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텟> 어린 장미는 뿌리를 뻗는다

만남

"안녕! 나는 에시예요! 나랑 친구할래?"

하얀색 프릴이 풍성한 원피스 위에 남색의 겨울 코트를 단단히 여민 꼬마아이 하나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묻고 있었다. 표적은 대략 아이와 서너 살 이내로 차이가 날 법한, 그러니까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 전반이었다.

올해 다섯 살의 오슬로젠 치아르타 맥슬러시는, 정신없이 말을 걸고는 거절당하고, 또 말을 걸고는 거절당하고를 반복하는 또래 아이를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저렇게나 연이어 거절당하면 조금 기가 죽을 법도 한데. 아이는 전혀 기죽은 기색 없이 해맑게 웃는 낯이었다.

"안녕! 나는 에시예요! 흙장난을 좋아해! 나랑 놀자!"

이번에는 오른팔을 귀에 붙을 정도로 쭉 뻗으며 그렇게 외쳤다. 상대가 흙장난은 싫다고 대답하자 아이는 굴하지 않고 그럼 무슨 놀이가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다가 결국, 지금은 놀고 싶지 않아, 하고 차갑게 거절당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다음 '친구 후보'를 찾아 떠났다.

'이상한 애가 있다...'

오슬로젠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훔쳐보고 있는데, 스승님도 그 아이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스승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 애는 뭘 하는 거지? 마녀도 아닌 게 집회에 와서는 설치기나 하고 말이야. 율리아나는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스승님의 스승님, 그러니까 대스승님이었다.

"메럴리나,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겠느냐?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말을 조심하라고 했지! 제 아래로 아기 제자도 있다는 녀석이 아직도 10대 기분이니, 쯧."

혀를 차는 대스승님에게 오슬로젠의 스승, 메럴리나가 반발했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사실을 말하는 게 뭐가 나빠? 저게 마녀가 아닌 것도, 거렁뱅이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관심을 구걸해대는 것도 사실이잖아. 그게 율리아나가 잘못 가르쳤다는 증거 아니겠어?"

"그래도 율리아나 그것이 웰포셔 출신 아니겠느냐. 귀족사에 대해서는 우리보다야 아는 게 많겠지. 쓸데없는 말 얹지 말고 로지나 잘 간수하렴."

"하, 귀족은 무슨! 웰포셔에서 쫓겨난 게 언젠데? 몸 잘못 굴려서 저 꼴 났으면 그렇게 낳은 자식은 제대로 간수해야할 것 아니야? 천박하게 진짜."

"메럴리나!"

오슬로젠은 어른들의 논쟁을 한귀로 흘리며 얇고 긴 스커트에 가려진 무릎을 딱딱 부딪혔다. 그러다가 스승님께 들키면 혼나리라는 생각에 파드득 몸을 떨며 자세를 바로 했다. 11월의 중반을 넘어가는 날씨에 이렇게 얇은 스커트만 한 장 입고 있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다못해 저 에시라는 아이처럼 위에 따뜻한 털옷을 걸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슬로젠이 오늘 챙겨온 옷가지는 지금 입고 있는 게 전부였다. 유서 깊은 요정 일족은 집회에 나갈 때마다 전통 복식을 입어야 한다는 스승님의 지론 탓이었다.

그래도 오슬로젠은 꿋꿋이 참았다. 춥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고 무엇보다 스승님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난 스승님은 정말로, 아주 정말로 무서워지니까.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참는다고 해도 고작 다섯 살 아이의 몸,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쉬야.'

추위는 견딘다고 해도, 추운 탓에 수축된 방광까지는 어떻게 견딜 수가 없었다. 오슬로젠은 한참 다리를 꼼지락거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스승님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차가운 자홍색 눈동자가 오슬로젠을 쏘아보았다. 아이는 몸을 움츠렸지만 이대로 실례를 할 수 없는 일이니 용기를 내어 스승님을 불렀다.

"스, 스승님."

"무슨 일이니, 로지?"

얼핏 다정해보이는 말투였으나, 그 목소리는 허투루 부른 것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로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쉬야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스승님의 얼굴은 순간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얼굴을 완연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가 그런 천박한 말 쓰지 말라고 했니, 안 했니, 오슬로젠! 너는 대체 누구를 닮아 그렇게 미련하고 천박한 거야!"

"메럴리나!"

대스승님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제자에게 놀라 바득바득 꾸짖기 시작했다. 아이가 조금 말이 늦될 수도 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꼭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야겠느냐. 남들 보기 창피한 줄 알아라. 네가 외도를 안 했다면 애가 너와 네 남편을 닮았겠지 누굴 닮았겠냐. 종내에는 로지가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 하는 걸 보면 너랑 판박이다라는 얘기마저 나왔다. 대놓고 비난을 당한 스승님은 얼굴이 빨개져서 대스승님과 대거리를-대략 스승님께서 로지에게 그런 천박한 단어를 알려주신 게 문제 아니냐 하는 내용의-하기 시작했고, 로젠은 요의를 참다 못해 결국 다시 한 번 스승님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뭐야!"

"스, 스승님, 제가 자, 잘못했어요. 제가 나쁜 말을 썼어요. 죄송해요. 다신 아, 안그럴게요. 그, 그런데 저 잠깐, 개이,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어요. 빨리, 빨리요."

아이의 어두운 붉은색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스승님은 오슬로젠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의미의 사교계 은어를 구사하고 나서야 좀 마음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낮게 혀를 차더니 빨리 다녀오라며 광장 너머의 의류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뛰지 말고! 숙녀답지 않게, 정말!"

그리고 의류점을 향해 달려가던 오슬로젠의 뒤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급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발이 빨라졌던 오슬로젠은 그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몸을 움츠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늦은 가을의 찬 바람이 냉혹하게 아이의 뺨이며 귀를 쓸며 지나갔다.

"실례합니다..."

오슬로젠이 간신히 의류점 문을 열자 안쪽에서 네에 잠시만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번 본 적이 있던 마녀 재봉사가 문간으로 나오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동안, 오슬로젠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아랫배에 힘을 꼭 주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너 메럴리나네 아기 아니니? 혼자서 무슨 일이야?"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재봉사는 신기한 듯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혔다. 오슬로젠은 요의를 참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화장실을 빌려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있었다. 재봉사는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듯 빠르게 아이를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화장실 혼자 쓸 수 있겠어?"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슬로젠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재봉사를 뒤로하고 빠르게 화장실 문을 밀어 닫았다. 변기에 앉아서 용무를 해결하자 요의와 함께 참았던 눈물이 꾹꾹 흘러나왔다. 오슬로젠은 안도하여 뒷처리를 끝내고 손까지 깨끗이 닦은 다음 화장실에서 나갔다.

재봉사는 마네킹에 대고 한참 작업을 하다가 오슬로젠이 나오자 그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굽혀 오슬로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기야, 혼자 괜찮았어? 화장실 쓰기 안 힘들었어?"

그건 사실 당연한 질문이었다. 다섯 살짜리 꼬마 마녀가 배변의 뒷처리를 혼자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 재봉사, 안은 아직 20대의 젊은 마녀로 미혼에 아이도 없지만 그 정도는 상식이라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슬로젠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며 네 괜찮았어요 감사합니다 했다.

"그래? 장하네. 혼자 화장실도 쓸 줄 알고. 대단한데? 그렇지, 아기가 너무 장하니까 내가 선물을 줄게."

그렇게 말하며 오슬로젠의 머리를 쓰다듬은 안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사탕 세 알을 꺼냈다. 그리고 포도맛, 딸기맛, 오렌지맛 중 어떤 맛이 제일 좋은지 물었다. 사탕을 눈 앞에 둔 슬로젠은 당황했다.

'사탕 같은 걸 받아먹으면 스승님께 혼날 텐데...'

하지만 안 받겠다고 하면 이 재봉사님께서 화내실지도 몰라. 어떡하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으로서는 기특한 아기에게 작은 선물을 준 것 뿐이었지만 오슬로젠에게는 그 사탕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는 게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처럼 느껴졌다. 오슬로젠은 한참 안의 눈치를 봐가며 고민한 끝에 조그맣게 대답했다.

"포, 포도맛이요..."

"그래! 그러면 포도맛을 줘야지. 자, 아~하자."

"아아~... 암."

"옳지, 잘 했어요!"

안은 귀엽게 앙 벌린 입에 포도맛 왕사탕을 쏙 집어넣었다. 혀를 오물오물해서 사탕을 볼 안에 수납한 오슬로젠이 고개를 빼꼼 숙였다.

"함햐... 암햐함미다."

"아이고 착해라. 메럴리나가 정말 귀여운 아기를 낳았네!"

안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르륵 웃으며 아이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혼날까봐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오슬로젠이었지만, 입 안에 진하고 달콤한 포도향이 퍼지자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아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의류점을 나서며 굳게 마음을 먹었다.

'사탕 진짜 맛있다. 스승님한테 들키지 않게 빨리 먹어야지!'

또륵, 또르륵, 도로록, 또로록, 쭙쭙. 아이는 다짐한 대로 열심히 사탕을 빨아먹었다. 볼일을 보고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걸 스승님에게 들키면 큰일이기 때문에 의류점 뒷편에 숨어서였다. 사실 그런 곳에 숨는다고 해서 어른들 눈에 안 보이는 건 전혀 아니지만, 자고로 다섯 살이란 아슬아슬하게 얼굴만 숨기면 남들도 안 보이는 줄 아는 나이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친구를 만들겠다며 또래 아이들 사이를 들쑤시고 다니던 '율리아나의 아이'가, 아직 말 안 건 애 없나 여기저기를 번뜩이는 눈으로 훑어본 끝에, 남들 눈에 다 보이는 장소에 숨은 '메럴리나의 아이'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을 걸어버린 것은.

"아앗! 장미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오슬로젠은 있는 힘껏 온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들켰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웅웅 울려퍼졌다. 하지만 곧 그 목소리가 스승님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오슬로젠은 조심조심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이른 가을의 하늘과 같은 빛의 눈동자가 오슬로젠의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 난 에시예요! 산딸기쿠키를 좋아해!"

에시는 이번에는 왼팔을 귀에 짝 붙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은 오동통한 손바닥이 대체 뭘 가리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오슬로젠은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반면 에시는 상대의 혼란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해맑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랑 친구할래?!"

"...!"

오슬로젠은 그제야, 몇몇 어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이러다가 스승님한테도 들켜버린다. 사탕 같은 걸 먹고 있단 걸 들키면 스승님은 정말로 엄청나게 화를 내실 거다. 밝은 하늘색 구두에 감싸인 작은 발이 자박, 자박, 뒤로 물러났다. 오슬로젠의 머릿속은 두려움으로, 가슴은 빠르게 뛰는 심장으로 온통이었다.

"으..."

열이 오른 눈가 아래에서 다친 새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입 안에 황홀하게 맴돌던 사탕의 맛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있었다. 조금만 힘을 빼면 금세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면 더더욱 심하게 혼날 텐데.

오슬로젠이 이리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안, 눈앞의 남색 코트 꼬마는 해맑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는 질문을 던져댔다.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오슬로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스승님, 남색 코트, 포도 사탕, 의류점, 모르는 애.

'혼날 거야...'

여러 가지 생각이 조그마한 머리통에서 복작복작 떠다녔다. 오슬로젠은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얼굴에 힘을 주었지만 오늘도 종아리를 맞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웅얼거렸다. 결국,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흐... 으...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 장미야, 왜 그래요? 우, 울지 마요! 울지 마아."

에시는 갑자기 울어제끼는 또래에게 당황한 나머지 통통한 손을 바동거리며 오슬로젠을 달랬다. 하지만 오슬로젠은 울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입을 앙 벌리고 우는 통에 안에 들어있는 포도사탕이 다 보일 정도였다. 결국 소란의 중심에 자신의 귀여운 아이가 있는 걸 확인한 율리아나가 달려오고 말았다. 그는 몸을 낮춰 에시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아이고, 우리 친구가 왜 우는 걸까? 에시, 무슨 일이 있었어?"

"으응, 에시가요. 인사했는데요. 놀자고 했는데, 어어, 친구가 놀랐나 봐요..."

"아이고, 그랬어? 친구 괜찮아? 많이 놀랐네에, 그치."

상황을파악한 율리아나는 오른손으로는 에시를 단단히 붙잡고, 왼손은 부드럽게 뻗어서 오슬로젠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 딴에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율리아나의 의도와 달리 오슬로젠의 울음소리는 오히려 더 커질 뿐이었다. 그 쯤 되자 다른 마녀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한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슬로젠을 알아본 누군가가 보호자에게 전언을 보내겠다고 했다. 잠시 후, 메럴리나가 얼굴을 찌푸리고 달려왔다.

"로지!"

"스승, 흐끅, 님... 우으아아아아아앙!!!"

메럴리나는 바로 아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오슬로젠의 울음소리는 스승님의 손길이 닿자 더 증폭되었다. 이제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와 새빨갛게 열꽃이 핀 얼굴이 못내 애처로웠다.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는 거니?!"

"스승, 흐읏, 잘못, 잘못했어요... 스승님, 흑... 잘못..."

"...하아, 이리 와! 율리아나, 내 제자에게 손 대지 말아요."

"아, 저."

아이를 차갑게 다그치던 메럴리나는 율리아나에게 싸늘한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오슬로젠을 질질 끌면서. 그 태도가 어찌나 강경했는지, 율리아나가 채 사정을 설명할 틈도 없었다.

그러니까, 오슬로젠이 그런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율리아나의 손길이 닿았을 때 더 크게 울어버린 건 결코 싫거나 불쾌해서가 아니라는 말을.

그저 그런 부드러운 손길이 처음이라 그저 놀라서였다는 말을.

*

한편, 에스텔르를 안아들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온 율리아나는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으응... 응..."

에시는 한참 고민하더니 몸을 딱 돌려서 빈 공간을 보고 섰다. 그리고 왼손을 착 뻗어 머리 옆에 붙이고 소리쳤다.

"아! 장미다! 안녕! 난 에시예요, 친구할래?"

그 다음에는 자기가 보고 있던 자리로 가더니 몸을 틀어서 살살 뒷걸음칠을 쳤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게 울음을 터뜨리려는 듯했다. 조금 전 오슬로젠의 표정 그대로였다.

"으..으으으..."

에시의 연기는 매우 박진감이 넘쳤다. 한 차례 표정 연기를 끝낸 아이는 원래 자리로 쑉 돌아와 손을 뻗었다.

"아이고! 장미야, 왜 그래?"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달래듯이 허공에 대고 손을 토닥인다. 그 다음은 다시 반대쪽 자리로 가서 손으로 치마자락을 꼭 잡고 애앵 애앵 우는 시늉. 그리고 또 다시 원래 자리로 가서 울지 마 장미야 하고 달래는 시늉까지 한 다음 율리아나를 올려보았다.

"이랬어요!"

"...으음, 미안 에시. 한 번 더, 조금만 더 진짜 같이 해볼래?"

율리아나는 곤란한 듯이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에시는 네! 하고 밝게 대답한 후 아까 했던 연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상세한 표현을 곁들여서였다.

"아앗, 장미다! 안녕! 난 에시예요! 산딸기 쿠키를 좋아해. 나랑 친구할래? 우... 우... 우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 장미야, 왜 그래요? 울지 마아, 울지 마아."

마지막으로 스승님한테 폭 안겨서 친구가 놀랬나보다 설명하는 장면까지 재연한 에시에게 율리아나는 일단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로단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진짜 놀라서 그랬나본데?"

"메럴리나가 오해한 것 같다면서. 괜찮겠어?"

"으음~ 그 사람 왠지 나한테 자꾸 틱틱거린단 말이야. 내가 뭔가 잘못했나?"

율리아나가 에시를 안아들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로클렛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걔 그러는 게 하루이틀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율리."

"아니, 난 괜찮은데. 그냥 거기 애기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걱정됐지요. 아, 에시. 스카랑 시즈랑 놀고 있을래?"

"네!"

율리아나의 품에서 내려간 아이는 먼저 흙장난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붉은 머리와 어두운 남색 머리 꼬마가 에시를 발견하고 샐샐 웃으며 손짓을 했다. 에시는 둘 사이에 미끄러지듯 엎어졌고 이어서 한 차례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그 가을의 집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그 후로 에스텔르 릴, 통칭 에시는 오슬로젠을 만날 때마다 어디선가 장미꽃을 가져와서 내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슬로젠이 울어버렸던 그 집회 날, 꼬마 에시가 소꿉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기 때문이다.

'있잖아요. 장미를 만나서 인사했는데.'

'...?'

'근데 장미가 울었어요.'

'...?'

'에시가 놀라게 했나봐. 어떻게 하면 안 놀랄까?'

각각 진한 붉은 눈과 푸른 눈을 가진 친구들은 대체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결국 둘이 내린 결론은 '에시니까 어쩔 수 없다'였다. 붉은 눈의 친구가 대답해주었다.

'선물을 주면 되지 않을까?'

'먹을 거나, 예쁜 거나, 주면 안 울지 않을까?'

푸른 눈의 친구도 고개를 기울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들은 에시의 머릿속에 반짝 하고 떠오른 것이 바로 장미꽃이었다.

얼마 전 배운 바로, 오슬로젠과 같은 요정 마녀는 꽃잎만 먹고도 살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요정 마녀의 주식은 꽃잎이다. 먹을 거면서 예쁘기도 하고 딱 좋다. 그것도, 오슬로젠의 탄생화인 장미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

"아! 장미다!"

"?"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집회 광장에서 스승님을 기다리고 있던 오슬로젠을 발견한 에시는 밝게 웃으며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나서야 떠올렸다. 오슬로젠이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빨리 선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걸.

"잠깐만!"

그래서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근처의 화단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 중 제일 깨끗하고 송이가 큰 걸 골라서 조심스럽게 줄기를 똑 땄다. 그리고 오슬로젠에게 돌아와 따온 장미를 쑥 내밀었다.

"자! 선물!"

"?!"

오슬로젠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에시와 그 손에 들린 장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시는 오슬로젠이 도통 장미를 받아들지를 않자 과장되게 어깨를 두드리며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결국 오슬로젠은 조심스럽게 장미를 받아들었다. 안그래도 해맑은 에시의 얼굴이 밤하늘의 별처럼 밝아졌다.

그런 아이를 향해 오슬로젠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 에시,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난 갈게. 다음에 봐요, 장미야!"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에스텔르의 뒷모습을, 오슬로젠은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받은 장미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한 장 뜯어서 오물거렸다.

사실 오슬로젠은 장미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외형은 둘째 치고 맛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탄생화인 만큼 꽃잎 한 장만 먹어도 기력이 훅 회복되는 효과는 있었지만 어린 아이의 미각에 적합한 맛은 아니었다.

'이거, 조금 달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시에게 받은 장미꽃의 맛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늦봄.

마녀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긴급 집회가 열렸다.

핵심 주제는 카르카샤스 조약의 존속에 큰 위기를 가져올 뻔 했던 죄인, 메럴리나.

그리고 그 제자인 오슬로젠의 처우에 대해서였다.

'아무리 스승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아이에게까지 그 값을 치르라고 하는 것은...'

'하지만 인간 쪽은 전부 처형한 거잖아요? 우리만 책임을 안 지는 것도 좀 그렇지.'

'그렇다고 저런 작은 아이를 죽이자는 겁니까?'

'갈 곳도 없을 텐데... 불쌍하게.'

'하지만 저 애가 커서 부모처럼 안 된다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이제 와서 연좌제라니요. 그럴 거면 애초에 라멘텀과 파케샤, 올로이스랑은 상종도 말았어야죠.'

'이야기를 비약시키지 말게. 하지만 고작 여덟 살 짜리에게 죄를 묻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다행히도 결과는 만장일치, 오슬로젠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승, 생부, 그리고 대다수의 친인척이 처형당했다. 홀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충분히 가혹한 벌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슬로젠이 미성년 마녀인 이상 반드시 마녀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새로이 사제결연을 맺어 새 스승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맞겠으나, 죄목이 죄목이다보니 도통 나서는 마녀가 없었다.

마녀들의 자비는 딱 거기까지였다. 가여우니 살려는 주겠지만, 그렇다고 짐을 떠맡을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이래서야 원로님들께서 맡아주시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원로님 중 요정 일족은 헬레이샤 님 뿐이시죠.'

'하지만 헬레이샤 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니...'

원로회의 요정 마녀인 헬레이샤는 이제 133세, 마녀로서도 꽤나 고령이었다. 아무리 몇 년 만이라도 아이 하나를 떠맡기에는 역부족인 나이였다.

'어쨌든 요정 일족이 맡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 애도 요정 마녀니까.'

누군가의 한 마디에 마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요정 일족에게 향했다. 요정 마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사렸다.

'나는 힘들어요. 그러니까, 지금 미성년인 제자만 셋이잖아요. 리벨리타 님은요?'

'나? 나는 남편이 세샤에 장기 출장을 가서... 몇 년 간은 거기 있기로 했는데... 자기는 어때?'

'글쎄요. 시간이 될지... 이번 북부 파견, 제가 가기로 했으니까 거기 집중하고 싶거든요. 조약을 생각해도 그렇고... 아스테나는 어떻니?'

'네?! 저 이제 스물 한 살이에요! 제 앞가림만으로도 버거운데...!'

논의라는 이름의 떠넘기기는 도통 출구를 찾지 못 하고 이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오슬로젠은 이제 겨우 목탄 연필이나 제대로 쥐게 된 손으로 로브자락을 꼭 쥐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 아래의 붉은 눈은 시든 겨울 장미처럼 줄곧 처져있었다.

아이는 그저 두려웠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도 충분히 두려웠으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은 그 이상으로 두려웠다. 시선들이 품은 감정이 호의적인 것인지 적대적인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자신을 '귀찮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오슬로젠은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죽어서 도망칠 수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이렇게 대놓고 짐짝을 떠넘기듯이 대화하는 어른들 사이에 있느니 차라리 생모와 생부처럼 목이 잘려 저세상으로 도망가는 것이 나았다.

태어나서 8년 간 늘어난 건 울음을 참는 기술 뿐일까. 하나 빠진 앞니가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고 있던 순간이었다.

'...우리가 맡도록 하죠.'

아주 오랜 시간, 쏟아져내리던 달갑지 않은 말들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한숨도 귀찮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직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오슬로젠은 땅에 떨어뜨려두었던 눈길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아니... 로단테. 하지만 당신은 요정 일족이 아니잖아요.'

거기에 서있는 것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마녀였다. 자신과 똑 닮은 제자 둘을 양 옆에 거느린 그는 엄격한 눈빛으로 마녀들을 바라보다가, 오슬로젠과 눈이 마주치자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그런 그의 뒤에서 늘상 함께 다니는 마녀 둘이, 각각 제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네. 하지만 오슬로젠이 아주 아기인 것도 아니고, 요정 일족 분들도 조언을 해주신다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로클렛과 율리아나도 도와준다고 하였으니... 셋이서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 말고는 맡겠다는 사람도 없잖아요? 로단테는 여러 일족의 생활 양식에도 해박하고 환경적으로도 아이를 맡기 좋죠. 로단테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함께할 거고요.'

'요정 일족 외의 마녀가 맡는다면 우리 정도가 제일 좋은 인선일 것 같은데요.'

이어지는 차분한 설득에 마녀들은 결국 떨떠름하게 찬성의 목소리를 냈다. 몇몇의 반대 의견이 있긴 했지만 그러면 네가 맡을 거냐는 무언의 압력에는 버티지 못 하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의장을 맡은 마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선언했다.

"으흠, 그러면 불꽃 일족의 로단테, 환영 학파의 로클렛, 그리고 레파라티오 율리아나. 이상 세 명에게 요정 일족의 어린 소망의 빛, 오슬로젠의 양육을 위탁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요정 일족의 각 마녀들도 오슬로젠의 원활한 성장을 위하여 조언을..."

"장미야!"

의장이 판결문을 끝까지 읊기도 전에, 그 허리를 끊고 높고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신난 어린아이 하나가 집회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길게 늘어뜨린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 시원하게 뻗은 눈매와 언제나 해맑은 입매, 그리고 오슬로젠에게 늘 장미꽃을 주고 가는 작고 가느다란 손.

"가자!"

"?!"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달려나온 에시는 오슬로젠의 손을 꼭 잡고 끌어당겼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져오는 것은 분명한 온기였다. 방심하고 있던 오슬로젠은 에시가 이끄는 대로 멍하니 달려갔다.

"아. 저기, 저..."

목적지에 다다른 오슬로젠은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머뭇거리는 오슬로젠을 세 명의 어른 마녀와 네 명의 제자가 한꺼번에 바라보았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어른 마녀들은 짧게나마 미소를 지어보였고 제자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루나데인은 그보다는 조금 더 길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에시는 나머지 두 명의 어린 마녀에게 가볍게 웃으며 선언했다.

"장미 데려왔어!"

"너 슬슬 쟤 이름 좀 제대로 불러. 장미가 아니라 오슬로젠이잖아."

그렇게 지적을 한 건 스카디아였다. 루나데인의 동생인 그 소년은 오슬로젠과는 딱 두 번, 그것도 거의 일방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에시가 스카디아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옆에 있던 다른 한 명의 소년이 제안을 해왔다.

"그럼 뒤쪽에만 잘라서 '로젠'은 어때? 장미니까."

"어, 그거 괜찮은데. 오슬로젠, 넌 어때?"

스카디아는 네가 싫으면 말고, 하고 덧붙였다. 세 아이가 대답을 기다리며 오슬로젠의 앳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미니까, 로젠.'

오슬로젠은 그 두 글자를, 입 안에서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대답했다.

"...로젠. 응, 좋아."

"그럼 장미는 앞으로 로젠인 걸로!"

에시마저 깔끔하게 동의하자, 소년들은 로젠을 향해 줄지어 자기 소개를 했다. 첫 타자는 스카디아였다.

"난 불꽃 일족의 스카디아. 스카라고 불러. 너랑 동갑이고 로단테 님의 제자야. 그리고 이 쪽은 우리... 언니. 루나데인."

"안녕, 난 루나데인이야. 내년에 성년을 맞아. 루나라고 부르면 돼. 저번에 한 번 대화한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해?"

그렇다면 루나데인은 열 네 살이다. 로젠은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와 스카는 둘 다 로단테 님의 미모를 완벽하게 물려받아 어린 나이에도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로젠이 딱 한 번의 대화로도 분명하게 기억할 정도로 말이다.

이어서 '로젠'이라는 애칭을 제안해왔던 소년이 인사를 했다.

"나도 너랑 동갑이야. 환영 학파의 시즈라구 해. 아니면 티디라고 불러도 돼. 마녀들만 있을 땐 시즈메일이고, 인간들 앞에선 티엔더스야. 로클렛 님이 우리 스승님이셔."

시즈는 그렇게 말하며 로젠의 손을 꼭 잡았다. 이쪽 역시 꽤 예쁘장한 아이였다. 로젠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작아서 조금 마음이 편했다. 로젠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에시도 자기 소개를 해왔다.

"난 에스텔르예요! 에시라고 부르면 돼요. 그런데 로젠은 내 이름은 알 거야. 예전에 소개했는 걸!"

"그게 제대로 된 소개냐... 그냥 여기저기 명함 뿌리고 다니는 거나 똑같지. 로젠, 얘 이름 기억했었어?"

스카디아가 질린다는 듯이 웃으며 에시를 손짓했다. 솔직히 3년 전의 그 일은 충격적인 경험이기도 했고, 그 이후로 꾸준히 먹을 것-장미꽃-을 가져다가 주던 에시였기에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와 시즈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너 머리 좋은가보다. 그걸 기억하다니."

"아니면 되게 착하거나. 로젠, 착해보여."

"로젠, 너 곱하기 할 줄 알아?"

"으, 응."

"나누기는? 나누기 어려워."

"나는 곱하기도 어려워!"

"근데 얘는 돈 계산은 되게 잘 해."

"맞아. 에시 저번에 가계부 처음부터 끝까지 안 쓰고 더하기 빼기 했잖아. 그치, 루나?"

"아아, 그 때? 맞아. 에시도 머리가 좋아. 그리고 착하고. 에시는 나중에 뭘 해도 잘 할 거야."

"아빠가 경제학 공부 열심히 하면 상단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로젠은 경제학 배운 적 있어?"

"으응, 아니..."

"그러면 세스란 어는?"

자기소개는 난데없이 변질되어 그 후로도 로젠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소년들은 로젠이 세스란 어를 조금 할 줄 알고 나누기는 세 자릿수 나누기 한 자릿수까지 할 줄 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는 어디까지 할 수 있다며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집회장의 한 구석에 계절을 잘못 찾은 듯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

집회는 그걸로 끝이었다. 사실 몇 가지 안건이 더 올라오기는 했으나 가장 급한 일이 해결된 이상 길게 진행할 필요도 없었다. 스카는 로단테, 에시는 율리아나에게 안겨서 이동술을 사용했고, 로젠은 시즈와 함께 로클렛에게 신세를 졌다. 성년이 곧인 루나는 스스로 이동할 수 있었으므로 혼자였다.

우선은 가장 가까운 로클렛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발드로제 공작부인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단촐한 오두막이었다. 로클렛으로서는 시즈와 둘이 살기에 충분히 아늑하고 편한 크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손님이 오면 앉을 자리가 부족한 게 조금 흠이긴 했다.

"얘들아, 조금 더 꾹꾹 눌러앉아볼래? 잘 하면 너희 넷 다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옳지, 완벽하다."

로클렛의 말에 스카와 시즈가 조금 더 붙어서 앉자 작은 소파에 로젠까지 앉을 수 있을 자리가 확보되었다. 검은 곱슬머리의 꼬마 마녀가 에시의 옆자리에 끼어앉자 그 앞의 테이블에 머그컵 네 개가 톡탁톡탁 나란히 놓였다. 로클렛이 물었다.

"로젠, 코코아 괜찮니?"

"...네."

소심하게 대답하자 로젠 앞의 머그컵에 부드러운 갈색 액체가 가득 차올랐다. 조그마한 마시멜로 두 개까지 빼놓지 않고 올려져있었다. 로젠은 다른 아이들이 코코아를 호로록 넘기는 걸 보고서야 조심스럽게 자기 몫의 컵을 입에 가져다댔다.

"다들 입에 맞아? 스카는 마셔봤으니까 알겠지만, 세샤에서 새로 들여온 거거든. 에시가 남기지 않는 걸 목표로 사온 야심작인데."

"네! 맛있어요! 다 마시는 거 노력할게요!"

"달긴 한데 맛있어요. 마시멜로 최고예요."

"코코아... 좋아..."

에시, 스카, 시즈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시즈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답이 아니라 도취에 의한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반응이기는 했다. 로젠 역시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겨우 맛있다고 대답했다.

"루나는?"

"향긋하고 아주 맛있어요, 로클렛님. 원래 마시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네요. 아, 혹시 저도 좀 살 수 있을까요? 레퀴에스에 가져다놓고 싶어요."

"그럴래? 세샤 동부에 상행을 간 친척이 보내준 건데, 편지를 보내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내년까지는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야."

"네, 기다릴 수 있어요. 으음, 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그만큼 넉넉하게 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건 걱정하지 마. 아마 보내달라는 만큼 보내줄 거야.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아, 일단 우리 집에 있는 거 조금 덜어줄게. 그래도 되지, 롯테?"

로단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클렛은 바로 코코아 가루를 소분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율리아나도 에시가 잘 마시는 걸 보니 좀 구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로클렛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로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마신다기엔 에시의 머그컵에 아직 코코아가 잔뜩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푸하!"

'엄청 열심히 마시는 것 같긴 한데...'

"스카 옷에 마시멜로 흘렸다! 스승님! 스카가요!"

로젠이 에시를 관찰하던 도중, 에시가 스카를 딱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로단테가 옷을 닦아주러 오는 사이 스카가 에시를 향해 으르렁댔다.

"야, 고자질하지 마!"

"웁, 웁, 푸하아!"

소꿉친구가 자기를 째려보건 말걸, 에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코코아를 이어서 마셨다. 하지만 푸하, 푸하, 거리는 기세에 비해 이번에도 내용물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 그 광경을 관찰하던 로젠은 에시가 코코아를 아껴서 마시고 있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 마음도 이해됐다. 이 코코아는 빨리 마셔버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맛있으니까.

의문이 해소된 로젠은 반쯤 녹은 마시멜로를 입 안에서 굴리며 행복한 기분에 젖었다. 혀 전체를 감싸는 달달함은 진한 만큼 중독적이었다, 로젠은 눈치채지 못 했지만, 소파의 정확히 반대편 가장자리에 앉은 시즈도 거의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루나데인은 혼자 쿡쿡 웃었다.

행복의 지속 시간은 정확히 코코아가 남아있는 시간 만큼이었다. 시즈와 로젠이 아쉬운 표정으로 머그컵을 내려놓은 것은 거의 동시였고 스카는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컵을 비우고 물수건으로 옷과 입가를 닦고 있었다. 아직 코코아가 절반 정도 남아있는 에시의 머그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즈의 얼굴에 스카가 물수건을 가져다댔다.

"야, 입 닦아야지. 너 엄청 묻히고 먹었어."

"지는 옷에 흘려...으으웁."

"스카야! 다음 차례는 로젠이에요! 로젠 입에도 코코아 잔뜩 묻었어. 코코아 대축제야!"

"응, 잠깐 기다려."

그렇게 대꾸한 스카는 물수건으로 시즈의 입가를 박박 문지르더니 바닥에 쭁 내려와서는 로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물수건의 깨끗한 부분을 찾아서 로젠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으으응!"

"가만히 있어! 닦기 힘들어."

로젠은 속으로 '아니, 왜 닦아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라고 생각했다. 굳이 스카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입가 정도는 스스로 닦을 수 있다. 하지만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로젠의 사교 경험이 너무 일천했다.

결국 스카는 로젠의 입가와 볼과 손등까지 꼼꼼하게 닦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갔다. 로젠이 고민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자 스카는 괜찮다며 화사하게 웃어제꼈다. 예쁘장한 얼굴에 씩씩한 미소가 떠오르니 아주 보기 좋았다. 로젠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 우리도 좀 앉자. 한 숨 돌려야지."

"네에. 아니, 우리 에시가 아직 마시는 걸 안 포기했네? 세상에!"

"네! 다 마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절반보다 더 많이 마셨어요!"

에시는 제 엄마를 올려다보며 발랄하게 대답했다. 율리아나는 감격해서 이 코코아는 기적의 음료라고 중얼거리며 우리 집에도 반드시 사다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른들의 앞에도 홍차가 담긴 찻잔이 한 개 씩 놓였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인데... 우선 생활에 대해서는 로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좀 들어봐야겠지?"

차를 한 모금 마신 로클렛이 그렇게 운을 뗐다. 로단테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지내기는 내 집에서 지내는 게 제일 편하지 않을까. 마을에 있기도 하고 방도 조금 더 많으니까."

"괜찮겠어요, 롯테? 루나 성년식 준비로도 바쁘잖아."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레퀴에스 준비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네."

율리아나가 걱정을 표시하자 로단테는 약간 고민한 다음 대답했다. 로단테의 첫 번째 제자인 루나는 내년에 성년을 맞는다. 그에 따라 로단테 역시 이것저것 준비를 해주느라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것이 '레퀴에스'다. 어른들의 대화를 듣던 루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스승님."

"그럴 수는 없어, 루나. 앞으로는 그곳이 네가 '돌아갈 곳'이 되는 거니까."

단호하게 말한 건 로클렛이었다. 그리고 로단테도 그것에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퀴에스는 한 마녀의 성년과 함께 지어져 그 마녀의 평생의 보금자리로서 기능한다. 그런 레퀴에스를 허투루 준비한다는 것은 마녀의 상식 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클렛은 이어서 로젠에게 물었다.

"우선 로젠의 이야기도 들어보자고. 로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지내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집이나, 아니면 로단테의 집에서 스카와 루나와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로젠이 그 질문을 들은 건, 시즈가 전달시킨 쿠키가 스카, 에시를 거쳐 막 로젠의 손에 들어온 시점이었다. 로젠은 눈치를 보듯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곳이나 좋아요."

분명한 의사표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 보호자를 잃은 여덟 살 짜리 아이의 대답으로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히려 스승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까. 로단테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러면 우리 집에 가서 지내자꾸나. 그렇게 넓은 건 아니지만 제자도 둘이나 있고, 시즈도 에시도 자주 놀러오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란다."

"...하지만, 루나의 성년식이..."

로젠은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말꼬리를 흐렸다. 레퀴에스 준비가 얼마나 힘든지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게 갓 성년을 맞는 마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건 알았다. 어른들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한 편, 전언으로 레퀴에스에 관련된 대화를 괜히 육성으로 했다는 후회를 나누었다.

"저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 때, 에시가 다 마신 컵을 탁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율리아나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제 엄마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에시의 속삭임에 응응 추임새를 넣으며 끝까지 들어준 율리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괜찮네. 롯테의 허락을 받긴 해야겠지만."

"저는요,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시는 그렇게 말하며 로젠의 옆으로 돌아왔다. 로클렛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뭔데?"

"아니, 에시가 아예 다같이 지내면 어떻겠냐네요? 여름이랑 겨울마다 다같이 공작성 가서 지내는 것처럼."

"다같이? 롯테네 집에서?"

"응, 롯테만 괜찮다면 좋은 생각 같지 않나요? 나랑 로키가 롯테의 집에서 지내면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편할 거고."

그 말에 어른들은 생각에 잠겼고, 꼬마 제자들은 잔뜩 흥분해서는 손을 번쩍 들고 좋다고 소리쳤다. 발안자인 에시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심지어 루나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롯테, 괜찮겠어?"

"나쁠 건 없겠지만 방의 개수가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는데... 너희들, 방을 같이 써야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네!"

"좋아요!"

"같은 방 좋아요."

"..."

힘차게 대답하는 또래 마녀들과 달리 로젠은 머뭇거렸다. 이 애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방을 같이 쓰는 건 저항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루나의 성년식 준비가 방해받으면 더 안 될 일이다. 그래서야 본말전도니까. 소년은 결국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당분간, 일단은 루나의 성년식 전까지 다들 내 집에서 지내는 걸로 하자."

"예에!"

"오!"

로단테의 선언에 스카와 시즈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리고 몸을 틀어서 양손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에시와도 손을 마주쳤다. 그 다음에는 에시까지 몸을 틀어서 로젠과도 손을 마주치려고 했다.

"나 너무 멀어... 로젠한테 전해 줘."

와중에 로젠과 소파의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시즈는 우는 소리를 하며 스카의 손에 한 번 더 짝을 했다. 결국 로젠은 에시와 한 번, 스카와 두 번 손바닥을 마주쳐야만 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그 외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