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mpe L’œil (1)
‘눈속임, 착각을 일으킴’이란 뜻으로 ‘속임수 그림’이라 번역할 수 있다.
어안이 벙벙한 세 사람을 데리고 갤러리의 경사로를 오르고 있으니 안채와의 연결통로 쪽에서 또다른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지민과 승현, 그리고 영우다.
"어디 가세요?"
영우가 큰 소리로 물었다. 토사 정리가 끝나 경찰이 갤러리 부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 상황에 2층으로 올라가는 게 이상해 보인 모양이다. 가장 앞서던 나무가 난간을 잡고 대답한다.
"현장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러 갑니다."
"현장을요?"
"한 선생님이 범인인 이유를 밝히려고요."
"예?!"
영우가 기겁을 하고 몸을 물리는 모습이 경사로에서도 보였다. 나머지 두 사람도 비슷한 반응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궁금하시면 선생님도 올라오십시오. 경찰이 오기 전에요, 어서요."
지면의 세 사람이 허둥지둥 경사로를 뛰어올랐다.
갤러리 2층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살아있는 사람 일곱과 살아있지 않은 사람 하나가 모였으니 자연스러운 변화다. 대열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나무는 『조화』의 앞으로 향한다. 다리 한 쪽으로 버티고 선 활기찬 포즈의 마네킹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객실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나무가 몸을 돌려 지민을 보고 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뿔테안경이 흔들릴만큼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런가요. 머리의 행방까지는 제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 말하고 나무는 한 쪽 다리로 선 마네킹과 다시 마주보았다. 바로 옆의 마네킹과는 거리가 상당해 마네킹의 간격 사이로 사람 두세 명은 거뜬히 드나들 수 있을 법했다. 그는 그 간격을 통해 작품 내부로 이동한다. 머리를 잃은 예술가는 아직 작품 안쪽에 누워 있었다.
고깃덩이로 이루어진 과일이 썩는 냄새가 났다.
단두된 예술가의 목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작품 바닥에 고여 말라간다. 몇 시간 전과 다르게 이제는 거의 물기를 잃었다. 피웅덩이에서 죽 튀어나와 작가의 방 안에 있는 절단기까지 이어지는 핏자국이 있다. 설탕 범벅 핫도그 위에 케찹을 뿌린 것처럼, 주욱 그려진 혈흔이다. 범인이 절단기로 아영의 목을 자른 후 작품 안까지 끌고 오는 과정에서 생긴 이동흔이다.
나무는 시신 옆에서 작품 밖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높은 비율로 보이는 건 경악, 그 뒤가 공포, 적은 비율의 분노와, 미세한 정도의 기대.
걸작이군, 하고 그는 남몰래 생각하고 만다.
"지민 씨, 바짓단에 뭐가 묻지는 않았습니까?"
나무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의 통 넓은 바지로 향한다. 바닥에 끌릴 듯 말 듯한 넓은 통을 가진 바짓단에는 먼지가 조금 묻었을언정 혈액 따위가 묻은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그는 뒤를 돌아 작가의 방을 바라보고 말했다.
"승현 씨, 제 목소리는 잘 들리시고요?"
"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입을 보지 않고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인공 와우의 파손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무는 도로 고개를 돌려 작품 너머의 인간들을 시야에 담는다. 승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영우 씨, 여분의 마스크를 갖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작가의 방에 마스크 없이 들어갔지요."
말을 끝내곤 눈을 질끈 감는다. 신예 작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이 정도로만 검증해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유신과 변호사님과 그 비서는 이것으로 세 사람의 혐의를 완전히 벗겨버렸을 테니.
나무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아영 씨의 사망추정시각은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입니다. 이쪽의 사립 탐정 분께서 직접 시신을 만지고 추정해 주셨습니다. 물론 부검이 아닌 검시에 지나지 않으니 사망추정시각이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않다는 건 여러분께서도 이해해주시겠죠."
동현이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굴린다.
"그리고 이쪽의 진유신 씨가 새벽 두 시에 목이 말라 안채 로비까지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 때 안채의 정문,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 근처가 빗물로 젖어있는 걸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안채의 문을 열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기에는 로비에 빗물로 젖은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와 반대로, 안채의 문을 열고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는 게 되겠죠. 새벽까지 빗발이 상당히 거셌으니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문가가 빗물로 젖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안채에 발자국이 없었다는 건, 안채의 문으로 나가서 다른 곳으로 들어갔다는 건가?"
승현이 끼어들었다. 잠깐 맥이 끊겨 흐름을 놓친 것 같았지만, 나무는 금세 정신을 수복한다.
"정확하십니다. 그 누군가는 안채의 문으로 비바람치는 밖으로 나가 다른 곳을 경유해 건물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안채에는 그 문 외에 밖과 통하는 통로가 없으니, 갤러리 쪽의 정문을 경유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추론이 성립합니다."
승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안채에서 밖으로 나가 갤러리로 들어가야 했을까요? 안채와 갤러리에는 연결 통로가 있으니 그곳을 건너면 비바람도 맞지 않고 갤러리로 이동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주차장에 들른 다음 갤러리로 향할 일이 있었던 거네요."
이번에는 지민이 불쑥 말했다. 행동력도 좋고 발언력도 좋은 인간이다.
"그렇습니다. 이아영 씨의 사망추정시각인 한 시 쯤, 비바람을 뚫고 주차장에 들렀다가 갤러리로 향한 누군가. 정황 상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범인이라면 주차장에 들러서 한 일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머리를 담을 통이나 비닐을 차에서 꺼내온 거죠. 실제로 이아영 씨의 머리는 보이질 않으니까요."
혀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발음을 잘 하고 있는 걸까.
"이상의 단서에서 범인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차장에 들러야 할 자가용이 있는 사람. 둘째, 작가의 방에 용이하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 셋째, 인간의 목을 자르고 남은 몸을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
나무는 좌중을 죽 둘러보았다. 유신의 얼굴만이 마네킹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실상 그녀의 표정이 가장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여 자리를 옮기는 건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두 번째 조건에서 천식이 있으신 조영우 평론가님은 쉽게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작가의 방 내부에는 분진이 상당했으니까요. 여분의 마스크가 없는 평론가님이 분진 속에서 사람을 죽이고 목을 자르는 행위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 작가의 방은 열려있는데도?"
승현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작가의 방의 폴딩 도어는 활짝 열려있다. 어제의 전시 때처럼.
"그만큼 열려있으면 분진은 밖으로 날아간다. 이 정도로 옅은 농도의 분진이라면 천식 환자라도 숨을 쉴 수 있어. 지금도 잘만 숨쉬고 계시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우가 눈을 번쩍 뜨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적어도 목이 잘렸을 때 폴딩 도어는 닫혀있었습니다. 절단기 근처의 혈흔에 먼지가 잔뜩 남아있더군요. 환기가 되지 않아 먼지가 많은 상태에서 그 위로 피가 흩뿌려진 흔적입니다. 그러니 범인은 이아영 씨의 목을 자른 다음 폴딩 도어를 열고 몸을 옮겼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랬나."
승현이 아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안승현 씨 역시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범인은 안채에서 주차장으로 나갈 때 우산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쓰고 나갔다면 우산에 가려져 문 안쪽으로 빗발이 들이치지 않죠. 하지만 빗발은 들이쳤고, 이는 범인이 우산을 쓰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안승현 씨는 인공 와우를 완전히 노출시키고 다니시니 우산을 쓰지 않고는 비바람 안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승현의 새빨간 메탈릭 인공 와우로 집중된다. 그녀는 남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곤 나무를 향해 물었다.
"얘는?"
"오지민 씨는 자가용도 가지고 계시고, 작가의 방에 출입하실 수도 있지만, 문제는 세 번째 조건입니다. 오지민 씨의 그 통 넓은 바지에 피를 묻히지 않고 목 잘린 시신을 옮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책상 위의 절단기로 목을 자를 때도, 목을 자르는 과정에서 혈액이 책상 아래까지 흐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오염물이 많은 상황에서 바닥까지 닿는 바짓단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민은 새빨간 얼굴로 제 넓은 바짓단을 내려다본다. 먼지가 좀 묻었지만 깨끗한 바짓단이다.
"자, 이렇게 한 선생님과 도슨트 두 분만이 남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도슨트 두 분은 범인의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성립시키십니다.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고요. 하지만 한 선생님이 범인임을 가리키는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우리의 눈앞에 있습니다."
"잠깐, 선생님은 자동차가 없으시다."
"한 선생님께선 이곳에 이아영 씨의 차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모종의 이유를 대어 아영 씨에게서 차 키를 얻는 일이 선생님께 어려울까요?"
승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나무를 노려보았다.
"선생님이 사람 목을 자르고 몸을 옮기실 수 있으실 거라 보나?"
"네, 당연히 가능하십니다. 한 선생님은 설치 미술계의 거장이시니까요. 장애를 얻은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하시죠. 손은 움직일 수 없지만 천운으로 손목은 움직이실 수 있고, 다른 팔도 팔꿈치까지는 움직이십니다. 애당초 절단기가 그렇게 어려운 도구인가요? 목을 절단기의 두 날 사이에 두고 가위 자르듯 힘을 주어 잘라버리면 됩니다. 한 선생님께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공작입니다."
인기척이 났다. 낯선 인기척이다. 경사로 쪽에서 들려온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무는 말을 이었다. 말이 조금 빨라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목을 자른 다음 폴딩 도어를 열고 몸을 작품까지 옮긴다. 이 마네킹 사이의 간격을 보시죠. 휠체어가 하나 들어가고도 남는 널찍한 폭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피가 흐르는 몸을 끌어 이 안으로 가져오신 겁니다."
"휠체어를 탄 채로 사람 몸을 끌어서 옮겼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뭐가 어렵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전동 휠체어를 쓰시는데요. 스틱만 기울이면 일정한 속도로 전진하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후진하는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겨우 인간 몸 하나를 못 옮기실 것 같습니까? 전동 휠체어가 성인 여성 두 명 분의 무게도 못 옮길까요? 충분히 옮기고 남습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나무는 시신을 가리켰다. 아니, 시신에서 흐른 혈흔을 가리켰다. 핫도그의 케첩처럼 일정한 너비로 주욱 그려진 혈흔을. 절단기에서부터 작품 내부까지 이어진 그 혈로血路를.
"사람이 사람을 끌면 이렇게 일정한 혈흔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여성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없다고 하지만 40kg는 넘을 거라는 말입니다. 몸을 끌다가, 힘에 부쳐서 잠시 멈추었다가, 끌다가, 멈추었다가를 반복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게 인간성입니다. 그런데 이 혈흔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아요. 작가의 방에서부터 작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몸을 주욱 끌어왔습니다.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습니까? 아니요, 이건 기계가 한 일입니다. 항시 기계와 함께인 한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갤러리는 금세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사람이 변사하면 죽음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전문가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법이다. 적당히 활동적인 옷을 걸친 형사들은 갤러리 내부에 머물렀던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사건의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홉 시, 평균적으로 많은 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간의 일이었다.
갤러리 2층, 목을 잃은 시신이 누워 있는 작가의 방 앞도 인산인해였다. 흰 현장감식용 복장을 차려입은 감식반 수 명이 『조화』의 마네킹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아무리 현장 보존을 위해서라도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집업을 뒤집어 쓴 모습은 따뜻한 봄날의 기온에는 걸맞지 않아 보였다.
활짝 열린 작가의 방에는 폴리스 라인이 쳐 있다. 그 안에도 우주인처럼 차려입은 감식반원 몇이 들어가 현장을 살피는 중이다. 감식 장비가 든 가방을 들고 자리를 여러 번 옮기며 현장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전시를 해서 그런가 지문이 너무 많은데."
감식반원 하나가 폴리스 라인을 넘어 작가의 방 밖으로 나오며 투덜거렸다. 밖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형사는 그에게 말을 붙인다.
"여기 있던 사람들이 하도 왔다갔다 했답니다. 어우, 사람 목이 잘렸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했던 건지. 깡도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족적도 전혀 소용이 없겠구만."
마스크를 쓴 감식반원이 콧숨을 흥 내뱉었다.
"사람 머리는? 아직 안 나왔나?"
"네.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저쪽 숙박업소 객실도 하나하나 들어가서 살피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오질 않네요. 우리가 오기 전에 여기 있던 사람들도 찾아봤다던데 역시 못 찾았답니다."
"지금 아홉 시 아닌가?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그 사람들?"
"다섯 시 쯤에 피해자의 차에서 경보음이 울려서 다들 깼다고 하더라고요."
"경보음?"
"태풍 때문에 강풍이 심했다고 하더라고요. 가끔 있습니다. 강풍으로 센서 오작동하는 낡은 차들."
"흠, 하긴 태풍이 왔었지."
"왔었습니다. 태풍만 안 왔으면 사람들이 여기 갇힐 일도 없었을 텐데요. 살인사건이 일어날 일도 없었을 테고."
형사가 무심코 작품 안쪽에 쓰러진 머리 없는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선이 쳐진 시신의 주위에서 감식을 계속하던 감식반원 하나가 허리를 들고 일어섰다. 경사로 쪽으로 향하더니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간다. 그와 교차되듯 경사로 쪽에서 튀어나온 이 역시 있었다. 후배 형사다.
"선배님. 증언은 얼추 다 모은 것 같슴다."
"뭐 특별한 거 있어?"
"특별하달까, 뭔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었슴다."
후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도 여기 머무른 사람들은 다 보셨잖슴까. 화가인지 작가인지가 세 명에 평론가가 하나. 안내인? 직원? 두 사람. 그리고......"
"초대객 네 사람."
"네, 네네네. 그런데 그 초대객 중 하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검다. 주위 사람들도 얘가 하는 말이 맞다고 자꾸 맞장구치고."
후배의 보고를 들으며 그는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1층과 2층을 잇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경사로로 사람이 자꾸만 드나들어 혼란스러운 와중이다. 얘까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범인은 휠체어 탄 화가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는검다, 자꾸만."
"그 사람이 목 자르는 거라도 봤대?"
"아니, 그건 아닌데, 왜 그런 말 있잖슴까. 불가능한 걸 모두 지우고 남는 게 사실?"
"결론만 말해라."
"아아이, 정말. 저기, 저 시신에서 절단기까지 이어진 혈흔 있잖슴까. 그게 사람이 끌고 다녔다기에는 너비가 너무 일정하다는 검다. 왜, 학교 다닐 때 운동장에 석회로 하얀 선 그을 때도요. 라인기를 똑같은 속도로 끌어야 선이 이쁘게 그어지잖슴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혈흔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죽 이어져있는 것 같다. 선 중간에 뭉친 흔적도 없고 끊긴 흔적도 없다.
"그 화가가 타고 다니는 휠체어, 전동이었지?"
"네, 네. 전동 휠체어의 힘을 빌리면 혈흔을 저렇게 똑바로 그을 수 있다고 그랬슴다. 아무리 여자라 해도 최소 40kg은 나가는데, 그걸 한 번도 휘청이지 않고 끌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안에는 없었다고 함다."
"어딨어? 그 화가."
"아까 호텔에서 봤슴다. 같이 가실검까?"
두 형사는 감식반원들을 뒤로 하고 급히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경사로 난간 너머로 갤러리 1층의 인파가 보였다. 사건 냄새를 맡고 온 기자 몇 명과, 용의자로 판단되어 갤러리에 사실상 구금된 이들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었다. 개중에는 휠체어를 탄 화가 역시 있었다.
"저 사람임다. 아까 범인에 대해 말해준 사람."
후배가 어떤 남자를 가리켰다. 덥수룩한 머리에 사각 테 안경을 쓴 그는 갤러리의 유리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선 갈색머리 여자가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 것도 같다.
누구한테 먼저 말을 붙여볼까. 휠체어를 탄 화가냐,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한 수상쩍은 인간이냐. 형사는 짧게 고민하며 경사로를 전부 내려왔다. 갤러리 1층에서 어영부영하던 이들의 시선 몇 개가 이쪽으로 쏠린다. 휠체어를 탄 화가의 시선도 그러했다. 형사는 마음을 굳힌다.
"한선혜 씨라고 하셨죠?"
그녀는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손길로 휠체어를 조작해 그에게로 몸을 돌린다.
"형사님이셨죠."
"개인적으로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객실로 함께......"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잠시 말문이 막힌다. 갤러리의 입구에서 같은 반 형사가 급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지각생이다.
"형사님, 제가 했습니다. 제가 아영이의 목을 잘랐습니다."
웅성이던 갤러리에 일순간 침묵이 퍼져나간다.
같은 반 형사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만이 건물 안에 울려퍼진다.
"야, 방금 나간 아들 누구고? 해운대 쪽에서 지원나왔다 카던데."
"해운대 쪽에서? 넌 늦게 와선 또 뭔 소리하는 거냐? 지원 나온 데 없는데. 아니, 그보다......"
형사는 짧게 깎은 머리를 있는대로 헤집었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뜬다. 한선혜는 초연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동시에 포기한 듯한, 자수자에게서 흔히 보이는 표정이 그녀에게서 보였다.
"선생님, 방금 그 말씀......"
"지원 나온 데가 없다 했나?!"
"하, 그렇다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럼 그 아들은 와 차를 끌고 나갔는데?"
"뭐?"
"마 차를 끌고 나갔다 안카나! 갱찰차를!"
"뭐라고?!"
형사는 후배에게 선혜를 맡겨두고 재빨리 갤러리 정문으로 튀어나갔다. 주차장에 세워뒀던 경찰차 세 대 중 한 대가 보이질 않았다. 아연한 그는 문 근처에 서 있던 아무나를 잡고 다급히 묻는다.
"방금 경찰차 타고 나간 사람들 보셨습니까?!"
말을 걸고 나서야 눈앞의 그가 아까 후배가 말했던 수상쩍은 인물임을 깨달았다. 덥수룩한 머리에 사각 테 안경을 쓴 남자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형사를 바라보았다.
"네, 형사님들인 줄 알았는데요. 경찰차에 너무 당당하게 타시길래."
"몇 명이었습니까?"
"두 명이요. 운전석이랑 조수석에 탔습니다. 아, 조수석에 탄 사람은 감식하시는 분 같던데요. 그 흰 옷을 입고 있었으니."
감식 현장을 뜨던 감식반원을 떠올린다. 장비를 더 챙겨오려고 내려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런 씨......"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다. 튀어나간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눈에 익은 기자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스치다가, 이내 갤러리에 고립되었던 용의자들의 얼굴에 초점이 맞았다. 휠체어를 탄 작가는 후배의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휠체어 뒤편에서 그녀에게 따지듯이 뭔가를 묻고 있는 여자 둘은 화가고, 그녀들을 진정시키듯 양 팔을 휘젓는 멀끔한 남자는 평론가다. 문가에 서 있는 수상쩍은 사각 테 안경과 갈색머리 여자는 초대객이며, 그들과 조금 떨어져 카운터 근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경 쓴 여자와 남자 역시 초대객인데.
직원 두 놈이 안 보인다.
단발머리 여자와 곱슬머리 남자가 안 보인다.
그것들이 범인이라 내뺀 건가?
아니, 잠깐만. 방금 한선혜 씨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했잖아.
젠장,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김 형사 니 거서 뭐하고 자빠졌노! 본부에 연락해가 지피에쓰 확인하라캐라!"
동료의 고함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뒷주머니에 꽂힌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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