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장난
방 안 가득 찬 커피 향에 고개를 흔들었다. 휴가라지만, 할 일도 없는 몸에 잠은 잘 대로 이미 잤고. 밤샐 일도 없지만 더 이상 커피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테이블에 앉아 이제 막 내린 믹스 커피를 홀짝이며 달력을 집어 들었다. 아직 4월은 아니지만 몇 시간만 지나면 3월이 지나니까 4월로 달력을 넘겼다. 휴가는 이때까지, 하고 친 붉은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그전까지 표시되어 있는 일정은 하나도 없었고, 그것은 핸드폰 캘린더라고 다를 바 없었다. 휴가를 그렇게 바라며 살아왔지만 갑작스럽게 이렇게 긴 휴가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보통 이래도 회사가 굴러가는지, 백야가 특수한 경우라 가능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잠도 잘 대로 잤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다. 어째서일까 믹스커피인데도 쓴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밑에 덜 섞였나.. 들고 있던 커피와 달력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들여다봐야 일정이 생기지도 않을 텐데, 보고 있어봐야 뭐하나 정말 다음 연도부터는 달력 없이 살아도 되겠다. 생각하면서 일어서려는 순간 몇 시간 뒤에 찾아올 내일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4월 1일.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있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괜한 장난이다. 심술이고. 그런데 이제껏 당해온 것들을 생각하면 한 번 정도는 장난쳐도 되지 않을까.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갖은 핑계를 대며 어떤 장난이 좋을까 고민하며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노트장과 펜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이렇게 떠올리면 당신과도 참 오랜 세월을 보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내게 가장 처음에 당신의 얼굴을 보고 떠오른 것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차이가 없다고는 말 못 하고 게다가 당신 특유의 분위기는 몸을 긴장하게 했다. 어른이고 어른스럽다. 비단 자신 말고도 같은 입사 동기에는 많은 어른들이 있었지만 유독 마음이 동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다치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집혔다. 놀랐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구나. 깨달았다.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봐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인간에 대해서는 통달했다고 자만했었으니까. 하지만 깨달음은 아직 부족하다고 일깨워주시는 부처의 말씀처럼 당신은 내게 당혹감을 안겨줄 따름이었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분명 나보다 더 잘 하겠거니 생각한 보고서를 떠넘기지를 않나, 얼떨결에 내가 뱉은 말이긴 하지만 출퇴근길을 이제 막 얼굴 튼 사이에게 기사를 맡기지를 않나, 거기에 종종 아침에 문을 두드리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혹은 여자가 나오지를 않나, 기존의 상식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하물며 새벽 세 시였는지 네 시였는지 여하간 한밤중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보통 이 시간대에 전화라면 부고 소식인 줄 알고 서둘러 깨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너무 시답잖은 부탁이었다.
"줭기사, 여벌 배찌 이쑤면 둘고 와주라아"
혀가 배배 꼬인 말에 무슨 말을 했는지 해석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주소가 들렸고 일단 배지 얘기를 한 것 같으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배지에 관한 것을 떠올리면 사실 가벼운 사안은 아니었다. 특히나 언뜻 듣기로 무당 쪽에 관련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빙의라도 당하면? 썩 유쾌한 모습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스치자 달리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자다 깨서 그것도 빈속으로 이렇게 뜀박질한 적은 없었다. 스마트폰에 겨우 해석해 놓은 주소에 도착하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얌전히 앉아서 이제는 김도 나지 않는 붕어빵을 쥐고 먹으려는 당신을 볼 수 있었다.
"뭐합니까?"
"오, 쩡기사!"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잠도 포기해가면서 달려왔는데, 저는 속 편하게 술이나 퍼마시다가 이제 배지를 잃어버린 것 같으니 심부름이나 시키고, 서류 업무를 모두 내게 몰아줄 때 알아차렸다. 아, 이 사람은 그냥 나를 호구로 보는구나. 내가 그냥 만만해 보이는 젖살도 안 빠진 20살짜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감정을 밖으로 내비친 적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힘 조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서 있던 너를 훅 일으켜 세우려 했다. 혹여나 너무 세게 잡고 들어 올린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분이 나빴는지 당신은 내 몸을 퍽 밀치려 했다. 하지만 취한 사람이 밀어봐야 밀리기라도 하겠는가. 오히려 뒤로 밀리는 당신이었고 그것을 보고 다시 중심을 잡아주었다가 재빨리 손을 떼었다. 취한 사람에게 성질부려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텐데 왜 그랬는지, 차는 안 끌고 왔지만 당신 집이 그리 먼 것은 아니니 안고 가든 부축해서 가든 업고 가든 어떻게든 빨리 데려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제게 기대서 갑시다. 하고 얘기했다. 이 이상 밖에 있으면 정말 감기라도 걸릴 것 같고, 정말 걸리기라도 한다면 내 탓인 것 같아서 내 마음이 아파지는 것이다. 하지만 술자리가 거북했던 탓일까 아니면 내가 선을 넘으려고 했던 탓일까 갑자기 기분 나쁜 듯 인상을 팍 쓴 당신은 정확하게 내 뺨을 후렸다.
“아니, 저는 왜 때립니까!”
찬 겨울이라 그럴까 뺨에 불이라도 댄 것 같이 화끈거림이 느껴졌고, 얼마 안 가서 통증이 느껴졌다. 맞은 뺨을 쓰다듬으면서 정말 맞을 만한 일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내가 무지한 탓인 지 옳은가 그른가는 판별해낼 수 없었다. 드라마라면 내 뺨을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대사와 함께 사랑이라도 피어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기분만 나쁘고 억울했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 건데?
기분은 나빴지만 아까처럼 취한 사람에게 상식선에서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다. 그냥 빠르게 재우고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한 번 빽! 하고 소리 지른 것을 빼고는 아무 말도 없이 네 옆에 서서 걸어갔다. 업기는커녕 부축도 못하는 데 과연 이게 취한 사람을 데려다주는 올바른 방법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별말 없이 얌전히 그리고 꽤 앞으로 잘 걸어 나갔다. 한두 번 휘청거려 심장이 놀란 적도 있었지만 바로 중심을 잡고는 다시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위태롭게 보이던 발걸음이 용케 당신의 집 앞에 도달했고 이제 침대까지만 모시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10분을 그렇게 서있었다. 아파트 비밀번호까지는 알지만, 현관문 비밀번호는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입을 떼었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 놀랐지만 그때까지도 감정이 남아있었나 네 말에 툭툭 말을 뱉으며 그냥 입사 동기로만 지내고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라고 얘기하려 했다. 그런데 네가 고맙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조금이나마 해주는 것에 뭔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우리가 이 정도 사이라는 의미일까, 여기까지가 내 자리인가. 의문만이 남은 채 아파트 공동문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단추도 다 풀어져서 감기에 걸릴 것 마냥 하고 다녔는데 정말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날 아침 주차장, 바래다준 지 4시간 정도 지났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멀쩡한 얼굴로 내려오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되어먹은 체력인가 혹 쌍둥이인가 생각했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단 듯이 인사하고 회사로 차를 몰았다. 만약에 그 반반하게 생겼다던 사람이 배지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려오는 것은 둘이었을까? 잡념과 함께 액셀을 밟을 뿐이었다. 그 뒤로 정말 많은 아침과 밤을 함께 했다. 다양한 사람을 당신은 스치듯 보여줬고 대충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당신 취향인가 보다 하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저곳에 본인이 들어갈 수는 없겠지, 그래 여기가 당신과 내 거리구나. 더 이상 가깝게 갈 수도 가서도 안 되는구나. 어차피 그 이상 허락된 것이 아니니까. 마음을 정리했다. 번뇌이고 잡념이다. 속세에 나온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욕망에 끌리는 본인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 벽을 쌓으려고 안 그래도 딱딱한 말투를 더 견고히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게 그저 사모님, 정기사하고 부르며, 그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야 네가 그럴 사이는 아니라며 거리를 잴 수 있게 도와줄 것 같아서.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절을 나온 지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자신이 죄스러워 감히 먼저 찾아갈 수 없는 절이 있었고 그곳에서 멀리하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먼저 찾아가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서 멀리해야만 하는 자신이 있었다."13년도부터 봐왔으니 우리가 이제 삼, 사, 오, 륙... 8년 차인가? 오래도 봤네. 정기사! 2020년도 잘 부탁해!"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송년회 때 그나마 내게 제정신으로 걸어준 말이 아니었을까? 2차인가 3차에 배지를 저 멀리 던져버리는 것을 겨우 받아내었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도대체 어쩌려고. 술이 들어가서 적당히 취해서 기분 좋게 되면 왜 그렇게 급발진을 하는지, 그때도 그랬다. 언제였지. 이것보다 더 취해서 한 번 침대까지 데려다 드린 날이었나. 나도 취할 대로 취했고 당신도 배지를 집어던지려는 것을 겨우 막고 집에서 5차 하자는 길을 따라가던 중이었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려 대충 술 몇 병 주워 담고 당신 집으로 갔던 날이었다.
"줭기사, 그것도 몰라~?"
아마 키스도 해본 적 없다는 얘기가 중간에 나왔을 때 그렇게 반응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예, 학교 다닐 때 해봤습니다. 하고 속이고 넘어갔어야 하는데 후회하는 것이다.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함을 속세에 내려와서 아직도 깨닫지 못했었는가. 그 길로 당신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자신보다 10cm는 넘게 큰 나를 밀어 넘어뜨렸었지.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어떻겠냐는 욕망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당신이 다가온 순간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이 너무 아파서, 이 심박이 당신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밀어내었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에서 아무런 악의 없이 찰싹찰싹 뺨을 쳐주었다. 입사 초에 있던 일하고 다를 게 뭔가. 서로 선을 넘었고 뺨을 맞고.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음을 삼키었다.
"어우 시발, 야 정기사 오늘은 내가 많이 취했다. 미안"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제 양 볼을 짝! 소리가 나게 치고 난 다음에 당신은 내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예전에는 정말 취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막 말씀하시지 않으셨나. 지금도 엇비슷하게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와는 달리 별말 없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겨우 진정시킨 줄 알았던 심장이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우리 사이입니까. 우리는, 어디가 맞는 선입니까? 목구멍 바깥으로 내뱉을 뻔했다. 겨우 튀어나오려는 것을 입에 남은 알코올 향이 나는 침과 함께 삼키었다. 입에서 나오는 번뇌를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까 뭐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입이 저 혼자 취기에 떠들어댈 것 같아서 겨우 아무 말이나 조합해서 뱉었다.
"예, 괜찮습니다. 진정하시고.. 좀 이런 건 나중에 안 취하면 하시고 그러세요."
비틀거리면서 부엌에 들러 네게 물 잔을 건네주며 했었던 것 같다. 뱉어 놓고도 본인이 뭔 얘기를 했는지 이해 못 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자신도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일어설 참이었는데 상황 파악이 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이렇게 말을 내뱉고 난 그다음 후폭풍이 두려워져서 허둥지둥 현관으로 몸을 옮겼다. 그런 내 등 뒤로 당신은.
"나 해? 내일 해? 내일 술 깨면 해? 해도 돼?"
"아 하십시오! 기억나고 안 쪽팔리면 예!! 할 수 있음 하세요!"
이때다 싶어서 놀리는 당신을 뒤로 두고 신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고는 그 뒤에 등을 기대앉았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그런 얘기를 할 리가 없다. 아까 먹은 술 중에 설마 이상한 것이 있었나? 아무리 취해도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다니. 정녕 있을 수도 있어서도 해서도 안 된다며 다짐을 해오던 일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선을 넘을 거라면 진즉에 넘어갔을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언제나 평정심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이 관계는 유지될 수 있으니까. 다행히도 다음날 아침에 나오는 너는 그날처럼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인사해왔다. 기억 못 하는 건가 싶어서 안심했다. 당신이 이런 일로 거리를 크게 벌리려고 하지는 않는 인물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별말 섞지 않고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출근해야 하는 자신이 슬펐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니까. 천천히 안전벨트를 풀고 이제 내립시다― 하고 당신을 바라보려는 순간, 갑자기 가까워진 당신의 얼굴에 온몸이 굳었으나 그와 반대로 심장은 펌프질을 계속했다. 설마 정말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 갑자기 거리를 좁히는 건가? 정말 다양한 망상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가까스로 다스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신에게 놓은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천천히 감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는 게 더 빨랐다. 립스틱이 떨어진 것 같다는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그것은 핑계로 그저 나를 놀리기 위해서 한 말임을 모를 수 없었다. 몰라서도 안 된다. 혼자 놀래서 진심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이 한 것이 장난임을 알게 되자 굳었던 근육이 자유를 찾고 심장도 평정심을 되찾았다. 평소 같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번 일 이후로 당신은 내게 이상형이 어찌 되는지 혹여나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지? 진짜 키스도 안 해 봤는지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정말 바라지 않던 것이었다. 네 관심이 너무 감사했지만, 당신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버리면 내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거리인지 감도 못 잡게 되니까. 지금도 심장이 아파서 얼마 못가 죽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 10년 차 즈음에는 심장이 못 견딜 것 같았다. 당신이 내게 하는 행동도 행동이지만, 자주 자기 몸 신경 안 쓰고 나가서 종종 다쳐오기도 했으니까. 그때, 끊었어야 했는데.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 속세의 것들을 욕심내고 탐하니 이보다 더한 땡중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여기가 가장 적당하겠지. 네가 반발자국 다가와 줬으니 내가 한 걸음 무르는 게 적정선이겠지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감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냥 이대로 부디 이대로.
하지만 한낱 미물인 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터진 연쇄살인사건과 함께 예기치 못하게 굵직한 사건에 휘말렸다..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영기를 먹고 자라는 원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을 해쳤을지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잡으려다가 다칠 백야 사람들이 생각났다. 혹여나 본인만 멀쩡하고 누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갑자기 잘 가지도 않던 절이 생각났다. 그날 불상을 봐서 일까 불심이 드는 것인지 아니면 도피인지. 여쭤보고 싶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리고 최근 이렇게 꿈에 나와 호통치시는 이유가 무어냐고. 누구에게 같이 가자고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절이니까 좀 같이 가줄 만한 사람. 편히 불러도 부담되지 않을 만한 사람. 몇몇 인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다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부탁해도 되는 것일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옆에 있었고 그냥 넌지시 물어봤다. 내일 절에 좀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당신은 흔쾌히 받아들여주었다. 어느 절로 가야 하나 얘기를 나누던 차에 갑작스레 당신은 얘기했다
"아니면 아예 지금 다녀올까"
반가움에 뛰는 심장을 겨우 누르고 떠오르는 잡념을 지웠다. 그 말을 듣고 팔을 걷어 시계를 보자 세시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잘 수 있을까, 멀지는 않다지만..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냥 가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 아쉬워서. 택시 타고서도 얼마 걸리지 않은 곳. 작은 산길을 타고 오르자 법당이 보였다. 여기가 당신이 얘기한 곳이구나. 법당에 들어서서 예를 갖춘 뒤 앉았다. 생각보다 많은 원망과 죄책감, 두려움 등이 얽혀 있어서 예상처럼 뭐라고 얘기하고 풀어내는 것이 어려웠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도 아닌데 머릿속 생각들은 정리되지 않았고 실타래 마냥 점점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성과 평정은 어디 가고 감정만이 남은 게 어이없었고 또 화가 났다. 감정에 감정이 덧씌워졌다. 너무 오래 속세에서 지낸 것이 화가 되었나? 옆에 앉아있던 당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봄이라지만 아직 추운 밤, 입에 담배를 물었지만 차마 피울 수 없었다. 불을 붙이면 이 감정이 필터를 타고 연기가 되어 삼켜질 것 같아서. 이대로 지우고 무시하고 싶지가 않아서. 다시 담배를 케이스에 집어넣을 즈음에 당신이 따라 나왔다. 좀 더 있어도 되었을 텐데, 별말 없이 당신 쪽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당신은 농담 몇 마디를 던지더니 물어왔다. 무슨 일이 있어서 병든 노모 보듯 그렇게 있느냐고. 뭐라 말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도 않았고. 굳이 얘기해야 하나 싶었다. 이 이상 얘기하는 게 과연 바르게 거리를 재는 것일까? 우리가 그럴 사이인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몰라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여기 지금 말고, 다음에 얘기해드리겠노라고. 나조차 정리되지 않은 말을 내뱉다가 헛소리하는 게 두려워 그 자리를 피했다.
고민은 있었지만 그래도 강원도에 왔다.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와야만 했으니까. 폐교 안에 들어가서 당신이 지하실로 내려갈 때 놀랐다. 혹여나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하는 잡념들과 동시에 원귀들이 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여기서 뚫리고 그대로 원귀가 밑으로 내려가면 더 큰일이 생긴다. 평소보다 창을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고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눈을 떠보니 밀려들어오던 원귀들을 모두 막아내었다는 사실이다. 조금 숨 쉴 여유가 생기니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중 당신이 가장. 두 명 정도 내려가서 상황 파악하라는 팀장님 말씀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앞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서둘러 바깥쪽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았다.
"야!! 정기사!! 존나게 반갑다!!"
다행이다. 얼굴이 밝은 것을 보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구나. 쌓여가던 걱정이 한 번에 무너짐을 느꼈다. 정말 다행이다. 반가움에 달려갈 뻔한 것을 참고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이런 감정에 끌려다녀서는 안 될 상황이니까. 그 길로 누구도 죽지 않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까 맞은 어깨의 통증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얼굴에 설마 다 티가 나는 건 아닌가 생각해 긴장하며 돌아갔다. 학교 바깥으로 나와 걷자 손에 찬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땀을 흘렸던가? 무엇이 그리도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고..
숙소로 돌아와서 의무실에 들린 뒤, 여러 잔소리를 들었다. 다만 무리만 하지 마라. 충분히 쉬어라. 같은 것. 이대로는 잠도 못 들 것 같아 숙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사 휴게실은 들렀었는데 혹시 여기는 어떤가? 터벅터벅 걸어갔다. 오늘은 작은 것들만 나왔던 것 같은데 만약 내일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염통인지 염찬인지 하는 것을 상대로 누구 하나 안 죽을 수 있을까? 휴게실에 가까워졌을 때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흡연실로 갔을 것이다. 휴게실에 앉아서 떡을 우물거리며 씹고 있는 당신을 보았을 때 고민도 하지 않고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때도 당신에게 크게 놀랐었다. 갑자기 사람을 향해 떡을 던지고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날아온 떡을 손으로 받기에는 높이가 애매해서 그대로 입으로 받아냈었다. 한 번 더 받아내고 나서야 당신은 정말 해맑게 웃으며 그만두었다.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잡기에 당신이 즐거워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어떻게 가릴 방법이 없어서 네가 그다음에 던진 물통으로 가렸다. 세 모금 정도 삼킬 때 즈음 겨우 진정된 안면 근육에 평소 같은 표정으로 당신 옆에 앉았다.
"진짜 머리 밀고 절 들어가려고?"
아까 농담 삼아 한 말을 묻길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농담은 정말 하면 안 되는 상인가 보다. 뭐라고 말만 하면 다 진짜 같다고들 하시니, 참. 그 뒤에 이어지는 당신의 말들은 대부분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지금이 뺄 타이밍이라고. 어찌 그러겠는가, 이제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는데. 내가 한 발자국 나서면 남들이 덜 다치고 안 죽을 텐데. 당신을 보면서 입을 떼었다.
"그래서, 손 떼라고 부르신 겁니까? 이 일 그만두라고?"
돌아온 대답은 다시 또 벌어진 거리였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라고. 그냥 내 생각이 궁금했다면서 평소의 내 태도를 얘기하시는 거였다. 정말 내가 호구처럼 굴긴 했나 당신이 보기에는 그저 등 떠밀려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았다. 순간 울컥하고 감정이 튀어 오를 것 같아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이 상황에서 그대로 당신을 보고 있자면 실수할 것 같아서. 괜히 감정을 드러낼 사이는 아니지. 그렇지. 자신을 속으로 타이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런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내게 당신은 생년월일 생시 모두 불러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주라도 봐주시려는 건가 기억 속에서 암호처럼 외운 숫자의 나열을 읊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생일을 챙겨준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는 것을 보아 역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이겠지. 당신은, 당신 생일에 내가 무언가 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칭찬을 할까 아니면 선물을 다시 내게 반송할까.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사주 결과가 모두 나왔다. 결과는 처참했다. 어떻게 그렇게 심장을 파고드는 사실들만으로 공격하는지, 그대로 다 들었다간 명절날 잔소리 듣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죽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살아돌아갈 수 있구나. 무리하더라도 살겠구나. 꾹 쥔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리하면 당신도 안 다치겠지.
옥상 위에서 부는 찬바람에 살짝 추워졌다. 코트를 단단히 여몄고 무언가에 꽂혀있던 창을 다시 뽑아들었다. 끝났구나. 다행이다. 나도 안 죽고 당신도 안 죽고. 정말 다행이었다.
노트 한 면이 주소로 보이는 글귀 몇 가지와 함께 가득 찼다. 어느새 방 안에 꽉 차있던 것 같은 커피 향은 모두 죽은 듯했고 바깥의 소리도 멀어졌다. 들리는 소리는 손목에 찬 시계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노트를 펜으로 채우는 소리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얼마나 늦은 시간까지 이러고 있던 건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홀드 버튼을 누르자 검은 화면에 오늘의 날짜와 시간이 적혀있었다. 4/1 1시 30분경. 남들은 그만 자러 갈 시간에 아직도 안 자고 뭐 하는 것일까. 한 주 전까지만 해도 죽느니 사느니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시답잖은 일에 노력을 쏟고 있다는 걸 깨닫자 어이없어서 실소했다. 내가 이런 장난에 열을 다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백야에 오고 나서, 당신을 만나고 나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구나 생각했다. 주위가 바뀐 탓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가 변한 건지.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렵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원인에 당신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다시 시선을 내려 노트를 보았다. 적다가 지우고 수정하기를 반복해 새까매서 얼마 글귀도 남아있지 않은 노트. 이대로 행동하고 난 뒤에 당신은 뭐라고 말할까, 어떤 반응을 할까 평소라면 진정시키려고 애썼을 심장을 오늘만큼은 맘 편히 뛰게 했다. 별의별 상상이 떠오르는 머리도 자유롭게 놔뒀다. 휴가니까 적어도 오늘만큼은 모두가 바보가 되는 날이니까.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바보처럼 있자.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한 시간을 더 망상 속에 빠져 있다가 겨우 잠들었다.
삐비빅 하고 우는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평소 같으면 잠들었을 시간에 일어나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통 회사 가는 것보다 조금 더 차려입어 봤다. 뛰어다니기 어려운 슬랙스를 골랐고, 언젠가 누가 준 선물로 받은 향수도 뿌렸다. 머리도 전날에 본 유튜브 강의대로 조금 만지고, 잠들기 전에 3시간 고민했던 꽃다발도 예약해뒀다. 처음 생각은 그냥 놀려볼까 했다. 하도 먼저 놀리시고 그래서, 만우절이라 장난쳐볼까 했습니다. 계획은 좋았다. 실행만 남았다. 천천히 바깥으로 나와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뜻한 봄바람은 아니지만 동장군은 예전에 물러가고 따스한 기운이 주변에 돌아다니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당신 집으로 바로 갔겠지만 아까 예약한 꽃집에 들러야 하기에 조금 돌아가게 생겼다. 꽃향기에 괜히 내가 좋아서 발걸음을 경쾌하게 옮겼다. 출근하는 날로 착각해서 사모님 집에 들렀다. 옷차림이 이런 것은 오늘 마침 약속이 생겨서 그렇다. 못 믿으면 꽃다발을 보여주며 정말이다.라고 하려고 했다. 아파트 공동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전까지. 엘리베이터 안에 타자마자 내가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게 뭔 장난이냐. 재미도 없고, 당신에게 비하면 장난도 아닐 것을 내가 무엇 때문에 하는 건지. 심지어 만우절에 나오는 그 흔한 장난 고백도 아니다. 장난 고백하러 갑니다라고 장난치는 꼴이라니, 어젯밤에 마신 커피에 분명 무슨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의미 없는 장난은 그만두자 하고 다시 닫힘 버튼을 누르려다가 누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길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꼴을 하고 왔는데 내리지도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붙잡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쪽팔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뭔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땀이 맺힌다. 이건, 그래도 드리고 가자. 어차피 드리려고 산 거고. 별 의미 없는 소품 같은 장미와 그 주위에 끼어있는 안개 꽃들을 보며 예쁘긴 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가야 할 것은 주인에게 가야지. 하루의 일과를 지키지도 않아도 되는 날에도 네 집 앞에 찾아오게 되었다. 어차피 저지른 일이고 끝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자. 그냥 하고 쪽팔려서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든 그냥 가든 하자. 마음을 다지고 당신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정기삽니다. 하고 말하자 얼마 안 있어서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왔다. 재빨리 당신 시야에서 꽃다발을 치웠고 당신은 웃으며 반겼다.
"정기사! 무슨 일이야, 휴가인데 여길 다 오고. 어디 나가?"
계획 대로였다. 차근차근 하나씩 기계처럼 안면 근육을 최대한 활용해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오늘 출근 아니었습니까? 아, 옷은 그.. 저번에 얘기해주신 분 오늘 한 번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분 드리려고 꽃까지 가져왔습니다. 차례차례 보여주며 당신의 호응 좋은 반응을 보며 제대로 속였구나 싶어서 꽃다발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는 만우절 장난이었습니다. 하고 얘기했다. 오늘 출근도 안 하고 할 일 없다고 하도 놀려대셔서 오늘 한 번 놀리려고 여기 왔다고. 웃으며 얘기하던 도중 어느새 나는 뛰고 있는 심장을 발견했다.
이게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똑같이 장난쳐서 뭐 할 건데.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자괴감에 얼굴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프게 뛰는 심장과 팽팽하게 돌아가는 사고가 이건 아니라며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솔직해져도 되지 않겠냐고. 새벽에 얘기하지 않았나 하루 정도는 바보처럼 있자고. 평소에 하던 부처 흉내는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이 관계를 사모-기사 관계로 이어오고 있었다. 입사 때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어오고 인생에 정말 꼽을 만큼 큰일도 겪었다. 이 정도로 노력해왔는데 한 번 정도는 실수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쌓아온 업이 많은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 내 멋대로 말을 뱉어도 되는 게 아닐까. 이제 그만 당신을 향해 움직이는 감정에 대해 제 이름을 붙여줘도 되는 게 아닐까. 만우절이라고 핑계 대면서 얘기해도 되겠지. 한 번만, 딱 한 번만 솔직하게 얘기하자. 그래. 정신을 차려보니 꽃다발을 안고 향을 맡는 네가 보였다. 아 그렇구나.
"좋아합니다."
뱉었다. 만우절 장난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고작 기념일도 아닌 날에 내가 끌려가서 어쩌겠나. 그냥 모두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비록 오늘 이 일을 만우절 장난처럼 여기며 웃더라도 좋다. 내가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일도 맞다. 평소에 이상형은 누구인지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냐고 괴롭히던 당신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도 못 하고 다들 예쁘시네요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들 모두 보다 원비 씨가 더 좋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 현관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치는 당신 옆에 선 사람의 모습에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들 어때? 하고 물어보는 당신에게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이젠 당신이 장난치는 것에 같이 장난치고 싶다. 무언가 먹고 싶다고 얘기하면 미리 차에 시동을 걸어두고 기다리고 싶다. 취해서 배지를 던져버린 당신을 픽업해 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같이 마시고 싶다. 당신이 다치러 가는 곳에 따라갈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운전기사로 남아 팔순까지 지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더 이상 뛰는 심박을 숨기려 애쓰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감정을 토해내고 싶다. 감정을 숨기려고 시선을 피하고 손에 피가 나도록 쥐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속에 꾹꾹 눌러 담아온 좋아한다는 말도 맘껏 하고 싶다. 그저 예의상 말하듯 얘기하는 것도 그만두고 편히 얘기하고 싶다. 주접도 한 번 떨어보고 싶다. 뭐라도 좋다 그냥 당신이랑 그리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추한 욕망이라 불리더라도 나는 그래도 좋다. 당신을 보면 피는 감정이 그러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후세에 미물로 태어나겠다. 비록 이것이 업을 쌓기만 하는 일이더라도 감수하겠다. 바보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보살님. 오늘은 그냥 포기하렵니다. 절제고, 평안이고, 무심이고, 열반이고, 해탈이고 모두 관심 없습니다. 눈앞에 이 사람이면 족합니다. 이 욕심이 화를 부른다 해도 제가 화를 입고 말 것이라면 그걸로 좋습니다. 점심시간마다 구내식당에서 내 앞에 앉아 꾸준히 물어오던, 그래서 우리 팀에서 좋아하는 게 누군데 하고 묻던 질문에 오늘에서야 답했다.
"구원비씨.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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