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림
때로는 녹색 외의 색을 하고는 했던 온실의 구석, 생을 저주라 이른다면 그 저주가 거두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까.
삶을 저주라 이른다면 제 혀로 얽어낸 수많은 것들은 말뚝처럼 이 땅의 곳곳에 남는 병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살아남기를 바라, 네 몸이 스러지더라도 내가 그것을 재생시켜 이 세상에 네가 존재했던 사실이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게, 그런 날카롭고 깊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살아가기 힘들거든 내게로 찾아와도 좋다는 얕은 언어에 이르기까지……. 말은 씨앗과도 같아 한 번 제 몸을 떠나가면 어디에서 어떤 형태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 씨앗을 품었던 모두가 그 씨앗의 원형을 기억하며 그것에 ‘약속’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 뿐이다. 약속, 붙들고 묶어두는 것,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 저주와 같은 것!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죽음보다는 삶을 바랐다. 그 간절함을 손에 감아 든 채 무책임하게 내뱉은 것들이 각기의 형태를 품은 채 타인의 땅에 심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때 즈음이었던가, 수많은 언령의 흔적, 언덕, 또는 무덤, 때로는 책망, 누군가에게는 원망, 절망, 또한 희망이기도 하던 것들. 나는 몇 조각으로 나뉘어 썩게 될까.
“많은 과거가 검은 형태로 저장되고는 하니까. 그래도 검정이 아주 매섭기만 한 색은 아니지……. 그것마저 추억과 닮았어.”
그리 말할 적에는 수많은 검정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검은 타르를, 누군가의 검은 잉크를, 누군가의 검은 흑연, 검은 카메라의 렌즈, 건반, 기타 줄, 그 따위의 것들-자신에게는 헤드셋의 안쪽에 자리한 스펀지와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검정은 과거가 잠든 침대였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 한 번 없이 목을 감싸는 가벼운 감각 하나만으로 수많은 것들을 재생한다 이를 수 있었다. 한 번도 그 재생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없으므로 기계적인 돌이킴에 쉬이 몸을 맡겼다. 열 아홉의 색, 개중에는 당신의 하양 역시 있었으나 그 범람하는 색의 종합 역시 흑색, 혹자는 그것이 죽음의 색이라 이르렀으나 수많은 것들이 웃고 떠드는 암흑 속에서 라이켄은 비로소 생을 느낀다. 제 주변을 메우는 초록 속의 검정들을 손에 들리는 형태로 품어 들게 된 것은 또한 그 이유 역시 있었을 것이다.
“재생이 나 홀로의 가치였다면 나는 오만하게도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여겼겠지.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않은 탓에……. 재생이라는 그 흐름은 영원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나의 가장 이상적인 재생일 것이라는 보장은 않아. 네가 종종 두려움에 차 하던 이야기가 있지 않나? 당장 내일 그 몸이 바스라져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눈을 감으면 영영 그것을 뜰 수도 없을지 모른다고 말이야. 나도 같은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 네 말마따나 그 직전까지 추락해 본 적도 여럿 있었지.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야.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이 존재가 이어질 수 있다 여기면 두려워 할 것이 아주 사라지더군.”
작게나마 무모라는 기질의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무감의 뿌리이기도 했던 그것은 또한 당신에게 그 어떤 상흔도 보이지 않았던 까닭의 극한 일부이기도 하다. 마주할 기회를 주지 않았음은 그 상처가 썩어 팔과 다리를 끊어낼 지경으로 제 몸을 갉아먹을 것을 우려하지 않은 탓이다! 그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않은 채 이끼는 끈질기게도 공존을-동시에 고립을-추구하며, 재생을-동시에 절단을-경험하고, 때로는 생을-동시에 사를-손에 쥔 양 땅에 뿌리를 박았다. 반 즈음은 본능과 같이 자리하게 된 근성이요 의지였으니 동물과 식물의 생을 동시에 머금은 이는 몇 마리, 몇 그루 분의 삶을 집어삼키려 들었던가……. 일종의 자가포식을 포함하고 있는 생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나마 존재할 수 있음이 어디야. 그나마 네가 그리워하는 것이 계절임이 다행이군 그래, 봄은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오고는 하잖아.”
당신의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가정을 알 턱이 없는 이는 무던하게도 몇 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단 하나 되감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그 어떤 계절도 하나의 얼굴을 한 채 동일하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말이었을까! 존재하는 한 너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기회를 입에 물 자격을 지니는 똑같은 생 중 하나가 아닌가? 그리 중얼거리는 음성 역시 때로는 무감했다. 라이켄은 종종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 없는 무욕의 인간처럼 행동하는 일이 있었고, 기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늘상 세상이 쥐어주는 ‘기회’라 이르는 것을 쥐는 것보다는 스스로 땅을 정하고 일구어내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가. 혹은 기회조차 바라지 않아도 될 정도의 땅에 운 좋게 몸을 눕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형정원-무너지고 원래의 형태를 잃어 폐허와 다를 바 없는 회백색의 땅, 그 사이에 돋아 있는 초록마저 생이라 좋다고 이르고서는 뒹굴고 있는 꼴이다. 당신의 염원이 꼭 팽창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원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니 제가 그 원을 듣기라도 했노라면 ‘조금 더 욕심을 내 보라’ 일렀을 것이 분명했다.
“몇 번 해 봐서 알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말이다. …….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르기는 하지만 그 뿐이었어. 다른 이의 원망을 얼마나 오랫동안 듣게 되는지에 대한 것은 시간을 거쳐 보아야 아는 문제지.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정말 이끼가 되어 땅에 퍼진다 해도 그것 하나하나를 밟으며 내 이름을 저주할지도 몰라.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일부이니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만 이야기하기를 바라.”
이 몇 문장을 이야기하던 대목에서는 또 다시 수많은 낯을 재생시켰다. 예의 자신은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퍽 두려이 여겼던 것도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실망이 공포스럽지 않게 된 것의 문제였을지, 너무나도 담백해진 잘못의 수용법에 대한 문제일지는 여즉 의문이었다. 그리 말한 직후 단언할 수 있음은 그 문장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다는 증명이기라도 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아.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긴다면 말이지. 일전에는 동생, 지금은 셀라기넬라, 이 다음의 네가 르노를 마주하고 기꺼이 그 흙에 남기를 바라게 된다면 네가 돌아와 새로이 삶을 이어나갈 자리는 언제든 남아 있을 거야, 셀라. 네 이름에 따라 묻히는 꽃도 그 풀이 되겠지…….”
그 흙먼지 이는 땅에 타인을 들일 예정은 없다 여겼으나 쉬이 말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은 그 속에 타자를 초대하고 싶었던 모양이리라 독백했다. 자신의 일부는 그 대지에 만연한 부재에 퍽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적어도 고독만큼은 그 원인이 아니라 여기는 이는 홀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후의 사고는 다시금 온실 속을 걷는 이의 시야로 전환된다. 그래, 셀라기넬라, 당신을 위해 마련된 딱 좋은 자리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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