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카운트다운

잇솔

ADOY - Mars

 뭐야... 너 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 같아. 그 말을 듣기 전에 인터넷을 관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최한솔이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눈을 부릅 뜨고 다시 보아도 선명하기만 한 문장.

 [나는 외계인이야.]

 최한솔, 열다섯에 인터팔에서 외계인을 만나다.

 카운트다운 Countdown

 (*대괄호 안의 말은 영어입니다.)

 최한솔 역시 외계인이다. 사실은 외계인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람이지만, 외계인이다. 외계인으로 살아왔다.

 최한솔. 풀네임 Hansol Vernon Chwe.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지 다섯 해에 온 가족 손 잡고 한국으로 떠나왔다. 출생지 탓에 미국 국적도 갖고 있지만, 최한솔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사실은 정체성 따위 고민한 적도 없었다. 다섯 살 이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의 삶은 풍화된 지 오래였으며 뇌리에서 반짝이는 기억들은 죄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최한솔은 한국인이 맞았다.

 다만, 고루한 단일민족 신화를 오랜 시간 암송해온 한국에서 최한솔이 어떻게 독해되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를 고르게 닮은 최한솔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분명하게 선 얼굴선과 긴 속눈썹, 밝은 빛이 도는 눈동자를 타고났다. '한국인'과는 다소 다른 외양 때문일까, 때론 다정하지만 필요치 않은 배려를 받기도 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초면인 사람이 헬로우 하고 말을 건다든지, 최한솔에게 섣불리 말을 붙이지 않고 이국의 언어가 들려오기를 기다린다든지. 최한솔이 무심결에 한국어로 말하면 그들은 가시적으로 눈을 틔우며 놀랐다. 외국인일 거라고, 혹은 한국어를 못 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게 부끄러운지 낯을 붉히기도 했다.

 제 존재가 판별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건 썩 거북한 일이었다. 그래서 최한솔은 어느 순간부턴가 대강 영어로 대답하여 상황을 넘기곤 했다. 졸지에 기대에 부응해버린 꼴이지만, 최한솔은 영어를 잘했다. 미국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영어가 주 언어인 어머니와 대화하며 자연스레 체득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최한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어에 안도와 긴장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을 이해는 하면서도 묘한 허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한솔은 자신이 남들보다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자신의 삶이 천부적으로 피로하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조롱과 선망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생애였다. 선망이라도 획득했으니 운이 좋았다고 위로 삼기엔 너무나도 외로운 시간을 지나왔다. 특별함에서 비롯된 불안정은 어린 최한솔이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나 혹은 타자로 규정되는 이분법의 경계에 선 최한솔은 늘 어딘가에 속하기를 희구했다. 그래서 최한솔은, 사실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음에도,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사고하며 범인을 연기했다. 그러나 언제나 최한솔에게 붙던 편리한 딱지.

 역시 한솔이는 뭔가 다르네.

 뭐가 다른데? 미들네임이 있다는 거? 성을 Choi가 아닌 Chwe로 표기한다는 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거? 전형적인 동양인과는 다른 이목구비를 가졌다는 거? 그렇다면 억울하다.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한 적 없지 않은가. 고작 그런 것들이 은밀한 배제를 정당화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반대로 최한솔에게서 어떤 차이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근히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최한솔은 알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뭔가 다르기를 기대했구나.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서, 달라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때의 최한솔은 생각했다.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야.

 지금의 최한솔은 생각한다. 그래, 나는 달라. 근데 우리는 모두 달라. 나도 딱 그만큼만 달라.

 나는 절대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어. 나는 끝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질 거야.

 물론 지금의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체념과 결심, 잠 못 든 밤이 필요했다. 최한솔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염세를 배웠고, 자유를 대가로 평화를 얻었다.

-

 와삭. 최한솔이 과자를 씹는 소리가 동아리방에 울렸다. 요새 입소문 난 과자래서 호기심에 사봤는데 썩 맘에 들진 않는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스러워서 영화 보며 먹기에는 영 부적절하다. 평소처럼 편의점 팝콘이나 사올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사이, 서명호가 제 허벅지 위에 올려진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일어나서 먹어."

 "5분만 더 누워있을래."

 "그래."

 서명호가 최한솔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 북북 헤집었다. 엉망으로 엉킨 꼴을 보며 저 혼자 킥킥 웃다가는 다시 고이 빗어 정돈해주었다. 최한솔이 투정을 부리듯 가는 허벅지 위에 얼굴을 부볐다. 묵직한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졸려?"

 "어. 좀."

 "그러면 영화 보지 말까?"

 "아냐. 보자."

 "언제."

 "5분 뒤에."

 최한솔의 뺨이 졸음에 익어 따끈따끈 달아올랐다. 서명호가 트랙패드를 톡 눌러 오프닝이 시작되던 영화를 일시정지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얌전히 눈꺼풀을 내린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촘촘한 속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로 보아 이미 반쯤 잠든 것 같았다. 오늘은 영화 못 보겠네. 서명호가 노트북을 탁 덮고 소파 헤드에 목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느릿느릿, 허벅지의 온도가 올라갔다.

 최한솔은 종종 닉네임을 말할 일이 있으면 자신을 에일리언이라고 소개했다. 자, alien의 사전적 정의를 한 번 검색해볼까요? 1. 생경한 2. 외국의, 이국의 3. 외국인 체류자 4. 외계인. 최한솔은 이 모든 사전적 정의가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에일리언이라 칭한 건 자신을 외국인 혹은 외계인으로 보는 시선을 끌어안은 것도 맞지만, 단순히 외계인을 좋아하기 때문도 있었다.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을 허우적대던 최한솔은 제약이 부재한 가상의 이야기에 쉽게 몰입했다. 그중에서도 외계인에 단단히 꽂혔던 건 아마 인간과는 다른 외모를 가졌을 이방인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혹은 또 다른 타자를 상정함으로써 자연스레 다수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일지도.

 외계인은 물론이고 지구종말론까지도 믿었던 아기 오타쿠 최한솔은 무럭무럭 자라 그나마 대중화된 취향을 갖게 된다. 그게 SF 영화였다. 유서 깊은 덕후 최한솔로서는 상상 속 세계가 구체적으로 시각화된 SF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SF 영화에 빠져든 뒤 최한솔의 취향은 극마이너에서 어느 정도 메이저 반열로 올라섰다. 영화 산업에서 SF란 화려한 CG와 음향 기술의 발전을 자랑하기에 적절한 장르였다. 때로 좋아하는 영화가 장식을 치렁치렁 매단 눈요깃거리로만 취급될 때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대중의 선택을 받는 덕분에 다양한 작품이 나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매니아로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고는 못 말하겠으나.

 스물두 살 최한솔은 학생회관 207호 문 앞에 서서 'SF 연구회'라고 쓰인 팻말을 읽고 또 읽었다. SF 연구회는 형식적인 가입 절차만 거치면 들어갈 수 있는 중앙 동아리였다. 최한솔도 그걸 알았지만 문을 두드리기를 망설였다. 솔직히 좀 두려웠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게. 최한솔이라고 주체적인 선택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방향이었지 어딘가에 속하는 쪽은 아니었다. 충동적으로 동아리방 앞까지 도달은 했다만 뒤늦게 솟구친 우려가 손목을 잡았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내가 어디까지 존중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마저 외계인이 될까. 그런 생각들.

 30분쯤을 멀뚱히 서 있으니 문이 벌컥 열렸다. 최한솔만큼이나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문 앞을 지키고 선 에일리언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우 씨, 깜짝이야."

 "..."

 "무슨 일로...?"

 최한솔은 대답 없이 열린 문 너머로 내부를 건너다보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물건들이 난잡하게 널린 책상과 소파. 벽에 별처럼 박힌 은하수 사진과 영화 포스터. 누군가의 상상으로 가득 메워진 책장.

 최한솔은 그 풍경이 마치 외계 같다고 생각했다.

 "동아리 가입하려고요."

 최한솔의 첫 번째 외계 진입. 무사히 성공.

 SF 연구회는 멋들어지는 이름에 비해 별거 없는 동아리였다. 가상의 이야기에 심취한 사람들이 각자의 오타쿠력을 뽐내는 자리라 하겠다. 동아리답지 않게 친목 활동도 많지 않았다. 술 먹을 시간에 영화 한 편을 더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주 1회 세미나를 제외하면 별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부분의 시간은 동아리방에 디비져 누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다.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대신 취향만 공유하는 공간을 찾아온 최한솔로서는 그런 무심함이 오히려 좋았다.

 최한솔이 서명호를 마주친 건 SF 연구회의 일원이 된 지 어언 3년차에 이르러서였다. 그새 최한솔은 동아리방 지박령이 되었다. 동아리방의 왼쪽 벽에 딱 붙어 있는 검은색 소파는 최한솔의 침대나 다름없었다. 그날도 최한솔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전용 침대에 누워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동아리원이 세미나 하자고 깨우지 않았으면 창밖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잤을 게 분명했다. 최한솔이 미적미적 일어나 찌뿌둥한 팔다리를 쭈욱 펼쳤다. 그런데 손끝에 뭔가가 툭 걸렸다. 반사적으로 어우 죄송합니다, 하며 돌아본 자리에 있던 낯선 얼굴.

 "아, 너는 저번 주에 못 와서 모르겠구나. 신입이셔."

 "어... 안녕하세요."

 최한솔이 쓰고 있던 비니의 각도를 다듬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신입 회원은 최한솔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다가 허공에 떠다니는 손을 마주 잡았다. 곧, 얼굴형을 왜곡하지 않는 안경을 걸친 말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그려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명호예요. 중국에서 왔어요."

 그때 최한솔이 무슨 생각을 했더라. 힘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손이 주는 감각이 인상적이라고 느꼈었나. 제 얼굴을 빤히 담는 길쭉한 눈매가 묘하다고 생각했었나. 이름을 묻지 않는 걸 의아하게 여겼었나. 아마 전부 사후적 분석일 거다. 매주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중앙 동아리에서 서명호의 첫인상이 그리 특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최한솔이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를 꺼리는 타입이기도 했고.

 그날 다룬 영화는 지구를 침략하러 온 외계인이 우연히 한 아이를 만나는 내용의 해외 독립 애니메이션이었다. 외계인은 지구인에게 제 존재를 들켰음에 크게 당황하지만, 타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는 아이는 외계인의 손목을 잡아 제 집으로 데려간다. 아이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으로 목소리만 들리는 외계인을 그저 아이의 친구로 여긴다.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고 아버지의 생활을 보조하며 자식처럼 지내던 외계인은 이 가정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 외계인은 자기 별의 발전된 기술로 아버지의 시력을 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외계인을 본 아버지는 초록빛깔 피부에 질겁하며 그를 두려워한다. 아버지의 반응에 겁먹은 아이마저 외계인을 멀리하고, 상처받은 외계인은 스스로 집을 나선다. 하지만 원래의 계획, 지구 침략은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자기 별로 돌아간다. 푸른 별을 검은 눈 한가득 담으며. 이 못난 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을 직감하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발제가 시작되었다. 미장센과 플롯 모두 해석의 여지가 많아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다. 무거운 주제의식 탓에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와중, 한 회원이 자신도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 외계인이 우수한 문명을 전수해주고 과제도 대신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분위기 환기를 위해 던져진 장난 섞인 감상이었다. 그저 웃으며 넘기면 그만인 큰 의미 없는 이야기. 그때 여태껏 묵묵히 듣기만 하던 서명호가 한 손을 들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서명호를 향했다.

 "그런데, 외계인이 지구인보다 우월하다는 법 없어요. 외계인이 지구인보다 못 살 수 있고 더 멍청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우리의 편견이야."

 "..."

 "그리고 문명이 발달한 게 무조건 좋은 걸까? 우리 이런 생각도 해봐야 돼요."

 그 순간은 정말이지, 갑분싸 그 자체였다. 제대로 꼽먹은 회원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반면 미동 없는 서명호의 낯에서는 아랑곳 않는 기색이 읽혔다. 모두가 둘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던 중 최한솔이 중얼거렸다.

 "와. 되게 외계인 같으시다."

 동아리 회장이 기다렸단 듯 아니 그러게, 엄청 외계인처럼 말씀하시네? 하고 애써 웃어넘겼다. 다들 아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서명호가 고개를 돌려 최한솔을 바라보았다. 최한솔도 피하지 않고 서명호를 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최한솔이 서명호에게 외계인 같다고 말하는 무례를 저지른 건 회장 말마따나 서명호의 지적이 1인칭 외계인 시점을 취해서가 아니었다. 서명호의 사고방식이 약 9년 전에 마주쳤던 외계인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한솔은 불현듯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별 사람들은 화가 많아. 진짜 싫어.]

 열다섯의 최한솔은 엉뚱하게도 외계인에게 '사람'이라고 해도 되나를 제일 먼저 고민했었다. 우리말로는 외계'인'이니 상관없으려나. 뭐 외계인 입장에서는 사람이긴 하겠다. 엉성한 결론을 내고 다음으로 한 생각은, 외계인도 자기 별을 싫어하기도 하는구나. 하긴 지구인이라고 다 지구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

 세미나가 마무리되어 모두가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서명호도 목에 스카프를 두르며 일어섰다. 최한솔이 다급하게 서명호의 소매 끝을 잡았다.

 "저기."

 "..."

 "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최한솔의 시선이 서명호를 향해 올곧게 쏘아 올려졌다. 멘트만 봐서는 영락없는 플러팅이었지만, 눈빛은 맘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하곤 의젓하게 서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서명호는 손을 떨쳐내지도 번호를 건네주지도 않았다. 그저 붙잡힌 제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최한솔이 조용히 덧붙였다. 친해지고 싶은데. 미처 다 매지 못한 스카프가 서명호의 목께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한솔의 두 번째 외계 진입 시도였다.

 "되는데, 내가 번호가 없어요."

 "번호가 없다고요?"

 "핸드폰을 안 만들었어요. 연락할 사람이 없어서."

 핸드폰이 없다니. 아무리 오픈 마인드인 최한솔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21세기 대명천지에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살지. 유학생이라 그런가. 유학생이면 더 필요하지 않나. 혹시 완곡한 거절인가. 딱히 수작 부린 건 아니었는데. 여러 추측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만한 건 없어 목덜미만 긁적였다. 서명호가 매달린 손을 떼어 최한솔의 다리 위에 소중히 올려두었다.

 "대신 내가 여기 많이 올게요."

 서명호가 떨어진 스카프를 주워 툭툭 털고 한 손에 감았다. 그리고 한쪽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작게 목례하곤 동아리방을 나섰다. 최한솔은 서명호가 남기고 간 친절한 미소를 한참 되새기다가, 야트막한 확신을 쥐고 소파에 몸을 뉘었다.

-

 서명호는 약속을 지켰다. 최한솔이 동아리방 문을 열면 항상 다리를 꼬고 앉은 서명호가 있었다. 두 번째로 동아리방에서 마주했을 때 서명호는 최한솔을 쳐다도 안 보고 말했다. 한솔씨 왔어요? 최한솔은 그 나긋한 목소리가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던 게 무색하게도 둘은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아 각자 할 일을 했다. 최한솔은 노트북을 두들기며 과제를 했고, 서명호는 그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최한솔은 문득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뜸 정적을 침범해오는 웃음소리에 서명호의 시선이 미끄러져 왔다.

 "아. 죄송."

 "재밌는 거 봤나 봐요."

 "아뇨. 그냥 둘 다 아무 말 안 하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게 신기해서요."

 "음, 그게 신기한가?"

 "보통은 그렇죠."

 팔랑,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서명호가 일어나 책꽂이에 책을 밀어 넣었다.

 "내가 말이 없어서 불편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최한솔은 자극에 둔감한 편이다. 따라서 무언가에 꽂히는 일이 잘 없다. 그러나 한 번 마음에 들면 제대로 들이받아버리고는 했다. 최한솔이 꽂히는 포인트는 대부분 남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예컨대 방금 서명호의 말에 배어 있는 따뜻한 염려와 모종의 동질감 같은 것들. 남들은 그런가, 하고 갸웃거릴 만한 것들. 최한솔은 어쩌면 남들보다 기민한 편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영화 보실래요?"

 최한솔이 노트북에서 헤드셋을 뽑고 음량을 올렸다. 서명호가 차가 든 텀블러를 들고 최한솔의 옆에 붙어 앉았다. 울컥 가까워진 차향이 나쁘지 않았다.

 서명호의 정중한 인삿말이 버논이 왔어? 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까이서 접한 서명호는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우선 언제나 동아리방에 있었다. 최한솔도 어지간한 동아리방 지박령임에도 서명호는 여기서 사나 싶을 정도였다. 어느 날은 새벽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잠깐 눈 붙이러 왔더니 서명호가 있어서 진짜로 기절할 뻔했다.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서명호는 그저 은은하게 웃으며 버논이 왔구나, 환대했다. 기묘한 지점은 다른 회원들은 동아리방에서 서명호를 거의 보지 못했다더라는 것이다. 최한솔과 같이 있는 순간 외에는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모습도 거의 본 적 없다나. 그게 좀 스산해서 형 혹시 귀신이야? 묻기도 했었다. 서명호는 되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대답조차 않았지만.

 최한솔은 끼니때가 되면 당연하게 동아리방에 들러 서명호를 찾았다. 형, 밥 먹었어? 그러면 서명호는 답했다. 아니, 근데 배가 안 고프네. 최한솔은 서명호가 차 외에 다른 음식을 입에 넣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국인-서명호는 중국인이지만-은 밥심인데 저렇게 안 먹어서야 쓰나. 걱정되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걸 선호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련히 잘 챙겨 먹겠거니 짐작하며 넘겼다. 그럼에도 점심 저녁마다 밥 먹었냐고 묻고 거절당하는 건 둘 사이의 루틴으로 자리했다.

 서명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추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최한솔이라고 현실에 발을 착 붙이고 있다고는 못하겠으나 서명호는 남달리 둥실 떠 있었다. 마치 이런 식이었다. 생일을 물으니 손가락으로 제 턱 끝을 토도독 두드리다가 11월 7일이라고 생각해, 하는 이상한 답변을 내놓는 것.

 "생각하는 건 뭐야."

 "그게 좀 애매해."

 생일이 애매할 수도 있나. 서명호의 말들은 언제나 추가적인 질문을 불러왔다. 그러나 최한솔은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못내 삼키고는 했다. 서명호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이유도 있겠거니 싶었다.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는 얘기를 캐묻지 않는 건 최한솔식 존중이었다.

 서명호는 최한솔을 버논이라고 불렀다. 별다른 계기랄 것도 없었다. 그때 서명호는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노트에 필사하고 있었다. 최한솔은 서명호의 허벅지 위에 한쪽 다리를 걸쳐 놓고 모바일 게임을 했다. 그때 동아리 회장이 동아리방을 나가며 최한솔에게 인사했다. 에일리언 나 간다. 서명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에일리언? 네 영어 이름이야?"

 "아니. 영어 이름은 따로 있어. 에일리언은 별명 같은 거."

 "그럼 영어 이름은 뭐야?"

 "버논. 정확히는 미들네임이야."

 버논, 버논, 버논. 서명호가 입 안에서 버논을 이리저리 굴렸다.

 "버논이라고 불러도 돼?"

 "갑자기?"

 "너만 갖고 있는 이름이잖아. 예뻐."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최한솔이라는 한국적인 이름을 낯설어하곤 했다. 그들은 최한솔의 미들네임을 알게 되면 굳이굳이 버논이라고 불렀다. 그건 일종의 낙인이었다. 너에게는 최한솔보다는 버논 최가 어울린다는, 악의 없는 배격. 그래서 최한솔은 누가 버논이라고 부르거든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해서 스스로 정정하게끔 유도했다. 그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명호의 노트 위를 메운 중국어 사이에 뾰족한 필체로 쓰인 '버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안 될 건 없지. 근데 세상에 버논이 나뿐은 아닐걸."

 '너만 갖고 있는 이름'이 그 의미가 아님을 알면서도 새초롬한 소리가 튀어 나왔다. 서명호가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너 기분 나쁘면 안 할게."

 "아니야. 형 이름은 중국어로 어떻게 읽어?"

 "쉬밍하오."

 밍하오, 밍하오, 밍하오. 이번에는 최한솔이 입 안에서 밍하오를 이리저리 굴렸다.

 "성조가 틀렸어. 밍- 하오. 이렇게 발음해야 돼."

 "밍- 하오. 이렇게?"

 "응. 그렇게."

 최한솔은 올라갔다가 뚝 떨어지는 음정이 낯설면서도 재미있는지 거듭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서명호를 똑바로 보면서 미잉, 하오, 발음했다. 서명호 또한 최한솔의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나도 형 밍하오라고 부른다."

 "너, 버논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거 맞아?"

 "어쩔밍하오."

 "뭐라는 거야..."

 서명호가 다시 책에 시선을 꽂았다. 최한솔이 서명호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은 읽지 못하는 언어를 써내는 손가락 끝을 멀찍이 눈에 담았다.

 그날부로 최한솔은 서명호의 버논이, 서명호는 최한솔의 밍하오가 되었다.

 최한솔은 서명호가 좋았다. 구체적으로는 서명호가 하는 말들이 좋았다. 서명호의 말들은 어딘지 정상 궤도를 벗어난 사고의 흐름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기이하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최한솔은 그 안에 깃든 다정을 포착했다.

 "그거 알아? 눈물을 오래 참으면 콧물이 난다."

 뜬금없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건 최한솔의 습성 중 하나였다. 서명호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 최한솔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이런 말을 툭 던졌다.

 "눈물을 오래 참아봤어?"

 최한솔은 웬만한 일에 놀란 티를 내지 않는 편이었다. 딱히 담대한 것까지는 아닌데, 겉으로 가시화되는 정도가 약했다. 그런 최한솔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간만에 크게 당황한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꺼내둔 말이다 보니 대단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 예고 없이 심연을 푹 찌르는 게 어딨어. 최한솔이 허겁지겁 아까 유튜브에서 본 얘기라고 둘러댔다. 서명호는 그렇구나, 하면서 소파에 어깨를 기댔다. 최한솔의 심장이 쿵쿵 뜀박질을 했다.

 눈물을 머금고 살던 때가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수시로 눈을 들어 물기를 말려야 했다. 열다섯 즈음의 최한솔은 제게 주어진 삶이 너무도 버거웠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앓으며 나는 누구인가를 고뇌했다. 너는 특별하다는 말이 위로보다는 가슴을 베어가던 순간, 최한솔은 학교를 그만뒀다. 판단당하는 걸 끔찍히 괴로워하는 최한솔과, 판단이 알파와 오메가인 학교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자퇴 이후에 최한솔은 스스로를 방 안에 가뒀다. 그리고 인터넷의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항해했다. 폭우가 내리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감정을 쏟아둘 곳이 필요했다. 누구든지 이 감정을 함께 끌어 안아준다면 무작정 닻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여행보다는 표류에 가까웠다. 세상에는 얼굴도 모르는 이의 속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여줄 여유가 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의 최한솔은 어린 마음에 상처난 자리마다 흉터 대신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대화의 포문이 열리면 거침없이 속내를 쏟아버리고는 상대가 조금이라도 가당찮은 소리를 하거든 어김없이 상처받았다. 그런 사람을 누가 기꺼이 안으려 들까. 최한솔은 인터넷 안에서든 밖에서든 타인과의 유대를 쌓지 못했다.

 그때 만난 게 그 외계인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처음에는 외계인인 줄 몰랐다. 외계인을 마주친 곳이 글로벌 채팅 플랫폼 인터팔인 만큼 그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일하게 최한솔의 길고 묵직한 서사를 묵묵히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때론 다 안다는 듯이 공감 서린 호응을 건네기도 했다. 열다섯 최한솔은 그 사람을 꽤나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겨둔 채 일방적으로 대화를 절단하고 사라졌을 때는 꽤나 아팠다. 지금도 여전히 그를 그릴 만큼.

 최한솔은 그 사람이 외계인임을 밝혔던 순간의 감정들을 선명히 기억했다. 첫 번째로는 황당했다. 물론 최한솔은 그때도 외계인을 좋아했고 믿었다. 언젠가 외계인을 만날 날을 기다렸고, 외계인을 만나게 되면 할 말도 다 생각해뒀다. 근데 외계인인 걸 애초부터 알고 만나는 거랑 몇 달 동안 얘기하던 사람이 짜잔 사실 저는 외계인이었습니다! 하고 밝히는 건 확실히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그때의 최한솔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외계인을 향한 자신의 믿음에 불경하게도 말이다.

 두 번째로는 슬펐다. 최한솔은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을 처음으로 깊게 신뢰한 거였다. 근데 그 사람이 실은 사람이 아니랜다. 무려 외계인이시랜다. 그때 최한솔은 생각했다. 아, 역시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 외계인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도 날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 맥이 빠지고 울적했다. 어린 최한솔의 작은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그 이후에 최한솔은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최초의 승인으로 넘치던 자신감은 좌절과 불신으로 점철되어 빛을 잃었다. 남들 앞에서는 표면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만 늘어놓았고, 적당히 우습게 굴어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때로는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슨 소릴 하든 어차피 최한솔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서명호에게 미들네임을 알려준 것도, 지금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하는 것도. 최한솔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최한솔이 먼저 형이 살던 동네는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서명호는 대답을 잠시 유예하다가는 중국의 둥베이라는 곳인데 제법 서늘한 지역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되물었다. 너는 고향이 어디야? 최한솔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녹였다.

 "어...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굳이 따지면 미국이 맞는데, 얼마 안 살고 여기 와서 고향이라고 하기는 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부연설명이 스스로도 지겨웠다. 반면 서명호는 흥미롭게 듣다가는 아주 명쾌히 말했다.

 "나는 고향, 꼭 태어난 곳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순간 최한솔의 머릿속 전구가 띵 켜졌다. 아, 그러네. 고향이 출생지만 가리키는 건 아니지.

 "와. 형 진심 명언 제조기."

 최한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실 자주 이랬다. 서명호는 다른 사람은 생각도 못 할 포인트를 일상적으로 짚어내는 사람이었으니까. 최한솔이 네이버 사전에 '고향'을 검색했다. 3번 정의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 있었다. 최한솔이 입을 주먹으로 가리며 와, 헐, 온갖 감탄사를 냈다. 이거 알고 말한 거야? 서명호가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너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왜?"

 "난 그냥 내 생각 말한 건데 네가 너무 좋아하니까."

 "..."

 "좀 부담돼. 응."

 작작 하라는 조용한 경고였다. 근데 남의 말 지지리 안 듣는 최한솔은 또 그 말에 꽂혀버렸다. 어떻게든 자신을 특별하게 분류하고 싶어 안달 난 세상을 살아온 최한솔은 서명호가 느꼈을 부담을 어느 정도 알았다. 그러나 굳이 언어화해서 타인에게 건넨 일은 없었다. 그만치 솔직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지만, 팔자려니 하며 살았지. 꾹 눌러 담아온 감정이 남의 입을 빌어 발화되는 순간의 희열을 덤덤히 넘기는 건 최한솔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최한솔이 서명호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헐. 나 방금 형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귓등으로."

 서명호가 못 말린다는 듯 눈을 감으며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너 마음대로 해."

 최한솔이 손안에 잡힌 가느다란 손목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서명호가 몸에 힘을 풀며 최한솔에게 기댔다. 이런 나른함이 모조리 마음에 들었다.

-

 [와우.]

 열다섯 최한솔은 갑작스러운 외계인 정체 공개 쇼에 십여 분을 얼탄 끝에 감탄사 하나를 보냈다.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데 무슨 반응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장난이라면 화가 좀 나겠지만, 진짜로 외계인이라면 그것대로 문제다. 최한솔이 여즉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외계인에게서 답장이 왔다.

 [너 나를 믿지 않는구나.]

 당연한 거 아냐? 최한솔은 그 말을 썼다가 백스페이스를 연타해 깨끗이 지웠다. 만일 진실이라면 외계인 입장에선 자신의 의심이 상처가 될 것이었다. 반면 거짓이라면. 어쨌든 속았으니 기분은 조금 나쁘겠지만 우스운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다.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후자가 낫다. 이유가 뭐가 됐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최한솔은 타인에게 불쾌를 안기는 대신 본인이 끌어안는 법을 서서히 배워가고 있었다.

 [지구에는 왜 왔는데?]

 최한솔은 제 답변에 만족했다. 확실히 영리한 질문이었다, 신뢰를 흉내내면서도 어느 정도 검증 목적이 내재된. 최한솔이 깍지 낀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외계인은 몇 분간 말이 없었다. 괜한 긴장감에 최한솔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오므라들었다. 오래 켜둔 화면이 자동 절전 상태로 넘어가기 직전에 장문의 답장이 돌아왔다. 최한솔이 마우스를 흔들며 얼굴을 모니터 가까이 붙였다.

 외계인은 화성력 기준으로 약 7년 전, 화성에서 왔다고 했다. 천성이 온화한 외계인은 화가 많은 제 고향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적절히 어울려 지내고 있었는데, 지구로의 특별 파견 요원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최종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전에 지구별의 생태와 문화를 살피는 게 주 업무라고 했다. 외계인은 긴 고민 끝에 결정했다. 이 별을 떠나보기로.

 외계인은 모르는 별로 혼자 떠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첨언했다. 최한솔은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며 외계인의 서사를 곱씹었다. 그럴듯하다. 꾸며낸 이야기라면 꽤나 고퀄리티라고 평하겠다. 한편으로는 외계인의 서사가 최한솔의 삶과 일견 닮은 구석이 있어 놀라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최한솔이 미심쩍어하는 동안 외계인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내왔다.

 [말이 좋아 시찰단이지, 그냥 지구인처럼 살면 돼. 그러면서 중간중간 정부에 보고하고.]

 끝까지 뻔뻔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쯤 되니 진짠가 싶다. 일단은 그를 믿기로 했으니, 최한솔은 제 믿음을 착실히 수행했다.

 [이거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야?]

 [안 되겠지? 근데 내가 뭘 하든 다들 큰 관심 없더라.]

 [다행이네.]

 [다행이지. 다행인데, 조금 쓸쓸하기는 해.]

 그런가.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면 편할 것 같은데. 정확히 이해는 안 갔지만 남의 감정에 이렇다 저렇다 태클 걸기를 즐기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말하는 외계인이 정말로 쓸쓸해 보여서 최한솔은 화제 전환을 하기로 했다.

 [지구에서 사는 건 어때?]

 [많이 싸워서 좋아. 폭력적인 평화가 아니라서.]

 근데 이건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 별 사람들이 화가 많아서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지구는 많이 싸워서 좋다니? 뒤엣말도 그렇다. '폭력적'과 '평화'가 병치될 수 있는 조합의 단어인가. 최한솔은 어제까지만 해도 끈끈했던 외계인과의 유대가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럼 화성의 '최종 계획'은 뭔데?]

 외계인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최한솔은 답장을 기다리다 늦은 새벽에야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후에 느즈막히 일어나 눈도 비비지 않고 바로 컴퓨터를 켜 인터팔에 접속했다.

 외계인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되는 말이 있다. 스물넷의 최한솔은 폭력적인 평화라는 말이 이 별의 완벽한 요약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최한솔이 갈등을 즐기게 된 건 아니었다. 다만,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데에는 적어도 한쪽 이상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걸 경험적으로 학습했다.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구성된 평화는 확실히 폭력적이라고 하겠다. 외계인의 의도야 모르겠지만 최한솔은 그렇게 이해했다.

 최한솔은 외계인을 만난 이야기를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사람이 없었던 문제 이전에, 당장 최한솔조차도 그가 외계인이 맞는지 긴가민가했다. 마냥 짓궂은 장난 치고는 수준 높긴 했어도 인터넷 공간에서 성실한 또라이를 만나는 일이야 흔하지 않은가. 최한솔이 생각하기에도 인터팔에서 우연히 외계인을 만났다는 건 좀 말이 안 됐다. 근데 최한솔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랑, 남이 말도 안 된다고 비웃는 건 또 다르다. 결말이 어찌 되었든 그 외계인과의 대화는 최한솔의 삶에서 가장 충격적이고도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비웃음 속에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때때로 어딘가에 털어놓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외계인이 남기고 간 비밀이 좀 심란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혼자 품고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아서. 최한솔이 고개를 홱 돌려 제 옆에서 일기를 쓰는 서명호를 뜨겁게 쳐다보았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제게 쏟아지는 1인분의 시선이 조금 따가웠는지, 서명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쳐다보지 말고 말을 걸어."

 "형은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

 "이 넓은 우주에 인간만 있다고는 생각 안 해."

 "그치."

 만약 내가 외계인을 만났다면 어떨 것 같아? 아직 꺼내본 적 없는 질문이 목구멍을 뱅글뱅글 돌았다. 근래 들어 서명호를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은 서명호에게 확신이 없었다.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기도 했지만 서명호가 언제나 원하는 대로 말해줄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보기보다 경계벽이 높은 최한솔은 밑밥부터 차근차근 깔아보기로 했다.

 "사실 나 오컬트도 되게 좋아하거든."

 "오컬트?"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컬트가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최한솔이 구글에 '오컬트'를 치고 위키에 나오는 설명들을 읽어주었다. 서명호는 제 턱을 매만지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최한솔의 얇은 입술을 눈꺼풀 깊이 삼켰다.

 "나는 특히 미지의 존재가 있다고 믿어. 외계인이나, 귀신이나, 괴물 등등."

 "뭐야 그게. 종교 같은 거야?"

 나왔다... 오타쿠를 향한 일반인의 순박하고 잔혹한 질문. 최한솔은 어쩐지 참담해졌다. 서명호는 미묘하게 시무룩해진 최한솔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특유의 높은 웃음소리를 공중에 흩뜨렸다. 겨우 멘탈을 잡은 최한솔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종교까진 아니고. 희망?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너는 외계인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 거야?"

 "어... 그랬던 것 같아."

 "만약에 외계인 있으면, 외계인하고 친구 하고 싶어?"

 "아니. 그건 불가능하지."

 "현실적으로는 어려워도 상상할 수 있잖아."

 곧장 대답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물음이었다. 최한솔은 9년 전을 회고했다. 나는 그때 외계인을 왜 좋아했더라. 외계인을 왜 만나고 싶어 했더라. 서명호는 생각에 잠긴 최한솔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대화에 긴 마가 떴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외계인에게는 지구인이 갖는 편견이 없을 거 아냐. 날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던 거야."

 9년 전의 최한솔은 저를 둘러싼 판단의 축이 지겨웠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편견 밖으로 나서는 건 최한솔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문제였다면 수정하면 그만이겠지만, 최한솔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최한솔은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한솔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온전히 인식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이번에는 서명호가 생각에 빠졌다.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최한솔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대화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건 서명호의 습관이었다.

 "음, 근데 외계인도 너를 이해 못 할걸."

 "와우. 비수를 꽂아버리네."

 "그런 뜻이 아니라."

 서명호의 눈이 도로록 굴러갔다. 자신의 말을 해설할 적당한 어휘를 찾는 듯했다.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 완벽하게 이해 못 해. 아마 외계인도."

 "..."

 "그리고 이해받을 필요 없어."

 잠깐의 여백. 최한솔이 숨을 참았다.

 "너는 너대로 살아."

 말을 마친 서명호는 입꼬리를 늘려 빙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일기장에 박았다. 펜이 큼직한 손안에서 휙휙 돌아갔다. 오후 5시 20분의 푸른 노을빛이 동아리방 창을 타고 들어왔다. 서명호의 동그란 코끝이 파랗게 젖었다. 최한솔은 그 풍경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그때 최한솔은 직감했다. 지금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서명호의 마지막 말을 오래토록 가슴에 품게 될 것이라고. 어쩌면 평생을. 영원히.

 최한솔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냔 말이야. 팡, 오래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밍하오."

 "어."

 아마 서명호는 그 순간의 최한솔이 이 사람에게는 뭐든 말해도 괜찮겠다고, 아니, 모든 걸 말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하면서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좋았다. 본인은 의식도 못 할 만큼 마음 깊이 밴 사려 깊음이. 당연하고 무덤덤한 따스함이.

 최한솔이 심호흡을 했다. 내내 홀로 곯았던 비밀이 최초로 바깥 공기를 맡는 순간이다. 벌써부터 후련한 것도 같았다.

 ['최종 계획'은,]

 "내년에 지구 망한대."

 [지구를 멸망시키는 거야.]

 툭. 데구르르. 서명호의 손을 벗어난 펜이 책상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해맑게 울렸다.

-

 최한솔은 종말을 기다린다.

 최한솔은 열다섯에 지구 종말을 점지받았다. 그건 마치 신탁처럼 내려왔다. 다른 게 있다면 신이 아닌 외계인이 선고했다는 점일까.

 외계인의 답장을 본 최한솔은 한 손을 들어 제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꿈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더 황당하다. 지구가 망한다고? 갑자기? 것보다, 지금 자기가 지구를 멸망시키러 왔다고 지구인한테 말하는 거야? 정확히는 계획 실행 전에 사전 조사를 하러 온 것이기는 하다만, 그거나 저거나. 그대로 최한솔의 사고가 정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최한솔은 마우스를 붙잡고 한참을 굳어 있다가,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최한솔은 인터넷 창을 하나 더 켜서 '지구 종말', '인류 멸망' 따위의 단어를 검색창에 넣어 보았다. 검색 결과 창에 갖가지 B급 영화 시나리오들에 더불어 온 세상 사이비 종교의 교리가 줄지어 섰다. 훑어보고 나니 더욱 망연해진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인터팔 창으로 돌아와 보니 외계인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당장 내일일 수도 있지. 다만, 유예기간이 있어. 지금부터 10년 정도 남았어.]

 [지구 시간으로 말이야.] 외계인이 덧붙였다. 최한솔은 마우스를 던지듯 내려놓고 세차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놈의 외계인은 쓸데없이 구체적이어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든다. 그냥 심심풀이로 남 골려주려는 사람이 유예기간 따위의 설정을 떠올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일단은 놀라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가 보기로 했다.

 [한참 남았네.]

 [그렇지도 않아. 지구는 화성에 비해 1년이 짧게 흘러가잖아.]

 [그럼 적어도 10년 뒤에는 다 죽는다는 소리야?]

 [잘 알아들었네.]

 외계인은 아주 담담했다. 덕분에 황당함이 배가 됐다.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만약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 10년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모두 죽는다면.

 [나도 죽어?]

 최한솔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둥 둥 둥 둥. 평소보다 빠른 비트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갑자기 시한부를 선고받은 꼴이었으니 당연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매일같이 고민했지만 어떻게 죽게 될지는 상상해본 일이 없다. 그런데 병도, 사고도 아닌 외계 행성의 침입으로 죽는다니. 무섭기 이전에 허무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외계인이 말했다.

 [너는 내가 데리러 갈게.]

 최한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데리러 와, 내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인터팔 상에 공개된 정보-국적과 이름-만으로는 최한솔을 특정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자.]

 기이하리만큼 확신에 찬 기약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외계인이면 다른 수가 있으려나 싶다. 인간이 상상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특별한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채팅창에 [언제?]를 치고 전송하려던 찰나, 외계인의 이름 옆 초록 불이 꺼졌다. 뭐야. 지 할말만 하고 나가버리네. 심통 난 최한솔이 콧김을 훅 뿜으며 의자에 흐물텅 늘어졌다.

 최한솔은 깍지 낀 손을 배에 올리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외계인이 들어오면, 어떻게 날 찾아낼 건지 물어봐야지. 난 화성으로 가게 되는 거냐고도 물어봐야지. 집 앞에서 자주 만나는 고양이도 데려갈 수 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머릿속에 외계인에게 던질 질문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나 외계인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다다다음 날에도, 계속.

 [야]

 최한솔은 한 달마다 외계인을 불렀다. 외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외계인이기 이전에 좋은 친구였으니까.

 [야]

 그렇지만 외계인의 이름 옆 초록 불은 켜질 줄을 몰랐다.

 [야]

 꼬박 세 번을 부르고서야 받아들였다. 외계인이 자신을 두고 사라져버렸다는 걸. 갑작스럽고 또 일방적인 이별이었다.

 외계인과 연락이 끊기니 인터팔에도 흥미가 떨어졌다. 다른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최한솔은 인터팔에 발길을 끊었다. 그래도 브라우저 즐겨찾기에서 인터팔을 빼지는 못했다. 기억이 밟힐 때마다 들어가보기 위함이었다. 언제 들어가도 답장은 없었지만.

 최한솔은 외계인을 자주 떠올렸다. 그는 외계인이 맞았을까, 아니면 더는 거짓말할 거리가 없어서 도망친 걸까. 10년 안에 지구가 망한다고 했지. 나를 데리러 온댔지. 정말일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최한솔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지야."

 긴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서명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턱을 괸 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쥐고 있던 펜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최한솔이 서명호의 텀블러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탔다. 나 차 한 입만. 서명호가 턱을 괴지 않은 손으로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기억하는구나. 옛날 일인데."

 "아무래도."

 아마 외계인을 만난 게 20년 전이었어도 기억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놀림 받은 기억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그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었기에. 사람을 찾아 유랑하다 외계인을 만난 열다섯 소년은 한 달 뒤면 스물 다섯을 맞는다. 동시에 길고 길었던 카운트다운도 종료될 것이다. 최한솔은 지구는 화성에 비해 1년이 짧다던 외계인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근데 기억 안 나는 게 있어. 외계인 이름. 외계인이랑 했던 얘기들은 다 기억하는데, 이상하게 이름만 까먹었어."

 "외계인 서운하겠네."

 "모르지. 걔도 날 잊었을지도."

 서명호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했지만 본 적도 없는 외계인에게까지 공감할 줄은 몰랐다. 사실 이름 외에도 그의 국적과 성별도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정보라고는 외계인이라는 고백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외계인에게 미안해졌다. 누군가가 저를 익명의 한국인으로 기억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셈이니. 서명호가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여 최한솔에게 가까이 붙었다.

 

 "만약 진짜 지구가 망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수가 있어? 그냥 같이 망하는 거지 뭐."

 시니컬하게 말했지만 최한솔이라고 죽음이 달갑지는 않았다. 남은 삶이 아까웠고, 다시는 보지 못할 인연들이 아쉬웠다. 그치만 다 같이 죽는다면 얘기가 다르다. 나의 죽음에 슬퍼할 사람도 다 죽어버릴 테니 적어도 죄책감은 남지 않으리라. 지금 최한솔이 걱정하는 건 단 하나였다. 어떻게 죽게 될까.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는 최한솔의 시선이 힘없이 떨어졌다. 서명호가 웃으며 최한솔의 목을 안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깨를 쓸며 오구 무서웠어요, 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착 감겼다. 최한솔은 서명호의 품에 안겨 눈만 꿈뻑였다.

 "근데 형, 이걸 믿어?"

 "너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 아니니까."

 "아닌데. 나 거짓말 되게 많이 하는데."

 "아니. 너 되게 솔직해."

 진짜 아닌데. 형 앞에서만 거짓말 안 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최한솔은 삐뚜름한 마음을 내뱉는 대신 마른 품 깊숙이 파고들었다.

 최한솔은 서명호 앞에서 유독 솔직해지고는 했다. 서명호는 스스로 속내를 꺼내놓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만사 그러려니 넘기는 특유의 포용적 태도 때문도 있겠다만, 일단 본인부터가 솔직했다. 서명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기를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을 꾸며내고 있자면 공연히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품에서 빠져나온 최한솔이 서명호의 목과 어깨 사이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습관적으로 유튜브를 켜니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벌써부터 캐롤 플레이리스트를 추천해주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누르자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힘차게 뻗어 나왔다. 익숙한 경쾌함이 기분을 붕붕 띄워 주었다. 역시 캐롤을 들어야 연말 기분이 난다.

 크리스마스라. 올해는 뭐 보지. 최한솔은 크리스마스마다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관습이 있었다. 최한솔의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는 보고 싶었으나 볼 시간이 없어서, 혹은 용기가 안 나서 미뤄놨던 것들이었다. 혹여 개쓰레기 같은 영화에 당첨되어도 기분이 괜찮았다. 메리 크리스마스니까. 서명호가 핸드폰을 잡은 최한솔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리더니 볼륨 버튼을 꾹꾹 눌렀다. 머라이어 캐리의 노랫소리가 차근차근 작아졌다. 음량이 좀 컸는가 보았다.

 "밍하오. 크리스마스에 뭐해?"

 "아무 계획 없어."

 서명호의 손이 최한솔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다 허벅지에 툭 떨어졌다. 최한솔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서명호의 손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무슨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요리조리 주물렀다. 서명호는 눈을 내려 자신의 손이 주물려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나랑 동방에서 영화 볼래?"

 최한솔은 지가 뱉은 말에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크리스마스가 연인의 날로 여겨지는 한국의 정서상 크리스마스에 만나자는 말은 고백이나 다름없다. 의도한 건 절대 아니었다. 본래 최한솔은 영화 볼 때 방해받는 게 싫어서 남들과 같이 보는 걸 꺼렸다. 특히 처음 보는 영화면 상대의 눈치까지 봐야 해서 배로 피곤했다. 그런데 서명호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경험적으로 서명호가 좋은 영화 메이트였기도 했지만, 아까의 비밀 공유가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 서명호를 믿기에 말한 거였는데 오히려 말하고 나니 믿음이 더 또렷해진 것이다.

 어쨌건 본의 아니게 데이트 신청을 해버린 최한솔은 응답을 기다렸다. 거절당한들 별로 달라질 건 없다. 평소와 같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뿐이다. 그런데 왠지 밑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좋아. 그러자."

 둥근 답변이 돌아오자마자 최한솔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핸드폰을 쥐었다. 화면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넷플릭스를 뒤적이는 두 눈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천천히 정해도 되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최한솔을 어르는 서명호의 나른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돌았다. 서명호는 모른다. 최한솔이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본다는 걸.

 신난 최한솔은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만약 그날 지구가 멸망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서명호와 함께면, 뭐든 괜찮겠다고.

 최한솔은 돕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총총 걸었다. 12월 중순 한겨울의 바람이 살을 베고 스쳐 지나갔다. 으, 추워. 빨리 동방 들어가야겠다. 서두르는 마음관 달리 다리는 여유롭게 휘적거렸다.

 일주일만의 동아리방 방문이었다. 아무리 학교를 느긋하게 다니는 최한솔이라도 대학생은 대학생인지라 학기 말엔 정신없이 바빴다. 최한솔은 웬만한 공부나 과제를 동아리방에서 해치우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자료를 들춰볼 일이 많아 도서관에 콕 박혀 있었다. 다시 말해 최한솔은 일주일 동안 서명호를 보지 못했다. 서명호와는 늘 동아리방에서 만났으므로.

 학생회관에 도달한 최한솔은 코를 킁 마시며 SF 연구회의 문을 열었다. 동아리방에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이제 종강도 했고, 올해 마지막 세미나라서 다들 시간을 내서 온 듯했다. 오우, 간만이고. 최한솔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게 인사하며 사람들을 잽싸게 스캔했다. 밍하오 어딨지. 쉬밍하오 어딨지.

 ... 어라. 어딨지? 최한솔은 와글와글한 동아리방을 도합 네 번 둘러봤다. 아무리 찾아도 서명호가 없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 시간을 보았다. 세미나까지는 5분 남았다. 웬일이지, 항상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의아해하며 동아리 회장 형 옆자리에 낑겨 앉았다.

 그런데 사람 촉이 참 이상한 게, 평소였으면 그저 우연이겠거니 넘길 일이 잘 넘겨지지가 않는 순간이 있다. 마치 알약이 녹아 목구멍 어딘가에 턱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찜찜한 감각이 불쑥 찾아들 때가 있다. 지금 최한솔이 그랬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묻거든 할 말은 없지만, 도대체 왜인지 최한솔조차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서명호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근거 없는 불안이 심장을 쿵쿵 내리쳤다. 가슴이 옥죄는 듯 갑갑해져 왔다. 어두워진 안색을 눈치챈 동아리 회장이 최한솔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오늘 명호 형 안 왔어?"

 회장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명호? 서명호? 회장의 되물음은 못 알아들어서라기보다는 질문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함인 듯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회장이 제 허벅지를 탁 쳤다.

 "아, 맞네. 너 걔랑 친했지. 너한테도 말 안 했어?"

 "무슨 말?"

 무슨 '말'을 말하는 걸까. 최한솔은 서명호와 셀 수 없이 많은 말을 했다. 하지만 서명호와 나눴던 어떤 이야기도 지금 회장이 칭한 '말'에 속하지 않을 것 같다.

 불안한 예감이 짙어진다. 심장 박동이 몸 안에서 더, 더, 크게 울리고,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페이드아웃된다. 사위가 조용해진다. 곧, 물속에서 듣는 바깥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소음이 고막을 퍽퍽 때린다. 귀가 멍멍하고 아리다. 설마. 설마.

 "걔 동아리 나갔어."

 삐─. 이명이 울렸다.

 ... 걔 들어올 때 사학과 16학번이라 그랬거든? 나 이번에 팀플 같이 한 사람이 사학과인 거야. 친해져 보겠다고 얘길 꺼냈다? 혹시 16학번에 서명호라고 아냐고, 우리 동아리라고. 근데 그분이 그러데. 자기가 16학번인데, 서명호라는 사람 없다고. 중국인 유학생도 자기 학번엔 없대. 완전 소름 돋지 않냐? 그래서 아까 걔 왔을 때 물어봤지. 너 사학과 맞냐고. 사학과에 서명호라는 사람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걔가 가만히 듣다가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동아리 나갈게요. 그러고 나갔어. 변명도 안 하더라...

 뭐 하는 새끼야 진짜. 쭈욱 설명해준 회장이 말끝에 욕지거리를 더했다. 그러나 최한솔은 방금 들은 얘기를 소화하기도 벅찼다. 그러니까, 서명호가 학교 사람이 아니라고. 신분을 속이고 이 동아리에 들어왔다고. 그걸 다 인정하고 도망쳤다고.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서명호가.

 "그게 언제였어?"

 "너 들어오기 직전에. 한 10분 됐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한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동아리방을 뛰쳐 나갔다. 어, 야, 어디 가! 최한솔은 뒤에서 저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뻥 트인 캠퍼스가 최한솔을 맞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든 가야 한다. 최한솔은 캠퍼스를 정처 없이 걸었다. 아니, 뛰었다. 어디 갔어. 서명호. 어딨어. 아무것도 짐작되지 않았다. 10분이면 이미 캠퍼스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최한솔은 계속 뛰었다. 달렸다. 눈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캠퍼스 구석구석을 뒤졌고, 심장은 눈치 없이 쿵쿵였다. 대기에 하얗게 맺히는 입김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개었다를 반복했다. 쉼 없이 움직이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양 뺨이 빨갛게 얼어가던 무렵, 저 멀리 가느다란 인영이 스쳤다.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기다란 코트 자락. 바람에 펄럭이는 목도리.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진 옆얼굴.

 ... 서명호다. 바삐 달리던 최한솔의 발놀림이 천천히 멎었다. 최한솔은 멈춰 섬과 동시에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며 무너졌다. 찬 공기를 헤치고 뛰어다니느라 쪼그라든 폐가 욱신거렸다. 최한솔은 허리를 구부러뜨리고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불규칙한 호흡이 땅바닥에 쏟아졌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겨우 고개를 들자 인영이 더욱 작아져 가는 게 보였다.

 명호 형. 명호. 서명호. 최한솔의 말라붙은 목구멍이 하잘것없이 작은 음성을 토해냈다. 역시 들리지 않았는지 서명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최한솔이 비틀거리며 허리를 세웠다. 벌게진 손등으로 입술을 한 번 쓸고, 크게 숨을 삼킨 뒤.

 "야, 밍하오!"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퍼졌다. 최한솔이 다시 와륵 무너졌다. 큰 소리를 내지르느라 몰아 쓴 숨이 또 가빠왔다. 배를 부여잡고 헉헉대는 최한솔의 앞에 긴 그림자가 졌다. 버논아.

 "놀랐지."

 "지금 놀란 게 문제가 아니라."

 칼바람에 시달려 빨갛게 물든 코끝을 내려다보던 서명호가 목도리를 풀어 건넸다. 최한솔이 손을 탁 쳐냈다. 목도리 끝이 땅을 한 번 그으며 휘날렸다. 최한솔이 천천히 허리를 펼쳤다. 서명호를 노려보는 눈이 붉었다.

 "형은 나를 아는데, 나는 형을 하나도 모르겠어."

 "..."

 "솔직히 화가 나."

 최한솔은 서명호에게 모든 걸 말했다. 세상에 서명호만큼 최한솔을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한솔은 서명호를 모른다. 사라진 서명호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어디 있을지 물어볼 곳도 없을 만큼. 이렇게 폐가 찢어지도록 달려야 우연에 기대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그게 분했다. 서명호는 최한솔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솔직한 적 없었다. 그걸 서명호를 분실할 뻔하고서야 알았다.

 최한솔은 서명호를 처음 본 날 이후로 계속, 저 소매 끝을 붙잡고 있었다. 그걸 최한솔만 몰랐다. 서명호가 최한솔을 기껍게 만나러 오니까. 와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정을 줬다.

 "미안해. 너한테 거짓말하기 싫었는데."

 서명호가 목도리를 최한솔의 목에 둘렀다. 최한솔은 이번엔 반항하지 않았다. 서명호가 목도리 끝을 질끈 묶어주었다. 숨을 쉴 때마다 찬 공기가 목도리에 밴 서명호의 향을 품고 콧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에 낀 서리가 이제서야 녹아내렸다.

 "내가 안 한 말이 있어."

 "해봐."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안 돼."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기다려줘."

 믿을 수 없었다. 배신의 상흔이 컸다. 지금도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아무 말 않았을 거면서. 나만 아는 흔적을 남겨두고,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놓고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을 해.

 "나중이 언젠지 내가 어떻게 알고 기다려."

 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명호는 해명하지 않았다. 잠자코 입술을 짓이기다가 한 마디를 남겼다. 나 가야 해. 초라하고 차가운 맺음말이었다.

 서명호는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다. 최한솔은 서명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날렵한 실루엣이 까만 점으로 수렴하는 걸 치열하게 새겼다.

 나중이 언젠데. 나중에라는 말 지겨워.

-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최한솔은 불도 켜지 않은 동아리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어스름하게 동아리방을 밝혔다. 최한솔은 넷플릭스 홈 화면을 계속 스크롤질을 했다. 땡기는 영화가 없었다. 결국 노트북을 덮고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자 난데없이 목에 포근한 질감이 닿았다. 잡아당기니 아까 꺼내두었던 서명호의 목도리가 쭈욱 늘어났다. 최한솔은 목도리를 끄집어내서 제 배 위에 펼쳤다. 옅게 남은 서명호의 향이 어렴풋이 올라왔다. 눈이 질끈 감겼다.

 영원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장난으로라도 영원을 논하기에는 연기처럼 불안정한 관계였다. 서명호가 홀연히 나타났듯이, 인연의 마침표 또한 홀연히 다가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삶의 한순간을 장식하는 기분 좋은 추억 정도로 남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나간 많은 인연이 그랬듯이.

 그런데 이건 너무 부조리하다. 최한솔은 서명호가 떠나간 후 서명호를 아주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점점 억울해졌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조금도 납득되는 구석이 없었다. 왜 거짓말을 해서까지 동아리에 들어왔는지, 자신을 알려줄 만큼 소중하지 않은 사람과 왜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지, 왜 마지막까지 모든 걸 안개 속에 방치해버렸는지. 서명호를 모르는 최한솔은 서명호를 이해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최한솔의 일방적인 애정이었다, 서명호는 최한솔에게 되돌려줄 애정이 없었다. 가장 손쉬운 결론을 내보자면 그랬다. 한데 대충 상처받고 털어버리기에는 서명호가 두고 간 말들이 걸렸다. 거짓말하기 싫었는데. 안 한 말이 있어. 그 말들을 조심스레 내놓던 신중한 눈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 갔다. 그래서 최한솔은 목도리를 들고 동아리방에 왔다. 그건 일종의 미련이었다.

 왜 내가 아끼는 이들은 모두 날 기다리게 할까. 최한솔은 깜깜한 동아리방에서 누워 답도 없는 탐구를 시작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내가 더 노력했어야 됐나. 내가 문젠가. 우울한 생각들에 빠져 있다가 푸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난 잘못 없어. 내가 얼마나 별로든 이러면 안 되지. 최한솔은 소파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채며 비관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몇 시간을 누워서 눈꺼풀 여닫기 운동만 하던 최한솔은 퍼뜩 핸드폰 잠금화면에 떠오른 시간을 보았다. 오후 11시 30분. 이제 메리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최한솔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목적지 없이 던져진 시선 끝에 앙다물린 문이 걸렸다. 적어도 오늘 안에 열릴 일은 없어 보인다. 최한솔이 노트북과 헤드셋을 정리해 백팩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허벅지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아. 목도리. 최한솔은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주워들어 툭툭 털고 목에 감았다. 이 정도 미련은 안고 있어도 되겠지. 오늘 날이 추우니까.

 일어나 백팩을 메는데 시야가 번쩍 빛났다. 곧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최한솔은 백팩을 내려놓고 창문에 달라붙었다. 설마 비가 오나? 창문을 열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물방울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바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건가. 여러모로 기분 나쁜 날이다. 최한솔이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동아리방이 환했다. 최한솔의 눈이 재빠르게 돌아가며 광원을 찾았다. 열린 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복도의 빛. 그리고 그 자리에 선,

 "버논아."

 서명호. 최한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명호가 문을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아니면 꿈을 꾸고 있나? 서명호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큼지막한 손으로 최한솔의 손을 잡아챘다.

 "가자."

 "어?"

 그리고 냅다 최한솔을 끌고 나갔다. 형, 나 가방. 가방 챙겨야 되는데. 서명호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걷던 걸음이 곧 뜀박질로 바뀌었다. 서명호는 최한솔의 손을 잡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최한솔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왜 서명호는 이제 와서 나타난 것이며, 지금은 어딜 가는 것인가.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같이 달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아귀가 어쩐지 절박했으므로. 달리는 둘의 뒤로 목도리가 깃발처럼 휘날렸다.

 순식간에 학생회관을 벗어난 서명호의 발이 학교 옆 산으로 향했다. 여길 간다고? 등교할 때마다 봐왔던 산이지만 가보는 건 처음이다. 최한솔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동안 서명호는 망설임 없이 산을 올랐다. 최한솔은 다급하게 서명호를 뒤쫓았다. 서명호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등산로 대신 거친 길을 택한 탓에 발에 여러 번 돌부리가 채이고, 겨울 나뭇가지가 얼굴을 비껴갔다.

 어리벙벙하게 끌려가던 최한솔이 손에 무게를 실어 서명호를 제지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더 뛰면 죽을 것 같았다. 최한솔이 가슴을 잡고 숨을 뱉어냈다. 서명호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불균질한 모양새로 쏟아져 나왔다.

 "어디 가는 건데?"

 20분가량을 쉼 없이 끌려가고 나서야 목적지를 묻는 거였다. 서명호가 최한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그러더니 다시 달려가는 것이다. 영문 모르고 같이 뛰는 최한솔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데리러 오겠다 했다고? 언제? 최한솔이 기억하는 한 서명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최한솔에게 데리러 오겠다고 한 사람이라고는,

 [너는 내가 데리러 갈게.]

 ... 어? 최한솔이 우뚝 멈춰 섰다.

 "와, 잠깐만."

 기억났다. 그 외계인의 이름.

 "형이 디에잇이야?"

 디에잇.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고, 기다리게 했던 이름. 근거는 하나뿐이었다. 데리러 오겠다던 이는 디에잇이 유일했으니까. 서명호가 고개를 돌려 최한솔과 눈을 마주쳤다. 입가에 은은하게 머금은 미소가 빛났다.

 "오랜만이야."

 그 순간 머릿속에서 힌트들이 조립됐다. 연락할 사람이 없다던 서명호. 차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던 서명호. 이상하리만치 외계인에게 깊이 공감하던 서명호. 최한솔의 비밀을 조금도 황당해하지 않던 서명호. 서명호와 대화할 때면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

 그리고, 서명호의 생일. 11월 7일. 최한솔은 9년 전, 디에잇이 외계인임을 고백하고 사라진 날이 11월 7일이었음을 기억해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서명호, 아니 디에잇이 손목시계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디에잇이 나무가 적은 절벽께로 최한솔을 데려갔다. 휙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는 최한솔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잘 들어. 1분 뒤면 지구는 멸망해. 죽을 확률이 높지만, 운 좋으면 안 죽을 수도 있어. 네가 선택해. 지구에 남을지, 화성으로 떠날지."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치만 믿는다. 서명호가 최한솔의 터무니없는 지구종말론을 믿었듯이 버논은 디에잇을 믿는다.

 "형은?"

 "난 너랑 함께해."

 땅이 휘청 기울었다. 디에잇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버논을 붙들어 지탱했다. 버논은 디에잇의 팔뚝을 잡고 겨우 일어났다.

 버논은 양자택일의 상황에 취약했다. 하나를 선택했을 때 다른 하나가 버려지는 걸 유독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렇게 극단적인 양자택일은 또 처음이다. 목숨을 걸고 지구에 남느냐, 남은 생을 걸고 화성으로 떠나느냐. 위험하지 않은 쪽이 없었다.

 오로지 확실한 건 디에잇이 함께한다는 것. 버논은 자신을 기다리는 디에잇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확신이 눈망울 가득 응결져 있었다. 버논이 입을 뗐다.

 "나는..."

 우렁찬 굉음이 울렸다. 우르릉,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발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강한 중력이 몸을 짓눌렀다. 버논이 디에잇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는.

 우르릉 쾅. 또다시 울리는 굉음이 버논의 답변을 흔적 없이 묻었다. 허나 디에잇은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디에잇이 버논을 끌어안았다. 머리를 안은 손이 귓바퀴와 편두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순간, 디에잇의 일생이 버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버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와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디에잇이 조용히 하라는 듯 코를 맞붙였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렸다.

 "10."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9."

 디에잇은 화가 많은 별, 폭력이 난무하는 별에서 생성되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재한 화성은 윤리가 발전할 토대가 없는 곳이었다. 반성과 성찰이 무가치한 곳. 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나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타자를 짓밟는 게 자연한 곳. 그곳이 디에잇의 고향이었다.

 "8."

 디에잇은 화성의 오류였다. 디에잇은 타자를 있는 힘껏 끌어안을 줄 알았다. 감정이 열등하게 취급되는 별에서 독선을 버거워하고, 아파하는 디에잇이 소외되는 건 당연했다. 화성인들은 디에잇을 '여덟 번째'라고 불렀다. 디에잇과 같은 별종은 화성 역사상 일곱 명뿐이었다고 했다. '여덟 번째'는 화성의 여덟 번째 오류라는 뜻을 가진 멸칭이었다.

 디에잇은 화성을 떠나고 싶었다. 단지 화성이 끔찍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사랑이 특기인 디에잇은 화성을 미워했지만 또한 사랑했다. 다만, 화성에서의 삶이 외로웠다. 진실된 소통을 하지 않는 이 별이 너무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대화를 하고 싶었다.

 "7."

 그래서 지구 시찰단을 모집한다는 공고에 손을 들었다. 화성은 지구를 파란 쓰레기라고 불렀다. 자기네들이 딛고 선 땅을 망치는 것도 모자라 거만하게도 우주 생태까지 망치려 드는 주제에, 쓸데없이 감정은 풍부해서 습관처럼 위선을 부리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화성은 파란 쓰레기를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화성으로서는 휴짓조각 하나를 태우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그래도 열등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가 별을 지배하고 저들만의 문명을 발전시킨 건 우주적 단위에서도 특이한 일이라, 화성은 지구를 기록해두기로 했다. 추후에 다른 색깔 쓰레기 별이 나타났을 때의 대비책이었다.

 디에잇은 지구로 향하며 제 앞을 지나쳤을 일곱 명의 오류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처럼 철저히 고립되다가 그저 스러져버렸을까. 모험할 기회도, 저항할 힘도 없이, 그렇게.

 그때 디에잇은 결심했다. 당신들이 나를 오류라고 부른다면 기꺼이 오류가 되어주겠다. 그렇게 화성의 여덟 번째 오류는 디에잇THE 8이 되었다.

 "6."

 디에잇은 동양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시찰을 맡았다. 화성 정부는 디에잇에게 중국어와 영어 언어팩을 제공했다. 사용 인구가 많은 언어들이니 대강 퉁쳐지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막상 지구에 도착한 디에잇은 좀 당황했다. 한 국가로 묶이는 땅 내에서도 지역마다 사용하는 말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른 국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디에잇은 매일매일 정부에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어, 일본어 팩 추가 지원 요청합니다.' 묵묵부답이었다. 처음엔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줄로 알았다. 정부가 디에잇에게만 응답하지 않았다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뭐야, 유치하게. 어쨌건 디에잇은 제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래서 스스로 언어를 익혔다. 어떤 이는 같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부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구는 소문만큼 이상한 곳이 아니었다. 디에잇은 파란 쓰레기별이 퍽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지구에도 화성인만큼, 혹은 화성인보다 더 폭력적인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곳이 좋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도 비웃음을 사지 않는, 더 따뜻해지기 위해 싸우는, 느리지만 한없이 밝고 넓은 별. 디에잇은 순식간에 이 모순덩어리 별과 사랑에 빠졌다.

 "5."

 지구 문화를 닥치는 대로 다 받아들이던 디에잇은 컴퓨터를 접했다. 화성에서 받은 사전 교육에 따르면 인간들이 들고 다니는 작고 네모난 통신기기 이전에 컴퓨터라는 게 있었다고 했다. 그 고철 덩어리 하나면 전 지구인과 시도 때도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단다. 통신에 있어 딱히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화성인에게는 너무도 낯선 물건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디에잇은 버려진 컴퓨터 하나를 주워 와 연구에 돌입했다. 컴퓨터만 만지작거린 지 몇 달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능숙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버논을 만났다. Hansol Vernon Chwe, 한국, 98년생, 검은색 프로필 사진. 서명호는 그 모든 걸 똑똑히 기억했다. 디에잇이 애초부터 소년의 고통을 이해했던 건 아니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별이 어딨다고? 하는 천진한 반발심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디에잇은 버논의 이야기를 들었다. 열다섯 버논의 외로움은 디에잇에게도 친숙한 것이었다.

 한창 버논과 대화하던 날, 거리를 걷던 디에잇은 문득 이 별에 어린 기이함을 포착했다. 거리 위에 이상할 정도로 균일한 사람들만 걸어 다녔다. 아프고, 이상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싹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 쭈삣 섰다. 디에잇이 덜컥 멈춰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고 갔다. 디에잇이 눈을 감았다.

 이 별도 참 못됐구나.

 "4."

 작은 접점에서 시작된 공감은 거대한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디에잇은 얼굴도 모르는 소년을 마음 깊이 아꼈다. 아무리 온화한 디에잇이라도 정서적 교류라는 걸 처음 해보는 거였던지라 평소처럼 침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버논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버논에게 말했듯 화성 정부는 디에잇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체를 밝히고 대화를 이어나가던 도중, 머릿속에 메시지가 하나 입력되었다.

 '경고 1회 누적 (※2회 누적 시 존재 말소)'

 화성 정부로부터 온 경고장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살벌하네. 정부가 처벌에 이토록 열심인 줄 몰랐다. 항상 응답이 없기에 존재조차 잊은 줄로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지. 디에잇은 항의 메시지를 송신하려다 말았다. 아무리 끔찍해도 살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

 그 뒤에는 임무 수행에 전념했다. 디에잇은 강박적으로 지구를 기록하고 보고했다. 이미 받은 경고가 실적으로 상쇄될 리 없음에도,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목을 죄어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소년과의 대화도 최선을 다해 뇌리에서 지웠다. 정부가 어디까지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디에잇은 마지막 행선지인 한국으로 떠나면서야 마음 편히 버논을 생각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매일같이 눈물 없이 울던 너는 이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의 일상이 그때보단 덜 힘겹기를. 너의 중심이 잡혔기를. 이 세계가 너에게 더 상냥해졌기를. 디에잇은 진심으로 소원하며, 한국에 발을 디뎠다.

 "3."

 버논의 곁에 이리 오래 머무를 뜻은 없었다. 아마 버논은 초자연적인 힘을 통했다고 기대했겠지만, 디에잇이 버논을 찾아낸 방법은 꽤나 원시적이고 음침했다. 디에잇은 지구 종말 계획의 유예기간이 1년 남짓 남았던 날에 컴퓨터를 켰다. 9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인터팔을 들어가기는 조금 불안해서 검색창에 냅다 버논의 이름을 넣었다. 흔치 않은 이름이라 버논의 사진과 일상이 기록된 SNS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생긴 아이구나. 지금은 대학교라는 곳을 다니나 보네. SF 연구회? 이건 또 뭐야. 드르륵 드르륵 스크롤 소리가 적막한 방을 채웠다. 하룻밤 내내 버논을 공부한 디에잇이 목에 스카프를 둘렀다. 데리러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볼까 싶었다. 딱, 손가락을 튕겼다.

 버논과의 첫 만남은 가볍게 불발되었다. 학생회관에 도착한 디에잇은 207호 문을 똑똑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빠르게 내부를 훑어보았다. 버논처럼 보이는 얼굴은 없었다. 왜 없지? 혼란해하며 남자의 물음에 대강 답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소파에 앉아 동아리 가입 절차를 밟고 있었다. 학과, 학번, 이름 말씀해주세요. 저는... 역사를 공부해요(지구의 역사를 기록 중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16학번이고요(스물 다섯 해 전에 지구에 왔으니, 학번으로 환산하면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이름은...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었다. 인터팔에서는 스스로를 디에잇이라고 칭했었지만, 디에잇이 한국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이름이라는 것쯤 잘 알고 있었다. 디에잇은 잠시 망설이다가 서명호라는 이름을 내놓았다. 지구에게 받은 인상-느리고徐, 밝고明, 넓은浩-을 종합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디에잇은 마침 세미나인데 앉아 있다 가시라는 회장에게 간략한 인사를 건네고 동아리방을 나섰다.

 정말로 얼굴만 한 번 보고 지구 종말 직전에야 들를 작정이었다. 디에잇은 이미 자신이 버논의 기억 저편으로 건너갔으리라 예상했다. 잠깐의 대화가 그렇게 큰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디에잇의 말을 듣던 버논이 말했다. 와, 되게 외계인 같으시다. ...설마? 디에잇이 버논을 보았다. 저 똘망똘망한 눈에 무슨 마음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화성인에게 지구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까지는 없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선 디에잇의 소매를 버논이 붙잡았다. 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그 순간 디에잇은 버논에게 남은 외로움을 읽었다. 그리고, 자신이 버논을 그리워해왔다는 것도.

 그래서 약속했다. 대신 제가 여기 많이 올게요. 9년 전도, 지금도 막연한 기약밖에 남길 수 없어 미안했다.

 "2."

 디에잇은 매일 동아리방에 들렀다. 이제 임무는 거의 끝났거니와, 버논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으니까. 그런데 버논과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 켠이 초조하게 달아올랐다. 버논이 디에잇을 기억하는지 헷갈렸다. 처음에는 서명호가 디에잇임을 알고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버논의 엉뚱한 속내를 단정할 수 없었다. 만일 버논이 기억한다면 좀 난감해진다. 디에잇뿐 아니라 버논도 위험해질 수 있다. 심지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었다. 그래서 디에잇은 동아리방에 앉아 있다가 버논이 아닌 발소리가 들리거든 손가락을 튕겨 제 방으로 도망쳤다. 더이상 리스크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왜 진작 버논을 떠나지 않았냐고 한다면. 욕심이 났다. 디에잇은 버논과 보내는 시간을 사랑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누군가의 상상을 엿보고, 서로의 세계를 맞붙이는 감각이 너무도 소중했다. 특히 버논과 몸이 닿을 때의 온기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 안락함은 디에잇이 지구에게 느낀 감흥과 닮아 있었다. 그래, 버논은 지구였다. 디에잇은 사랑하는 지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버논이 디에잇 앞에서 디에잇 얘기를 꺼냈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인터팔 소년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에 기쁘기에 앞서 두려웠다. 목전에 다가온 죽음이 서늘했고, 졸지에 위험을 짊어지게 된 버논에게 죄스러웠다. 디에잇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 죽지 않았다. 버논도 그대로였다. 왜? 화성이 나에게 이리 너그러울 리 없는데. 디에잇은 버논의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도 소멸을 기다렸다. 역시 아무 일 없었다. 디에잇은 버논 몰래 안도했다.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봐주는 건가. 일단 성급한 걱정을 멈추고 눈앞의 버논을 안아주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관용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성은 '최종 계획'의 실행을 앞당기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디에잇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은 안 된다. 지구는 벌써 멸망하기에는 아름다웠고,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고, 그리고.

 아직 버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디에잇은 화성의 결정을 돌려보려 애썼다. 지구가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를 요목조목 정리해서 화성에 보냈다. 당연히도 응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 별에게 기회를 달라고 매일매일 구걸했다.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으니.

 디에잇은 버논을 떠나야 했다. 그때의 디에잇은 버논을 차순위로 미뤄야 할 만큼 긴박했다. 어쩌면 종말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헛된 소망이 디에잇을 잠식했다. 그래도 버논에게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하려 했었다, 결과적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지만. 학생회관을 나선 디에잇은 혼자 걸어가면서도 몇 번을 뒤돌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버논을 기다릴까 수백 번 고민했다. 그때 저 멀리서 찢어지는 음성이 메아리쳐왔다. 밍하오!

 버논이었다. 버논이 디에잇을 찾아왔다. 디에잇은 붉게 얼어붙은 버논의 손끝을 보고 이 우주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벌건 눈으로 원망을 쏟아내는 버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번번이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내가 약해서 미안해. 미안해. 디에잇은 유예된 사죄를 담아 버논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왜 하필 오늘 비니를 안 쓰고 왔어, 추운데.

 크리스마스에도 디에잇은 화성에게 제 주장을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끝나기 한 시간 전, 화성에게서 공지가 왔다.

 '지구 시간 기준 12월 26일 00시, '최종 계획' 실행 (※전 요원 복귀 요망)'

 디에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아리방을 향해 달렸다. 손가락만 한 번 튕기면 이동할 수 있었음에도, 버논이 그곳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음에도, 달렸다. 버논은 디에잇을 달리고 싶게 하는 사람이었다.

 "1."

 머릿속에 입력된 타임라인을 꼭꼭 씹어 삼키던 버논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버논은 언어화된 위로를 건네는 대신 디에잇의 마른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왜 나였어? 디에잇의 답변이 전해져왔다.

 네가 이 지구에서 지구를 가장 사랑하니까.

 버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헛다리 제대로 짚었네. 내가 지구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외계인도 인간 모르는 거 맞구나.

 아니, 사실은 맞혔다. 나는 지구를 사랑해. 이 지긋지긋하고 못난 별을 사랑해. 나를 괴롭힌 이 별을 사랑해.

 이번에는 디에잇이 물었다. 너는 왜 나를 믿었어? 내가 디에잇인 줄도 몰랐으면서, 어떻게 서명호를 믿었어? 버논이 답했다.

 그럴 만한 사람이었어. 형은 나를 떳떳하게 해.

 디에잇이 고요히 웃었다. 버논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자그마히 속삭였다. 내가 널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 버논도 디에잇의 귓가에 속삭였다. 응, 괜찮아. 둘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 화창하게 웃었다.

 

 "0."

 쿠구궁, 소란한 굉음과 함께 발밑이 훅 꺼졌다. 버논을 끌어안은 디에잇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둘의 발이 지표면에서 둥실 떠올랐다. 둘은 느린 속력으로 중력의 반대편을 향해 솟아올랐다.

 버논은 긴 속눈썹 너머로 지구의 마지막 풍경을 담았다. 가늠할 수 없이 오랜 시간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모두 다 사라진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달파했던 이 별에서의 지난날들과 이별한다. 안녕. 버논이 나직한 인사를 건넸다.

 번쩍, 빛기둥이 솟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버논은 디에잇의 오롯한 온기를 감각하며 눈꺼풀을 내렸다.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두 이방인의 품에서 정당하고, 옳고, 바른 세계가 무너지고,

 불온하고, 그릇되고, 비뚤어진 세계가 탄생했다.


합작 링크: https://sfteen.postype.com/post/11417866

후기(+설정 몇 개 추가): https://www.evernote.com/shard/s688/sh/08bd7bbc-12a3-7da2-d712-a5c918e98ca8/18fb0a6694ddebfb202a8ec1b5c1b5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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