게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최한솔은 연애를 책으로도 잘 접하지 않은 초짜 중의 초짜였다. 그런 최한솔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건 자연의 이치였다. 어쩌지? 형이 먼저 잡길 기다려야 하나? 아님 내가 잡아야 하나? 하긴, 고백은 형이 했으니깐... 최한솔이 흘끗 눈을 내려 디에잇의 손이 위치한 곳을 확인했다. 그의 허벅지 위에 자리한 길쭉한 손가락을 보고 침을 꿀떡 삼키고는, 꼼지락꼼지락 손을 옮겼다. 열심히 전진한 끝에 최한솔의 손끝이 디에잇의 새끼손가락 끄트머리를 톡 건드렸다. 낸 용기에 비해 한없이 소심한 터치였다. 그러나 디에잇은 미동도 없었다. 어라? 분명 닿았는데? 더 제대로 잡아야 되나? 혼란스러워하던 최한솔은 디에잇의 손등 위에 냅다 손을 얹었다. 진짜 얹기만 했다. 이게 맞나...? 뭔가 이거는 좋기보단...

 그때, 디에잇이 최한솔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어어어? 갑작스레 작용한 인력에 최한솔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그대로 안착한 곳은 디에잇의 판판한 가슴팍 위였다. 졸지에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버린 최한솔의 허리에 디에잇의 다른 손이 얹혔다. 이, 이이이, 이거 뭐지? 최한솔이 뭔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사이, 디에잇은 허공에서 방황하는 최한솔의 오른손을 가만히 보다가 허리에 두었던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손으로 그나마 비어 있던 최한솔의 오른손마저 잡아왔다. 최한솔의 오른손을 제 눈앞으로 끌어와 이리저리 돌려보던 디에잇이 중얼거렸다.

 "예쁜 점이 있네..."

 손바닥 께의 반점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았다. 디에잇은 무력하게 힘풀린 최한솔의 오른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엄지로 반점을 살살 쓸었다. 그러다가 점 위에 입술을 내렸다. 어억?!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최한솔이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제야 심장이 정신 나간 속도로 뛰는 게 들려왔다. 와씨 이거 bpm 따서 비트 짜면 EDM 하나 뚝딱 나오겠는데. 허튼 소리도 음악적 언어로 승화하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렷다.

 "혀, 형."

 "응?"

 "이 자세 불편한데..."

 최한솔이 디에잇의 품 안에서 꿈지락거렸다. 단지 상황을 모면하고자 뱉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몸이 애매하게 기운 와중에 완전히 기대지는 않으려 사지에 힘을 꽉 준 자세는 아무래도 편치 않았다. 디에잇은 얼핏 웃음 짓고는 최한솔을 밀어 바르게 앉혔다. 여전히 한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아니? 손깍지를 껴서 손가락을 더욱 단단히 얽고는 손등을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최한솔은 죽을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디에잇의 오른쪽에 앉은 바람에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 고동이 그의 귀에도 들리진 않을까 하는 말같지도 않은 염려까지 들었다.

 끊임 없이 빗발쳐오는 시선이 슬슬 버거울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대뜸 거칠게 문을 두들겼다. 바짝 쫄아 있던 중에 큰 소리가 나니 절로 몸이 뛰었다. 곧이어 문밖에서 낯선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퀵입니다-. 퀵? 웬 퀵? 최한솔이 동그래진 눈으로 문을 노려보는 동안 디에잇이 스무스하게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디에잇은 문을 열고 남성과 인사를 나누더니 웬 거대한 비닐 봉투를 받아왔다.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최한솔 쪽으로 다가와 눈앞에 봉투를 흔들어보였다.

 "아까 시킨 거."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는 것이다. 이로 수저 비닐을 까는 디에잇을 멀찍이 관망하던 최한솔이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따라 붙었다. 아무리 최한솔이 손 많이 가는 타입이라 한들 손님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만큼 염치가 없진 않았다. 씁! 그러나 디에잇은 뭔 고양이에게 경고하는 듯한 소릴 내더니 비닐을 뜯으려는 최한솔을 제지했다. 완벽한 애 취급이었다.

 "놔둬. 내가 할게."

 "왜 퀵으로 시키신, 아니. 시킨 거야?"

 "여기가 배달이 안 돼. 멀기도 하고."

 "말을 하지. 이 동네에도 맛있는 중식당 있는데."

 디에잇이 옅게 미소지었다.

 "좋아하는 곳이라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먹고 싶었어."

 헐. 로맨티스트일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곧이어 디에잇이 중얼거렸다. 허얼-. 아, 나 육성으로 헐이라 했구나.

 어쨌건. 둘은 식사를 했다. 디에잇픽 맛집은 맛이 훌륭했다. 덕분에 최한솔은 이름도 잘 모르겠는 요리를 우물대며 잠시 근심걱정 없는 시간을 보냈다. 디에잇은 비닐 장갑을 끼고 성실히 마라샹궈의 새우를 깠다. 최한솔이 비닐 장갑을 끼려는 순간, 서명호가 양념으로 시뻘개진 한 손바닥을 눈앞으로 디밀었다. 끼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주저하는 최한솔의 그릇 위로 뭔가가 툭 올라왔다. 잘 까진 선홍빛 새우 두 마리가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로 놓여 있었다.

 "하트."

 라고 말하는 디에잇의 낯엔 수줍은 기색이 돌았다. 어쩐지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최한솔은 조금 황당했다. 무슨 이런 애교가 다 있지? 디에잇은 최한솔의 반응도 살피지 않곤 남은 새우를 전부 제 그릇으로 가져왔다. 마치 최한솔이 직접 까 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최한솔은 디에잇이 까준 새우를 냠냠 먹으며 벌써부터 관계의 모양이 정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디에잇은 식사를 마치자 작업실을 떴다. 아무래도 솔로 데뷔를 앞둔 잘 나가는 아이돌 디에잇께선 바쁜 몸이셨다. 바쁘게 겉옷을 들고 문으로 향하는 디에잇은 퍽 아쉬운 기색이었다. 최한솔 또한 아쉬웠지만 붙잡을 맘은 들지 않았다. 한가로이 연애할 겨를도 없이 바쁜 디에잇은 최한솔이 가장 바라던 디에잇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복잡하게 생긴 신발을 신고 온 디에잇은 한참 동안 신발을 신었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느적거리는 듯도 했다. 문고리를 잡고 나가기 직전, 180도로 몸을 돌린 디에잇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최한솔은 잠깐 벙쪄 있다가 아아, 하고 뒤뚱뒤뚱 걸어가 폭 안겼다. 차마 제대로 끌어안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안겨 있자니 디에잇이 쥐어짜듯 최한솔을 꽈악 끌어 안았다.

 "또 봐."

 "..."

 "다음에는 작업실 밖에서 봐."

 "..."

 "연락할게."

 그리고 머리통에 입맞추고 나갔다. 최한솔은 디에잇이 사라진 현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방에서 마라 향이 푹푹 풍겼다. 최한솔은 창을 열고 수많은 차들이 왔다갔다거리는 걸 구경했다. 저 중에 형이 탄 차도 있을까. 와중에 어제가 1일인지 오늘이 1일인지 궁금했다.

 문제가 있다!

 연애에는 문제가 없다. 기묘하게 시작되었으나 둘의 연애는 원만히 이어졌다. 디에잇은 일과 사랑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 가끔은 한창 바쁠 때라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마음을 썼다. 디에잇이 그럴 때마다 최한솔은 깜짝 놀랐다. 딱히 그가 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교할 전례가 있어야 뜸한 줄을 알 게 아닌가. 최한솔은 전혀 속상하지 않았지만, 혹여 맘이 상했을까 걱정하는 디에잇이 흡족스러워서 한 번은 삐진 척도 해보았다. 그날 밤 50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르고 달래는 카톡을 받고선 그만두기로 했다만.

 이렇듯 디에잇과 최한솔은 꽤나 잘 맞았다. 애정 전선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디에잇은 최한솔에게 확고한 애정을 쏟아부었고, 최한솔도 최선을 다해 화답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

 디에잇이 너무...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최한솔은, 너무너무너무, 팬이었다.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왜 이제 와서 문제 삼냐. 디에잇이 솔로 쇼케이스에 최한솔을 초대한 게 화근이었다. 작곡진으로 참여한 이상 명분이야 있었다. 실로 최한솔도 처음 초대 받았을 때는 신부터 났다. 버젓한 뮤지션이 된 기분도 들었다만, 사랑하는 이의 커리어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입증받은 듯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들떠서 아묻따 수락하려던 최한솔은 한 박자 늦게 멈칫했다.

 그럼 나는 형의 옛 팬이자, 현 동업자이자, 연인이기도 한 거네?

 ... 라는 생각이 드니까, 썩 내키지가 않았다.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다 알고 있던 거였는데도 새삼스레 가슴이 싱숭생숭했다. 자신이 이 쇼케이스에 어떤 이름으로 참여하는 건지가 헷갈렸다. 셋 중 둘은 디에잇도 익히 아는 사실이므로 상관 없다. 다만 하나가, 최한솔 생각에는, 존나 상관 있었다.

 근데 저는 팬분들이랑은 안 만나요.

 놀랍게도 여태껏 의식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디에잇의 팬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팬들과 소통하는 디에잇을 지켜보며 일하는 애인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니, 연예인이랑 연애하기 개꿀인데? 라며 여유도 부렸었다. 그러나 막상 입 싹 씻고 동업자이자 연인으로서 공식 행사를 가려니 마음이 켕키더란 것이다. 뭐랄까,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실감이 안 나서라기에는 부들부들 떨며 손도 못 잡던 시기를 지나 이젠 눈만 마주치면 뽀뽀하는 사이가 되었는데도 그랬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인 최한솔은 결국 초대를 거절하고 유튜브 라이브로 쇼케이스를 보기로 했다. 디에잇이 영상으로나마 꼭 봤으면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디에잇은 잘했다. 예와 다르지 않게, 아니, 예전보다 더. 디에잇은 불쑥 성장해 있었다. 좋아할 때에도 여기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던 아이돌 디에잇은 그새 더 노련해져 있었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디에잇. 매끄럽게 앨범을 소개하는 디에잇. 기자들과 농담을 나누는 디에잇.

 아, 이래서 좋아했었지.

 기나긴 회피가 명을 다했다. 디에잇을 팬으로서 사랑하고 응원했던 열아홉의 자신이 디에잇과 사랑을 나누는 스물넷의 자신과 불가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내게 그 시절이 없었다면 형과 사랑에 빠졌을까? 아니, 형을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둘의 재회에 최한솔보다는 디에잇이 기여한 바가 컸으므로. 그러나 그때로부터 발아한 호감이 있지 않았더라면, 최한솔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무관하다고 우겨왔던 두 시절이 실상 연속선 위에 있음이 와락 납득됐다. 최한솔은 삽시간에 결백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느즈막하게도 이제야 모조리 양심이 찔렸다. 최한솔은 디에잇을 잘 알았다. 디에잇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팬일 때 쌓아두었던 디에잇에 관한 알쓸신잡은 연애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디에잇은 슬슬 최한솔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 정보량의 차이가 부당하게 느껴졌다. 마치 부정한 루트로 디에잇의 애정을 획득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팬이었던 걸 알았다면, 형은 날 사랑했을까?

 답이야 알 수 없다. 최한솔은 디에잇에게 모든 걸 알고도 자신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게 최한솔을 겁먹게 했다. 최한솔은 디에잇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와 보내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좋았다. 하루하루 꿈 속을 걷는 것 같았고,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정을 알게 된 디에잇이 자길 떠나서 마침내 꿈에서 깨게 될까 무서웠다. 사실은 디에잇이 속았다는 배신감에 잠시라도 가슴앓이를 할 게 더 싫었다. 그래서 최한솔은 전말을 밝히길 망설였다.

 ...

 꽤 오래 망설였다...

 솔로 활동이 끝난 디에잇은 여유시간이 늘었다. 그말인즉슨 최한솔을 자주 만나러 왔다는 거다. 최한솔은 자신을 찾아온 디에잇을 반갑게 맞았다. 종종 작업실 밖에서 만나기도 했다. 장소는 매번 달랐다. 식당, 찻집, 미술관 등등. 아무래도 연예인이라 이렇다 할 스킨십이나 애정표현을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데이트였다. 그를 증명하듯 디에잇은 언제나 다정한 눈빛으로 최한솔을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최한솔은 뜨끔거려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홀로 괴로워하면서도 연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던 무렵, 최한솔은 인정했다.

 근데... 다 내 잘못이잖아. 남모르게 쩔쩔매며 상대가 주는 애정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비로소 홀가분해진 최한솔은 싹다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래, 형에게 선택권을 주자. 형이 날 선택하지 않아도 쩔수 없지. 내 잘못이니까. 내가 다 책임질 몫이니까!

 하필 키스 중에 결심했다...

 심지어 정신이 있는 중의 첫키스였다. 최한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제게 열렬히 입을 맞추는 디에잇이 리터럴리 코앞에 있었다. 탈색과 염색을 거듭해 퍼석해진 머리칼과 단정하게 다듬어진 눈썹, 눈매를 따라 촘촘히 박힌 속눈썹이 또렷하게 보였다. 최한솔은 자신의 뺨께에 올라온 디에잇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일순 디에잇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최한솔은 더 달아오른 디에잇을 모르는 체하며 고개를 뒤로 밀었다. 맞닿아 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져나갔다. 

 "나 고백할 거 있어."

 얼떨떨하게 최한솔을 쳐다보는 서명호의 오동통한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그게 섹시해보이지도 않을 만큼 최한솔은 긴장해 있었다.

 "뭔데?"

 "나 사실 형 팬이었어."

 순식간에 둘을 에워싸던 열기가 가셨다. 대신 한기가 찾아들었다. 최한솔이 짐짓 몸을 떨었다. 최한솔을 바라보는 디에잇의 눈매가 서늘하게 빚어졌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끝인가? 벌써부터 가슴이 울렁거렸다.

 디에잇은 최한솔을 노려봤다. 명백하게, 노려봤다. 그리고 말했다.

 "했었어."

 "어?"

 "너가 했었다고. 그 얘기."

 ... 네? 언제요? 이번엔 최한솔이 얼떨떨해졌다. 누가 봐도 놀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는 최한솔 앞에서 디에잇은 옅은 한숨을 뽑았다. 한 손으로는 최한솔의 뒷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

 "너 우리 사귀기로 한 날 기억 안 나지."

 들켰다.

-

 최한솔을 향한 마음이 결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정 무게에 이르렀을 때였다.

 디에잇은 고백을 결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글쎄.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정의하기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디에잇에게 중요한 건 현재였다. 시작이야 어쩧든 지금 디에잇은 최한솔이 좋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하지만 인정 즉시 고백할 생각은 못 했다. 디에잇이 보기에 최한솔은 좀... 어렸다. 진짜 연하이기도 했지만 뭐라고 하지. 이런 말은 좀 심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느낌? 최한솔을 좋아하지만서도 워낙 어린 애로 봐서일까, 정말 어리던 시절을 알아서일까,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최한솔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성애적인 영역은 상상조차 안 됐다. 버논이도 섹스라는 뜻을 알까? 모르겠지. 얼마나 순수한 애인데... 비트 찍기, 영화 보기, 먹기밖에 안하는 애임. 최한솔을 이 따위로 캐해하고 있는 입장에서 너 이제 나랑 야한 짓 안 야한 짓 다 하는 사이가 되어보자고 제안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타이밍을 재던 어느 날, 디에잇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최한솔네 작업실에 놀러 갔다. 최한솔은 마감이 급한 작업이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디에잇을 뒤로 하고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디에잇이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디에잇은 당연하게도 의자 뒤에 붙어 최한솔에게 백허그를 했다. 최한솔은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슬금슬금 책상 쪽으로 의자를 끌고 갔다. 자연히 하체가 책상 아래로 숨겨졌다. 엉덩이를 부산스럽게 들썩이며 하체를 더 깊숙이 밀어넣는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큼큼. 괜스러운 헛기침은 화룡점정이겠다.

 음... 그렇군.

 그 순간 디에잇은 반성했다. 우리 버논이도 다 큰 성인 남잔데, 지나치게 어린 애 취급했다.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은 덤이다.

 아무튼지간에. 이제 꿀릴 것도 없었다. 의도치 않게 최한솔도 남자(!!)임을 확인한 디에잇은 주저없이 고백을 계획했다. 먼젓번에 최한솔이 예쁘다고 했던 옷을 차려 입고(막상 최한솔은 그 옷인 줄 몰랐다), 스케줄도 없는데 샵을 들르고(최한솔은 그냥 스케줄 끝나고 왔나 보다 했다), 무드를 잡기 위해 아껴놨던 와인을 들고 왔다(예상했겠지만 최한솔은 그 정도로 귀한 술인지 몰랐다).

 "나랑 그런 사이 되어줄 수 있어요?"

 디에잇이 생각하기에 최한솔도 낌새를 챈 것 같았다. 최한솔은 평소보다 뻣뻣하게 굴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걱정이 되긴 했다. 지금까지 최한솔은 디에잇 앞에서 그렇게나 마신 적이 없었다. 애써 절주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둘에게 술은 구실일 뿐 오고 가는 대화가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해, 디에잇은 최한솔의 주량을 알지 못했다. 주사 또한 알 리가 없었다. 또 다시 말하면, 최한솔이 취해도 겉보기에는 조금도 티가 나지 않는 편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아, 형. 안 돼요..."

 ... 응? 내심 긴장하고 있던 디에잇의 눈이 번뜩 뜨였다. 최한솔에게서 형이란 소릴 처음 듣는 거였다. 것보다, 혹시 너 방금 앙탈 부린 거야...?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반응에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디에잇에게 다소 혀가 꼬인 말이 돌아왔다.

 "저 형 팬이란 말이에요."

 를, 서두로 최한솔은 지난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읊었다. 개중엔 디에잇이 몰랐던 게 많았다. 저 트위터에서 형 패션 정보 올리는 계정도 운영했어요. 진짜 좋아했는데. 형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요? 진짜 나빴어요... 디에잇은 멍하니 최한솔의 고백을 들었다. 팬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돈 줄은 몰랐는데.

 "저는 전부 형이 처음이었는데."

 아, 이 말은 좀... 자극적이다. 뭘 잘했다고 부루퉁하게 아랫입술을 내민 최한솔을 보다가 디에잇은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번뇌로 가득 차 명상이 시급했다. 이렇게까지 알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딥한 팬이었음을 알고 나니 조금 심란해지려던 마음이 금세 가벼워졌다. 그래. 다 필요 없다.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좋은데, 알지도 못할 옛날에 어떠했든 무슨 소용이랴. 사랑 앞에 원리원칙쯤 가볍게 내다버리는 건 최한솔이 꿈에도 모를 디에잇의 로맨티스트적 면모 중 하나였다.

 삐진 아이마냥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최한솔의 속눈썹이 축 가라앉았다.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저 안 만나실 거죠."

 아이고. 전에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거랑 그건 다르지, 버논아. 그러나 디에잇도 뭐가 다른지 정확하게 꼽기 어려웠다. 당연하다. 디에잇도 아무튼 다르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 셈이었으니. 디에잇은 의자를 당겨 최한솔에게 가까이 붙었다. 혼자 뭔 생각을 그리 많이 했는지 덜컥 암담한 결론부터 내버린 이 애를 달래주는 게 급선무였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뭘요?"

 "버논 씨가 제 팬이었던 거."

 "진짜요? 어떻게요?"

 저 많이 컸는데요. 목소리도 낮아지고, 키도 크고, 턱선도 달라지고... 최한솔은 제 몸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쫑알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 수다스러운 모습이었다. 좀... 열아홉 살 같았다. 아닌데. 오히려 그때는 과묵했는데.

 "5년 전에 팬싸인회 오지 않았어요?"

 "가긴 했는데... 딱 한 번 갔는데요? 그걸 기억해요?"

 "눈."

 "눈?"

 "눈동자 색이 예뻐서 기억했어요."

 개구라다. 디에잇은 거짓말이라면 학을 떼지만서도 좋아하는 사람 기분 나아지라고 사탕발린 말 정도는 할 유도리가 있었다. 100% 거짓말은 아니다. 헤이즐넛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최한솔의 눈동자를 의식한 순간부터 최한솔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최한솔은 금방 근심이 걷혔는지 한결 맘이 가벼워 보이는 얼굴을 했다. 다행히도 절반의 거짓말이 통한 모양이었다. 그마저도 귀엽게만 보여 디에잇은 큰일 났군, 생각했다.

 그리고 최한솔은 입을 다물었다.

 ... 왜지? 그때까지만 해도 눈앞의 사람이 꽐라 상태인 줄 몰랐던 디에잇은 최한솔과 정상적인 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말도 들려오질 않았다. 왜 말 안 해? 네 차롄데. 성미가 급해진 디에잇이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은근하게 최한솔을 재촉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까딱한 최한솔이 의자에 등을 깊이 뉘이곤, 고했다.

 "형. 죄송한데요."

 "네."

 "저 졸려요."

 ... 엥?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제가 너무 자극적인 걸 보면 졸리거든요? 뇌가 감당이 안 되나 봐요. 최한솔은 쨍알쨍알 이상한 소릴 해댔다. 그제서야 다시 보니 최한솔의 눈이 반쯤 감긴 것도 같았다. 드디어 디에잇은 눈치 챘다. 최한솔이 취했다는 것을.

 "그럼 나랑 있을 때 맨날 졸렸겠네."

 "네. 엄청요."

 농담이었는데... 너무 단호히 긍정하니 쬐까 민망해진 디에잇이 멋쩍게 웃음 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한솔의 입도 디에잇을 따라 헤벌쭉 벌어졌다. 진짜 취했나 보네. 허탈해진 디에잇이 그러면 먼저 잘래요? 물었다. 보아 하니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게 분명하니까 차라리 한숨 자고 일어나 다시 얘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뭐해요?!"

 거진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디에잇의 입에서 꽥 쏟아져 나왔다. 경악한 디에잇의 눈동자에 바지를 내리려는 듯 바지춤을 움켜잡은 최한솔이 비쳤다. 최한솔은 여전히 바지춤을 쥔 채로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아. 불편해서요. 저 원래 아무것도 안 입고 자거든요."

 "여, 여, 여기서 말고, 화장실! 화장실 가서 갈아입어요."

 "뭘 그렇게까지요. 그냥 벗으면 되는데."

 "뭐가 돼!!!!"

 다시금 비명을 지른 디에잇이었다. 최한솔 말마따나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싫었다. 소중한 사람의 벗은 몸을 이렇게 얼렁뚱땅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에서도 낭만을 잃지 않기. 그건 디에잇 인생 제1의 철칙이었다.

 "제발, 오늘만 옷 입고 자면 안 될까? 부탁할게."

 어느덧 저도 모르게 반말로 애원하고 있었다. 애걸복걸하는 디에잇을 빤히 보던 최한솔이 바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꼿꼿하게 선 채로 중얼거렸다.

 "씨발 당연히 되죠."

 "... 어?"

 "저는 형이 부탁하는 거 거절 못 해요."

 그래놓고 화장실 가서 상탈한 채로 나왔다. 디에잇은 한 번 더 비명을 지르고 손수 티셔츠를 입혀줬다고 한다...

 냅다 바닥에 누우려는 최한솔을 겨우 저지한 디에잇이 구석에서 라꾸라꾸 침대를 찾아 펼쳤다. 여기, 여기 누워요. 거의 던지다시피 해서 겨우 눕혔다. 졸리단 소리가 진심이긴 했는지 최한솔은 눕자마자 잠들어버렸다. 방금의 사달로 진이 쪽 빠져버린 디에잇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갈하게 누워 눈을 내린 최한솔의 입술 새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디에잇은 침대에 턱을 괴고 그 숨소리를 들었다. 담요 아래로 튀어나온 손목을 보다가, 그 위에 검지로 작은 하트를 그렸다.

 "버논아."

 "..."

 "한솔아."

 "..."

 "잘 자."

 빙긋 웃은 디에잇이 잠든 최한솔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마구잡이로 헝크러뜨려버리고는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얌전히 정돈해주기에는 아무래도 괘씸했다.

 소파에 누운 디에잇은 어둠 속에서 눈을 껌뻑거렸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최한솔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부탁하는 거는 거절 못 한다고. 그러면 고백도 그런 마음으로 받은 거 아냐? 돌이켜 보면 명확하게 좋다고 하지도 않았다. 피상적인 표현만 따지면 도리어 거절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겠다. 버논아, 너 어렵네. 디에잇은 멀찍이 어스름하게 보이는 최한솔의 윤곽을 째려보다가 겨우 눈을 붙였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긴가민가했다. 그래서 선뜻 손도 잡지 못했다. 당시의 디에잇에게는 오로지 시선의 자유만 있었다. 디에잇은 열심히 제 연인(아마?)을 눈에 담았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고백 전에도 종종 쳐다보고는 했으니깐... 합리화를 하며 얼마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는데, 손에 미묘한 온기가 닿았다. 슬쩍 눈을 내리니 제 손등 위에서 꿈질거리는 두툼한 손이 시야에 들어찼다.

 그때 디에잇은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겨우 삼켰다. 대신 손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나 이제 너 만져도 되는 거지?

 섹슈얼한 것도 가능? 응 가능. 하며 고백해서 성사된 관계지만서도, 성적인 걸 시도하긴 쉽지 않았다. 뽀뽀까지야 별거 아니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일단 키스하고 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마 최한솔도 마찬가질 테고.

 그러니까, 키스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최한솔은 작업실에 놀러와도 되지만 오늘은 미뤄놓은 일을 처리해야 돼서 미안하지만 형을 방치하겠다고 했었다. 진짜로 최한솔은 디에잇을 방치하고 작업에 매진했다. 섭섭하진 않았다. 그저 각자의 비즈니스를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로 거듭난 것 같아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할 일이 없기는 해서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아서 인스타 피드나 뒤적이던 중, 최한솔이 소파로 왔다.

 "좀 쉴랭."

 그리고 디에잇에게 폭 기댔다. 디에잇은 최한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가, 머리통에 쪽쪽 입맞추고, 뺨을 잡아 입술에도 입을 한 번 맞췄다. 한 번 더 입을 맞추려는데.

 꾹 다물린 최한솔의 눈꺼풀 아래로 촘촘한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걸 봐버린 이상 다른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러면 어떻게 키스를 안 해? 그렇게 최한솔의 뺨을 부여잡으며 턱을 꺾은 그 순간, 디에잇은 경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너 오늘 작업 못 할 것 같다고.

 그랬는데...

 이게 뭔 상황인지.

 "그럼 나만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

 "서운하네."

 디에잇이 짐짓 토라진 척을 했다. 설마설마 하기는 했다. 갑자기 말을 놓던 것도 그렇고, 언젠가부터 뭔가 찜찜하고 불안해 보여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기억을 못해서일 거라곤. 게다가 그날 잔 줄 알았다니! 이건 어이없는 걸 넘어서 화도 났다. 날 뭘로 보는 거야? 정황 근거(도대체 팬티를 왜 벗은 거야?)를 듣고 나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싶긴 했지만서도 억울했다.

 전말을 알게 된 최한솔은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를 봤다. 그러다 은근슬쩍 몸을 기울여 디에잇에게 기대왔다.

 "나두 서운행..."

 그리곤 어깨에 머리를 부비는 게 아닌가. 이 녀석 봐라. 고양이야 뭐야? 뻘쭘함을 애교로 무마하려는가 보았다. 네가 이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 어떻게 알았지. 거짓말처럼 마음이 풀려버린 디에잇이 너그럽게 웃으며 최한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같이 쌓아갈 기억 많으니까."

 "응."

 "앞으론 잊어버리면 안 돼."

 "절대 안 까먹겠습니다."

 선언하는 최한솔은 사뭇 비장한 태도였다. 귀엽다는 말 그만 하고 싶은데 귀여웠다. 콩깍지인지 뭔지 알 바 아니다. 최한솔 눈에는 천재만재 아이돌이라지만, 디에잇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사람이 애교를 부리는데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디에잇이 최한솔의 어깨를 쓱쓱 쓸어내렸다. 최한솔은 이왕 애교 부린 거 끝장을 볼 셈인지 어깻죽지에 계속해서 뺨을 부볐다. 디에잇이 문득 최한솔의 어깨를 잡아 몸을 세웠다. 그리고 분명하게 눈을 맞췄다. 이번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그럼 버논아."

 "응?"

 "오늘 자고 가도 돼?"

 "..."

 "근데 여기서 말고. 더 좋은 곳에서."

 최한솔은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며 힘겹게, 하지만 또렷하게 대답했다.

 "(씨발)당연히 되지."

 


후기: https://www.evernote.com/shard/s688/sh/745af7a4-d451-70b9-e530-f64d65005126/Pg7XN5GkMzDFZxJ7D2OLg-tddogAFn7flHtVt8OSffirGaRaDRRr8SdN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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