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프니까 청춘이다

원찬

사람또사람 - 문제의 시작

 아, 진짜 덥다. 전원우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다리는 절뚝절뚝, 손에는 한쪽 신발이 든 비닐봉지가 달랑달랑, 땀은 삐질삐질. 난리도 아니었다. 어디 교수가 그랬다던데,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청춘 참 가혹하구나.

 전원우는 정형외과에서 전치 3주 판정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새벽에 동기들과 가볍게 술을 먹고 자취방 건물 계단을 오르던 전원우는 쿠당탕 소리와 함께 그대로 자빠졌다. 오죽 큰 소리가 났으면 1층에 사는 주인집 어르신이 무슨 일이냐고 버선발로 뛰쳐나올 정도였다. 자다 깨서 눈도 제대로 못 뜨시는 어르신의 걱정에 죄송함이 먼저 든 전원우는 괜찮습니다, 하고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갔더란다. 집에 들어와 바지를 걷어 보니 무릎에는 시퍼런 멍이, 복사뼈 부근에는 탱탱한 붓기가 차올라 있었다. 제 몸에 무심한 편인 전원우는 며칠 좀 뻐근하고 말겠지 낙관하며 잠에 들었다.

 그런데 일어났더니 발목이 종아리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부어 있었다. 띵띵 부은 발목을 보자마자 어우,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얼음찜질이라도 해야겠는데, 집에 얼음이 있던가. 없으면 먹다 남은 치킨 얼려둔 거라도 잠깐 대고 있어야겠다 생각하며 일어나던 전원우는 다시 쿠당탕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발목이 너무, 너무, 너무너무 아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발목을 잡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전원우는 결국 동기이자 동네 친구 이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학이라고 늘어지게 자던 이지훈이 나른하게 전화를 받아들자마자 전원우가 한 말은.

 "야, 씨발 나 좀 살려줘."

 그렇게 전원우는 이지훈의 부축을 받아 겨우 정형외과에 갔다. 그때까지도 전원우는 제 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상태였다. 파스 정도 붙이라고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발목을 보여주니 의사가 입을 떡 벌렸다.

 "어우, 많이 부었는데요. 엄청 아프셨겠어요."

 전문성 있는 사람이 그러니 덜컥 겁이 났다. 의사가 환부를 누르자마자 입술 새로 끄으... 하는 신음이 기어나왔다. 의사가 일단 초음파 검사를 해보고 물리치료도 받고 가시라고 제안했다. 초음파 검사와 일부 물리치료는 비급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잔뜩 겁먹은 전원우는 통장잔고도 잊은 채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결과 인대를 심하게 다쳐 반깁스를 적어도 3주 착용해야 하며 한동안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나. 눈이 좀 나쁜 거 빼고는 지금껏 크게 다쳐본 일이 없는 전원우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인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거던가. 반깁스를 받아 차면서 군대 가기 전에 다쳤으면 공익 떴을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했다. 전원우는 물리치료까지 다 받고 10만원이 넘는 금액을 플렉스하고 나오면서 살짝 눈물을 흘릴 뻔했다. 사흘마다 물리치료 받으러 오라는데 다시 오기 망설여지는 금액이었다. 실비를 들어놨어야 했는데. 울적하게 핸드폰을 확인하니 동기 단톡방에 카톡이 쌓여 있었다.

 [이지훈: 원우 발목 ㄱㅊ?]

 [문준휘: ?]

 [문준휘: 원우 다쳤어??]

 [이지훈: ㅇㅇ어제 집 들어가다 접질렀대]

 [이지훈: 아까 병원 데려다 줌]

 [권순영: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

 [권순영: 전원우 개꼴았넼ㅋㅋㅋㅋ]

 [권순영: 엥근데 쟤 어제 술 별로 안먹지 않음?]

 권순영 쪼개는 거 봐라. 하필이면 술 먹고 미끄러진 거라 놀림 받기 딱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ㅋㅋㅋ을 연발해대는 동기놈을 보니 짜증이 치솟았다. 전원우는 한 손으로 [나 반깁스함]을 쳐서 보냈다. 권순영은 반깁스라는 단어에 놀랐는지 얼마나 오래 해야 되냐고 심각하게 물었다. 집 가서 답해야지 생각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문준휘: 헐]

 [문준휘: 너 집 되게 높지 않아?]

 그래. 그게 문제였다. 창원의 아들 전원우는 가까운 국립대에 가지 않으면 지원해줄 생각 없다는 부모님의 으름장을 쌩까고 서울로 떠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타지생활하는 자식놈한테 용돈 한 푼 안 주실까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안 주셨다. 단 1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인 건 알고 있어서 불만은 없었다만 쌓여가는 학자금 대출을 보고 있자면 아주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그래도 입대 전에는 기숙사 생활을 해서 괜찮았는데, 제대 후에 복학하려고 하니 기숙사에 시원하게 떨어져 버렸다. 나는 돈만 없는 줄 알았는데 운도 없었네. 졸지에 자취생 신세를 못 면하게 된 전원우는 최대한 저렴한 집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언덕배기 꼭대기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 5층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사람 사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가는 집이었지만 드물게 장점도 있었다. 동기들이 너네 집은 해발고도가 너무 높다며 잘 오지 않았다.

 전원우는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을 쨍하게 비추는 태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재앙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였을까. 집이 조금만 낮은 곳에 있었더라면 언덕을 올라가느라 다리에 힘이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번듯한 건물에 살았더라면 빼곡한 계단을 타다 넘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째 이런저런 가정을 할수록 서글퍼지기만 했다. 전원우는 가난에 대한 책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잡생각을 멈추고 다리를 질질 끌며 경사로를 올랐다.

 열심히 등산하던 전원우는 언덕 중간에 걸쳐 있는 수달마트 앞에서 속도를 낮췄다. 오늘 찬씨가 캐셔하는 날일 텐데. 이제 전원우는 아예 멈춰 서서 마트 안을 기웃거렸다. 유리로 된 자동문 너머 카운터에 노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있다.

 이찬은 나가는 손님에게 안녕히 가세요, 밝게 인사하곤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문밖의 전원우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전원우의 다리에 감긴 반깁스를 보고는 턱을 떨어뜨리며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다리를 가리키면서, '다리'.

 양팔을 브이자로 접고 손바닥을 위로 밀어올리며, '왜?'

 직관적인 제스쳐에 이어 과장되게 입을 뻥긋거리는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전원우는 손날을 세웠다가 가로로 풀썩 넘어뜨리며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무음으로 말했다. 이찬은 속상한 듯 볼을 부풀리고 울상을 지었다.

 이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다시 오르막을 오르던 전원우는 주먹으로 광대를 살살 문질렀다. 밀담하는 내내 솟아 있던 탓에 광대가 아렸다. 전원우는 한가득 걱정을 안고 있던 이찬의 얼굴을 떠올리고 고개 숙여 픽 웃었다. 어쩐지 다리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전원우는 집 바로 앞에 작은 슈퍼가 있음에도 매일같이 수달마트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집 앞 슈퍼보다 싸서였다. 가난한 자취생 전원우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가성비를 따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고, 발품을 팔아가며 손수 비교해본 결과 대부분의 품목이 수달마트가 더 저렴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도 자취 초기까지만 해도 귀찮으면 그냥 집 앞 슈퍼에 가고는 했던 전원우가 수달마트의 충성스러운 단골이 된 건 순전히 그 캐셔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충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와 치약을 사던 어느 날이었다.

 "07,"

 "네에, 전원우님."

 알뜰살뜰하게 포인트 적립을 하려 전화번호 뒷자리를 읊던 전원우가 멈칫했다. 눈 앞에 산뜻한 미소를 띄운 어린 얼굴이 있었다. 캐셔는 포스기에 0717을 입력하고 화면에 뜬 전원우 이름 세 글자에 안도하며 작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맞혔다."

 "..."

 "제가 이름이랑 번호 외운 첫 손님이세요."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는 캐셔의 얼굴에는 한치의 구김도 없었다. 캐셔의 가슴팍에 넓은 간격으로 이찬, 두 음절이 쓰인 명찰이 반짝 빛났다. 전원우는 말간 얼굴과 명찰을 번갈아 보다가 멋쩍게 아, 네... 하고 마트를 뛰어 나왔다.

 전원우는 한동안 수달마트를 가지 않았다. 요새 젊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잖아, 단골이라고 챙겨주면 오히려 발길을 끊는. 전원우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적잖이 낯을 가리는 전원우는 마트에서까지 사회성을 발휘하여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의지가 없었다. 그저 익명의 손님1로 스쳐지나가고 싶은데 일방적으로 이름에 번호까지 털리고 나니 쑥스럽기도 했고. 마트를 갈 때면 항상 세수도 않은 꼬질꼬질한 상태였어서 더 민망스러웠다.

 그런데 한 번 수달마트 물가에 길들여지고 나니 집 앞 슈퍼를 이용할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이거 수달마트에서는 500원이나 싼데. 수달마트는 포인트 적립도 되는데. 끝내 가성비충 자아에 패배하고 만 전원우는 다시 수달마트로 향했다. 단, 이번에는 샤워도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전원우는 마트 가는데 목욕재계까지 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수달마트 앞에 도착한 전원우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슬쩍 내부를 염탐했다. 문제의 캐셔 이찬이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전원우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의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갈 타이밍을 쟀다. 운좋게도 그날은 주말 저녁이라 손님이 많아 카운터 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지금이다. 전원우는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비로소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전원우님."

 잽싸게 들어가던 전원우는 출석이 불리자마자 멈춰 섰다. 삐걱거리며 돌아본 카운터에 손으론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얼굴엔 해사한 웃음을 올리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전원우는,

 "... 안녕하세요."

 맞인사를 해버렸다. 이찬은 입꼬리를 더 끌어 올리며 크게 미소짓더니 금방 고개를 돌리고 다음 분이요, 외쳤다. 전원우는 바쁘게 움직이는 이찬을 물끄러미 보다가 라면 코너를 향해 발을 옮겼다.

 "0717이요."

 "네, 전원우님."

 "..."

 "영수증 버려드릴게요. 안녕히 가세요!"

 ... 끝? 괜한 떨림에 라면 한 봉지 들고 마트 몇 바퀴를 빙빙 돌다 겨우 줄에 합류한 게 무색하게도 계산은 빠르고 간결했다. 계산이 끝났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전원우를 보던 이찬이 의례적인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턱을 까딱, 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아. 전원우는 작은 탄식을 내뱉곤 머쓱하게 마트를 나섰다.

 시발 이 찐따새끼. 전원우는 집에 오자마자 벽에 머리를 쾅 박았다. 난감한 듯 눈을 굴리던 이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 쪽팔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름 외운 첫 손님이라 하여도 전원우는 이찬이 맞이하는 수십, 수백 명의 손님들 중 하나일 뿐이고 포인트 적립을 조금 더 빠르게 해주는 것 이상의 특별 대우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의 응대를 받는 게 그렇게 바라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쫄아서 이런저런 상상을 해대던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됐건 피곤하게 굴지 않던 이찬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는 했다. 이후에 수달마트를 몇 번 더 찾았을 때에도 이찬이 부담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간간이 오늘은 좀 덥네요, 여름이 되려나 봐요, 와 같이 대답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만 건넬 뿐이었다. 번호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건 편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찬이 일방적으로 전원우를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전원우는 수달마트에 들를 때마다 오늘은 이찬이 있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찬의 밝은 성정이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치만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누군가에게 꾸준한 환대를 받는 게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비로소 이 동네에 소속된 듯한 느낌이 들어 들뜨기도 했다. 그렇다. 평생을 내향인으로 살아온 전원우는 살가운 외향인을 어느 정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고, 타인의 이유 없는 친절에 취약했다.

 전원우가 이찬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었다. 이찬은 주중에는 낮 시간대에, 주말에는 늦은 저녁 시간대에 근무한다. 근무 시간을 알아내고자 노력한 건 아니었다. 그저 수달마트를 하도 자주 가는 데다가 갈 때마다 카운터를 흘끗거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된 정보였다.

 그리고 이찬은 항상 웃고 있다. 처음에는 감정 노동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자기 부모님뻘은 되어 보이는 직원에게도 방실방실 웃으며 형 누나 소리를 하는 걸 보니까 원체 곰살맞은 성격인 것도 같았다. 이찬의 웃음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입꼬리를 시원하게 밀어 올리며 햇살처럼 웃는 이찬을 보면 조금 행복해져서, 모든 게 빠르게 변해가는 서울에서 저 웃음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전원우는 일부러 이찬의 근무 시간에 맞추어 마트를 가곤 했다.

 마지막으로, 이찬은 만나는 사람이 있다. 굳이 관찰하지 않더라도 이찬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가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게 전원우가 이찬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한 이유였다. 희번득하게 번쩍이는 반지와 눈이 마주칠 때면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봉투도 하나 주세요."

 "어? 오늘은 안경 안 쓰셨네요?"

 "아, 네."

 "우와. 못 알아볼 뻔 했어요."

 알바 면접 다녀오느라고요. 얼마 전에 과외 하나 짤렸는데 곧 월세 내는 날이라 마음이 급하거든요. 이런 소리를 입 안에 꾹 가두고 그저 인중을 늘리며 웃었다. 묻지도 않은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얼굴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안경 없는 낯을 요리조리 구경하는 이찬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순간 전원우는 렌즈를 끼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 천진하고도 노골적인 시선을 고화질로 마주쳤다가는 필히 당황해버리고 말았으리라. 이찬은 봉투에 물건들을 차곡차곡 넣더니 현란하게 포스기를 눌렀다.

 "봉투값은 빼드릴게요. 서비스."

 이찬이 얼떨떨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전원우의 손에서 카드를 빼갔다. 그리고는 자기 주머니에서 50원을 꺼내더니 포스기에 쏙 넣었다. 마무리는 언제나와 같이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하는 밝은 인사.

 전원우는 묵직한 봉투를 들고 올라가는 내내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자꾸만 비질비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콧잔등을 찡긋하며 소곤거리던 이찬이 동실동실 떠다녔다. 솔직히 이건... 너무 귀엽다. 어떻게 저런 생명체가 다 있지? 사실 그날의 전원우는 샴푸와 세제가 동시에 똑 떨어진 와중에 면접도 잘 풀리지 않아서 다소 울적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달마트에서 나오자마자 언제 우울했냐는 듯 마냥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정말 웃겼다. 이게 뭐라고, 고작 이 봉투가 뭐라고. 전원우의 걸음에 맞추어 봉투가 버석거리는 소리가 발랄하게 울렸다. 집에 도착한 전원우는 이찬이 베푼 50원의 선의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찬장에 고이 넣어 두었다.

 며칠 뒤 전원우는 살 게 딱히 없는데도 수달마트로 달려갔다. 초코우유라도 사먹어야지, 하는 핑계를 대면서.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원우는 그날 미용실을 다녀왔다. 미용실이랑 마트가 뭔 상관이냐고 한다면, 캐셔의 작은 호의에 설레버린 한 손님의 설레발이라고 하겠다. 생각할수록 안경 안 낀 걸 알아봐주었던 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전원우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면서부터 오늘 꼭 찬씨를 봐야지 다짐했더랜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짧게 다듬은 것도 그래서였다. 이찬이 오늘도 알아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전원우는 초코우유 하나를 카운터 위에 슥 밀어두었다. 이찬이 어서오세요, 하면서 바코드를 삑 찍었다. 전원우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찬의 눈치를 살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

 "..."

 "..."

 5초간의 정적. 한껏 올라가 있던 이찬의 입꼬리가 아주 느릿하게, 또 떨떠름하게 내려갔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아, 아뇨. 안녕히 계세요."

 

 황급히 건넨 인사의 마지막 음절이 위로 튀어 올랐다. 하필 이럴 때 삑사리까지 나고 난리야. 허겁지겁 마트를 뛰쳐나온 전원우는 바로 초코우유를 까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굴이 홧홧했다. 내가 뭘 기대한 거지. 전원우는 좀 울고 싶어졌다.

-

 "그니까, 네가 자주 가는 식당 직원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요약하자면 그렇지."

 "원우. 너 바보 되고 싶어?"

 "... 넌 어째 욕할 때 유난히 발음이 좋아지는 것 같다."

 권순영 요약 잘하네. 문준휘는 욕 잘하고. 바닥을 구르던 문준휘가 더-워! 하고 포효했다. 벌떡 일어나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꺾더니 바로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바. 아. 아. 아. 보. 오. 오. 오. 전원우를 놀리듯 '바보'를 말하는 문준휘의 목소리가 선풍기 날개에 달달달달 끊어졌다. 권순영은 침대에 축 늘어져서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야 원우야 제발 에어컨 좀 틀자, 필터 내가 닦아줄까, 울부짖었다. 전원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쪄죽을 정도도 아닌데 뭘. 동기가 실시간으로 쪄죽어가고 있건 말건 전기세 아끼는 게 더 중한 전원우였다.

 권순영과 문준휘는 계절학기 종강했다고 전원우네를 습격해서 뒹굴고 있었다.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나니 남몰래 곯고 있던 고민이 툭 쏟아져 나왔다. 내가 요새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말야. 연애 얘긴 줄 알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빛내던 권순영과 문준휘는 웬 식당 직원 얘기에 김이 팍 샜는지 각각 침대와 바닥에 녹아버렸다. 마트를 식당으로 각색한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 동네에 마트는 몇 없기도 하고, 마트에서 일하는 청년은 더욱 한정적이니까.

 문준휘는 이제 거의 선풍기를 끌어안은 채로 그 직원분은 그저 서비스 정신이 투철했을 뿐인데 네가 딴마음 품고 있는 거 알면 얼마나 부-담! 스럽겠냐, 괜한 짓 하지 말고 적당히 지내라고 유창하게 조언했다. 너 한국어 많이 늘었다. 문준휘가 아랫입술만 내밀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역시 그런가. 수긍하면서 듣다 보니 이상했다. 문준휘는 당연하게 전원우가 친해지고 싶은 직원을 여자라고 상정하는 듯했다. 전원우는 그 사람 남자라고 정정하려다 말았다. 여자든 남자든 크게 달라질 건 없기도 했고, 커플링으로 추정되는 반지가 마음에 걸렸던 건 맞았기에. 문준휘의 일갈을 듣던 권순영이 허허 웃었다.

 "당장 사귀기라도 할 거야? 아니잖아. 그냥 친구하고 싶다는 거 아냐?"

 "얜 사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친해지고 싶어."

 "에이."

 문준휘와 권순영이 동시에 야유했다. 문준휘는 그렇다 쳐도 권순영 너는 내 편 아니었냐. 아니 근데, 순수하게 친해지고 싶다는 게 그렇게 놀릴 일이야? 이 유성애에 미친 놈들아. 그래도 둘의 석연찮은 반응에 자신이 없어져서 무어라 첨언하는 전원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분도 날 이상하게는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단골 손님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또라이가 어딨냐?"

 "내가 그분이 외운 첫 손님이랬어."

 "그게 뭐. 어쩌라고."

 "내가 안경 안 쓴 것도 알아봤고."

 "그건 지나가는 호랑이도 알아보겠다."

 호랑이가 왜 지나가니. 호랑이가 지나가다가 와우 오늘은 안경 안 쓰셨네요, 하면 신고를 해야지. 조목조목 반박하는 권순영에 전원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나름 가까워졌다는 근거가 될만한 일화들만 추출한 거였음에도 남들 눈에는 어느 것도 특별하지 않은가 보았다. 완전히 기가 꺾여버린 전원우는 조심스럽게 마지막 증거를 제출했다.

 "저번에는 봉투도 서비스로..."

 "너 진짜 바보야?"

 참다 못한 문준휘가 또 사자후를 갈겼다. 결국 전원우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와 이 새끼 졸라 답정이네. 헛웃음을 섞어 중얼거리던 권순영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전원우를 곁눈질하고는 마지못해 해결책을 하나 내주었다.

 "먹을 거라도 주면서 말을 터봐. 친해지려면 건덕지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분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어, 초콜릿! 초콜릿 어때. 나 초콜릿 싫어하는 사람 하나도 못 봤어."

 "초콜릿 알러지라도 있으면."

 "..."

 "..."

 "야. 고만해라."

 애써 달래주던 권순영의 인내심마저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초콜릿을 제안했던 문준휘도 몰라 네가 알아서 해! 하고 다시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권순영은 잽싸게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며 문준휘가 빠져나간 선풍기 앞자리를 차지했다. 번갈아가면서 선풍기를 독점하는 것보다 회전모드로 해놓고 모두가 고르게 바람을 쐬는 게 낫지 않나. 그니까 저 바보들이 나한테 바보라고 한 거지. 전원우는 쬐금 심란해지고 말았다.

 바보들의 행진에도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었다. 문준휘 말마따나 상대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친해지고 싶다면 권순영 말대로 뭐라도 해봐야 했다. 그렇게 전원우의 비밀스러운 친해지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단계는 시덥잖은 걸로 말 트기. 2단계는... 안 정했다. 내성적인 전원우로서는 1단계부터 충분히 고역이었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카운터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다가 그냥 돌아오기를 몇 차례, 술을 한 잔 걸친 주말 새벽에야 겨우 용기를 냈다.

 "비가 오네요."

 이찬은 오랜만에 듣는 전원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러게요, 장마인가. 대답했다. 전원우는 뿌듯함에 차오르려는 웃음을 힘겹게 눌렀다. 뭐야,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전원우는 늘 날씨 얘기를 꺼내던 이찬이 떠올랐다. 얕은 관계에 가볍게 이야기하기에 날씨만한 소재가 없다는 걸 이제 알았다.

 그날부터 전원우는 날씨봇처럼 이찬을 볼 때마다 날씨 얘기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슬슬 소재가 고갈되어갔다. 한여름이다 보니 날씨가 매일 비슷했던 탓이었다. 덥거나 비오거나 둘 중에 하나만 골라 예스 올 예스. 백날 오늘은 비가 오네요, 오늘은 좀 덥죠, 같은 소리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전원우는 매일 밤 내일은 날씨가 다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일은 선선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눈이라도 오든가. 아, 한여름에 눈 내리는 건 너무 이상기후인가. 참고로 전원우는 무교다.

 애초에 날씨 얘기도 이찬이 내일도 비 온다는데 우산 꼭 챙겨 다니시라는 등의 말로 대화를 이어주지 않으면 툭툭 끊길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전원우는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되는데. 근데 다음 단계가 뭐지. 전원우는 무슨 미연시 게임이라도 하는 것마냥 어떻게 해야 이찬과의 친밀도를 더 올릴 수 있을지 고뇌했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 고르면 되는 미연시와 달리 이건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주관식이라 더 골치 아팠다.

 전원우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달마트로 향했다. 이제 진짜 할 말이 없다. 날씨는 야속하리만큼 쨍쨍했고 덥다는 말은 그저께 이미 써먹은 레파토리였다. 와중에 바디워시가 동나서 마트를 안 갈 수는 없었다. 조용히 바디워시만 사서 나와야겠다 생각하며 마트에 들어섰는데, 카운터에 노란 머리통이 보였다. 어?

 "염색하셨어요?"

 정확히는 노래진 머리통이었다. 원래 흑갈색이었던 이찬의 머리카락이 거의 백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격적인 변화에 너무 놀라버린 전원우는 자석에 이끌리듯이 쪼르르 카운터로 갔다. 바디워시는 가져오지도 않았다.

 "아 네, 염색은 아니고. 탈색. 기분 전환하려고 함 해봤어요."

 이찬이 왼손으로 바삭하게 얇아진 머리칼 끝을 매만졌다. 그 순간 전원우는 약지에 반짝거리던 반지가 사라진 걸 포착했다. 헤어스타일 변화, 기분 전환, 사라진 커플링. 퍼즐처럼 정황이 맞춰졌다. 전원우는 얼마 전에 동기놈 하나가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엉엉 울었던 걸 기억해냈다. 요새 이별 철인가. 이찬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표정을 띠었다.

 "안 어울리나 싶기도 하구. 괜찮나요?"

 "네. 예쁘네요."

 전원우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제 대답에 놀라 입을 헙 다물었다. 본디 전원우는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심도 있게 따져본 뒤에야 말을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집에 와서야 후회하는 일도 잦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뇌를 거치지 않은 수준이었다. 예쁘다니! 아니 예쁘긴 한데, 예뻐서 예쁘다고 한 거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닥 친하지 않은 사이에 던질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계산하다 한 말도 아니고 노란 머리통을 보고 혼자 반가워서 달려와 한 말이라는 게. 그것도 헤어져서 심란할 사람에게. 졸라 부담스러웠겠지. 큰 실수를 한 기분에 머리끝부터 식은땀이 나며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감사합니다아."

 오만 걱정에 휩싸여있던 전원우의 귀를 산뜻한 대답이 간지럽혔다. 이찬은 헤헤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전원우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몸을 돌려 바디워시 코너로 삐걱삐걱 걸어갔다. 웃음을 참느라 이상하게 구겨진 얼굴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익숙하게 칭찬을 받아드는 이찬에 긴장이 사르르 녹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치, 예쁜 걸 예쁘다고 한 게 뭐 그렇게 부담스러울 일이라고. 자기가 아니라도 타인에게 예쁘다는 말 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정말로 예뻤으니까. 전원우는 바디워시를 고르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하던 이찬을 자꾸 자꾸 떠올렸다.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정말 좋다. 자기가 지금 과도한 의미부여를 해가며 이찬을 신격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전원우였다.

 바디워시 하나를 들고 돌아온 전원우는 카운터 위에 바 초콜릿 하나를 끼워 넣었다. 초콜릿이라도 줘보라던 권순영과 문준휘의 조언이 생각보다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았다. 조언을 들은지 거의 2주가 지나가는데 왜 이제야 실천하냐면, 반지 때문이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있던 반지가 없어진 걸로 봐서 실연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커플링까지 맞출 사이면 깊은 관계였을 것이고. 그런 사람과 헤어져서 슬픈 와중에 일하려면 꽤나 힘들겠구나 짐작한 것이었다. 힘들 땐 단 걸 먹으면 좀 나으니까. 근데 뭐라고 말하면서 주지. 이건 이찬씨 드세요? 이름 부르는 건 좀 그런가. 그쪽 드세요? 정 없어 보이는데. 드세요? 이게 제일 낫겠다. 전원우는 자기가 이렇게까지 소심한 사람이었나 잠깐 생각했다.

 "앗. 잔액 부족이라는데요."

 "어."

 "다른 카드 있으세요?"

 다른 카드... 없다. 근데 벌써 잔액부족이라고? 내 통장에 고작 육천 원이 없어? 허둥대던 전원우는 혹시나 싶어 초콜릿을 빼고 다시 계산해달라 요청했다. 이찬이 카드를 긁더니 계산되셨어요, 낭랑하게 말하며 카드를 돌려주었다.

 전원우는 집으로 걸어가며 은행 앱을 켜서 거래내역을 확인했다. 수달마트에서 야금야금 지출한 내역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최근 이찬과 말을 섞어보겠다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군것질거리를 사제꼈던 게 패착이었다. 한 달치 거래내역을 탐독한 전원우는 큰 소리로 한숨을 짓고 말았다. 내가 다 쓴 게 맞네. 과외비 언제 들어오더라. 당장 내일 굶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사실보다도 아까 이찬에게 초콜릿을 주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나는야 너무나도 거지라서 친구도 못 만든다네요. 간만에 설움이 폭발하는 날이었다.

-

 그렇다면 이찬은 이 수상쩍은 단골 손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마디로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찬이 그렇게 동물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음에도 전원우는 흔히 알려진 고양이의 습성을 그대로 빼닮은 사람이었다. 경계심 많고, 낯 가리고, 조심스러운. 생긴 것도 고양이를 닮은 것도 같았다.

 이쯤에서 이찬을 소개해보자. 이찬, 빠른 스물 셋, 전라북도 익산 출신, 서울살이 2년차. 10대의 이찬은 꿈이고 진로고 아무 생각이 없었고 오직 댄스 동아리에만 열심이었다. 고3 때는 주변 분위기 따라 억지로 샤프를 잡아보기도 했으나 공부는 영 적성이 아니었다. 고졸 딱지를 획득하곤 적당히 취업이 잘된다는 2년제 공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싫은 이찬과 숫자놀이가 잘 맞을 턱이 없었다. 중심도 잃고, 학점도 잃고, 학고 받고 졸업과 멀어지는 착각 속에 방황하던 이찬은 결국 1년만에 휴학을 때려버렸다. 계획에 없던 휴학, 할 게 뭐 있겠는가. 후딱 머리 밀고 군대나 다녀왔다.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가 되어 돌아온 이찬에 부모님은 이젠 맘 잡고 공부 좀 하려나 흐릿한 기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찬이 부모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춤을 추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네가 언젠간 그 소리 할 줄 알았다. 그래도 맨날 엄망아빵 거리던 애가 징그럽게 어머니아버지 소리를 다 하고, 꽤나 진심이기는 한가 보다 싶었다. 부모님이 뒷목을 잡은 건 그 뒤에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서울에 가야겠습니다."

 이찬의 갑작스러운 상경 선언에 집안이 뒤집어졌다. 부모님 눈에는 아직 신생아나 다름없는 귀한 아들이 갑자기 서울 가서 춤을 추겠단다. 서울에 뭐 믿을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익산에서 배울 수 있는 춤은 제한적이라는 것이 사유였다. 얘가 앞으로 뭘 해먹고 살는지 궁금하긴 했어도 크게 속 썩인 적은 없었는데. 아들놈이 한 번 꽂히면 다른 선택지는 쳐다도 안 보는 고집불통인 걸 너무 잘 알고 계셨던 부모님은 이찬의 상경을 허가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아버지는 부산에서 서울로 대학 간 조카, 그러니까 이찬의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을 했다. 찬이가 서울을 가겠단다, 혹시 너랑 같이 살면 안 되겠냐. 조카는 싹싹하게도 아휴, 당연히 되죠. 찬이 제가 잘 챙길게요. 했더란다.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이찬은 제일 먼저 댄스 학원을 등록했다. 크럼프고 락킹이고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 이찬의 열정에 감명받은 강사님이 인맥을 탈탈 털어 작은 스트릿 댄스 크루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이찬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스트릿 댄서가 되었다만,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 서 있는 무명 댄서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연습실 대여비 등 나가는 돈에 비해 들어오는 돈이 택도 없이 적었다. 부모님께 손 벌리기는 싫었던 이찬은 알바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편의점, 뷔페, 영화관 등 이곳저곳 전전하다 수달마트에 정착한 지 어언 4개월. 이찬은 알바가 끝나면 바로 연습실 가서 춤추고, 가끔은 공연도 하고, 어쩌다 보니 사촌 형 친구랑 눈 맞아서 연애도 하며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은 서울살이를 하고 있었다.

 "포인트 적립하시겠,"

 "0717이요."

 낮은 음성이 이찬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눈만 올려 보니 검은 후드 아래로 세상 어둠 다 끌어모은 듯이 버석하게 마른 얼굴이 보였다. 손님은 이찬에게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목례를 건네고는 힘없는 다리를 휘적이며 사라졌다. 와... 겁내 피곤해 보인다잉. 누구신지 몰라도 힘내세요 화이팅. 왠지 응원을 건네게 되는 뒤통수였다.

 그 손님은 매일은 아니더라도 꽤나 자주 들렀다. 수많은 단골들 중에서 그 손님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건, 글쎄. 언제나 먹구름이 가득 낀 얼굴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어째 저분은 활기차 보이는 날이 하나도 없네. 뭐 하는 분일까. 평일 낮에도 오는 걸 보니 직장인은 아닐 테고, 대학생이려나. 나이는 사촌 형 또래쯤? 이찬은 음료 코너 재고를 채우다가 옆에서 우유를 고르는 그 손님을 훔쳐보았다. 엄지로 턱을 받치고 검지로 입술을 매만지며 매대를 살피는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 비교를 하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이 한 곳에서 멈춰 섰다. 곧 길쭉한 손가락이 초코우유를 집어 들었다. 이찬은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해놓고도 미련을 뚝뚝 흘리며 우유 매대를 흘겨보는 손님을 힐끔대다가 급히 눈을 돌렸다. 에구, 너무 쳐다봤다.

 그 손님은 보면 볼수록 신중한 사람이었다. 마트에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물건 하나 달랑 들고 오고는 했으니. 지금 혹시... 핸드워시 하나 고르는 데 10분을 쓰신 건가요? 이찬이라고 엄청 충동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의 꼼꼼함은 신기할 정도긴 했다. 또, 그는 천 원 짜리를 사도 절대로 포인트 적립을 잊지 않았다. 되게 살뜰하네. 그러니까 이찬이 여러모로 인상적인 단골 0717 전원우를 외우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다. 주말 저녁에는 원래 손님이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날은 유난히 붐볐다. 차례차례 계산을 하다가 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 0717이다. 바깥에 진열된 과자를 보는 척 내부를 기웃거리는 전원우는 영락없는 한 마리 고양이였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겨서 이찬은 전원우의 입장을 일부러 큰 소리로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전원우님."

 "... 안녕하세요."

 전원우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들어갔다. 뭔 사람 마주치고 꼬리 부풀리며 도망가는 고양이마냥. 낯을 많이 가리나 보다.

 막상 계산할 땐 별말 않았던 건 나름의 배려였다. 반응이 재밌어서 놀려주고 싶기는 했는데 계속 친한 척을 했다간 다신 안 올 것도 같았다. 그새 내적 친밀감이 상당히 쌓여버린지라 아예 오지 않길 바라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전원우는 꾸준히 수달마트를 방문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오는 듯도 했다. 이찬이 가볍게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게 은근히 투명해서, 자신보다 키가 한참 큰 남자임에도 귀엽다고 슬쩍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이 거대 고양이 같은 남자에게 시시콜콜한 소리를 흘려 놓고 반응을 감상하는 게 요새 이찬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비가 오네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원우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찬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찬이 말을 걸어도 뻐근하게 웃어넘기거나 그렇네요, 네 글자 겨우 쥐어짜내던 게 전부였는데 어느새 역할이 역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얘길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진짜 덥죠, 곧 장마가 끝난대요, 오늘은 습한 게 비가 올 것 같아요. ... 뭐지? 인간 기상청인가? 이찬은 어느덧 그의 날씨 뉴스에 동태눈깔을 하고 아 진짜요? 만 남발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노력해서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전원우는 말했다는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부쩍 편안해 보이는 얼굴에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좋은 일 있나 보네. 다행이다.

 반면 그즈음의 이찬은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찬이 몸담고 있는 크루의 리더가 갑작스러운 탈퇴 선언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춤이나 추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춤이나 추겠다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잔인하고 또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리더가 빠져나가니 당연히 크루는 크게 흔들렸다. 리더 중심이었던 체제를 재편성하는 정도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리더의 탈퇴 사유가 크루원들 마음 깊은 곳에 상흔을 남긴 것이다. 형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이제라도 다른 일 알아봐야 하나, 이런 문장이 써진 말풍선이 크루원들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형, 거짓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이찬은 닿지 않을 원망을 떠난 리더에게 내던졌다.

 천성이 긍정적인 이찬이지만 자신의 불안정한 처지가 더욱 비관적으로 느껴지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크루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실내 공연을 해보기로 했는데 공연장 대관료가 만만찮았다. 그래서 이찬은 연습을 빼고 물류센터 단기 알바를 다녀왔다. 완전히 주객전도였다. 춤추고 싶어 돈을 벌기 시작했던 건데 돈 버는 것 때문에 춤을 못 추는 지경이 되었으니. 연애 사업도 엉망이었다. 현생을 챙기기도 버거운 와중에 연애가 잘 풀릴 리가 없었다. 애인과 매일같이 헤어지네 마네 소리를 해가며 싸우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찬은 불안에 잠식되어갔다.

 "달이 참 밝네요."

 "네?"

 별안간 마트를 울리는 중저음에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전원우였다.

 "오늘 달이요. 진짜 크고,"

 "..."

 "예뻐요."

 뜬금없이 웬 달. 평소와 같은 날씨 얘기의 연장선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목소리에 폭신하게 깃든 설렘이라든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그날따라 안경 너머의 긴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퇴근하던 이찬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원우 말대로 크고 밝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오랜만에 보는 것도 같았다. 요새 집, 연습실, 알바만 오가느라 쉴 틈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으니까. 이찬이 바삐 놀리던 발을 멈춰 세웠다. 정말 예쁘다.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전화번호 뒷자리뿐인 남자에게 낭만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이찬은 그날 아주 오랫동안 달을 보며 서 있었다.

-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과외 두 탕을 뛰고 귀가하던 전원우는 목을 빼고 자취방 건물 앞 화단을 보았다. 화단 가득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오리였던 게 언제 이렇게 활짝 폈대. 화단 가꾸기는 주인집 어르신의 취미인 듯했다. 계절마다 바꿔 심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정성으로 집도 보수 공사를 해주시면 좋을 텐데. 어쨌건 추레한 건물 앞을 장식한 해바라기는 이질적이지만 예뻤다. 멍하니 해바라기를 구경하던 전원우는 네이버에 '해바라기 개화시기'를 검색해보았다. 8월~9월이면... 대충 8월 말쯤이라는 건가. 엥? 벌써 8월 말이야? 말도 안 된다. 날짜를 보니 정말 8월 말이었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이듯 해바라기의 꽃말은 개강이구나. 해바라기를 보고 행복하기도 전에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개강이 실감나고 말았다.

 방에 도착한 전원우는 냉동실에 수북히 쌓인 아이스팩들 중 하나를 꺼내 발목 위에 올렸다. 아이스팩은 어제 이찬이 준 거였다. 마트에 온 전원우를 반기던 이찬은 반깁스를 보자마자 예의 울상을 지어 보였다.

 "깁스 언제까지 해야 한대요?"

 "3주는 해야 한다더라고요."

 "에궁... 여름인데 고생스러우시겠어요. 앗, 잠시만요!"

 그러고는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원우는 안절부절못하며 텅 빈 카운터 앞을 지켰다. 그새 손님이 오면 어쩌나, 두리번두리번, 왔다리갔다리. 머지 않아 이찬이 양손 가득 아이스팩을 들고 돌아왔다.

 "창고에서 슬쩍해왔어요. 이걸로 찜질하세요."

 "어, 감사합니다."

 이찬이 전원우의 손에 아이스팩을 와르르 쏟았다. 어림짐작으로 세어도 다섯 개는 족히 넘어 보였다. 슬쩍한 것치고는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방실방실 웃는 낯에 한 개만 있어도 돼요, 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전원우네 냉장고 냉동실은 아이스팩으로 꽉 차고 말았다.

 얼음찜질을 하는 전원우의 머릿속에 아이스팩을 한아름 들고 있던 이찬이 그려졌다. 꼭 사냥에 성공한 수달 같았지. 혹시 수달마트 이름이 찬씨를 보고 지은 건가. 그러면 찬씨는 마트 주인장의 아들? 어쩐지 서비스 정신이 남다르더라. 방학이라고 부모님 일 돕나 보네. 전원우는 싹 다 틀려먹은 추리를 하면서 폰효자 이찬을 기특해했다.

 목 말라... 자다 깬 전원우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물을 찾았다. 빈 생수병이 손에 부딪혀 댕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전원우는 반깁스를 차고 일어나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빈 병만 몇 개 굴러다닐 뿐 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꼭 이럴 때 물이 떨어지지. 전원우는 고민에 빠졌다. 내려가서 수달마트에서 사올 것인가, 집 앞 슈퍼에서 살 것인가. 상황상으로는 슈퍼가 옳은 선택이겠지만 수달마트를 가기로 했다. 왜냐면 이찬의 근무 시간이니까. 전원우는 물세수를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길을 떠났다.

 "저기 아이시스 2리터짜리 6개 묶음 가져갈게요."

 "네에."

 이찬이 삑삑삑 포스기를 누르곤 카드를 싹 긁었다. 전원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물을 챙겨 들었다. 평소였으면 거뜬히 들었을 텐데 아픈 다리 탓에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찬은 비틀거리는 전원우를 마뜩잖게 노려보았다. 어째 불안불안하다. 전에 보니까 언덕쪽으로 올라가던데,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한 친절한 캐셔 이찬이 카운터를 박차고 나가 전원우의 옆에 따라붙었다. 전원우는 갑자기 제 손 위에 얹어진 또 다른 체온에 화들짝 놀랐다.

 "전원우님. 집까지 걸어가시죠?"

 "네? 네."

 "제가 갖다 드릴게요."

 "네? 아, 아뇨..."

 "누나, 나 배달! 카운터 잠깐 봐줘요."

 어엉, 찬이 다녀와, 하는 대답이 멀리서 들려왔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전원우가 어리바리 까는 사이 이찬이 작은 기합을 넣으며 물을 번쩍 들었다. 전원우는 잔뜩 쩔쩔매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찬을 졸졸 쫓아갔다.

 "정말 괜찮은데..."

 "아니에요. 보는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그러면 같이 들어요."

 "음, 아뇨. 그게 더 힘들 것 같아요."

 완벽한 철벽 방어였다. 상냥하게 웃으면서 거절하니까 뭔 말을 못하겠다. 찬씨 몰랐는데 단호한 면이 있으시네... 전원우는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찬과 친해지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신세지는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열린 것처럼 식은 땀이 줄줄 났다. 죄송해서 어떡하지. 이 와중에 카운터 너머로만 보던 사람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는 게 대단히 새로웠다. 전원우는 시야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한 이찬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새 까만 뿌리가 제법 자라 있었다. 노란 머리칼과 속눈썹 한올 한올이 Full HD 1080p로 보였다. 으악, 진짜 가깝다. 괜히 긴장이 되고 맥박이 빨라졌다.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친해질 기회구나. 억지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진정 우연한 순간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 준비되지 않은 때에 찾아온 게 문제였다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될 것 같았다. 전원우는 뭔 말을 할지 머리를 팽글팽글 굴렸다.

 "그... 찬씨도 이 근처 사세요?"

 "네. 사촌 형이랑 같이 살아요."

 "오, 제 친구도 사촌이랑 살던데."

 "정말요? 그런 집이 또 있구나."

 그대로 대화가 뚝 끊겼다. 전원우는 이찬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고 더 말을 붙일 생각을 접었다. 여름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지 날이 지나치게 더웠다. 하늘이시여, 어제 제가 내일은 시원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정말 너무하시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슬슬 전원우도 힘들어서 정적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건물이에요."

 "어. 여기 사셨어요?"

 이찬이 자취방 건물 바로 앞에 있는 슈퍼를 보고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찔려버린 전원우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더듬더듬 변명했다. 수, 수달마트가 훨씬 싸더라고요. 글킨 하죠. 이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슈퍼에서 시선을 거뒀다. 일단 표면적으론 별 의심을 하지 않는 듯 보여 다행이었지만,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연신 펄떡거렸다.

 이찬이 건물 문 앞에 물을 털썩 내려놓았다. 전원우가 카드키로 공동현관을 여는 동안 이찬은 티셔츠를 잡아 펄럭이며 땀을 식혔다.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손님 혼자 보냈으면 맘 불편할 뻔했네. 몇 층이에요?"

 "아, 들고 올라가는 건 제가 할게요."

 "계단에서 넘어져서 다치신 거잖아요."

 "..."

 "갑시다."

 "아뇨아뇨아뇨!"

 전원우가 다급하게 온몸을 던져 문을 가로막았다. 착지할 때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이 욱신거렸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다시 물을 든 이찬이 전원우를 뚫고 건물 내부로 진입하려 벼르고 있었다. 이찬이 왼쪽으로 휙, 하면 전원우도 휙, 왼쪽을 막았고. 오른쪽으로 휙, 하면 또 오른쪽을 휙, 막았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좌 우 좌 좌 우 레프트 앤 라이트. 몇 분간 이어지던 요상한 대치는 전원우가 이찬에게서 물을 빼앗음으로써 종결되었다. 전원우는 컬링을 하듯 물을 계단 앞에 쓱 밀어 넣어두고 이찬의 양어깨를 꽈악 잡았다. 

 "여기계단이진짜가파르거든요엘리베이터도없고요여기까지갖다주신것만으로충분히감사해요."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어... 알겠으니까 숨 좀 쉬세요. 갑자기 극구 만류 랩을 하는 전원우에 이찬은 완전히 벙쪄버렸다. 이렇게 말을 빨리 할 수 있는 분이셨어? 얼굴까지 시뻘개져서는 여즉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전원우가 어쩐지 필사적이라 도저히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찬이 네 알겠어요, 하자 전원우가 참았던 숨을 크게 뱉었다. 경사를 오르랴 이찬을 막으랴 가쁘게 차오른 숨이 불규칙하게 쏟아져 나왔다. 젠장, 쪽팔려. 과하게 날것의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줄을 몰랐다.

 전원우는 아직 자기 손이 이찬의 어깨 위에 있단 걸 퍼뜩 의식했다. 몸에 전체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너무 세게 잡고 있었다. 전원우가 천천히 손힘을 풀면서 어깨에서 손을 뗐다. 미세하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찬이 싱긋 웃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망했다, 전원우는 직감했다.

 "그럼 가볼게요. 언넝 나으시구요."

 "어, 네..."

 "... 어? 이거 뭐예요?"

 전원우는 쿨하게 가겠다는 이찬에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함에 민망함까지 겹쳐버린 탓이었다.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여, 널 붙잡기엔 내가 너무 바본갑다. 안녕... 전원우는 집에 들어가면 바로 벽에 머리를 들이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서서 가던 이찬이 돌연 화단에 바짝 붙었다.

 "우와, 해바라기다! 저 해바라기 실제로 처음 봐요."

 "..."

 "진짜 예쁘다... 덕분에 이런 구경도 해보네요."

 요리조리 해바라기를 구경하느라 좌우로 기울어지는 이찬의 뒷모습을 보던 전원우가 조심스레 그 옆에 섰다. 해바라기를 보는 이찬의 두 눈이 호기심과 경외로 가득 차 반짝였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이찬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즐거움이 우러 나왔다.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옆으로 벌어졌다. 전원우는 해바라기를 저가 심은 것도 아니면서 무한한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전원우님 보면 해바라기가 떠오를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전원우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찬을 보면 해바라기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고. 그도 그럴 것이 이찬의 노란 머리카락과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는 해바라기와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전원우는 아주 잠깐 누가 꽃인지 모르겠다는 느끼한 생각도 했다.

 전원우가 시선을 해바라기에 고정한 채로 나지막하게 이찬을 불렀다. 찬씨. 이찬이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제가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

 "엥? 에이, 아니에요."

 "너무 죄송하고 고마워서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사드리게 해주세요."

 이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부터 필요 이상으로 절박하게 구는 전원우가 웃기고 귀여웠다. 진짜 투명하다니까. 막상 전원우는 이찬이 왜 저리 빵 터진지 잘 모르겠어서 얼떨떨하게 눈을 굴릴 뿐이었다. 실컷 소리 내어 웃은 이찬은 양손을 허리에 짚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뭐, 제가 특별히 밥 살 기회를 드릴게요."

 선심 쓰듯 말하는 통에 하마터면 감사하다고 할 뻔했다. 턱까지 치켜든 이찬은 제법 거만한 표정이었지만 전원우의 눈에는, 뭐랄까. 그저 한 마리 뱁새 같았다.

 "단, 원우님 다리 다 나으면요."

 "..."

 "꼭 같이 밥 먹어요 우리."

 그 순간 따뜻한 바람이 휭 불어 오며 이찬의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화사하게 웃는 이찬의 뒤로 해바라기가 그림 같이 펼쳐졌다. 전원우도 이찬을 따라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우는 이찬이 떠나간 화단 앞에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다친 발목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대박. 밥 먹기로 했다.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해바라기 사이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웃던 이찬의 잔상이 함께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프기를 잘했다. 아닌가, 다 나아야 밥 먹겠다 했으니 아프기를 못한 건가. 애초에 아파서 잘될 게 있나. 하지만 만약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행운은 없었을 것 같다. 아, 빨리 낫고 싶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병원을 가야겠다. 물리치료도 받고 하루빨리 건강해져야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해져야지. 3주? 내가 1주 안에 낫는 기적을 보여주겠어.

 전원우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문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제는 기성 세대의 기만의 상징으로 꼽히는 문장이지만 오늘따라 그리 밉게 생각되지 않았다. 뭐, 아프니까 청춘이 오긴 했네. 책은 안 읽어봐서 뭔 내용인진 모르겠다만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전원우가 손가락으로 해바라기 꽃잎을 톡 건드렸다. 둥실둥실 나부끼던 해바라기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전원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청춘이라면, 좀 아파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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