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찬탈 | 답록
에필로그
나 좀 잡아줘.
네가 그렇게 말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인데 감정들은 신중하다. 고요하게 흐른다. 왜냐하면 이 말을 너에게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모든 섬세한 감정들이 이제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주 입에 담는 단어는 본인에겐 무거워지고 타인에겐 가벼워진다. 그러므로 대신 나는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어떠한 것이 될지 이야기한다. 나는 이미 너에게 닿았다.
남은 것은 네가 나의 사랑에 포근히 기대게 되는 것, 그뿐.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안녕하세요, 제임스.”
“오랜만입니다, 알레한드로. 이번 상담은 3주만이지요?”
알레한드로는 상담사 제임스 데이비스의 센터로 들어갔다. 그 센터는 미국에 기반을 둔 제임스가 알레한드로를 편안히 상담할 수 있도록 마련된, 오직 그들 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알레한드로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요? 오늘은 신체로 트라우마를 감각하는 세션을 진행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3주나 떨어져 있었으니 이야기가 참 많겠네요.”
제임스는 약간 통통한, 푸근한 인상의 중년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이제 이 ‘아저씨’를 정말 좋아하고 신뢰하는 상태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제임스는 산티아고 삼촌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다. 그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만으로도 6회기 정도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알레한드로가 제임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지난 3주간 있었던 일들을 떠들기 시작했다. 예리하게 벼린 언어는 간데없고 말은 두서없다. 그만큼 상대가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알레한드로는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요.”
제임스는 자세를 고쳐앉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가진 듯했다. 제임스가 물었다.
“어떤 사람인가요?”
“외제니라고, 학교 동기에요. 권능은 예언이고요.”
“어쩌다 좋아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나요?”
“모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상담을 거부하던 시절에 그애가 없었으면 완전히 부서졌을 거예요.”
알레한드로는 대체로 상담에 꼬박꼬박 나갔고 몹시 협조적인 내담자였지만, 딱 한 번 상담을 한 달 정도 거부한 적이 있었다. N.N.으로서 벌인 일이 파국으로 치닫고 그를 믿은 사람들이 산티아고처럼 내걸렸을 때. 수많은 삼촌이 내걸린 듯한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던 때, 알레한드로는 상담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제임스 앞이라고 해도 그 이미지를 재구성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알레한드로는 다시 그러한 착란을 짧게 겪었다. 그래서 상담을 나가는 대신 알레한드로는 그 시절을 외제니와 함께했고, 마침 같이 부서져가던 그들은 서로를 지탱했다. 제임스 데이비스가 알레한드로를 다시 만난 시점은 이미 알레한드로가 살인자가 되고 난 뒤였다.
“아, 그 시절 같이 지냈다던 분이 그분이었군요.”
“네. 그애는 이제 미국으로 돌아간지 한참 되었지만, 계속 생각나요. 그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주 깊이. 그애는 항상 ‘땅에 닿지 않은’ 상태에요. 그래서인지 자신을 함부로 다루고 남이 그러는 것도 별로 개의치 않아요. 그 중에서도 특히 저한테는 많이 약하죠. 제가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쉽게 내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원하는 게 뭔가요?”
“많죠. 한 번 자보는 것도 있고.”
“하지만 요구하지 않았군요?”
“네. 제 욕심으로 끌고 다니다가 부서뜨리기에는 너무 소중하니까요.”
“사랑이군요.”
“네.”
“그런데 제 눈에는, 왜 알레한드로가 불만스러워 보일까요? 단순히 지금 이루어질 수가 없어서만은 아니죠?”
알레한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한드로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제임스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우호적이고 신중한 눈은 알레한드로를 천천히 들여다보듯이 응시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말한 것과 정반대 내용인데도 놀라지 않는군요, 제임스.”
“저는 알레한드로가 그 말을 스스로 하기를 오래 기다려왔어요. 당신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분출 상태일 때보다 더 필사적이었으니까요. 당신은 트라우마가 주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고 그건 N.N. 활동도 있겠지만 모두를 사랑하려는 태도도 포함되지요.”
알레한드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못 당해내겠다니깐……. 맞아요. 저의 사랑은 산티아고가 나에게 준 거죠. 정확히는, 산티아고의 시체가 나에게 준 거죠. 전에 당신이 저보고 N.N. 활동은 저의 자살시도라고 표현했던 거, 기억나요?”
“기억나지요.”
“저는 이제 끊임없이 자살시도를 하면서, 또 살아내기 위해 안전장치를 만드는 거예요. 사랑으로 저의 삶에 촘촘한 그물망을 세우죠. 어느 날 제가 진짜 추락했을 때 받쳐주도록. 저는 외제니를 사랑하게 되었고, 제가 부서지면 외제니도 같이 부서질 걸 알아서 버텼어요. 사랑이 절 받쳐준 거죠.”
제임스가 클립보드 위의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제임스는 말하기 위해 잠깐 쓰는 것을 멈췄고 그때 정면으로 알레한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사랑하기 싫다고 말했죠.”
“네.”
“왜냐하면 사랑은 당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네.”
“산티아고의 시체가 당신에게 강요한 것이니까.”
“네.”
알레한드로는 세 대답 모두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임스가 말했다.
“이 대답들을 소리 내어 말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부서지는 기분이요. 왤까요? 전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을 그득그득 채워서 이 목숨을 붙여 놓는 게 지겹다고요.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자연스럽게 죽으면 되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일단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당신의 죽고자 하는 열망 자체가 죄책감과 수치심과 충격이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갈망 또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강요’라는 관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알아요, 제임스. 자주 알려주셨으니까요.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잘 되진 않지만요.”
알레한드로는 제임스가 미리 잡아둔 스케줄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마 이 화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번 회기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제임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떤 병리는 평생 안고 가야 할 수도 있고, 당신의 사랑이 그렇게 당신에게 굴레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걸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제가 이 상담을 진행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도망 이상의 선택지를 주고 싶기 때문이지, 모든 걸 ‘고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의외의 관점이었기에 알레한드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임스가 말을 이었다.
“그분은, 지금 당신이 죽으면 부서질 것 같나요?”
그 말에 알레한드로는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하진 않았다.
“네.”
“그분을 위해서라면 버틸 수 있나요?”
“네.”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죠. 그건 당신에게도 ‘강요’받아서 생긴 사랑 이전에, 당신 본연의 사랑이 있어서 그래요. 그것마저 부정하니 당신 자신을 부정해서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 드는 거죠. 강요가 싫다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그것은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 같나요?”
이번에 알레한드로는 정말 길게 고민했다. 답은 짧았다.
“네.”
“그러면 사랑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것이 당신을 구하기 때문이라서, 그 수단으로써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당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죠.”
알레한드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남은 일정은 트라우마를 신체감각으로 느끼는 세션으로 넘어갔다.
알레한드로는 상담이 끝나고 외제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제니는 웬일로 곧바로 받았다. 알레한드로는 평소처럼 안부를 물었고 외제니는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그 전화를 하면서 자신이 상담 시간 동안 했던 말을 생각했다. 외제니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어떤 영역에서는 남이 함부로 자신을 침해해도 별다른 거부나 저항이 없어서 만약 알레한드로가 원하는 게 있다면 아주 쉽게 얻어낼 수 있다는 말. 알레한드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언가 원하면’ ‘얻을’ 수 있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알레한드로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냥 전화해 봤어. 잘 자.”
알레한드로는 전화를 끊었다.
타이밍이 와도 잡지 않았다. 그건 알레한드로가 외제니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자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가지고 다니기엔 아직 너무나 연약해서, 부서뜨리고 싶지 않아서,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가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프롤로그
무도회 발코니에서 우리는 한가로이 대화를 나눈다. 네가 나를 도발한다. 나는 너의 그런 시도가 우습다. 흔들어 보겠다고. 자기 자신이 가장 흔들리기 쉬우면서. 그래, 이런 것에는 어울려 줘야지. 나는 이런 기묘한 기류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을 유보해둔다. 키스 같은 것들. 영화나 드라마나 일상에서는 그토록 쉽게 일어나는 것들. 하지만 나는 미뤘다. 때로 어떤 것들은 본론보다 그 이전의 긴장감이 더 재밌기 때문에.
나는 조금 제멋대로 행동한다. 실례해도 되냐고 말하면서 허락도 받지 않고 행동한다. 손을 야릇하게 쓰다듬는다. 뺨에 입맞춤을 받고 손등에 입맞춤으로 화답한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신경 쓰여.”
무엇이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을까?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이다. 나는 너에게로 침범한다. 재밌는 불장난의 하이라이트, 그리고 폭발과 소멸.
그저 거기까지일 뿐인 그런 흔들림.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섬세한 것들은 트라우마가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한 건지도 모른다. 모든 흔들림을 사랑하겠다 선언해놓고서도 자신이 흔들린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런 섬세한 것들은 무언가가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그렇게 나는 흔들림을 사랑하게 된다.
나 자신도 모르는 채로.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