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람] 감기
W.mayo님 커미션
무리한다고 생각은 했다. 아이젠은 달뜬 한숨을 푹 뱉어냈다. 부대장실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안 그래도 대원들에게 조금은 쉬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는데, 마치 그러고 싶었던 사신처럼 바로 몸이 아파 버릴 줄은 몰랐다. 히라코는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무엇을 알아서 한단 말인가. 제 상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그러니까 대장과 부대장의 할 일은 전혀 다른 결인데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설마 제 글씨체를 흉내 내는 짓 같은 건 안 하겠지.
어쩐지 그런 짓을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니까 관자놀이가 쿡쿡 쑤셔왔다. 감기였다. 그것도 지독한 몸살감기. 옷이 닿으면 피부가 쓰리고 이불이 누르면 숨이 막혔다. 이마 위에 얹어진 물수건도 무거웠다.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 고생을 하기는 했다. 갑자기 바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앉아서 일을 하느라 끼니를 자주 걸렀다. 아프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4번대에 갔다가 미소로 혼구녕이 나고 온 뒤로 그대로 누운 채 끙끙 앓기 바빴다.
칼에 베이거나 호로에게 다친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간단하게 약만 받아 가겠다고 했는데, 돌아와 보니 이번에는 대장님이 혼을 내셨다. 그러면서도 먼 길 다시 가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자, 뭘 예쁘다고.. 하고 중얼거린 그는 제 이마에 물수건을 턱 얹어놓고 나갔다.
먹물이 묻은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들기는했지만 일단은.. 한숨 자둘까. 약을 먹어서인지 잠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까무룩 하게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분이 계셨다. 조용한 제 방을 가득 채우는 그분. 가람은 마른 수건을 물이 담긴 바구니에 살짝 넣었다가 배서 힘껏 쥐어짰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잠기운이 달아난 저는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천천히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불같은 목소리가 제 귓가에 홧홧하게 꽂혔다.
“누워라.”
“..선생님?”
혹시 화가 나셨나? 잠시 당황을 했다가 그 뒷모습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대로 어정쩡하게 일어났던 상체를 다시 뒤로 눕혔다. 이불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나고, 아마 기척으로 제가 누웠다는 것을 다 알았겠지만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가만히, 아마도 금빛 시선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고 있을 이는 조용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마른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아프게 울렸다.
“아가. 무리하지 말라고, 반드시 몸을 챙기라고 하였는데.”
“.....”
“이게 무어냐.”
천천히 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그는 쥐어짠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서 이마 위에 얹어주었다. 눈 주위까지 한꺼번에 덮치는 어둠에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수건 위에서 조금 망설이던 손이 제 눈을 가린 것을 조금 위로 올려주었다.
가면이 없었다면, 아마 그의 눈썹이 팔자로 꺾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무룩한 게, 아픈 건 저인데 그가 더 신경을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쑥 뱉어냈던 화도 오래 가지 않았다. 성질을 낸 다음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 같은 저 눈빛과 달싹거리며 말을 하지못하는 입술.
조금은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그에게 들이대면서 제 마음을 전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부듯하면서도 용기를 냈다는 게 가슴 찡해지는 부분이었다. 결국 제게 고개를 끄덕여준 이는 이렇게 다가와 아플 때 저를 걱정해 주고, 신경을 써준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 넘겨주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마치 조금이라도 잘못 다루면 깨지는 물건을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게 느껴졌다.
얇은 창호지를 흔들법한 바람이 불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제 곁에 있는 이에게 정신이 팔려서 뒤늦게 눈치를 챘는데,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어쩌면 이렇게, 홀로 빛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밝게 보였을까.
달빛 한 조각 없는, 구름이 많이 끼고 꼭 눈이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과 발끝을 얼릴 날씨임에도 그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느낌만 약간 시무룩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다. 소스케, 이렇게 열이 나는데..”
“선생님만 계신다면요.”
한때는 정말로 꺼내놓기 어려운 진심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안의 모든 분노를 죽여버릴 만한 이가 나타났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당장 찢어 죽이지 않으면 제가 흔들려버릴 것 같았다.
결국에는 흔들렸고 그게 옳은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도 다 저 존재에게 제가 미쳐버려서 착각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착각이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어야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에게 그런 존재였고, 다른 길을 터준 선생이었으며, 하나뿐인 제 연인이었다.
이불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확실히 제 몸에서 열이 나고 있는 게 맞았다. 그의 손은 한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물을 만졌기 때문일까? 아침에 제 대장이 떠다 놓은 물이었다. 아니면 바구니에 담긴 물까지 새로 떠오신 건가? 어쨌거나.. 일단은 그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제 가슴 위로 얹어진 손등에 콩닥거리는 심장이 느껴질까. 그랬으면 좋겠다.
안경이 없으니 콧등이 허전했다. 가닥가닥 넘겨진 머리카락과 올려진 물수건. 그것이 그려낸 그림자로 살짝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은 잘 보였다. 감기만 아니었다면, 옮겨질 병만 아니었다면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그의 몸을 끌어당겼을 것을.
어쩔 수 없이 손으로만 만족을 해야 했다. 그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다가 이내 제 손을 꽉 잡았다. 옷깃만 스쳐도 피부가 아팠지만 그의 손길에는 오히려 치료를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더 만져줬으면 했고 더 돌봐줬으면 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선생님의 돌봄이라고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간절했다.
“낮에는 일도 못했다지.”
“누가 그런 소리를..”
“내가 누군가에게 들어야만 네 소식을 알겠느냐.”
네 것이라면 다 알 수 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린 그는 남은 손으로 열이 오른 제 볼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내려가는 손등이 차가워서, 꼭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는 마치 제 생각을 다 읽었다는 것처럼 손바닥을 넓게 펴서 제 볼을 감쌌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자 저절로 숨이 조금 찼다. 가슴이 작게 부풀었다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상체는 꼿꼿하게 세운 채, 본인의 잘못을 속죄하는 인간처럼 머리를 숙이고.. 느릿하게 감기는 눈꺼풀 뒤로 사라지는 금빛에 잠시 애가 탔다가, 이렇게 안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랬다가.. 저는 언제나 선생님 앞에서 미숙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이 다 무색해질 정도로 어리석어졌다. 어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발버둥 치는 인간 같았고 그저 울부짖음으로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호로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저를 유심히 바라봐주고, 품어주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우면서 감사하고 또 행복하고. 조금씩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아마도 이건 감기 때문일 것이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은 현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제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그가 너무나도.. 열로 달뜬 머릿속은 자꾸만 같은 단어만 반복하며 생각했다. 평소처럼 능숙하게 그의 앞에서 대처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저는 아프고 약했으며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의젓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앙 다물었다. 다 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던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동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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