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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가람]그 감정의 이름은

W.mayo님 커미션

젠가람 by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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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아이젠은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 알아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이였기 때문에 어떠한 의문이 생기면 그것을 배운 것에 대입을 하기 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고, 스스로 배워나갈 수도 없다. 이런 일을 다른 사신들도 다 겪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손 아래에 깔린 서류들이 옅은 바람에 팔락팔락 흔들렸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서류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글씨가 눈앞에서 펄럭펄럭 날아다녔다. 한 문장을 읽으면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는 글자가 단어 단위로 잘려 인식되지 않았다. 아, 오늘은 일도 많은데. 하필 이런 날까지 그런 고민 하나 해결하지 못할 게 뭐람.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팔락거렸다.

“어디 그래서 바닥에 구멍이 뚫리겠나.”

“아.. 대장님.”

“그려. 니 대장님이다. 일 안 하고 뭣허냐.”

내내 지켜보고 있던 히라코는 답답했는지 결국 입술을 달싹거렸다. 퉁명스럽게 튀어 나가는 말에도 제가 영 반응이 없자 그는 긴 머리카락이 책상 위에 흩어질 만큼 허리를 숙여서 저를 바라보았다. 고개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저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았다. 슬쩍 시선을 들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슬그머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살짝 미소를 지으니 그는 흥 하고 콧김을 뱉어냈다. 어디 아픈 건 아닌 모양이군,하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작고 미세한 변화에 담긴 뜻도 바로 눈치를 채면서 제 마음 하나 울렁거리는 것에 이름 하나를 못 지어주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저를 가만히 지켜보던 제 상사는 몸을 뒤로 기대며 등받이에 상체를 푹 기댔다. 먹에 젖은 붓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서류에 다시 집중을 했다. 물론 잘 읽히지 않았지만 최대한 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혼자 있으면 편할 텐데 일을 하고 있으니 그것마저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순간 그에게 이것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까 하고 고민을 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벌써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술 끝과 놀리고 싶어서 눈이 화사하게 휘어지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아예 모르는 건 아닌데,그러고 싶은 척을 하는 건가. 아,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 전부 모르겠는 일투성이다.

단어로 조각나는 문장을 겨우 이어서 읽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위해 평소보다 머리를 조금 더 써야 했다. 그런 다음 사인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기고 또다시 애를 쓰며 문장을 읽어낸 다음, 사인을 하고.. 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히라코는 고개를 이리 기울였다가 저리 기울이며 아이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

“니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디..”

중얼거리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던 그는 갑자기 아! 하고 소리를 내면서 허겁지겁 붓을 들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서류에 사인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맞다. 지금 그는 여유롭게 제 얼굴이나 관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5번대 앞으로 새로운 서류가 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몰려오는 날이었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해내지 않으면 오후에 다가올 것들을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정시 퇴근이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저는 퇴근을 하고 봐야할 이가 있었다.

바로 그 사람,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그 존재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분은.. 아. 일단 이걸 하자.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읽어내고 사인을 하는 일은 금방 익숙해졌다. 손이 점점 빨라지고 애써 머리를 써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되었다.

붓이 종이를 쓸고 가는 소리 이외에 조용한 집무실 안으로 뒷마당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걸 봐주기도 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실 필요 없다고 저를 등 떠밀었던 긴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속으로 작은 감사를 전하고, 마저 이어가려고 하다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그분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누구에게 말을 할 수도, 조언을 들을 수도, 지금까지 배우고 깨달아 온 것에 대입을 할 수도 없는 것은 바로 그분을 볼 때의 제 반응이었다. 특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처음에는 제가 그 존재를 싫어하는 거라고 착각을 했다. 그럴 만한 반응이었다. 모든 것이 분노로 가득 차올라, 이 세계의 부조리를 다 뒤엎으리라고 마음먹었던 시절에 마주보기 괴로울 정도로 권력 아래 기어다니는 사신들을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뛰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이것은 제가 누군가를 경멸할 때 느끼는 감정인가.

그래서 그를, 그분을 경멸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였고, 제 가슴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모든 것이 다 아니꼽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나타난 호로의 목을 잘라냈음에도 가슴 한구석에서 넘쳐나는 불안을 어찌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대원들을 한심하게 본다거나 치미는 짜증을 애써 꾸역꾸역 삼키다가 밤마다 아릿해지는 명치를 쓰다듬지도 못하고 잠에 겨우 들던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히던 시절. 그때 그분은 제 앞에 나타나셨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들끓기만 하던 분노가 놀랍게도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그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속도 울렁거렸다. 뱃속에서 먹지도 않은 음식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욕지기가 느껴지고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혹여나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이 되는 그런 상황. 심장 소리가 들리면 무언가를 들켜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분노이거나 짜증이거나 하는 부정적인 마음이라면 곤란하고 말 뿐이지만, 그것이 만일, 정말 만에 하나라도 긍정적인 마음이라면 그것은 곤란하고 끝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따, 소스케 사인 길게도 한다잉. 책상도 다른 부대로 넘겨줄 거냐?”

“예? 아..”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사인을 하다 보니 붓을 세게 눌러서 서류가 온통 젖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정성으로 썼을 부분이 검게 물들어서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 붓을 들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책상 위까지 먹칠을 하고 말았다.

당황해서 얼른 붓을 내려놓고 일단 지저분해진 책상부터 닦았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서류를 작성해 주신 분께 부탁을 드려서 다시 받아와야 했다. 각 부대를 돌면서 사인을 받는 일은 제가 해야겠지. 아무래도 오늘 정시 퇴근은 무리인 것 같았다.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작은 절망들이 제 목 언저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그럼 전 다녀오겠습니다.”

“그려.”

엉망이 된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쌓인 것들이 산더미 같으니 얼른 다녀와야 했다. 아이젠은 급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가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곧 순보를 써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빨리였다. 얼른 다녀와서 남은 서류를 다 끝내야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다가오고 계시던 그분을 제때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제 탓이었다. 가람은 느긋한 걸음으로 5번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런 순간은 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쨌거나 지금은 평화롭지 않은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에 안심하며 살짝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다시 들었을 때 다가오는 이를 빠르게 피하지 못하고 쾅 부딪혀 버렸다.

움찔하며 놀랐지만 제 몸놀림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잽쌌다. 이미 망가져 버린 서류를 안고 있던 팔을 뻗어 그분의 허리에 두르고 등과 뒤통수를 한 번에 감쌌다. 덩치가 큰 남자였지만 어쩐지 품에 쏙 들어온다는 착각이 들었다.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그분을 끌어안은 채 허리에 힘을 주고 발가락과 무릎으로 단단하게 바닥을 짚었다.

순간 상체가 홀러덩 뒤로 넘어가려다가 멈춘 이는 눈을 크게 뜨고(아마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꼼짝도 하지 않는 가면이 벗겨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 위로 손을 덮었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제 가슴에 닿아 느껴졌다. 아니, 이건 제 심장 소리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분을 바로 세워준 다음 멀리 떨어졌다. 그래도 마주 보고 있는 식이었지만. 제자리에 선 그는 옷을 손등으로 살살 털어 구겨진 부분을 편 다음, 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은 구겨져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서류로 향했다. 아. 이건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아서 불안했다. 작게 헛기침을 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소리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이건.. 괜찮습니다. 원래 망가져 있던 서류여서, 다시 받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딜 가고 계셨습니까? 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오늘은 선생님께 어떤 날입니까,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아까 저와 부딪히면서 다치신 부분은 없으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침착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다가는 하루가 모자랄 것이다. 제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가.”

“..예.”

‘‘다친 데는 없느냐.”

..그것은 제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늘 그런 존재였다. 어쩐지 이상하게 본인보다 상대를 먼저 걱정하는 이. 그래서 참 적응이 안 된다. 처음에는 이분의 그런 행동을 꼬아봤었다. 당연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진실을 말한다면 그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말해주겠지. 괜찮단다, 세상에는 이런 마음도, 저런 마음도 존재하는 법.

그런 그의 말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실제로 한다고 생각하니 또 속이 울렁거렸다. 이것은 단순한 욕지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약간 어지러운 느낌? 발밑이 흔들리는 느낌? 그래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울렁이는 것 같은 느낌.

늘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시절에는 저도 같은 울렁거림이라고 착각을 했다. 위에서 먹은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뱉어내기 직전에 올라오는 거북함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가 하는 말, 행동,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거짓으로 느껴졌다. 가식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느끼는 욕지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고, 한층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대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무언가 조금 다른 느낌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어지럽고 발을 딛고 있는 바닥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과장을 보태면 제 세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저 보기 싫고 화가 나서 구역질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저는 아직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그런 감정을 느껴도 될 만한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제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제게 손을 내밀어주신 분이다. 감히 이런,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생겼다고 해도 저 혼자 간직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 저는 사실 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래야만..

“소스케?”

“아, 네.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벙하게 대답하고 또 입술을 깨물었다가 살짝 웃었다. 아까 선생님께 닿은 가슴이 자꾸만 뛰고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면 혓바닥 위로 올라온 맥박 때문에 생각하고 있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뱉어낼 것 같았다.

그래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를 향한, 선생님을 향한 이 감정에 감히 서투르게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차마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이 감정을 언젠가는 드러내고,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 구걸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발 한 번만 저와 마음이 같아 달라고 간절한 부탁을 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 서류는..”

“아, 제가 조금 바빠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맞다. 서류 처리를 해야 하지. 지금 정신을 차려야지, 이렇게 또 감상에 빠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지나가려고 했다. 제 앞에 서 계시는 선생님을 지나쳐서 이게 몇 번대 서류였더라, 어쨌거나 작성을 한 사신에게 최대한 빨리 가려고 했는데. 느릿하게 올라온 그의 손이 제 손등을 살짝 감쌌다. 먹으로 물들고 구겨진 종이가 쥐어진 손이었다. 그 위를 따뜻하게 덮는 온기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가면으로 얼굴이 거의 가려진 그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젠은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가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 속에서 무엇이라도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신처럼 오래도록. 침묵이 흐르고 거짓말처럼 주변의 소리들이 멀어졌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제 시선이 우두커니 서서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괜찮은 거지?”

“..그럼요. 괜찮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살짝 치워내며 자리를 피했다. 그래, 이건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잠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시선이 얽혔다고 느낀 순간 멈춰버린 것 같은 심장 때문에 저는 이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자꾸만 울렁대는 마음이 왜 그러는 것인지,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한없이 넓으면서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감정에 이름을 지어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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