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
여전히 구멍처럼 수많은 자리가 남아 깔려 있는 고요는 쓸쓸함과 환대의 낯을 동시에 띄운다.
“눈을 감고 응시할 수 있는 것은 과거나 미래 뿐이니, 계속해서 그 검은 빛을 바라보는 것은 너머를 응시하는 일을 아주 두렵지만은 않게 해 주지, 아마?”
장난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뱉어진 말이나 실상 눈을 덮는 것들의 색이 붉다는 것을 알아 비죽, 특유의 웃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정말로 검은 색인지 한 번 보자고, 그리 중얼거리며 눈을 감으면 시야 바깥의 빛이 일렁이는 검은 배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실이 흐르는 듯한 형태의 섬광이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이 일렁이는 것에 무엇의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 그저 자신이 현재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남을 수는 없다는 상기이기에 온전한 검정을 허용치 않는 것일까? 피로한 눈을 뜨면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 빛의 반사체가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인영의 크기마저 변하지 않았으며 표정마저 여상하여, 말 그대로의 원형이 남은 이를 마주하는 것은 그마저도 과거의 편린을 손에 그러쥐게 한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쫓고 이어가는 것 역시도 일방적인 재생이자 미련인가-땅을 나눈 타인을 멋대로 제 정원의 일부와 같다 여기고 마는 것은 일종의 병해와 같았다.
“난 대외적인 명제가 아닌 네 개인을 듣고자 해.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주욱 그렇겠지.”
‘대외’라는 단어 하나를 먹잇감 삼아 갈고리와 같은 뿌리를 내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색을 초록으로 덧씌울 수 있다는 것은 퍽 기꺼운 일이며 그 침투성을 믿어 타인이 말을 내뱉을 때까지를 집요하게 바라볼 수 있음 역시 그러했다. 타인의 마음 따위는 고려 대상으로 두지 않는 담담한 형태의 이기주의, 어렴풋이 제가 경외해 마지않는 삶에 대한 타인의 두려움을 느낀 탓에 더욱 이후의 이야기를 끌어내려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음은 기쁜 일이 아닌가, 또한 그것이 명을 재촉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무엇도 알 수 없이 흐릿한 삶은 언제 끊어질 줄을 몰라 더욱 빛을 낸다. 그리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 당신 역시 그리 여길 수 있기를 바랐다. 아니, 간원했다! 그렇기에 고집스럽게도 당신의 재생을 부르며 시들어가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부활초의 이름을 덧붙였다.
“셀라기넬라의 견해는 어때, 죽음은 실로 두렵지 않은 일이야?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이지.”
언제고 물을 머금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이름을 머금었다면 생의 일부인 죽음의 과정, 그것에 대한 준비마저 무의하지 않음이 옳음이라. 그러나 나기를 연옥에 걸쳐진 숨을 타고난 당신은 늘 모든 것을 끝마친 듯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꼭 그 모든 것이 사람이 타고 남은 한 줌의 재처럼 훌훌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러니 더욱 그 생을 강하게 거머쥐며 몇번이고 곱씹을 수 밖에는 없다. 그 육체가 아주 짓이겨지고 끝내는 스러져 당신이 준비해 왔던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당신은 사명을 다했다는 듯 어떤 호흡의 시도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 이름만은 무덤이 아닌 동산과 같은 꼴로 남을 수 있으리라고. 비문에 써내릴 추도사를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이후의 이름을 고민함은 그와 같은 까닭이었다. 언젠가 그 돌 위에도 이끼가 덮여 이름이 녹색에 삼켜지거든 비로소 함께하는 재생을 꿈꿀 수 있게 될까…….
“네 호기심이 네 울타리가 되었구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념을 끊어내듯 튀어나온 한 문장이었다. 가만 당신의 목을 바라보면 그 유리 구슬 속에 갇힌 씨앗은 보이지 않을지언정 여전히 그 구슬을 매달고 있던 끈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신이 끝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 뿐이다. 한 땅에 평생을 몸 담아 살아 왔던 이는 그 방랑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그저 어떠한 형태로 피어나 자랄 것인지, 자신은 어떤 색을 띄는 것이 좋을 것인지, 무엇의 위로 자라나야 제가 바라는 생의 형태에 닿을 수 있을지만을 고민해 왔던 이는 그 고민을 어렴풋이만 지레짐작할 뿐이다. 그 어떤 땅도 당신의 온실이 되어 주지는 못했던 것일까, 기다리던 봄과는 아주 같지 못했던 것일까. 유령을 묶어 둘 땅은 없었던가-그 따위의 생각으로 침묵을 채웠다. 그렇다면 너는 네 땅을 직접 일구어 봄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셀라.
“르노가 완전히 네가 찾던 봄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셀라. 그 곳이 마음에 들거든 그 씨앗을 심어 두어도 좋아. 자칭하기를 그리 하고 싶다면 물론 그리 해도 좋고.”
아, 일순 고향의 붉은 빛이 점멸하고 제 앞의 하양에 초록이 깃듦을 보았다. 꼭 서로의 땅을 일부 떼어내어 그 빈 틈 사이에 끼워 넣어두기라도 한 듯한 꼴이다. 그 겨울을 닮은 것의 일부조차 ‘자신’으로 삼지는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과 ‘다시’를 불어넣어 옅게나마 무채에 채도를 부여함은 어찌나 오만한 일인가. 그럼에도 다섯 자의 소개-르노의 셀라라는 그 목소리만은 아주 싫지 않은 것이라 입꼬리를 끌어올릴 수 밖에 없다. 당신의 절명에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이리 재생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음은 또 다른 행운이라,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자신과 땅을 나눈 이가 여전히 존재함 역시 그러하다 느꼈다. 르노의 서늘한 땅, 그 한 구석을 기억한다. 당신이 자리하고자 한다면 그 곳에 당신의 의자와 탁상이 자리하게 될까, 당신은 그 실과 바늘로 르노의 무엇을 재생시키는 이로 거듭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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