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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솔

사고 및 부상에 대한 언급 있음

"그래서 너희는 무슨 사이야?"

이건 정말이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데. 라고 최한솔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정의하는 걸 좋아했다.

최한솔이 여태 살아오면서 느낀 바에 의하면 그렇다.

익숙한 개념들로 세계를 분리하고, 새로운 자극을 그 분류에 끼워 맞추고. 그 분류 안에 들어가면 마음의 안정을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 가며 살아간다. 이걸 설명하는 무슨 심리학 개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십 대 초반에 들은 교양 강의 교수님의 목소리가 불현듯 지나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지식은 많은 명시적 지식이 그렇듯 종강을 하자 곧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최한솔에게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배운 게 없거나 이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그 개념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이것도 다 똑같은 건데 왜 사람들은 그 쉬운 걸 모를까.

사실 사람들이 그러는 게 최한솔이 알 바는 아니다. 실제로도 일반적으로는 신경을 잘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게 타인에게까지, 정확히 말해 한솔에게까지 뻗칠 때는 좀 곤란해졌다. 나는 이렇게 분류되는 걸 즐기지 않는데.

그래. 다 좋다고 치자. 그럼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오자. 살면서 온갖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상으로 수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언제 들어도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게 대상이 누구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서명호와 최한솔은 무슨 사이인가? 이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최한솔은 홀로 고뇌에 빠졌다.

"그냥 친구야."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대답을 시도해 봤다.

"무슨 친구가 그래? 야, 너네 그거 그냥 친구 아니다? 내가 장담해."

그들이 가진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배경지식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평가했을 때 최한솔의 대답은 거짓말, 혹은 변명, 취급을 받았다. 엄밀히 말해 서명호와 최한솔은 친구 이상으로 스스로를 정의한 적 없기에 그냥 친구인 게 맞는데도.

거짓말을 한다고 저를 비난하는 말들을 들으며 한솔은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냥 대답해달라는 건 핑계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한솔이라는 명백한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하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정에 대한 확신을 바랬다. 자신이 생각한 게 틀렸을 거란 생각을 하기 싫어서 당사자를 의심하는 지경이라니 이게 뭐람.

물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세상은 원래 애매모호한 건데도, 그 애매모호함에까지 ‘썸’ 같은 이름을 붙여 가면서 수치화하고 정리하고 유형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들에게 서명호와 최한솔은 그냥 있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풀어야 할 문제였다. 그 궁금증을 추구하는 데 있어 둘의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질문 자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과는 별개로, 최한솔이 생각하기에도 이게 솔직하지 않은 대답인 건 맞았다. 서명호와 최한솔이 '그냥 친구'는 아니었다.

왜 아니냐고? '그냥'은 뭐고 '친구'는 뭐냐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돌아갈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지금 한솔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서명호를 같은 반열에 둘 수는 없다. 다른 사람과는 가질 수 없고 서명호와만 나눌 수 있는 어떤 특별함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지만 서명호는 그런 부재로 설명된다기보다는, 그보다 한솔에게 조금 더 특별한, 아니, 조금 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럼 일반적으로 그런 관계를, 독점적이고 특별하며,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 놓는 특별한 관계를 칭하는 말이 있지. 그리고 최한솔도 어쨌든 사람들과 부대끼며 2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 왔기 때문에 자신과 서명호의 관계가 ‘무엇‘처럼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이 질문을 하는 의도도.

최한솔은 설명 방식을 바꿔 봤다.

"우리 사귀는 사이야."

"우와, 역시 그렇지? 고백은 누가 언제 했어?"

그런 거는... 한 적 없는데.

듣고 싶은 대답이 정해져 있으니 그걸 한 번 꺼내 본 적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 딸려오는 질문들에 또 사실대로 고하면 그건 사귀는 게 아니지! 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끔은 최한솔이 서명호를 상대로 음침한 상상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마냥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던져지기도 했다. 그건 솔직히 억울했다. 아닌데. 우리 관계는 분명히 상호적인데. 다른 거야 그렇다 치겠지만 이 오해는 조금 아팠다.

그렇지만 또 왜 그러는지 이해는 갔다.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정의하는 데에는 거기에 응당 따르는 기대와 사회적 통념들이 있었다. 사귄다고 말한다면 사회가 말하는 '사귐'에 부합해야 하니까. 썸타는 과정을 거쳐 고백을 하고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어서 데이트하고 뽀뽀하고 키스하고 어쩌면 섹스도 하고 그 모든 걸 다른 사람과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고...

그런데 최한솔과 서명호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완전히 아닌 건 또 아닌데, 또 완전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안 맞았다.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둘이 고백하고 사귀자고 약속한 사이는 아니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최한솔이 굳이 굳이 사귄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던 거겠지. 그니까 사귄다고 둘러대면 '역시 그렇구나!'라는 반응이 돌아오긴 하는데 사귄다는 행위에 대한 필요조건을 만족하지 못해서 사귀는 건 아니라는 결론이 난다. 사귄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진짜 사귄다고 말만 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그럼 뭐가 남지?

아무 사이 아니야? 이건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 이런저런 미디어에서 ‘아무 사이’인 사람들이 그 관계를 애써 부정하려고 들 때 쓰는 말이라 어차피 첫 번째와 똑같은 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서명호와 최한솔이 아무 사이도 아닐 수가 있는가. 함께 나눈 시간과 추억과 생각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둘이 같이 살고 있는데 최소한 동거인이자 친구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한때는 일 적 파트너이자…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는데. 어떻게 아무 사이가 아닌가.

그런 식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럼 어디에 맞는 건지 애써 찾아보다 보면,

"그냥 사이야."

돌고 돌아 이곳에 도달한다. 아무 의미도 담고 있지 않지만,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는 말. 여러 가지 대답을 시도해 봤지만 역시 이게 최선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부족한 정보값을 채워서 아무렇게나 해석하곤 했으니까. (최한솔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시도하고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많은 구설수를 일으킨 줄은 몰랐다)

여전히 그게 다냐며 야유하고 진실을 말해달라고 설득하려고 드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거짓된 건 없었기에 최한솔은 나름 만족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정의하고 분류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최한솔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어서 정의하고 분류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정확하지 않은 분류에 냅다 끼워맞출 생각이 없을 뿐이지. 좋은 정의를 찾을 때까지는 고민해봐야겠지만.

사이. [1]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공간. 또는 한 물체에서 다른 한 물체까지의 공간. [2] 서로 맺은 관계. 일정한 관계들로 이루어진 사람들 가운데. 또는 그런 조직이나 사회의 내부. [2] 번 정의를 사용하는 상황이라면, 통상적 의미는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Relationship이라는 번역이 적절하겠으나 한솔은 그 단어를 직역하면 Between이 된다는 걸 퍽 좋아했다. 번역가로서 직역은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Between A and B. 어떤 사람들의 ‘관계’라는 것은 그 사람들 ‘사이’의 틈이 어떻게 정의되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한 명만 있어서는 만들 수 없고, 둘이나 그 이상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 세 명의 사람이 있을 때는 A와 B, B와 C, C와 A 간의 세 가지 관계뿐만 아니라 세 명이 함께 있을 때 만들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시너지까지 포함할 거고, 사람이 더 많아지면 그 경우의 수도 늘어난다. 그럼 A와 B의 사이는 둘이 있을 때, 셋이 있을 때, 넷이 있을 때... 이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고 합쳐야만 진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어떤 상태로 수렴하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 피부색도 스펙트럼이고 인종도 스펙트럼이고 성 정체성도 로맨틱 정체성도 뇌가 작동하는 방식 신경 전달 물질이 얼마나 나오는지 오이며 고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심지어는 성별도 스펙트럼이다. 유전자로 인해 정해지는 것들마저도 이렇게 다양한데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정의해나가는 방식까지 합치면 얼마나 다양한 축이 있을까.

수백 수천 개의 축들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좌표를 찾고 자기 자신을 그 여러 가지 측면의 조합으로 정의한다. 3차원 공간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쉽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복잡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그런 복잡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들의 복잡성을 다양한 방식과 기준을 바탕으로 인지하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상을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는 건 인간이 정말 잘 하는 일일 거다.

그런데 관계에 있어서는 왜 그렇지 않냐는 말이지. 노트북 앞에 앉아 손가락 사이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던 한솔은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흐르고 내면과 외면의 많은 것들이 바뀌는 와중에도 정말 꾸준한 것들이 있었다. 어떨 때는 정말 피곤할 정도로.

한솔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간만에 다녀온 대학 동기들 술자리에서, 아직도 명호와 같이 산다는 말에 주변인들의 반응이 폭발한 탓이다.

와 너네는 진짜 대단하다. 아직도 같이 다녀? 근데도 안 사귄다고? 구라까네. 됐어 얘들이 그런 거 아니라잖냐. 아니 그래도 그 정도면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지. 한솔이 가만히 있는데도 한솔과 명호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토론하느라 바빴다. 서명호랑 요즘 뭐 하고 다니는지 말했다가는 까무러치겠네, 싶을 정도로. 물론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아, 이래서 이 자리 안 오고 싶었던 거지. 어쩐지 가기 싫은데 왜 싫은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더니만. 한번쯤은 예의 차릴 겸 와볼까 했는데, 역시 쎄한 건 빅데이터라 이거지. 한솔은 다시금 제 감의 신뢰도를 재고하기로 했다. 

"그냥 사이라니까."

늘 해왔던 것과 같이 대답을 했는데도 이럴 거면 왜 물어봤는지 믿지 않는 반응마저 소름 돋을 정도로 같았다. 레퍼토리가 달라진 게 없으니 익숙하게 받아치긴 했는데 그래도 피곤했다. 매일 겪는다고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매일매일 스스로를 조금씩 깎아내는 거지. 조금 깎아낸다고 별 일이 나지는 않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오십 번 백 번.. 하다 보면 흠집이 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보면 꺾이기도 하는 거고. 

한솔은 어쩐지 지금 자신이 꺾이기 직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라앉은 기분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되어서,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작업을 하려고 앉았지만 싱숭생숭해진 마음에는 쉬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채 두 문장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제 일감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상념에 잠기는 게 맞지. 고개를 얼굴에 파묻었다.

왜 관계에서만큼은 애정도가 일차원 축인 것처럼, 타인-지인-친구-애인-가족 뭐 이런 식의 눈금이 그려진 것처럼 만들어지는 걸까. 어떤 타인의 어떤 부분을 친구의 그것보다 사랑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어떤 친구는 애인보다 어떤 부분에서는 더 소중할 수 있고 가족보다도 소중할 수 있고... 아무튼 그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과 관계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다 다른데 왜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냐고. 그런 기준을 강요하는 세상도 답답하고 답 하나 못 찾아내는 자신도 답답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뭐 해?"

한솔의 고민 속을 고민의 주인, 정확히 말하자면 고민의 한 18%정도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온다. 키보드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자 실크 파자마 차림으로, 방금 일어난 건지 눈을 벅벅 비비면서 걸어나오는 맨발의 서명호가 있다.

"어, 명호 형. 일어났어?"

"좀 전에. 너 안 잤어?"

명호의 물음에 한솔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고개를 들고 보니 창밖에서는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고뇌 덕에 일은 하나도 안 한 터라 그냥 밤을 새운 사람이 됐다. 그렇지만 프리랜서가 으레 그렇듯 밤샘은 익숙하니까. 

그것은 한솔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 명호는 한솔의 이런 생활 패턴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잠 한숨 자지 않은 제 동거인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차를 우릴 정도로. 한솔은 잠시 대답 없이 계산된 듯 깔끔하게 움직이며 차를 우려내는 명호의 손을 쳐다보았다. 명호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으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움직임을 지속했다. 명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그렇게 하다가 몸 상해. 이따가 조금 자."

다 우려낸 차를 한 손에 들고 한솔의 곁으로 돌아온 명호는 모니터를 흘긋거리며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길고 곧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잠에 못 들도록 머릿속을 가득 채운 번뇌를 손으로 다 뽑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 손길에 기분이 좋아져 더 해 달라는 뜻을 담아 명호의 손바닥 안으로 좀 더 기댔다. 명호는 그 모습에 푸흐흐, 웃었다.

"고양이 같아."

고양이 닮은 건 본인이면서 말이 많네. 시비를 걸까 하다가 그냥 명호의 팔꿈치 부근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으로 투정을 대신했다. 명호도 말없이 팔을 벌려내어 한솔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했다.

마른 몸이지만 근육으로 가득 차 있어 평균보다 조금 더 따뜻한 몸. 어깨에 얼굴이 딱 얹어지는 게 마치 맞춘 듯 안정적이다. 아직 졸음이 다 달아나지는 않은 듯 한솔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명호를 보며 한솔은 손을 들어 잠결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편안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상념이 다시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같이 살고. 절대 지겹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지겹다 싶을 정도로 붙어 다니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물론 한솔의 스케줄이 불규칙적인 탓에 엄밀히 말해 같이 일어나는 경우는 적었다) 서로의 습관이며 버릇에 대해서 다 알고 있고. 서로에 대한 스킨십도 거리낌없이 마구 끌어안고 붙어 있고.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할까.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틀린 것 같아서 괜히 토를 다는 바람에 생각이 멈추지를 않았다.

한솔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진 걸 눈치챘는지 명호의 손이 다시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솔은 흐음, 콧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다시 머리를 맡겼다.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지금 눈 앞에 있는 것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의와 분류 같은 것보다야 훨씬 중요할 텐데.

"오늘 언제 들어와?"

"글쎄. 조금 늦을지도 몰라."

"미팅 있어서?"

"그냥, 이것저것. 차 너 것도 내렸거든. 마시면 잠 잘 오니까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차 마시고 들어가 자."

그렇게 말하며 한솔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은 명호는 하품을 찢어지게 하며 욕실로 향했다. 한솔은 카운터 위에 남은 나머지 한 잔의 잎차를 가만 살폈다.

저 형은 출근할 거면서 잠 잘 오는 차를 마셨대.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알아 구태여 토를 달지는 않았다.

 

최한솔은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만큼 모든 관계가 고유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이는 뭔가 특별해. 뭐 이런 진부한 구절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얘랑 쟤랑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당연히 관계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친구 앞에서 굳이 나는 케이팝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MBTI를 믿지 않아도 과몰입한 친구의 유형이 뭔지는 기억하고 회를 못 먹는 사람과 초밥집에 가지 않고. 싫어한다는 걸 굳이 하지 않고 좋아하는 건 좀 더 해 보려고 하는 그런 작은 노력들.

그런데 서명호를 대할 때는 조금 달랐다.

서명호라는 사람의 선호와 불호와 취향과 성향에 맞춰서 또 새로운 관계를 맺었던 것은 맞지만, 그 방식이 달랐다. 서명호와 있으면 어쩐지 눈치를 조금 덜 보게 됐다.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괜히 한 번 더 해보게 됐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굳이 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솔직하지 않은 건 아니고, 변덕스럽다는 게 더 맞을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서명호는 햇빛이 좋다면서 선글라스를 쓰고 비를 좋아한다면서 우산을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최한솔이 서명호에게 그렇게 굴어도 서명호는 싫어하지 않았다. 싫은 줄 알았는데 괜찮았거나 좋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로인 것들을 함께 발견해나갈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이라며 서명호 눈치를 엄청 봤는데 최한솔은 안 그랬다. 역설적이게도 예민한 서명호는 사람들이 자기 눈치를 보는 것에도 예민해서 자기한테 투박하게 부딪혀 오는 최한솔을 좋아했다.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 같다.

....아마도.

아마...도?

그치만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으니까? 한솔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냥 서명호가 최한솔에게 잘해주고 최한솔이 와서 부딪혀도 잘 받아 주고 최한솔이 재롱을 부리면 잘 웃어주고 그랬으니까. 그러면 서명호가 좋아하는 사람 목록 어딘가에 들어 있을 거라는 가정 정도는, 주제넘지만, 할 만한 거 아닌가?

이게 꼭 로맨틱이나 섹슈얼이나 이런 게 아니라. 최한솔이 서명호와 키스도 섹스도 하고 싶어하진 않지만 (하라면 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하다) 서명호를 좋아하듯이, 서명호도 그 방식이 뭐가 됐든 최한솔을 좋아하지 않을까? 좋아해야 이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지 않을까?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내고 이제는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될 때까지 최한솔과 계속 가까운 사이로 지내 주고, 월세를 아끼기 위함이라지만 생활공간도 공유한다는 건 그래도 서명호도 최한솔을 좋아like해서, 아니면 최소한 나쁘지 않은tolerate 정도여서 같이 살아주는 거 아닐까. 

사실 안 물어봤다. 서명호가 그렇게 말해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사회 통념이라는 게 있으니까. 싫어하는 사람이랑 살지는 않겠지. 충분히 유추 가능한 논리적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 고민에 빠져 있느라, 한솔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차량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빠앙- 하는 경적 소리를 들었을 땐 이미 늦었다. 

몸이 붕 떠올랐다.

땅에 도달하기 직전에 우습게도 한솔의 뇌리를 스친 건 주마등 같은 삶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서명호였다.

아, 명호 형 걱정할 텐데.

밥 혼자 먹으면 심심하다고 싫어하는데.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약속....

생사를 다투는 순간에 떠올리기에는 제법 초라한가. 마지막 생각은 끝맺지 못한 채 의식이 암전되었다.

어렵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흰색 타일 천장이 흐리게 눈에 들어왔다. 오, 이거 그건가. 낯선 천장. 아, 웃기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밈이라는 게. 웃으려고 했는데 숨이 마음처럼 쉽게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재차 깜박이자 시야가 조금 더 맑아졌다. 숨도 쉴 만 해졌다. 깊게 숨을 들이쉬니 코를 쏘는 듯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아, 여기 병원이구나.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욱신거리는 제 흉통이 그 증거를 더했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주변에 있는 것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답답한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로 매달려 있었고, 한쪽 팔도 드레싱으로 잔뜩 싸매여 있었다. 머리도 기분이 이상한 걸 보니 붕대가 감겨 있는 것 같고. 그나마 자유로운 왼쪽 손을 움찔거려 봤더니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이 거슬린다. 답답한 건 딱 질색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병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는 명호가 잠들어 있었다. 기다리다 잠든 듯, 한솔의 침대 한 쪽에 얼굴을 기댄 채.

부스스한 머리와 명호답지 않은 캐주얼한 의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트레이닝복 바지에 대강 끼워입은 듯한 후드티에, 계절에도 맞지 않는 슬리퍼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선 바로 이어지는 두통에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형이 밖에 이러고 나오는 건 잘 본 적이 없는데.

급하게 나왔나 보다. 실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하나뿐인 하우스메이트니까 다쳤다는 얘길 들으면 급하게 달려와 주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기분이 묘했다. 자신을 위해 나와 줬다는 게 괜히 감동적이기도 하고. 

불편한 자세로 기대어 자느라 얼굴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이 거슬려 보여서, 한솔은 왼손을 천천히 들어 머리카락을 옮기려고 했다.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 게 무색하게 손을 들자마자 명호는 번쩍 눈을 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명호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깼어?"

"ㅇ..."

"목, 목 마르지. 기다려 봐, 물 줄게."

얼마나 정신을 잃은 채로 있었는지 목이 칼칼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걸걸한 한솔의 목소리를 알아챘는지 명호는 눈치 좋게 물병을 찾아 왔다. 본인도 자다 깬 건 마찬가지라 목이 다 쉬어 있었는데도. 형도 물 좀 마시라고 하려던 한솔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제 상황을 깨닫고 제 입에 물컵을 대 오는 명호의 손에 몸을 맡겼다. 명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나?"

대충, 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에 물린 컵 덕분에 그럴 수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아까부터 얼얼했던 갈비뼈 부근이며 어깨와 팔 근육들이 일제히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 아파 와서 한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입가에 올려져 있던 컵에서 물이 흐르자 명호는 다급히 컵을 내려놓고 휴지를 찾았다. 미안, 미안해. 한솔은 형이 미안할 거 없는데 왜 미안하대, 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살짝 저으려다가, 그것도 좋은 생각이 아님을 깨닫고 멈췄다. 괜찮아. 발음보다는 숨소리가 더 짙은 목소리로 위로를 전했다.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명호에게는 그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사고 났던 건 기억 나?"

한솔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호가 마저 일러 줬다.

길을 건너다가 신호주시를 하지 않은 운전자 덕에 사고가 났고, 뼈 몇 군데가 부러지고 과다출혈도 올 뻔해서 수혈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의식이 없어서 너무 걱정이 많았다고. 다행히 수술 이후에 큰 문제는 없었고 그 운전자가 자진신고해서 병원비도 내 주겠다고 해서 그 부분은 잘 해결됐고. 수술의 여파가 컸는지 이틀 정도를 정신을 못 차려서 깨는 거 보려고 여기 있었다. 이런 얘기였다.

명호는 이 얘기를 전하면서도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는 건지 한솔을 조심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이미 만신창이가 돼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뭘 또. 여기서 또 사고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걱정하지. 의아해하던 와중 한솔은 갑자기 왜 이 상황이 이렇게 낯선지 깨달았다.

서명호의 눈시울이 붉다. 운 것처럼. 

걱정한 것처럼. 

이상할 것도 없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나 때문에 서명호가 울다니. 불가능할 일도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한솔의 시선이 제 눈가에 가는 걸 알아차렸는지 명호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툭툭 두드린다. 피부도 얇아서 쉽게 붓는데 상처라도 나면 어쩌나. 우는 서명호를 달래고 눈을 비비는 손을 맞잡아 막아 주고 싶지만 혈액 팩에 깁스에 온갖 걸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몸은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해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말로 대신했다. 형 상처 나. 눈 비비지 마. 그럼 서명호는 또 그 말을 듣는다. 덜컥, 하고 손이 멈췄다. 둘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자리잡았다.

침묵을 깬 건 명호였다.

"버논아."

"으응."

가볍게 대꾸한 한솔은 뒤에 이어질 명호의 말을 기다렸지만, 명호는 그새 또 정신이 어디로 갔는지 자기가 불러 놓고 답이 없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명호의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있던 한솔은 계속해서 답이 없는 제 동거인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불렀다.

"명호 형, 괜찮-"

"우리 결혼하자."

어어? 제 문장을 뚫고 들어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바보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더 설명해보라는 뜻으로 명호를 쳐다봤지만 명호도 자기 할 말을 다 했다는 건지 입을 꾹 닫고 한솔을 쳐다보기만 했다. 뭐지, 진짜? 이 형한테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갑자기 이런 소릴, 아. 한솔은 씩 웃었다.

"이거 방금 프로포즈야?"

"...너가 그러길 원한다면."

"음."

뭔 소리냐고 뭐라고 할 줄 알았더니 대답이 싱거워서 더 당황스러웠다. 장난으로 받아치려고 했는데. 명호의 얼굴을 보니 진지해 보여서 대꾸를 다시 입 안으로 삼켰다. 프로포즈. 지금 이게 프로포즈라면.... 음.

"되게 무드 없는데."

"너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어?"

우스개소리로 꺼낸 말에도 명호는 칼같이 반응해 왔다. 물론 그 말은 맞다. 맞을 수 밖에 없다. 서명호는 최한솔의 취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프로포즈고 뭐고 무드나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 같은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당황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한솔의 침묵이 길어지자 명호의 표정에도 불안감이 스쳤다. 그걸 단박에 알아챈 한솔은 더욱 당황스러워지기만 했다. 아니, 저 형은 뭔 말을 하고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이해한 거야.

"뭐야, 뭐야. 말을 해."

"싫어?"

"아니, 싫겠어? 그게 아니라 설명을 좀 하라는 거지."

그러자 명호도 조금 안심한 듯 어깨에 긴장이 풀린다. 진정하고 설명 좀 해 봐. 라는 한솔의 말에 두어 번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가방을 뒤적거려 꾸깃꾸깃해진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병실 침대의 간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한솔이 목에 힘을 주어 내용을 읽으려 하자 명호가 한숨을 쉬고 침대 옆 버튼을 눌러 상체의 각도를 조절해주었다.

"너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연락 받자마자 왔는데, 가족 아니면 안 들여보내준다고 했어."

"..."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보호자라고 했는데도 나는 안된다고. 너 가족들은 다 외국에 있다고 해도 안 들어주더라. 밤에도 면회 안 된다고 쫓겨날 뻔하고. 결국 어머니가 전화해주셔서 해결하기는 했는데..."

명호는 말문이 막히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림자가 진 아래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한솔은 안절부절하다가 바늘이 주렁주렁 달린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에 명호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같이 있는 거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사이는 우리끼리만 알면 되는 거니까 어디에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 근데 증명해야 하는 데들이 있더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관이 있는 거였어. 그래서..."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의 종이로 돌아갔다. 한결 편해진 각도 덕에 종이의 윗부분에 쓰여 있는 글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혼인신고서

그리고 어느새 빼곡하게 채워진 서류의 칸들. 잡고 고민을 많이 한 건지 아니면 그냥 마땅한 책상이 없었던 건지 군데군데가 구겨져 있었다. 서명호답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또 서명호 같기도 했지만. 한솔은 아무 말 없이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짜네, 서명호. 가짜로 말할 사람은 아니긴 했는데, 진짜라니까 기분이 또 이상해서. 

명호는 한솔의 그런 침묵을 또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또 주절주절 설명을 한다.

"너만, 괜찮으면. 싫으면 안 해도 돼. 그치만 혹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에는 괜찮았는데 그때는 모르잖아. 그래서 해 두는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야?"

"어?"

"무슨 일 있을까봐 하는 거냐고."

"...싫어?"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듯 가만 질문을 곱씹던 명호는 하라는 답은 안 하고 되려 한솔에게 되물었다.

"누가 싫대. 물어보는 거야."

난감한 듯 주변을 살피던 명호는 정확히 말하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라며 말문을 띄었다.

"나는, 너 혹시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 원할 수도 있으니까."

"...어?"

"안 잡고 싶었는데, 너를. 같이 있는 거 너무 좋지만 보내야 하면 보낼 수도 있는 게 사랑이잖아. 그래서 혹시 모르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왜 어딜 가? 혹시? 혹시 모른다니? 저 조그만 머리로 어디까지 생각을 한 건지 상상도 안 됐다. 나는 지금 여기가 딱 좋은데. 최한솔에게 서명호 같은 사람은 또 없을 텐데. 논리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황당한 전개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서명호가 방금-

"형 나를 사랑해?"

"그럼 넌 나를 안 사랑해?"

그럴 리가 없는데, 라는 듯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한솔과 눈을 맞춰 오는 데에는 이길 데가 없다.

그렇지. 나는 서명호를 사랑하고, 서명호도 나를 사랑하지.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아, 이거 직접 듣는 거 기분이 제법 좋네. 사고의 여파로 여전히 온 몸이 욱씬거렸지만 마음만큼은 하늘을 날 듯 가벼웠다. 

그래,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지. 그게 어떤 사랑이든 누가 봤을 때 어떻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를 위해 있어줄 거라고 약속한 사이면 충분하지. 이게 무슨 사이인지 한참 혼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한 게 무색하게 홀가분한 결론이었다.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느라 광대가 당겨 온다는 걸 느꼈다. 허어, 이렇게 된다고. 한솔은 조용히 키득거렸다.

"아, 아까 한 말 취소."

"뭘?"

"이거 되게 근사한 프로포즈네."

"아잇, 진짜.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서명호의 손이 최한솔의 두부에서 붕대에 감기지 않은 부분을 찾아 가볍게 톡, 두드렸다. 한솔은 말없이 씩 웃었다. 맞다. 그런 건 신경쓰지 않지. 중요한 건 이제 서명호와 최한솔은 뭔가 조금 다른 사이가 되었다는 것. 둘의 관계와 둘이 살아가는 방식과 심지어는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둘을 부를 방법이 생겼다. 

그게 비록 사람들이 예상하는 방식과는 다를지언정, 상관 없었다. 이제 그 누구도 서명호와 최한솔이 무슨 사이인지 물어 볼 필요가 없을 거고, 둘이 자신의 관계를 증명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런 관계가 되는 거다. 한솔은 웃으면서 펜을 집어들어 제 이름을 휘갈겨 서명했다. 왼손으로 쓴 탓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꾸깃한 종이 위에 펼쳐졌다. 

"나도 형 사랑해"

"..."

"그리고 결혼도, 좋아. 형이랑 할 수 있어서 영광이야."

펜을 내려놓으면서 한솔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호도 회답하듯 밝게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사이니까.


생활동반자법 지정 when....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스타입 2022.11.09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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