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솔] 팬이 아냐! & 팬이 맞아!

팬이 아냐!

잇솔

♪ 익스 - TV star

 [디에잇 -양도 -포카 -교환 -분철 -럭드 -판매 -제시...]

 최한솔은 오늘도 서치를 한다. 사유 1, 그새 목격담이라도 떴을까 봐. 사유 2, 다른 팬들의 주접을 보고 싶어서. 사유 3, 그냥 형 보려고. 그러나 그의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악플.

 [디에잇 간잽했는데 유사러 먹금하는 거 보고 좀 정떨ㅋ;]

 최한솔이 이를 뿌득 갈며(물론 마음이 그렇다는 거고, 제3자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트윗을 꾸욱 눌렀다. 위아래로 촤르륵 펼쳐지는 타래. 대화 상대는 역시나 비공개 계정이다. 어떤 놈인가 보자. 트윗주 인장을 눌러 바이오를 보니 역시나 타돌팬(추정)이다. 최한솔이 메인트에 떡하니 걸려있는 익명질문함에 들어가 장문의 글을 우다다닥 써내렸다.

 [님 혹시 어쩔써방이 뭔지 아심? 모를 거임 당연함 방금 내가 만듦. 어쩌라고 가서 써방이나 해. 너 혹시... 뭐 돼? 그렇게 디에잇 잘알이시면 디에잇 나무위키나 갱신해주시든가요; 유사 처먹으려고 덕질하는 사람이 있다? 디에잇식 팬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후략)]

 전송 버튼까지 올라간 엄지가 멈칫. 최한솔은 저가 쓴 명문-이라기엔 어그로 안 끌어본 티가 난다만, 모르는 척해주기로 하자-을 두어 번 읽어보곤 그냥 창을 나가버렸다. 불현듯 이성이 돌아온 탓이었다. 짧지 않은 덕질로 미루어보건대 이런 분풀이성 글은 갈겨봤자 판에 해가 되면 됐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몹시 합리적인 결론이었으나 콧구멍에서 쒹쒹 분출되는 숨은 막을 길이 없다. 곧장 디에잇의 인스타 알림이 뜨지만 않았어도 한참 동안 트윗주를 저주했을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최한솔은 디에잇의 팬이다. 것도 꽤나 뜨거운 팬. 최한솔이 좋아 죽는 디에잇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에서 비보이로 활동하다 캐스팅되어 한국 활동을 시작한 지 어언 3년차, 최근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냄에 따라 개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천재(이건 최한솔의 사견이다) 아이돌이시다. 그리 밀어주는 멤버라곤 할 수 없었던 디에잇이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계기로 크게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비보이 출신다운 현란한 춤. 둘째는 독보적인 패션 감각. 셋째는 특유의 촌철살인 화법. 의외로 셋째 사유로 말려든 팬들이 꽤 있었다. 한 예능에 나가서 무례하게 구는 남자 패널들을 쿨하게 먹금해버린 게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언어의 서툶으로 생겨난 일화인지라 마냥 좋아만 하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었지만, 평소 그 패널들이 불편하게 구는 일이 많았어서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많았더랜다.

 그래서 최한솔은 뭘로 입덕했냐. 셋 중 무엇도 아니었다.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최한솔은 실제 인간에 큰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덕질을 해도 작품 속 캐릭터나 작품을 빨지, 현실의 인간을 덕질해본 일은 없었다. 드물게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창작자로서의 인간, 그러니까 그 사람의 세계관을 좋아할 뿐이었다. 그런 최한솔이 처음으로 인간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게 디에잇이었다.

 계기는 사소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터넷을 둘러보던 최한솔은 한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인성갑 아이돌 오늘자 발언.twt]. 라이브 방송 중에 팬의 고민 상담성 댓글을 읽고 성심성의껏 답변해주는 부분의 클립과 디에잇의 평소 언행을 한데 모아둔 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업 의도가 선명한 글이었다. 근데 그 영업에 제대로 걸려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최한솔이다.

 자고로 덕통사고란 예상치 못한 때에 당하는 법이다. 당시 최한솔은 딱히 헛헛하지도, 넘쳐나는 사랑을 쏟을 데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름 모를 팬의 고민이 한때 최한솔이 품었던 것과 무척 닮아 있었고, 당시 최한솔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디에잇이 똑같이 했다. 그 순간 최한솔이 떠올린 질문은 이렇다. 이 사람 뭐야?

 최한솔은 아주 기막힌 연이라고, 운명이 형과 나를 맺어준 게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 커뮤니티를 잘 보지도 않는 사람이 친구가 준 유머글 링크를 타고 타고 가다가 관심도 없던 아이돌에게 도달해 입덕에 이른 것이 운명이 아니면 뭐냔 말이다. 본디 입덕은 착각으로 시작된다. 너와 나는 특별하다는 착각 말이다. 무튼 아무리 흔해 빠진 계기래도 당사자에게는 고유한 경험으로 남기 마련이다. 곧장 나무위키부터 시작해 디에잇의 궤적을 쭉 밟던 최한솔은 순식간에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오. 스타일리쉬하네? 옷 잘 입는 사람은 호감이지. 비보이 출신이라고? 헐, 나 이 노래 되게 좋아하는데 이거에 맞춰서 춤춘 적이 있다고? 대박이네. 그림도 그려? 나 원래 예술하는 사람 좋아해. 우리 부모님도 그림 그리시잖아...

 어떻게든 끼워 맞춰 공통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보다. 벅찬 마음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거다. 어느 순간부터 최한솔은 접점을 찾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접점을 만들고 있었다. 디에잇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개구리 인형을 제 가방에도 달고 다니고, 디에잇이 본 영화를 보고, 디에잇이 좋아한다는 음악을 듣고, 디에잇이 입는 옷을 사 입었다. 아예 새로운 취미도 들였다. 차 마시기. 그래봤자 티백을 담갔다 뺀 물을 마시는 정도라 디에잇처럼 제대로 된 다도를 즐긴 건 아니었지만서도, 좋았다. 공통분모가 늘어갈수록 그와 연결되는 것만 같았다. 가끔 명호 형은 왜 이런 걸 좋아하지? 싶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재밌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몰랐던 나를 알아가면서 최종적으로 내 세계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최한솔은 전례 없는 충만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즐겁고 행복했다. 디에잇을 좋아해서, 디에잇 덕분에. 최한솔은 행복했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으나, 어느덧 최한솔은 디에잇을 명호 형-디에잇의 본명은 서명호다-이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속으로만. 입덕하고 약 한 달 뒤, 최한솔은 트위터를 시작했다. 보아하니 정보를 얻기에는 트위터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유명한 팬 계정들을 몇 개 팔로우한, 소위 구독계를 판 최한솔은 디에잇이 너무 좋을 때마다 '명호 형'이 들어간 주접 트윗을 써 갈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트위터 새내기 최한솔은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는 법조차 알지 못했고... 언젠가부터 트윗마다 인용이 적게는 세 개, 많게는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근데 눌러 보면 죄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 기현상이 그저 오류인 줄 알았던 최한솔은 나중에 비계 인용이라는 것의 존재와 함의를 알고 심히 당황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최한솔은 곧장 '트위터 비공개 전환'을 검색해서 계정에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혹시나 해서 아예 새 계정을 만들었더니 그간 코빼기도 안 비치던 계정들이 서치창에 잘만 뜨는 걸 봤을 때는 슬프기까지 했다. 원래 새로운 곳의 규범을 학습하는 데엔 뼈아픈 실패가 수반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기가 죽진 않았다. 최한솔은 굳세게 혼자만의 덕질을 이어나갔다. 뭐 같이 덕질하는 친구가 있어본 적이 있어야 혼자가 외로운 줄도 알 것이 아닌가. 최한솔은 나름의 방식으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 나름의 방식이라 함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속도전. 최한솔은 디에잇의 인스타에 알림이 뜨면 첫빠로 하트를 누르려 하고(성공해본 적은 없다), 누구보다 빠르게 댓글을 달았다(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글에 '반사'라 단다든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지만 쏠쏠한 즐거움이 있었다. 둘째, 정보전. 최한솔은 정보 수집욕이 있었다. 특히나 사람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 성격적인 면보다는 좋아하는 음식, 방문한 식당, 선호하는 브랜드 등과 같이 객관적인 정보들을 알고 싶어 했다. 남들이 모르는 걸 자신은 안다는 것은 최한솔에게 충분한 자족감을 주었다. 가끔은 자부심으로까지 넘어가 너희는 명호 형이 닭고기 좋아하는 거 모르지? 하며 다른 팬들을 몰래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정보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게 되었을 무렵, 드디어 공개 계정을 팠다. 계정명은 '8fashion'. 디에잇이 입은 옷 정보를 정리하는 정보계였다. 여러 카테고리 중 패션을 택한 건 여타 팬 계정과 차별점을 둘 수 있을 만큼 최한솔이 빠삭한 분야가 패션이라서였다. '8fashion'은 오랫동안 꾸준하게 운영됐다. 가끔 다른 계정보다 업로드가 늦거든 진심으로 열이 뻗쳐 잠 못 든 밤이 수두룩하다는 건 최한솔만 아는 비밀이다.

 이렇듯, 태어나기를 느리고 느긋한 최한솔은 디에잇을 사랑할 때에만 민첩하고 치열했다. 원래 사랑은 사람을 바꿔 놓는 법이라지만 지나친 변신이기는 했다. 최한솔이 천성을 거스르고 이토록 열심일 수 있었던 동력은 친밀감에 있었다. 디에잇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그와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 친밀감은 나날이 몸을 불려 실은 일방적인 사이임에도 쌍방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원래 아이돌 산업이 그 환상감을 팔아먹고 산다는 걸 초짜 팬 최한솔은 전혀 알지 못했더랜다.

 어찌 됐건. 최한솔은 뜨거운 덕질을 이어나갔으나 철저히 안방 덕후에 머물렀다. 학교는 안 다니지만 일단은 미성년자라 활동이 제한적이기도 했고. 실물을 본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나중에 콘서트나 한 번 가면 그만이지 싶었다. 그렇게 욕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최한솔은 뜻밖의 계를 타게 된다.

 디에잇을 영접했다. 간만에 친구를 만나 놀다가 귀가하던 길이었다. 지하철 칸 안에 서서 휴대폰만 뒤적이던 최한솔은 익숙한 향을 맡고 고개를 들었다. 디에잇이 즐겨 바른다 하여 올리브영에서 시향해봤던 그 향수 냄새였다. 시선이 닿은 곳에 익숙한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며칠 전에 최한솔을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날밤 까게 했던 디에잇의 보세 사복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명호 형인가? 명호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최한솔은 저와 디에잇(추정)을 실은 지하철이 역 다섯 개를 지나치도록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겨우 심장을 붙들어 매고서는 휴대폰을 꺼내 홀드를 풀었다. 하필 명호 형이 자기랑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있다는 게 통 믿기질 않아 검증이 필요했다. 트위터에 '디에잇 지하철', '디에잇 목격담' 등을 쳐보아도 아무것도 뜨지 않는 걸 확인한 최한솔은 카메라 앱을 켰다. 그리고 그를 후경으로 하여 최대한 자연스럽게 셀카를 찍었다. 손이 벌벌 떨리는 바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흔들린 사진 몇 장을 버리고, 마침내 딱 한 장을 건졌다. 최한솔은 그에게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몸을 웅크려 화면을 숨기며 방금 찍은 사진을 확대했다. 마스크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분명히 디에잇이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 씌워진 케이스가 얼마전에 최한솔이 아카이브했던 디에잇의 케이스와 일치했다. 드디어 확신을 얻은 최한솔이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문이 열렸고, 디에잇은 지하철에서 내려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최한솔은 잠깐 자기가 선 채로 졸았나 의심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실제로 집에 돌아와 샤워하기 직전 뜬 인스타 스토리 알림을 누르기 전까지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디에잇이 인스타 스토리에 지하철 셀카를 올렸다. 아까 그 사람의 착장 그대로 입은 셀카를. 더 놀라운 건, 셀카에 최한솔이 나왔다. 몸의 반의 반쪽만 걸쳐 나와 최한솔과 웬만큼 가까운 지인도 못 알아볼 수준이었지만, 최한솔은 알 수 있었다. 저건 나다.

 최한솔은 헐벗은 채로 우두커니 서서 화면만 보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명호 형이 맞았구나. 내가 명호 형을 봤구나. 명호 형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셨구나... 까지 생각하고 문득 뻐렁친 최한솔은 냅다 스토리 답장을 보냈다.

 [형 저거 뒤에 저예요]

 [2호선 맞죠]

 오죽 뻐렁쳤으면 덕질용 인스타로 계정 전환하는 것도 까먹었다. 당연히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한솔은 대략 한 시간 동안 스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나체로 한 시간을 서 있었다는 얘기다.

 신기했다. 아까 말도 못 건 게 억울하기도 전에, 신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명호 형도 알면 깜짝 놀랄 것이었다. 바로 옆에 내 팬이 있었다고? 하고 말이다.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직접 말해주고, 놀라는 디에잇의 얼굴을 직관하고 싶었다. 최한솔은 끝내 어떤 결심을 하고 마는데...

 팬싸인회를 넣어볼까?

 그러나 독고다이 안방 덕후 최한솔은 팬싸라는 걸 도통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랜덤 뽑기로 당첨되는 거라기엔 맨날 가는 사람만 가는 것 같던데... 고뇌하던 최한솔은 일단 앨범을 샀다. 열 장이나 샀다. 딴에는 엄청 많이 산 거였다. 일단 최한솔은 안정된 수입원이 있을 리 만무한 열아홉이었고, 포카 욕심이 없는 편이라 앨범이 나와도 버전별로 한 장씩만 사고 마는 가성비 팬이었다. 이렇게 많이 샀는데 하나쯤은 붙겠지? 최한솔은 당첨자 발표일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물론 떨어졌다. 최한솔은 '미당첨' 세 글자를 노려보다가 오류인가 싶어 거듭 새로고침을 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맥이 빠졌다. 솔직히... 기대했다. 아니 그러면 팬싸는 대체 누가 가는 거야? 역시 운인가? 최한솔은 그제서야 '팬싸인회 가는 법', '팬싸 당첨 후기' 등을 서치하기 시작했다. 쭉 보니까 팬싸컷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팬싸컷? 그게 뭔데 씹덕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서치해 보니 디에잇이 속한 그룹의 팬싸컷을 알려주겠다는 계정이 나왔다. 디엠을 보냈더니 웬 계좌번호가 돌아왔다. 뭔... 이런 걸 돈 받고 알려줘? 불만스러웠지만 얌전히 돈을 보냈다. 얼마 뒤, 답장이 왔다. 순식간에 최한솔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숫자였다. 0 하나 실수로 더 붙인 거 아냐? 눈을 벅벅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았다. 허위정보이길 바랐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꼴랑 열 장으론 택도 없었던 것이다.

 최한솔은 영겁의 시간 동안 고민했다. 형 한 번 보겠다고 이 정도 돈을 지불하는 게 맞나? 형이 그 정도 가치가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너무 비싼데? 계산해 보니 그간 저축한 세뱃돈과 용돈을 싹싹 긁어모아도 차마 비비지도 못할 금액이었다. 결국 최한솔은…알바몬을 켰다. 부모님께 받은 보호자 동의서(집에만 있기 지겨워서 알바를 해보려 한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써주셔서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를 들고 무려 물류 센터로 향했다. 신체 건장한 남자가 급전 땡기기에 물류 알바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최한솔은 겁나 많은 택배를 이고 지고 옮겼다. 쉬는 날 없이 2주를 내리 일하는 바람에 골병 나기 직전, 돈이 모였다. 최한솔은 팬싸컷을 아슬하게 넘기는 수량의 앨범을 주문하고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지구야 미안해...

 정말 다행히도, 팬싸에 당첨됐다. 최한솔은 진짜로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앞서 봤던 세 글자에서 '미' 하나 빠졌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종일 붕방붕방 들떠 있던 최한솔은 한밤중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팬싸에서는 보통 뭘 하지? 최한솔은 다른 사람들이 남긴 팬싸 후기를 열심히 찾아보면서 공부했다. 팬싸인회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질문을 준비해가는 편이 좋겠군.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신선한 게 뭐가 있지. 음... 생각 안 난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명호 형에게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본격적으로 질문하려니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최한솔은 질문 준비에 며칠 밤을 더 새워야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팬싸 당일이 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최한솔은 비장하게 팬싸 장소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에잇 손민수템으로 무장하고, 어깨에는 개구리 인형이 달린 가방을 메고, 속으로는 디에잇에게 던질 질문들을 중얼중얼 되뇌었다. 드디어 장내로 들어선 최한솔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 척(왠지 초짜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느긋하게 걸어가 착석했다. 다른 팬들이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이 정돈 예상 범위 안에 있어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최한솔의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가 모두 들어찼다. 하릴없이 팔짱을 끼고 정면을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쿡 찔러왔다.

 "저기요. 혹시 명호 팬이세요?"

 돌아보니 엄청나게 거대한 카메라를 허벅지에 올린 여성이 있었다. 최한솔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 가방에 달린 개구리 인형을 가리켰다.

 "네. 보시다시피."

 "맞띔하실래요?"

 "그게 뭐예요?"

 그 여성분은 잠시 최한솔을 응시하다가는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최한솔도 입술을 삐죽이며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최한솔에게 다시 말을 거는 일은 팬싸가 끝날 때까지 없었다.

 몇 분이 더 지나고, 미묘하게 조명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었다. 나도 찍을까? 최한솔은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말기로 했다. 사진이야 홈마들이 찍어줄 테고, 눈에 담는 걸로 충분하겠지 싶었다. 이내 단상 오른켠에서 멤버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디에잇은 맨 끝자락에 있었다. 우왕, 명호 형이당. 최한솔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박수로 반겼다. 디에잇을 포함한 멤버들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디에잇이 오른쪽 끝에 앉는 바람에 왼쪽 끝에 앉은 최한솔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괜찮았다. 어디에 있든지간에 최한솔의 눈에는 디에잇만 보였으므로.

 팬들을 응대하는 디에잇을 감상하다 보니 최한솔의 차례가 왔다. 최한솔은 직원의 안내를 따라 최대한 의젓하게 움직였다.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었다. 처음 느낀 심장의 속도가... 정신없이 다른 멤버들에게 싸인을 받고 또 받다 보니 디에잇의 차례였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디에잇이 길게 입매를 늘리고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최한솔은 머릿속이 새하얘짐을 느꼈다. 침착해야 돼, 침착해. 최한솔은 디에잇의 앞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원래 내 팔다리가 이렇게 삐걱거렸나?

 "안녕하세요오..."

 "안녕하세요."

 헐.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맨날 모니터로만 보던 사람이 정말 코앞에 있었다. 잘하면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에잇이 살아있다니? 디에잇이 내 눈앞에 현존하다니? 전에도 마주치긴 했지만 아이돌스럽게 꾸민 디에잇은 실물로 처음 보는 거라 색달랐다. 이 맛에 팬싸 오는구나 싶고...

 "처음 온 거죠?"

 "네?"

 "내 팬 같은데, 모르는 얼굴이라서요."

 디에잇이 최한솔의 상의를 손가락으로 콕 가리켰다. 자기 사복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아. 최한솔은 약간 띨빵한 소릴 내고서는 허겁지겁 답했다.

 "네, 네... 처음 왔어요."

 "반가워요. 이름이 뭐예요?"

 "최.한.솔.입니다."

 "한솔-. 이름 예쁘네요."

 최한솔은 또박또박 'To. 한솔'을 적는 디에잇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형이 내 이름을 부르다니. 내 이름을 쓰다니! 고작 이거에 흥분할 줄은 몰랐다. 최한솔은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 짓다가 퍼뜩 소기의 목표를 떠올렸다. 온몸에 파스 붙여가며 택배 실어 나를 결심을 했던 이유를.

 "저, 예전에 인스타 스토리에..."

 "뭐라고요?"

 "예전에 인, 스타 스토리에 올, 리셨던 사, 진에 제가 나, 온 적 있어, 요."

 ... 나 왜 이렇게 비와이처럼 말하지? 최한솔은 첫코를 단단히 잘못 꿰었음을 직감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디에잇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사진이요?"

 "그, 한달전쯤에지하철안에서찍으신거요. 셀카인데, 이옷, 아니이거아니다. 다른옷입고마스크끼고계시던거..."

 지금은 왜 또 아웃사이더처럼 말하지? 하도 빨리 말했더니 숨이 딸려 정신이 살짝 혼미해질 정도였다. 최한솔은 배경에 아주아주 조금 걸친 거긴 한데 그게 자기였다고 횡설수설 덧붙였다. 아니 변명은 왜 해? 이쯤 되니 걍... 울고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망한 것 같았다. 이런 최한솔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에잇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선 열심히 싸인을 하고 있었다. 앨범에 무어라 끼적이다가도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프로 아이돌의 애티튜드도 갖추셨겠다.

 "진짜? 그 사진에 나왔어요?"

 "네."

 "신기하네요. 말을 걸지."

 "저도 나중에 알아서, 그때 디엠도 보냈는데."

 "그랬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미지근한 반응이 돌아왔다. 어? 최한솔은 당황했다. 분명 혼자 방구석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이런 반응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김없이 당황해버렸다. 그래서 싸인을 마친 디에잇이 질문을 기다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디에잇은 꾹 다물린 최한솔의 입매를 보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최한솔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때 디에잇은 귀여워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귀여울 만도 했다. 누가 봐도 어린애가 바짝 긴장해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그런데 최한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답했다.

 "집에서요...?"

 디에잇은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 표정을 포착한 최한솔은 되려 더 긴장해버렸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겨우 웃음을 수습한 디에잇이 대화를 이었다.

 "응. 집에서 왔구나.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여, 열아홉 살이요."

 "힘들 때네요. 공부 열심히 해요."

 형 저 학교 안 다녀서 별로 안 힘들어요... 라 답하려 했으나 너무 TMI인가 싶어 관두기로 했다. 곧 저쪽에서 이동하실게요, 하는 안내가 들려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최한솔의 눈앞에 불쑥 웬 새끼손가락이 나타났다. 디에잇의 손이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어, 네."

 "약속."

 얼떨결에 새끼손가락을 걸어버린 최한솔이었다. 디에잇은 최한솔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을 단단히 얽고서 엄지로 지장까지 찍은 뒤에야 손을 놔주었다.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듯한 제 어린 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도 해주었으나, 막상 최한솔은 헐레벌떡 내려가느라 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최한솔은 말 그대로 몸져누웠다. 받은 앨범을 풀어보지도 않고 죙일 베개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마음이... 괴로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대화도 나누고, 손도 잡았으니 행복해야 마땅한데 가슴은 싱숭생숭하기만 했다. 이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현타. 제대로 현타가 왔다. 우선 쪽팔렸다. 어린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디에잇이 자꾸만 생각났고, 그때마다 최한솔은 임종을 맞고 싶어졌다. 오히려 서툰 티를 냈으면 나았을까? 귀여운 아기 팬 컨셉으로? 괜히 긴장 안 한 척하려다 더 긴장해버렸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해간 질문도 하나도 던지지 못했고. 형이 묻는 말에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힘겹게 얻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진정 최한솔을 우울에 빠뜨린 다른 이유가 있었다. 디에잇이 멀게 느껴졌다. 팬싸인회에서 마주한 디에잇은 너무나도 노련하고 친절한 어른이자 프로 아이돌이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프로페셔널하면 좋은 건데, 좋아야 하는데... 최한솔은 속상했다.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여유롭게 인사하던 디에잇에게서는 빛이 났다. 그에 비해 자기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당장 뿅 하고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아마 디에잇은 자기 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면 나에게서 긍정적 energy를 받아가라지 않았냐며 아주 경을 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최한솔도 머리론 알고 있었다. 연예인과 팬 사이의 거리감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적정 거리를 두는 게 더 건강하다. 하지만 막상 실감하고 나니 달랐다. 때론 친한 형 같이도 보였던 디에잇이 이제는 몹시 낯설기만 했다.

 여러 번 본 팬들과 친근하게 대화하던 디에잇도 최한솔에게는 당혹스러운 형상이었다. 나보다 형을 자주 보는 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과연 내가 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나? 내가 모르고, 절대로 알 수 없는 형이 얼마나 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덕질할 힘이 안 났다. 최한솔의 덕질을 지탱하던 거대한 축-친밀감-이 손쉽게도 무너져내린 것이다.

 나한테 형은 너무 큰 사람인데, 형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최한솔은 더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유치하고 찌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 후로 디에잇만 보면 팬싸 날이 자동으로 함께 연상되며 민망함과 생경함과 괴로움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그게 통 감당이 안 돼서 점차 디에잇을 안 보게 됐다. 그에 따라 '8fashion'의 업로드도 뜸해져갔다.

 트위터를 하루에 한 번도 잘 안 들어가게 되었을 무렵, 최한솔은 방 구석탱이에다가 종이봉투째로 처박아놨던 싸인 앨범을 펼쳤다. 팬싸 날 이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아 종이가 빳빳했다. 한장 두장 넘기던 손이 당연하단 듯 디에잇의 페이지를 찾아냈다. 뜻밖에도, 이름과 싸인 외에 한 마디가 더 쓰여 있었다.

 '다음에는 꼭 인사해요!'

 최한솔은 손끝으로 디에잇이 남긴 추신을 쓰다듬었다. 이제 와 만진다고 해서 글자가 번질 리도 없는데 손길이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최한솔은 눈에 새기듯 추신을 읽고 또 읽었다. 다음에는 꼭 인사하라고. 형과 나에게 다음이 있을까.

 최한솔이 앨범을 덮었다. 앨범을 한 번 꼬옥 끌어안은 뒤, 책꽂이 한켠에 조심스레 꽂아 넣었다. 형, 저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렇게 최한솔은 디에잇을 탈덕했다.

-

 그것이 무려 5년 전의 일이다. 최한솔은 지금도 덕질을 한다. 하지만 대상이 아이돌은 아니었다. 이제 최한솔은 아예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을 덕질했다. 해외 연예인이라든가, 브랜드 디자이너라든가. 수집욕 또한 여전했다. 다만 예전만큼 열렬하진 못했다. 그때 받은 상처가 크기도 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

 스물넷의 최한솔은 음악을 한다. 보다 구체적으론, 버논(Vernon)이라는 이름을 달고 비트 메이커로서 유튜브에서 활동한다. 꿈꾼 대로의 삶이었다. 중2 때의 자퇴도 음악을 배우려고 한 거였으니. 3년차 비트 메이커 버논은 이름만 대면 알 정도의 대중성은 없었으나, 업계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 확실히 그에게는 업계에 먹힐 만한 매력이 있었다. 첫째는 한결같음이요, 둘째는 다양성이겠다.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가치인가 싶은데, 그걸 해냈다. 버논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뚝심 있게 밀어붙이면서도 여러 장르로 폭넓게 변주할 줄 알았다. 실제로 다양한 아티스트들에게서 꾸준히 작업 의뢰가 들어오는 덕분에 최한솔은 이메일 수신함을 확인하는 걸로 아침을 열었다.

 [플*디* 엔터테인먼트 - 곡 작업 문의 메일 드립니다.]

 ... 응? 가장 최근에 온 메일에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왜 익숙하지? 최한솔은 눈을 부비며 기억을 더듬었다. 플*디* 엔터테인먼트가 어디더라... 아!

 디에잇이 있던 소속사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그룹 전체가 재계약했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우리 형이 의리 하나는 끝내주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있었다. 이제 최한솔은 굳이 찾아보지는 않더라도 종종 포털 메인 같은 데서 디에잇이나 소속 그룹의 이름이 보이면 눌러 보기는 했다. 한동안 민망해서 부러 피해다닐 때도 있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난 덕분인지 기분 좋게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나쁘게 기억해봤자 최한솔만 손해였다. 살면서 제일 열정적으로 좋아한 사람이기도 했고, 디에잇의 잘못으로 탈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플*디* 정도 규모(최한솔이 덕질할 때만 해도 중소였으나, 대형 기획사에 인수되고 제법 커졌다는 소문을 들었다)의 엔터테인먼트에서 의뢰가 오다니. 주로 언더씬 뮤지션들과 작업을 해온 최한솔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자 좋은 기회였다. 주저없이 메일을 눌렀다.

 [Vernon 님께.

 안녕하세요, 플*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당사 소속 아티스트 THE 8(디에잇)의 솔로 앨범에 수록될 노래의 작업을 의뢰드리고자 합니다.]

 ... 까지 읽고 최한솔은 휴대폰을 침대에 덮어버렸다. 잠깐만. 명호 형 솔로 나와? 5년이 지났는데도 첫째로 든 생각 꼬라지가 그랬다. 최한솔의 기억 속 디에잇은 욕심이 많았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를 즐겼고, 실행력도 좋아 뭐든 배우면 쫙쫙 흡수해서 얼마 뒤에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뱉는 천재 아이돌이셨다. 그렇게나 다채로운 사람이었던 만큼 솔로를 낸다면 어떤 컨셉일지 짐작도 안 됐다. 아씨, 궁금해. 호기심을 못 이긴 최한솔이 휴대폰을 들었다... 가 다시 덮었다.

 진-짜 잠깐만. 나보고 형 노래를 만들라고? 보통은 제일 먼저 할 생각을 이제야 하고 자빠졌다. 그제서야 심장이 미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내가, 무려, 명호 형의 첫 솔로 앨범에 들어갈 노래를 만든다고? 이게 말이 되나? 저절로 올라간 손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입에서는 흐아아아, 매가리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꿈이라면 깨어나. 빨리! 급기야 스스로 뺨을 후려치려던 최한솔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언젠가 디에잇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얌전히 손을 내렸다. 그래. 이건 일이다. 나는 프로고, 명호 형도 프로고. 프로로서 협업해보자는 거야. 촌스럽게 굴지 말자. 벽을 보며 자기 암시를 한 끝에 비로소 용기가 난 최한솔이 다시금 메일로 눈을 돌렸다.

 인사 멘트 이후에는 개략적인 아티스트 소개와 앨범 컨셉이 쓰여 있었다. 어디 보자. 테마가 '꿈'이라고. 형답다... 애써 차분하게 읽어내려가던 중, 후반부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티스트의 의지가 강한 관계로, 기타 세부 사항은 직접 조율하고자 합니다.]

 직접 조율? 무슨 의미지? 아티스트의 의지는 또 뭔 얘긴지 모르겠다. 하여간 소속사들 말을 참 이상하게 한다니까. 아무튼, 들어온 의뢰를 거절할 까닭이 없다. 최한솔은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천장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머리가 얼얼했다. 무언가 큰 폭풍이 몰아치고 간 것 같았다. 어릴 적 좋아했던 아이돌과의 공동 작업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근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앞으로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좋을까? 애초에, 왜 나에게 연락했을까? 내 작업물은 어쨌건 힙합 베이스인데. 형한테 어울리려나...

 갑자기 최한솔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잘하고 싶어졌다. 디에잇한테 기깔나는 비트를 뽑아주고 싶어졌다. 청춘의 일부를 기꺼이 바쳤던 이의 음악적 도전에 누가 되지 않을 만한, 아니. 그걸로는 모자라다. 세계 최고의 비트를 찍어주고 싶어졌다. 최한솔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작업실에 출근하기 위함이었다. 가슴에 출처 모를 의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며칠 뒤, 최한솔은 '직접 조율'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최한솔이 눈앞의 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친숙한 정경 앞에 화려한 듯 수수한 디자인의 티셔츠에 대놓고 화려한 바지를 받쳐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누추한 동네에 귀한 분이... 마치 인물만 누끼 따다 붙여놓은 것마냥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와우. 명호 형이... 내 작업실 앞에 있네?

 "... 안녕하세요."

 "저, 연락 드렸던..."

 "오우, 네. 들어오세요."

 최한솔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남자, 다시 말해 디에잇은 문을 잡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최한솔은 먼저 신발을 벗고 앞서 들어가며 생각했다. 원래 내 팔다리가 이렇게 삐걱거렸나?

 디에잇이 올 것은 알고 있었다. 그야 연락을 받았으니까. 메일 답장을 보내고 몇 시간 뒤, 소속사 측에서 전화가 왔다. 참여하실 앨범은 아티스트가 주도적으로 프로듀싱에 관여하고 있고, 각 곡의 작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만들어나가길 원하시는데 괜찮으시냐고. 그리 물어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감이 나질 않아서 되도록 작곡가분이 가장 편하신 장소에서 만나길 바라신다는 말에 작업실 주소를 줄줄 불었더랜다. 추가적인 통화로 첫 만남 날을 확정 지어놓고도 현실감이 없었다. 범접할 수 없게만 보였던, 그래서 결국 탈덕까지 하게 했던 이가 자길 보겠다고 직접 행차하신다는 게... 평생 접한 어떤 픽션보다도 판타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판타지가 아니었다. 지금 제 코딱지만한 작업실에 버젓이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은 디에잇이 맞았다. 최한솔은 심각한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디에잇에게 줄 물을 따르면서도 정신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와중에 예전에 디에잇이 찬물을 마시면 바로 배탈이 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뜨거운 물을 섞어 미온수를 만들어냈다. 이걸 기억하네. 어느 것 하나 황당하지 않은 게 없었다.

 자리에 돌아온 최한솔은 디에잇의 앞에 컵을 놓고서 그 맞은편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디에잇은 단정하게 인사하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탁. 컵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입가의 물을 손등으로 훔쳐낸 디에잇이 최한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눈.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디에잇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버논입니다."

 "..."

 "..."

 "팬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네. 저도 팬..."

 형이 내 팬? 이라는 사실에 감격하기 전에 최한솔은 뱉은 말을 수습해야 됐다. 일로 만난 마당에 열성팬이었던 과거까지 까발릴 필요가 없다. 당시의 감정이 많이 풍화됐다 한들 당사자에게 고하기는 쑥스러운 일화기도 했고. 아무래도 숨겨야겠다. 짧은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렸다.

 "... 은 아니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 팬 아니에요?"

 "네. 절대 아닙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 또 뭐 잘못 말했나? 최한솔이 눈치를 살피는 사이, 디에잇이 눈썹을 살짝 추켜 올렸다가 뻑적지근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부정하시네요. 서운하게."

 "어... 오.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그리곤 해사하게 웃는 것이었다. 순간 최한솔의 가슴에 파도가 쳤다. 5년 전과 다름 없는 미소였다. 그때 최한솔은 언뜻 서늘해 보이는 디에잇이 웃기만 하면 확 따스한 인상이 되는 게 참 좋았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폴더를 만들어 웃는 디에잇의 사진들을 따로 모아둘 정도였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얼굴을 오랜만에 보자니 조건반사처럼 안면에 열이 쭉 올랐다. 큰일났다... 최한솔이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렀다.

 이후에는 작업 얘기가 이어졌다. 디에잇은 앨범의 전반적인 컨셉과 생각해둔 이미지를 상세히 브리핑했다. 그리곤 타이틀이 밝은 분위기의 댄스곡일 예정이라 그와 겹치지만 않는다면 어떤 무드든 괜찮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한솔은 디에잇이 하는 말을 성실히 받아 적었다. 종이에 아예 코를 박고선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엄청나게 집중해서는 아녔다. 그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최한솔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진지하게 음악 얘기를 하는 디에잇이 너무... 고자극이었다. 위험했다. 고작 목소리 좀 들었다고 진작 사그라든 줄로 알았던 덕심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일을 대하는 신중한 자세는 최한솔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디에잇의 여러 모먼트들 중 하나였다. 자칫하면 미친 오타쿠 모드로 돌아가 정신 놓고 주접을 떨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최한솔은, 덤덤함을 (꽤나 잘)가장했으나, 중간중간 마음을 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는 버논 씨 음악이 좋아서 연락드린 거라서, 제 말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원래 스타일대로 편하게 작업하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생각 다른 거는 앞으로 같이 얘기하면서 맞춰가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맞춰서 짜볼게요."

 "고맙습니다. 버논 씨는 본명이 뭐예요?"

 "네?"

 "본명이 버논이에요?"

 "아아. 아뇨. 최.한.솔.입니다."

 "한솔-. 이름 예쁘네요."

 데자뷰였다. 최한솔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형, 이건 반칙이지... 최한솔이 더 눌릴 데도 없는 모자를 꾸욱 눌러 쓰는 동안, 디에잇은 평온하게도 일정 정리를 시작했다. 덕분에 이미 이것저것 휘갈겨서 여백이 없는 지면으로 다시 도피할 구실을 얻은 최한솔이었다.

 디에잇은 이후 일정까지 픽스한 뒤에야 떠났다. 스케줄이 있어 슬슬 일어나야겠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디에잇은 최한솔이 양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하니 부드럽게 웃었다. 최한솔은 제발 웃지 좀 마시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심장 떨어질 것 같으니까.

 최한솔은 짐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는 디에잇을 어정쩡하게 따라갔다. 복잡하게 생긴 신발을 신은 디에잇이 반 바퀴 돌아 최한솔과 눈을 맞췄다. 그럼 버논 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도..."

 "또 만나요."

 그리곤 휭 나가버렸다. 최한솔은 디에잇이 사라진 현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작업실에 그가 남기고 간 우드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향수 취향 안 변했구나. 가까스로 자리로 돌아와 앉은 최한솔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환기는 않기로 했다.

 디에잇은 수차례 더 작업실을 방문했다. 그러려니 하고 오는 대로 받아들이던 최한솔은 다섯 번째로 디에잇을 맞이할 즈음에야 의구심을 품었다. 원래 이렇게 자주 만나나? 여태 해온 작업들과 프로세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실로 지금까지는 대강 컨셉과 원하는 무드, 레퍼런스를 보내주면 그에 맞춰 비트 찍어주고 이메일로 컨펌 받고 수정하는 정도가 다였다. 세세한 거 하나하나를 굳이 작업실 컴퓨터로 직접 듣고야 마는 케이스는 디에잇이 유일했다. 물론 디에잇은 작업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늘상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금방 자리를 떴는데, 그게 진짜 의아한 포인트였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까지 대면 접촉을 지속할 이유가 뭐냔 말이다. 보다 못해 바쁘시면 메일로 보내드리겠다고도 해봤다. 하지만 디에잇은 극구 사양하며 텍스트로만 소통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해서 이편을 선호한다고 했다. 최한솔은 그때 내심 감복했다. 역시 우리 명호 형. 뭐 하나 대충 하는 게 없어. 예나 지금이나 멋진 사람이다.

 자주 봐선지 처음의 긴장감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작업이 만족스럽게 흘러가거든 디에잇은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요청했는데, 그에 삐그덕대지 않고 응하게 됐다는 것만으로 장족의 발전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디에잇이 대뜸 의자 뒤로 다가와서 거의 끌어안는 자세로 함께 화면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됐다.

 "버논 씨는 쉴 때 보통 뭐해요?"

 거듭되는 만남 동안 일만 하진 않았다. 디에잇은 종종 사적인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라포를 쌓으려는 건가?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디에잇은 수상하게 발이 넓었다. 접점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의 친분이 밝혀지기도 부지기수라 도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했었는데 이런 사소한 인연들도 소중히 해서 그런가 보았다. 최한솔은 시간이 나면 보통은 영화를 보고, 가끔 온라인 루미큐브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루미큐브도 디에잇이 할 줄 안다 그래서 시작했던 거였다.

 "저도 루미큐브 할 줄 아는데. 나중에 저랑도 해요."

 "오. 좋죠."

 나 방금 자연스러웠다. 최한솔은 몰래 안도했다. 처음보단 덜하다곤 해도 말을 할 때마다 괜스레 의식하게 되기는 했다. 최한솔이 제 옆의 디에잇에게로 눈을 돌렸다. 디에잇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여 최한솔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한테도 물어봐 달라는 건가...?

 "디에잇 씨는. 취미 있으세요?"

 "저는 취미 좀 많은데."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영화 보기, 전시 보기, 등산, 요가, 명상... 디에잇이 제 취미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요가 빼고는 다 아는 거였다. 최한솔은 이렇게, 5년 전과 다르지 않은 디에잇의 어떤 면들을 마주할 때면 묘하게 들뜨곤 했다. 한때의 명잘알 부심이 충족되는 느낌이랄까.

 "주변에 명상하는 사람 있어요?"

 "네?"

 "다른 분들은 취미가 명상이라고 하면 놀라던데."

 "..."

 "아니면, 알고 있었어요?"

 오싹 소름이 올라왔다.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껏 둘러댄 말이 제가 듣기에도 어설펐다. 디에잇은 어버버거리는 최한솔을 빤히 보다가 살풋 웃었다. 이따금씩 이렇게 최한솔만 아는 스릴이 둘을 에워쌀 때가 있었다. 목이 탄 최한솔이 물을 찾아 책상을 더듬거렸다. 디에잇이 제 컵을 최한솔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최한솔은 그걸 또 냉큼 받아 마셨다. 근데 우리 언제부터 나란히 앉았더라.

 디에잇의 성실한 방문 덕에 작업은 얼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자잘한 수정 외에는 크게 손볼 데가 없었다. 곧 이 시간도 끝이 나겠구나. 마침내 최종 파일이 나오고, 최한솔은 디에잇과 함께한 나날들을 떠올리며 그와 빚은 멜로디를 듣고 또 들었다. 어째 시원섭섭...

 해야 하는데? 디에잇이 섭섭할 틈을 안 줬다. 계속 왔다는 소리다. 한창 작업을 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더니 디에잇이 서 있었다. 최한솔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어제 최종 파일을 보냈는데? 심지어 손에는 웬 기다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바빠요?"

 "아니요?"

 나 뭐래? 최한솔은 바빴다. 그간 디에잇의 곡 작업에 매진하느라 다른 일거리를 미뤄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은 주인의 처지를 개무시하고 제멋대로 즉답했다. 아니 근데, 명호 형이 왔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냐고. 아닌가? 거절할 수 있나? 아, 잘 모르겠다. 와중에 디에잇은 박스를 흔들며 말했다.

 "좋은 술을 얻어서."

 얼씨구. 이젠 일하는 척도 안 하시겠다. 뻔뻔해, 당당해, 기막혀. 그러나 여기서 가장 얼척없는 사람은 괜춘 내일 밤 새면 그만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작업실에 디에잇을 들이고 있는 최한솔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디에잇은 불시에 찾아왔다. 덕분에 최한솔은 띄엄띄엄 작업실에 들르던 과거를 청산하고 매일매일 출석 도장을 찍는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자기가 없는 날에 왔다가 헛걸음할 디에잇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안 좋았으니까. 디에잇은 자기 때문에 졸지에 허슬러가 되어버린 어떤 비트 메이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지런히 놀러 왔다. 도리어 점점 더 빈번히 오는 듯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똑똑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불쑥 눈앞에 꽃다발이 나타났다.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최한솔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다행히 프리저브드 플라워였다. 최한솔은 다시 한발 앞으로 나가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오는 길에 예뻐서 샀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것이다. 최한솔은 어이가 없었다. 집주인 다 되셨네. 디에잇은 작업실 입성 즉시 그 좁은 공간을 구석구석 누비며 벽면을 살폈다. 꽃다발을 걸어둘 자리가 있나 가늠하는 것 같았다. 최한솔은 그 뒤에 멍청하게 서서 바싹 마른 푸른색 꽃잎을 내려다보았다. 어... 이거는, 좀.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예요?"

 "연예인이 팬이랑 사귀... 기도 하나요?"

 플러팅... 아닌가? 바쁘게 움직이던 디에잇이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부자연스러운 타이밍에 던져진 부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최한솔도 왜 하필 저런 질문을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이 있지는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디에잇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비스듬하게 섰다. 날카롭게 선 눈매나, 길게 뻗은 몸선의 예술성이 상당했다. 와, 간지 미쳤네... 최한솔은 아무래도 자기가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예계 소문 같은 거가 알고 싶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뭐,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

 "근데 저는 팬분들이랑은 안 만나요."

 역시나. 최한솔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여전히 단호하구나. 바로 그 점이 좋았던 거지만서도 허탈한 건 왜일까.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지?"

 "어... 그게,"

 "어차피 우리는 팬으로 만난 거 아니잖아요?"

 ...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깜짝 놀라 크게 트인 두 눈에 빙글빙글 여유롭게 웃는 디에잇이 담겼다. 최한솔은 오래간만에 울고 싶어졌다. 형, 이러시면 저 오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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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단순히 음악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한창 솔로 앨범을 구상하던 때에 디에잇은 음악이란 음악은 닥치는 대로 다 찾아 듣고 있었다. 타이틀은 무난하게 잘하는 걸로 하되, 수록곡에서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고 싶어 고민이 많았다. 늘 힙합에 열망이 있어왔던지라 적어도 한 곡은 힙합 베이스의 빠른 곡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범위를 좁히고 검색하던 중에 버논을 만났다.

 버논의 음악은 독특한 맛이 있었다. 정형화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모든 비트와 멜로디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가는데도 다 듣고 나면 특정 부분이 귀에 맴돌았다. 그런 걸 보면 대중적인 후크도 잘 만들 듯했다. 음악 재밌게 하시네. 어떤 분이실까? 궁금증이 든 디에잇이 버논의 인스타를 찾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디에잇은 포트폴리오로 가득한 피드를 넘기다가 무심코 디엠을 눌렀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가 제게 보낸 디엠을.

 [형 저거 뒤에 저예요]

 [2호선 맞죠]

 5년 전에 올린 스토리에 대한 답장이었다. 이거 뭐야? 스크롤을 쭉 올려 보니 그즈음에 올렸던 스토리들에 그가 이모지로 답장한 내역이 주르륵 펼쳐졌다. 뭐야, 내 팬이야? 의외의 인연에 헛웃음이 절로 났다. 그때, 디에잇의 귓가에 웬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디엠도 보냈는데.

 어. 이거 누구지? 기억이 날락말락했다. 팬분인 것 같은데. 아마도 팬싸인회에서... 지하철 셀카에 자기 나왔다고. 되게 어린 남자애가...

 헐. 걔야?

 디에잇은 곧장 버논의 프로필로 돌아가 피드를 밀어 내렸다. 줄창 이어지는 홍보성 게시물 가운데에 버논으로 추정되는 인물 사진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그 글로 들어가 냅다 사진을 확대했다. 검은 비니를 쓰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 위로 어렴풋한 기억 속 어린 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와, 맞네. 적잖은 세월이 흐른 만큼 어린 티를 벗긴 했어도 그때 얼굴이 남아 있었다. 그 친구가 이렇게 컸어? 신기했다. 자기가 뭐라고 벌벌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애가 그새 다 커서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그것도 제법 잘한다는 게.

 디에잇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버논의 인스타를 구경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로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를 도맡은 형이었다. 신호음은 몇 번 가지 않고 끊겼다.

 "어, 형."

 궁금했다. 어떻게 지냈어? 음악은 언제부터 했어? 무엇을 보고 들었기에 이런 재밌는 곡을 만들게 됐어? 혹시 네 음악에 내 영향도 있어? 내 어떤 점이 좋았어? 그날 이후 왜 다시는 볼 수 없었어? 지금은 나 안 좋아해?

 이제는, 내 팬이 아냐?

 그래. 그렇다면...

 "나 같이 작업하고 싶은 분을 찾았어."

 이번에는 내가 너의 팬으로 찾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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