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탐구자 (2)
소녀들
하도 오랜만에 보는 탓에, 누구냐고 물을 뻔했다. 이번엔 거의 한 달 만이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흐려진다.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연두색의 긴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맞춰 휘날렸다. 두 눈동자 색이 노란빛과 하늘색으로 서로 다르다. 위에 걸친 윗옷은 체구에 맞지 않게 커서 소매가 거슬린다. 작년에 산 끈이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아직도 신고 있다.
싱긋 웃고 있는 여자아이가 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스칼렛은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레이시, 오랜만이야.”
“응. 옆은 누구?”
예고 없이 찾아온 레이시의 시선은 월아를 향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보이지 않다가 이럴 때 찾아오다니 기막힌 우연이었다.
“인사해. 월아라고 해. 사막에서 쓰러져 있던 걸 데려왔어. 설명하자면 긴데… 지금 예전 기억이 없는 상태라서,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당분간은 우리 탐험대에 있기로 했어.”
마주칠 일이 적다고 해도 설명해 둘 필요는 있다. 일단은 표면상으로 동료가 될 사이다. 월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시 레이시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얘가 레이시. 전에 말했던 우리 탐험대 다른 한 명. 앞으로 친하게 지내.”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고 손을 마구 흔드는 레이시를 상상했는데, 의외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월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 초면인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이 둘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데.
“밖에서 왔다고….”
레이시가 작게 중얼거렸다. 몇 초간 정적이 이어진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약간의 조바심이 느껴진다. 다행히 레이시는 금방 다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 표정으로 돌아왔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오른쪽 손을 뻗는다.
월아는 별 반응 없이 그 손을 잡았고, 레이시가 가볍게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아까 묘하게 반기지 않는 듯한 태도였는데 기분 탓인가. 의외로 낯가림이 있는 편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월아구나.”
“응, 원래 이름은 아니야. 스칼렛이 지어줬어.”
“그래그래. 잘 부탁해.”
“마찬가지야.”
둘은 다시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불필요한 걱정이다. 레이시는 스칼렛이 앉은 소파 쪽으로 다가와 바로 옆에 앉았다. 자신보다 키가 작아 귀여운 소동물 같다.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게 된다. 레이시는 손길을 딱히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디 다녀왔는지 물어봐도 돼?”
“나쁜 괴물들을 처치하고 있었지. 용사라면 당연한 일이야. 감사하지 않아도 돼.”
“하하….”
바로 얼마 전에 미친 도마뱀을 만나서 죽을 뻔한 이야기는 일단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둘의 이야기를 듣던 월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용사가 뭔데?”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을 떠나서, 레이시를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렇게 당황한다. 말과 행동 양쪽이 나이에 비해 어린아이 같다. 스칼렛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말을 해서 조금 놀랐었다. 단순한 사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이 선택받은 용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특이한 컨셉이라도 정한 건가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단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전해져 왔다. 그래도 주변에 피해를 주거나 사고를 치는 일은 없으니 좋을 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고 있다.
“용사는 세상을 구하는 존재지. 악의 무리를 무찌르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대단하지?”
“레이시는 늘 이렇게 얘기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레이시는 자랑스럽다는 듯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월아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오해할까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적당히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상한 사람들이 있더라.”
레이시는 식탁 위에 놓인 주스를 병째로 들고 들이키더니 그렇게 이야기했다. 원래부터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내용물은 금세 동이 났다.
“어디에?”
“시장 주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토끼 귀를 가지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이대로면 재앙이 닥쳐서 불야성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어. 사람들은 그걸 보고 꺼지라며 난리를 쳤고.”
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 옆에 양손을 올리고 그 토끼 귀라는 사람의 흉내를 냈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돌아오면서 봤던 흰 로브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예전에 이상한 것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런 쪽과 관련 있나 하는 생각이 드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종교 쪽으로는 아는 것도 적다.
“재앙?”
“몰라. 뭐가 이 주변에 왔다고 막 그러더라. 자세히 듣고 싶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못 갔어.”
월아의 물음에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덴 가까이 안 가는 게 나아.”
“응응.”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안 돼.”
레이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되는 건 언니로서 당연한 일이다.
“다음에 스칼렛이랑 같이 나갈까?”
가만 쓰다듬을 받던 레이시는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레이시가 탐험을 같이 나가겠다고 먼저 말한 게 이 탐험대 결성 이후로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탐험을 나간 게 언제였는지도 까먹었다. 그것도 고작 숲 구역을 조금 돌다 온 게 전부였고. 그 거리는 탐험이라기보단 산책에 가까웠다.
“정말?”
혹시 농담 삼아 말한 건가 싶어 재차 되물었다. 레이시는 히죽 웃는다. 팔을 뻗어 스칼렛의 볼을 검지로 콕 찔렀다.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응. 스칼렛이랑 같이 가고 싶어.”
“난 언제든 괜찮은데.”
“나도 매일 같이 있으면 좋지만… 음. 용사는 바쁜 거니까. 세상을 구하려면 부지런해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또 몰랐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좀 더 해 봤어야 하는 건데. 항상 엉뚱한 말만 늘어놓지만 귀여운 동생이자 동료다. 오랜만에 함께 탐험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월아도 가는 거지?”
“나? 아, 그래야지.”
멍하니 둘을 지켜보고 있던 월아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던 것인지 잠에서 깬 사람처럼 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술 마시러 갔어?”
“어… 아니.”
대화하는 내내 뭔가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리처드였다. 레이시는 리처드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듣지 않아 모르지만. 리처드가 머리 한 쌍의 도마뱀한테 물려 병원에 갔다고 말하면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둘러댈 거리를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월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리처드 아저씨는….”
순수한 아이를 위해서는 하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스칼렛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용사를 위해서 마법 물건을 가지러 갔지.”
그 말을 들은 레이시는 만세! 하고 두 팔을 활짝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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