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ysement (1)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을 뜻함.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물건이 있는 표현을 의미한다.
수많은 차를 몰아봤지만 경찰차를 몰아본 건 또 처음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찰차 안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은 이번 일의 동업자는 점프 슈트 모양의 흰 작업복을 벗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옷을 벗는 게 어렵긴 하다.
조력자에게 차를 한 대 준비해 달라고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 답장 하나는 빠른 녀석으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갤러리 근처 산길에 자동차 한 대를 세워뒀다는 연락이 되돌아왔다. 갤러리에 버려두고 나온 차는 아쉽지만 그대로 경찰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손이 닿으면 다른 동업자가 되찾아오든가 하겠지.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서진은 경찰차의 시동을 껐다. 백미러 뒤의 블랙박스에서 메모리 칩을 꺼내 부숴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뒷좌석에 실어두었던 이아영의 머리가 담긴 봉지를 들고 재빨리 차를 갈아탔다. 이번에도 조수석은 은수의 차지였다.
쉴 틈도 없이 시동을 걸고 악셀을 밟는다. 좀 구형이지만 쓸만한 차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앞으로 쌩하니 나아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국도로 빠졌다. 연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없지는 않다. 그래도 속도를 아주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덥다. 에어컨 틀자."
은수가 단발머리를 홱 쓸어올리며 말했다. 운전수 서진은 잔뜩 나열된 버튼들을 한 번 쓱 훑고는 에어컨을 켜 주었다. 냉각되기 시작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나왔다.
"더워, 더워. 감식반은 이걸 어떻게 입고 일한대."
수사 현장 근처에 있던 여벌의 감식 슈트를 훔쳐 입었다고 한다. 아니, 실은 여벌 슈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감식반원이 있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경찰 측 사람으로 보이기에는 제격인 차림이었기에 덥석 갈아입은 듯했다.
서진은 그녀가 옷을 훔칠 동안 현장을 돌아다니며 경찰차의 차 키를 탐색했다. 불룩해 보이는 주머니에는 일단 손을 넣고 봤다. 세 번 만에 찾은 게 기적이었다.
탈출 준비를 마치고 한선혜에게 사인을 주었다. 자수의 의사를 보여 만인의 주목을 끌라는 사인이었다. 그녀는 멋지게 해냈고, 두 사람은 소나무가 망을 보는 사이 경찰차를 탈취해 머리와 짐을 챙겨 들고 갤러리에서 도망쳤다.
"그 사람들은 옷을 가볍게 입겠지."
"셔츠보다 가벼운 옷이 어디 있다고 그래?"
뒷자리에서 안전벨트를 맨 대형 비닐봉투가 차체의 움직임에 따라 짤그락짤그락하며 얼음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말에 맞장구치는 것처럼도 들린다.
"아, 더워. 가려워. 나도 좀 벗을까."
전방에 위험 요소가 없는 걸 확인했다. 끼어들 차도 없고 커브도 없다. 서진은 핸들에서 오른손을 떼어냈다.
머릿가죽을 잡아뜯듯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다가, 이내 두피와 분리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전혀 곱슬거리지 않는 진짜 머리가 가발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턱 밑까지 오는 직모 단발이 가발망에 싸여있다.
"와~ 시원해!"
"땀 냄새 나. 다시 써."
"어제도 씻어서 썼는데 냄새는 무슨 냄새."
곱슬거리는 가발을 뒷좌석으로 대충 던졌다. 머리가 담긴 비닐봉투 옆으로 툭 떨어진다. 은수는 백미러로 그 모습을 흘기다가, 시선을 앞유리로 돌렸다. 손만을 움직여선 조수석의 창문을 반쯤 내려버린다.
"울산 어디라고?"
서진이 물었다. 여전히 왼손 하나로 핸들을 잡은 채 이제는 입술 밑에 붙였던 가짜 점을 떼어내고 있다.
"말해주면 아나?"
"네비에 좀 찍어봐."
"이대로 쭉 도로 타고 가. 빠질 길은 내가 알려줄 테니까."
"아니, 이 좋은 세상에 왜 네비 냅두고."
"기계는 믿을 게 못 돼."
그냥 길만 알려주는 순박한 기계일 뿐인데 못 믿을 게 있나 싶었지만 서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 시내로 빠져서 담배 좀 사 가자."
"담배?"
"이틀 동안 안 피웠더니 진짜 죽을 맛이야. 니코틴 패치를 몇 번 갈아붙였는지......"
"그거 보통 하루에 하나씩 붙이는 거 아니었나?"
"아아아, 절대 아니야. 미치는 줄 알았어."
"시신을 두 구 치울 뻔 했군."
그리 말하면서도 은수는 시내로 빠지는 길을 안내했다. 이상할 정도로 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전에 부산에 살았던 적이 있었던 걸까.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지 않은 갤러리로 향할 때도 그녀는 길 한 번 헤매지 않았다.
"던힐 육미리를 끔찍하게 피워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오래 살아서 뭐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연기한 조사원 김민석은 그녀의 명령을 따라 핸들을 꺾었다.
정말로 해안 근처에 있는 납골당이었다. 규모도 별로 크지 않다. 손님이 없는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아영이 생전 원했던 친구와의 재회를 성사시켜주었다.
납골당에 머리만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아영은 이미 죽었으니 저 세상에서 친구를 만났을 텐데. 불순한 생각이 들었지만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반기를 들지 않고 수행하는 게 조사원의 직업 윤리였으므로 민석은 말없이 눈앞의 유골함을 들여다보기나 했다.
이름이 석 자 쓰여 있다. 어떤 명단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흔해 빠진 이름이었다. 옅은 옥색으로 빛나는 유골함 옆에는 고인의 생전 폴라로이드 사진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고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이아영이 함께 찍힌 사진이다. 두 사람 모두 웃고 있다. 친해 보인다.
"남잔가?"
"내 눈에는 여자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금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은수는 품 안에 아영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손잡이를 묶어 포장했던 대형 비닐봉투를 열어 이아영의 얼굴이 빼꼼히 나오도록 했다. 눈은 감고 있지만 얼굴은 제대로 유골함을 향해 있다.
"만족하셨겠지. 이 정도면."
그녀에게 건네받은 휴대폰으로 아영이 유골함을 향한 모습을 찍었다. 아영을 들고 있는 은수는 검은 장갑을 낀 손밖에 나오지 않는다.
선혜에게 사진 전송을 마친 두 사람은 서둘러 납골당을 뒤로 했다. 납골당 건물과 주차장을 둘러싼 담벼락 너머로 해안이 죽 펼쳐져 있었다. 갈매기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연휴에 먼저 떠난 사람을 보러 오는 이는 얼마 없는가 보다.
"연락이 올 때까지 좀 쉴까."
품에 아영을 안은 채 은수는 담벼락 바깥으로 나섰다. 해변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양의 모래가 바다 앞쪽에 쌓여 있었다. 해수면이 올라간 건지 모래가 유실된 건지 혹은 둘 다인 건지 알 수가 없는 광경이다.
두 사람이 줄지어 걸어다닐 정도는 되었다. 아영을 안은 은수가 먼저 모래 위로 발을 내딛는다. 민석은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던힐에 불을 붙였다. 각별하고 강렬한 맛이 목구멍을 때렸다.
"그건 어떻게 할 거야?"
"머리 말하는 건가?"
"응."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해야지. 바다에 버리라고 하면 버리고, 근처에 두고 가라고 하면 두고 간다."
머리 없이 장례를 치르는 건 곤란할 테니 높은 확률로 후자가 선택받지 않을까.
독한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바로 옆에서 파도가 몰려왔다가 도망간다. 하기사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파도든 바람이든 저 멀리 도망가고 싶어질 거다.
"난 뭐라도 얻어가긴 했는데, 그래서 당신은 대체 왜 갤러리에 자원했던 거야?"
"너랑 다르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농담하지 말고. 뭐 찾고 있었던 거 아닌가? 돈 되는 소장품이라든가."
"내가 그렇게 질 나쁜 그림 도둑으로 보여?"
우뚝 제자리에 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공교롭게도 신장이 비슷해 시선은 일직선상에서 맞는다. 품에 안긴 이아영의 얼굴은 이제 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구두가 만든 발자국 한 줄이 모래 위에 선명하게 남았다. 제 발자국도 등 뒤에 남아있을 것이었다. 파도가 조금 높게 친다면 전부 지워질 흔적이긴 하다.
쏴아, 하고 파도가 다시 물러간다.
은수의 입가에 호선이 걸린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단발머리가 올라간 입꼬리를 미묘하게 가렸다.
"거기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었을 뿐이야. 영구적인 상실을 겪은 인간들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끔찍한 작품을 만들어내거든."
영구적인 상실. 한선혜는 다리와 손을 잃었고, 안승현은 청각을 상실했고, 오지민은 특정 색상을 구분하는 시각을 잃었다. 지민이 적록색맹이라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젯밤 객실에서 은수가 이렇게 언질해주었다.
색약이나 색맹 같은 색각 이상을 가진 이들은 작품의 배색에 있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는 한다. 평범한 시각을 가진 이라면 웬만해서는 하지 않을 배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거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오지민 정도의 퍼포먼스에 이르면 그건 더 이상 옳지 않은 배색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독특하고 오묘한 배색으로만 보일 뿐이다.
오지민의 연작 『평생의 친구』. 첫 번째 작품의 모델은 필름 카메라. 두 번째 작품은 달팽이. 그리고 세 번째가 아킬레스건을 뜻하는 독화살. 이는 각각 그녀 자신과 친한 친구인 안승현 작가, 그리고 스승 한선혜를 의미하는 것이리라는 해석을 그녀는 내놓았다.
"상실을 겪으면 보편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보편에서 벗어나 비정상의 바운더리로 밀려나게 되는 거지. 시대가 지나면서 보편의 범위는 점점 확장된다고 다들 착각하면서 살아가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상실은 아직 비정상과 결부되어 취급된다고."
그리고 그녀는 품에 안은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보편과 정상을 숭배하는 인간들의 틈새에서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는 상실인들의 작품에는 가끔 헤아릴 수 없는 양의 감정이 실려. 비보편 인간의 에고를 끔찍할 정도로 쏟아부은 비정상 작품이 간혹 세상에 나오고는 한다는 거지."
민석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손가락으로 툭툭 쳐 털어냈다. 담뱃재가 파도의 먹이가 되어 쓸려나간다.
"피그말리온 신화 정도는 알고 있겠지?"
"조각상이랑 사랑에 빠진 남자였나?"
"그래도 얼개는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군.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조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에게 소원을 빌어 조각을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지."
"대단한데. 나도 신한테 소원을 좀 빌어볼까."
"우리 세계에서도 가끔 그런 일이 생기고는 한다는 거야."
남은 담배를 맛있게 빨아들이던 민석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인간의 강렬한 에고와 감정의 집합체는 이따금 새로운 용도를 얻지. 살아움직이는 조각상이나, 곤죽이 된 인간을 되돌리는 석판, 몸을 담근 사람을 잡아먹는 욕조."
결론이 났다. 평범하게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다. 이 바닥에 제정신인 인간이 얼마나 있겠느냐만, 아무리 그래도 오컬트에 심취한 인간은 처음이다. 사이비 종교에라도 빠져있는 건가. 천안에서 보았던 그런 이상한 종교 같은 거에?
"그런게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보이질 않더군. 수장고도 외부에 있고."
아니, 결국 작품 도둑질을 하려고 했다는 거 아닌가?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한 원론적인 질문을 애써 삼킨다. 맞장구나 좀 쳐 주는 게 낫겠다.
"이전에는 그런 걸 찾은 적이 있고?"
"그럼."
"뭐였는데?"
"입에 담으면 곤란한 작품."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리려고 했다. 두통에는 담배가 특효약인 법이라, 다 피운 꽁초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새 걸 꺼내 꼬나물었다. 오컬트에 심취한 동업자는 어느새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봉투 안으로 아영의 머리카락이 비쳐보인다.
"머리는 두고 가라는군."
"정문에라도 놔 두면 찾아가겠지. 돌아가자."
걸어왔던 길을 따라 돌아간다. 파도에 쓸려 깨끗해진 모래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남긴다. 축축한 모래가 서걱서걱하며 밟힌다. 파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변으로 달려와선 두 사람의 흔적을 게걸스럽게 삼켜버렸다.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운전은 민석의 몫이었다. 조수석의 시트를 뒤로 넘기고 누운 은수는 딱히 잠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편안히 누워선 차창 너머의 풍경을 관망하거나, 연락을 확인하거나 할 뿐이었다.
"아."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던 은수가 외마디 신음을 뱉었다.
"도청기 전원이 나갔네."
"이제야?"
"그 조그만 게 거의 하루나 버티고.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
소나무의 구두에 붙였던 도청기 얘기였다.
소나무와 진유신이 같은 명단에 올라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민석에게 아는 지인이 정보를 흘려주었다. 네가 찾는 그 사람들 이번에 무슨 리셉션에 참가한다는데,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냐면서.
갤러리 오픈 기념 자리라니 가 봤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장소도 부산이다. 민석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에서는 거리가 상당히 되어 관두려던 찰나 지인이 은수를 소개해주었다.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조사원인데 개인적인 목적으로 그곳의 도슨트 자리에 지원했다며, 괜찮으면 너도 그 자리에 끼워넣을 수 있을 거라고.
"동지가 있으면 그래도 재미나지 않겠어? 연휴에 휴가 가는 셈 치고 다녀와 보라고. 후방 지원은 이쪽에서 해 줄 테니까."
함께할 동업자도 있다.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개인적인 흥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휴에 집에서 방송도 켜지 않고 누워있는 것보단 이쪽이 몇 배는 재미있을 거다.
그래서 민석은 은수를 따라 부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최은수라는 이름은 당연하지만 가명이라 했다.
"김민석이라니. 정말 평범하다 못해 가명이라고 떠벌리는 것 같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모였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좀 더 젊어 보이기도 하고, 말투만 들어서는 늙어 보이기도 한다. 이쪽을 당연하게 하대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쩌면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지도 몰랐다.
"품질 좋은 가발이네. 어디서 샀어?"
"맞춤 제작."
"쓸 줄은 알고?"
"당연하지."
가발망을 쓰고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바르고 있으니 그녀는 별종을 다 본다는 눈으로 이쪽을 빤히 관찰했다.
"머리는 대체 왜 기르는 거야? 짧은 게 변장하기 편하지 않나?"
"멋부리고 싶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걸 무시하고 입 아래에 점을 붙였다. 곱슬거리는 가발도 썼다.
단순히 스타일을 바꾸는 수준이 아닌 이런 본격적인 변장을 할 때는 연기가 또 중요하다. 머릿속으로 지인들의 얼굴을 쭉 늘어세워 보았다. 누구의 인격을 연기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도슨트로 위장취업한 이상 갤러리에 초대된 손님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번의 타겟인 소나무와 진유신과도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명단을 쭉 살펴보니 저번 일산 사건 때 얼굴을 한 번 보았던 진유선 변호사도 있다. 어쩌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오동현과도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평소의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격을 가장하는 편이 낫다. 소극적이고, 손님 응대에 서툴러 동료 도슨트에게 의지하는 인간상을 연기할 필요가 있다. 곧장 이웃의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서도진이다. 서도진을 모델로 연기하자.
"박서진."
"음?"
"박서진이라고 불러줘. 김민석이 아니라."
"김민석보단 훨씬 나은 이름이네. 좋아."
민석은 그녀에게 자신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행동을 함께 하는 이상 서로의 목적 달성을 돕는 게 범법자들의 유대 형성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은수는 목적을 공유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혼자서만 비밀을 털어놓은 셈이 되었군, 하고 그가 조금 후회하던 찰나.
"도청기 붙이는 거 정도야 간단하지. 도와주지."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난 갤러리를 돌아다닐 수 있기만 하면 돼. 네가 도와줄 일은 하나도 없으니 안심하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해."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소나무에게 도청기를 붙였다. 상당히 눈에 띄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돌발 사태에 직원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깨진 잔의 파편을 주워 모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발 좀 들어달라고 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다른 곳도 아니고 구두에 도청기를 붙인 것이다. 이래서야 그가 하는 말이 잘 들릴까 의심스러웠지만 도청기의 성능은 생각보다 좋았다. 더군다나 상상도 못한 고립 사태에서 묘하게 이득을 보았는데, 소나무가 객실 안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온전하게 도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견지명이라는 거지."
허풍이 섞인 말이었지만 민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이미 1인용 침대에 누워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갤러리의 도면을 스마트폰 액정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명이 쓰기에는 비좁은 객실이었다. 하지만 흔적을 방 두 개에 남기는 것보단 하나에 남기는 편이 낫다. 민석이 가발을 쓰고 있는 탓도 있었다. 가발 아래에 가려진 그의 머리카락은 은수와 같은 단발이라, 민석이 홀로 묵었던 객실에서 기다란 머리칼이 나온다면 입장이 심히 곤란해진다.
소나무는 객실 안에서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동행인 진유신과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커플이 아니면 하지 않을 짓을 하다가, 은수의 방문에 깜짝 놀라 서둘러 객실을 나서거나 했다.
이대로 허탕인가, 하며 귀에 도청용 이어폰을 꽂은 채 객실 바닥에 베개도 하나 없이 누웠을 때였다. 은수 역시 침대에 누워 다리를 꼰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수면에는 적합하지 않은 자세였다.
이어폰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네, 선생님. 네, 알겠습니다. 같은 말을 하더니 급하게 신발을 신고 문을 연다. 계단을 내려간다. 자동문이 지잉 하고 열리고, 주차장에 깔린 파쇄석을 조심스럽게 밟는다.
은수를 깨워 객실을 뛰쳐나갔다. 상부의 절반이 유리로 만들어진 연결 통로 너머로 그가 이아영의 차를 뒤지고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아영의 차를 뒤지고 있으니 이대로 갤러리로 향할 심산이 높다. 빠르게 통로를 지났다. 갤러리 정문으로 들어오는 소나무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진 일이라는 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뭐?"
"그 사람은 왜 울었던 거지?"
인간의 머리를 자른 소나무는 울고 있었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피비린내가 나는 방 안에 서 있었다.
꼭,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흐릿한 미소마저 머금으면서......
기이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도슨트 역을 완벽하게 해낸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민석의 질문을 곱씹다가, 대답했다.
"인간은 역치를 넘는 공포 앞에서는 오히려 초연해질 때가 있지."
인간의 머리를 자른다. 단두대처럼 간단하게 잘리는 것도 아니다. 손잡이를 아래로 내려서, 살이 썰리고 뼈가 부서지는 감각을 오롯이 느껴야만 한다.
"머리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꿈이나 가상 세계로 인식한다. 하지만 오감으로 들어오는 자극은 결코 꿈이나 가상 세계의 그것이 아니야. 당연하지. 이곳은 현실이니까. 이미 현실을 차단한 이성은 그런 괴리에서 눈을 돌리려고 애쓰지만 본능은 달라.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거야."
그는 분명 잘게 숨을 떨고 있었다.
"사람의 목을 자르는 행위에서 오는 본능적인 공포는 분명 존재하지만, 이성은 이미 닫혀있기에 자신이 뭘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거다. 일시적인 섬망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지."
한편으로 공포와 희열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신경은 참 단순하게 생겨먹어서 희열에서 오는 흥분과 공포에서 오는 흥분을 똑같이 처리한다는 말이야. 아마 공포로 몸이 떨리는 걸 희열로 오인했을지도 몰라. 의식 레벨이 아닌 무의식 차원에서 말이야. 잠꼬대랑 똑같아. 그렇다면 그 사람이 웃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나?"
"그런가......"
바로 앞의 차가 고속도로에서 나가는 길로 빠졌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등간격으로 늘어선 차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도로를 내달린다. 민석은 담뱃갑에서 던힐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차창을 내린다. 거센 바람이 귓가를 때렸다. 담배 연기가 시속 백 키로의 바람을 타고 사라진다.
소나무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잠시 만났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화풍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많은 걸 배웠고, 훗날의 재회를 기약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만 합니다, 선생님.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십 년 동안 수많은 지역을 오가며 찾아 보았지만 소문조차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목을 자르고,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소나무는 한선혜에게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 인생을 내던졌습니다......
인생을 내던졌다.
내던졌다, 라.
소나무의 인간상에 대해 생각했다. 메일과 sns에서, 그리고 어제오늘의 갤러리에서 보았던 그의 인격을 재조립한다.
겨우 거처를 자주 옮긴 것만으로 인생을 내던졌다는 표현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좀 더 깊고 어두운 뒤틀림이 그의 내부에는 자리잡고 있다.
이를 테면......
최은수는 가산에서 내렸다. 아는 회사에 잠깐 들를 일이 있다고 했다. 알아서 돌아갈 테니 그쪽도 알아서 퇴근하라는 짧은 말을 뒤로 하고 그녀는 빌딩 숲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민석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조력자에게 연락했다. 그는 아직도 부산의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백도화 명의의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 란에 올린 사진을 찍어준 것도 그다. 조만간 수고비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영감님의 사무실 근처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동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 저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렸어요."
몹시 흥분된 어투였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다.
"연휴에 또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동현의 길고 긴 모험담을 들으며, 민석은 익숙한 지명이 쓰인 도로 표지판 아래를 지났다.
짧은 휴가의 종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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