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mpe L’œil (2)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라도 일단 범인이 자수한 후에는 모든 경과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이다. 갤러리 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역시 그러했다. 범인으로 나선 한선혜의 자백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형사들이 사후조사를 이어가기는 했지만, 그녀의 자백에는 어떤 모순도 없었기에 경찰은 끝내 이를 받아들였다.
한선혜는 정말로 수제자의 머리를 잘라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닌 수제자 이아영의 의지였다고 한다.
그녀는 어젯밤 열한 시까지 아영과 함께 작가의 방에서 주제작 『조화』의 세세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 이미 충분한 수의 마네킹을 사용하긴 했지만 마네킹들이 둘러싼 가운데 공간을 그녀는 채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선혜는 더 이상의 오브제를 꾸며넣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아영은 선혜의 의견을 긍정하는 제스처는 보였지만, 아무래도 오브제가 필요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 날도 소란스러운데 혹시 일찍 주무시지 않으실 거라면 이따 한 시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선혜는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잠을 잘 청하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아직 태풍이 몰고온 먹구름과 강풍이 부산에 드리워 있었기에, 안 그래도 그녀는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애제자의 요청을 선혜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한 시에 작가의 방에서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고 선혜는 객실로 돌아갔다.
도슨트들이 준비해 둔 크로와상과 음료를 조금 먹고 창 밖을 바라보며 태풍을 염려하고 있으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한 시가 되었지만 수마는 소란에 쫓겨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객실을 나서 안채와 갤러리의 연결 통로를 통해 갤러리로 넘어갔다. 작가의 방의 관계자용 출입문을 노크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문에 난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흐릿한 빛이 흘러나오고만 있었다.
반응이 없는 게 이상했지만 불은 켜져 있으니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거겠거니 싶었다. 그녀는 관계자용 출입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관계자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 놓인 길쭉한 테이블이 먼저 보인다. 맨손으로는 다듬기 힘든 소재를 자를 때 자주 쓰이는 절단기가 그 위에 놓여 있다. 방 가운데를 차지한 커다란 철제 테이블에는 아영이 줄곧 다듬고 있었던 마네킹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아영은 이것을 『조화』의 마지막 오브제로 넣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아영을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방 왼쪽으로 돌린 선혜는 경악하고 말았다.
왼쪽 벽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에는 아영이 시뮬레이션 용도로 사용하던 데스크탑과 각종 종이 서류가 있었다. 아영은 그 앞에 바퀴 달린 의자를 놓고 앉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오브제의 짜임을 검증하고는 했다. 그리고, 선혜가 그쪽을 보았던 때에도 아영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 팔걸이 밑으로 팔을 길게 늘어뜨린 채로.
"자살이었습니다."
얼굴이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리고 입가에 거품이 묻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독극물을 먹은 상태였다. 찰나의 희망을 갖고 제자의 몸에 손을 대 보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산 자의 체온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숨에 패닉 상태가 된 선혜의 시야에 책상 위의 유서가 들어온 게 실로 기적이었다고 한다.
"선생님, 저는 그 날 이후로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저에게는 완전히 부재했습니다. 그 애는 이런 저를 보면 분명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겠지만, 이대로 삶을 이어가도 그 애는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붙박혀만 있겠죠, 라고."
"그 애라는 건......?"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영이의 친구입니다. 그 분도 분명 비바람이 많이 치던 날에 사고를 당해서......"
인생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애와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저는 그 사실이 괴로워서 도무지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 애는 더 이상 쉴 수 없는 숨을 저만 쉬고 있다는 현실이 괴롭습니다. 그 애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선율을 저만 듣고 있다는 자각이 끔찍합니다. 그 애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저 자신을 실은 가장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제 몸을 마지막 재료로 삼아주세요.
애도도 하지 못하는 미련한 저를 작품으로 만들어주세요.
몸은 오브제로 삼고 머리는 그 애의 곁에 놓아주세요.
"그래서 저는 아영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재료로 쓴 작품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었지만, 특수한 처리를 하지 않으면 금세 원래의 형태를 잃는 게 사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이아영을 재료로 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건 오늘 아침 뿐이라고.
작가가 세상을 뜬 이상 작가의 작품은 유작전이 아니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신인 작가인 아영에게는 유작전을 열 수 있을 정도의 명성이 없었다. 그러니, 당장 내일 아침 사람들의 눈앞에 작품을 내어놓지 않으면 그녀의 바람을 이뤄줄 기회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사태를 파악한 선혜는 빠르게 아영의 목을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절단에 필요한 도구는 작가의 방 안에 있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절단기라면 그녀도 자주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고, 사용법도 간단하니까. 문제는 잘린 머리를 어디에 담느냐였다. 사람의 머리가 들어갈 만한 통이 작가의 방 안에는 없었던 것이다.
문득 갤러리로 오기 전 아영의 차 트렁크에 작품에 필요한 자재들을 옮겨 담았던 게 떠올랐다. 거기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박스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길로 아영의 객실로 향해 차 키를 갖고 안채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기억대로 트렁크에는 자재를 넣어두었던 비닐 봉투가 남아있었다.
사람 머리를 넣을 수 있을 만한 용량의 봉투를 들고 그녀는 갤러리로 돌아갔다. 비바람이 몰아쳐 무척 힘에 부쳤다. 아영이의 머리를 이 안에 넣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내일 소방서에서 토사를 치워주면 바로 사람을 불러 아영이의 그 분이 계신 납골당으로 가는 수밖에 없나, 하고 생각하며 갤러리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익숙한 그림자 둘이 그녀를 막아섰다.
이번 리셉션을 위해 일일 직원으로 고용한 도슨트 두 명이었다.
그녀는 정말 죽을만큼 놀랐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누가 걷는 소리가 나서 나와 봤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선생님."
단발머리 도슨트, 최은수가 물었다. 곱슬머리 도슨트 서진은 언제나처럼 은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 깨어있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선혜는 바로 둘러대지 못했다. 어물거리며 굽은 양 손으로 비닐 봉투를 버스럭대고 있으니 은수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녀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목소리의 톤을 조금 부드럽게 하여 다시금 물었다. 시선이 맞았다. 염려의 빛이 담긴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아영이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선혜는 한순간 생각하고 만다. 제자의 자살과 시신 훼손을 앞둬 극한 상태에 몰린 정신은 기이하게도 그런 결론을 낳았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선혜는 끝내 도슨트 두 명에게 아영의 자살과 마지막 부탁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오열 섞인 고백을 듣던 도슨트들은 눈앞에 시신이 있는 것마냥 경악을 금치 못했다. 털어놓지 말 걸 그랬나, 잠깐의 후회가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들은 곧 결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선혜는 도슨트들을 데리고 갤러리 2층으로 향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축 늘어진 아영의 시신을 본 두 사람은 잠시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시신의 상태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죽었어, 정말 죽었군, 하고 몇 마디 나누었다.
아영의 목을 자른 건 선혜였다. 도슨트들의 도움을 받아 아영의 목을 절단기 사이에 끼워넣고 레버를 당겼다. 인간의 목에 칼날이 파고드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절단기의 칼날이 시신의 피부를 찢고 근육을 잘라 목뼈에 닿을 때는 몰아치는 공포심으로 레버를 누르는 손목이 지나치게 떨려 자칫하다간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목이 잘렸다. 칼날이 서로와 맞닿았다. 시신의 목을 자르는 거니 피가 그렇게 많이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의 완전히 식지 않은 피가 잘린 목 밖으로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절단기를 적시고 테이블을 적신 피가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선혜는 참기 힘든 구역감을 느꼈다.
"선생님, 가서 폴딩 도어를 열어주십시오."
제가 머리를 수습하겠습니다, 하고 은수가 말했다. 피웅덩이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선혜는 그녀의 말을 따라 작가의 방의 폴딩 도어를 열었다. 손잡이를 잡고 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손목과 팔꿈치를 이용해 능숙하게 폴딩 도어를 열고 은수를 돌아보았다. 아영의 두부를 넣은 비닐 봉투의 손잡이를 묶어 포장까지 마친 은수는 서진과 함께 시신의 몸을 옮기려 들고 있었다.
"내가, 내가 옮길게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오브제를 작품에 배치하는 건 예술가의 일이라는 신념이 고개를 내밀었던 걸까.
선혜는 바닥에 누운 아영의 한쪽 발목을 잡고 끌어 옮겼다. 실질적으로 끌어당긴 건 선혜의 몸이 아닌 전동 휠체어지만, 아영은 잘 끌려왔다. 끌려오면서도 목에서 피를 끊임없이 내뱉는 모습이 꼭 붓을 닮았다고 선혜는 한순간 생각하고 말았다. 겨우 가라앉혔던 욕지기가 다시 이는 것을 그녀는 최대한 참아내고 아영을 『조화』로 옮겼다. 『조화』를 덮고 있었던 흰 천은 서진이 빠르게 달려가 걷어냈다.
『조화』의 가장 가운데에 그렇게 아영은 오브제로서 배치되었다.
그녀를 둘러싼 마네킹들은 활력이 넘치는 포즈를 취하고 서로 맞닿거나 떨어져 있다. 다들 몸의 어느 부분을 유실했을언정 네거티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은 없다. 그들에게 상실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흥겹게 춤을 추면서 서로와 교감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머리를 잃은 아영만은 그들 사이에 오도카니 누워 아무와도 교감하지 않는다.
조화 사이의 부조화.
작가가 나서서 작품의 의미를 해체한다.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선생님."
아영의 머리를 품에 안은 은수가 속삭였다.
"이아영 씨는 제가 책임지고 그 분에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영의 친구는 울산 근처의 외진 해안에 위치한 어느 납골당에 잠들어 있다. 이곳에서 차로 족히 한 시간은 가야 할 거다.
"저를 믿으십시오."
눈을 감은 아영의 머리가 반투명한 비닐 너머로 비쳐 보였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라도 일단 범인이 자수한 후에는 모든 경과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이다. 나무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선혜의 자수로 갤러리에 감돌았던 팽팽한 분위기는 다소 사그라들었다. 용의자들을 향했던 형사들의 날카로운 시선도 무뎌지고, 이제 그들의 신경은 경찰차를 탈취하고 도망친 도슨트 두 명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들이 스마트폰에 대고 고함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도슨트들에게 약취된 경찰차는 산길의 어떤 지점에서 GPS의 이동이 멎은 듯했다. 사람의 머리를 들고 도보로 이동할 리는 없으니 미리 이동 수단을 준비해 둔 것일 테다.
도슨트라는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나무로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선혜의 증언을 듣자 하니 일단 최은수라는 여성은 보통내기가 아닌 듯 싶다. 도슨트라는 것은 거짓 신분이고, 어떠한 목적으로 갤러리에 잠입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점쳐볼 수 있다.
형사들은 도슨트들이 타고 온,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버려진 자동차를 조사했다. 트렁크 안쪽에 숨겨진 수납 공간이 있고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아영의 머리가 이 안에 있었던 것 같다고 형사들은 이야기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의 낌새를 보였다.
지민은 선혜가 밝힌 진상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표정이 좋지 못한 승현이 그녀를 옆에서 위로했지만, 승현 역시 마음이 썩 좋지 못한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가를 반복했다. 영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름의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를 따라 죽는 일은 의외로 예술가들 사이에서 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변호사 유선은 사건의 진상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선혜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며 나서는 걸 보고 잠시 놀라는 듯 했으나, 감탄보다는 안도의 감정이 몇 배는 커 보였다. 이 말도 안 되는 귀찮은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해방감이 엿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서이자 탐정인 동현의 경우, 선혜가 자백한 그 순간부터 나무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나무로서는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2020년대의 한국에서 사립 탐정이라는 웃긴 직업을 택할 정도니 추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동거인 유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선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중간중간 아랫입술을 깨무는 게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아 어떠한 형태든 충격을 받으면 가슴을 끌어안고 주저앉고는 한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나무는 다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선혜를 제외한 일곱 사람은 갤러리를 떠나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열한 명이 있었는데, 짧은 밤 사이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도망치고 또 한 명은 자수하고 말았구나.
"갈까?"
유신에게 물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던 유선과 동현의 주의까지 끄는 효과가 있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아래로 숙이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사 안 드려도 돼?"
"인사?"
"송 군, 저 분이랑 연이 깊은 거 아니었어?"
"아......"
선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에서는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는 형사 여럿에 둘러싸여 고개를 푹 떨군 채였다. 헤아리기 힘든 절망이 스며나오는 게 나무의 눈에도 보였다.
"......나중에 인사 드리려고."
유신과 함께 주차장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유신의 캐리어를 끌어주려다가, 뒤따라 나온 유선과 동현이 신경쓰여 제 가방만을 소중하게 들고 말았다.
점심 때가 가까운 시간이다. 태풍이 가신 부산의 하늘은 파랗고 높고 볕이 강하다. 뒤편의 절벽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짠내를 훅 풍겼다.
"언니, 역으로 가는 거야?"
유선이 구둣발로 파쇄석을 자박자박 밟으며 물었다. 그녀의 크지 않은 가방은 뒤따른 비서 겸 탐정이 들고 있다.
"응, 그럴 것 같은데."
"태워 줄게."
그녀가 나무에게로 눈을 흘겼다.
"그쪽도요."
"감사합니다."
분명 태워줄 거라 생각했었다.
유선의 차 트렁크에 유신의 캐리어를 싣고 동승했다. 운전수는 당연하게도 비서 겸 탐정이었고, 조수석에 나무가, 뒷좌석에 자매 두 사람이 앉았다. 조수석에 탔는데 운전석에 유신이 없는 건 다소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동현은 머쓱한 미소를 보내곤 차의 시동을 걸었다.
우르르륵 하고 파쇄석을 차내며 이제는 토사가 전부 치워진 언덕 사잇길로 차는 향한다. 조수석 창문 너머의 사이드미러로 아직 갤러리 주차장에 남은 경찰차들이 보였다.
사잇길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영이 말이야."
나무의 뒤에 앉은 유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나봐."
"그러셨나봐요."
운전수가 말을 받았다. 시선은 다행스럽게도 자동차 앞 유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었던 거야."
그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겠지, 하고 유신은 뒤이었다.
"나랑 얘기했을 때도 많이 슬퍼했거든.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사고로 죽어서 힘들다면서. 조금만 더 진지하게 들어줄 걸 그랬나봐."
"설마 언니가 죄책감 갖는 건 아니지?"
"죄책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그렇다고 그냥 미련이라 하기에는 좀 무겁네."
"그 정도로만 해. 슬퍼한다고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이아영도 그건 알고 있었다. 슬퍼한다고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은 이를 내버려두고 자신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그와 가까운 과거에 붙박이기로 했다.
"만났을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었다. 흠칫 놀라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퍼진 목소리가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네."
등 뒤에서 유신이 대답해주었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도슨트 분들 말이야."
말실수를 지우듯이 나무가 다른 주제를 던졌다. 차의 통행이 드문 산길에서 겨우 도로로 이어지는 길목을 찾은 동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말을 받는다.
"음, 그 친구 분이 계시다는 납골당으로 가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런데, 솔직히 수상한 분들이잖습니까. 경찰차까지 훔친 마당에 순순히 납골당만 갔다가 돌아오진 않을 것 같아서요."
"으~음. 납골당에 갔다가, 그러게요. 아니, 아영 씨의 머리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요? 화장도 안 했으니 납골당에 모셔둘 순 없을 텐데......"
"화장까지 해 주는 거 아냐? 서비스가 대단하신 분들이네."
"언니, 이상한 소리 좀 그만 해."
"애초에 그 사람들 도슨트가 아니었던 거죠? 왜, 그 단발머리 분이 제 발도 걸어서 넘어뜨렸다고 했고요."
"도슨트가 아니면 뭔데?"
"어, 나 같은 탐정이라든가."
"탐정이 도슨트로 위장해서 뭘 하는데?"
"어어, 미술품을 훔쳐가겠다는 예고장이 왔던 거 아냐?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걸 받고 놀라서 탐정을 고용한 거지. 도슨트인 척 리셉션을 진행하다가 도둑이 나타나면......"
"오 탐정. 그런 범행 예고가 있었으면 탐정한테 의뢰할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를 했겠지."
"은수 씨는 그래도 미술품 해설을 잘 해주셨는데요."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운전이나 해."
세 사람의 집중 포화를 듣고도 헤헤 웃으며 넘길만한 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산길에서 도로로 나와 다른 차들의 행렬에 끼어든다. 목적지인 부산역까지는 이십 분 가량이 남았다.
"유선이 너는 이대로 올라갈 거야?"
"부산에 더 있고 싶지 않아. 올라가다가 눈 좀 붙일 거야."
실로 단호한 어투였다.
"언니는 몇 시 차야?"
"보자...... 네 시 십오 분이네. 역 근처에서 시간 좀 떼우다가 가야겠다. 밥도 먹고, 구경도 하고."
"그쪽은요?"
"저는 세 시 반 찹니다."
거짓말이다. 유신과 같은 네 시 십오 분 차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 두어야 할 당위성이 느껴졌다. 까탈스러운 변호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따갑게 날렸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침묵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도로에는 차가 얼마 없었다. 부산에서도 외곽인 도로라 통행량이 저조한 듯했다. 가드레일 저 멀리 부산 시내가 보여온다. 한때 부산에 머무른 적이 있었던 나무에게는 조금이지만 익숙한 곳이다. 몇 년 사이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요즘은 삼 년이면 강산이 변하던데.
네 사람을 태운 차는 부드럽게 시내로 접어들었다. 외곽 도로와는 차원이 다른 교통량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쩐지 예상 시간보다 일찍 시내에 들어왔다 싶었는데, 네비게이션은 시내의 정체까지 예측했던 거구나.
건물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민 부산역 건물이 빽빽히 막히는 도로를 훔쳐보고 있었다. 부산역 앞까지 가는 것보단 이 근처에 내려 도보로 가는 게 빠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었는데."
뒷좌석에 몸을 편안하게 묻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유선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 사람 전시."
"유선이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본다. 난 스무 살 이후로는 너한테 영화가 재밌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어."
"작품이 좋았다는 말을 한 게 아니야. 전시가 좋았다는 말을 한 거지."
"똑같은 거 아냐?"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줬잖아? 열정이 보이는 사람, 난 좋아하는 편이야."
유신이 동생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고글에 장갑에 앞치마까지 입은 게 예술가라기보단 공장 노동자 같더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설치 작품을 만드는 거니깐. 대단했는데......"
"자살이라......"
자동차가 멈췄다. 건물 사이로만 보였던 부산역의 간판이 어느새 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여기 내려드릴까요?"
동현이 앞좌석과 뒷좌석을 애매하게 전부 바라보는 각도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 네."
"트렁크 열어드릴게요."
정차된 차의 트렁크를 열어 유신의 크지 않은 캐리어를 내렸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내린 차창 너머로 유선과 동현의 이야기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데, 장갑은 어디 간 거지?"
"장갑?"
"죽은 사람이 끼고 있었던 장갑. 고글인지 보안경인지는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장갑은 안 보였어."
"일회용이라 쓰고 버린 거 아냐?"
"넌 목장갑을 일회용으로 쓰냐?"
"쓰다가 찢어져서 버렸다든가...... 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중에 또 봐, 언니."
"유선이도 잘 들어가고. 오 탐정도!"
"감사했습니다."
유선의 외제차가 시내의 교통 행렬 안으로 사라진다. 교통량은 많지만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나무는 동거인이 잡고 있던 캐리어의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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