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해냈어!” 켈레브림보르는 그날만 해도 열네 번째로 외쳤다. 나르비는 질리지도 않고 허공에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다. “끝났다고!” “지긋지긋했어!” “다신 안 할 테다!” “나마리에!” 낄낄거린 켈레브림보르가 잔을 비웠다. 그의 잔에는 크하잣둠의 자랑인 밀맥주가 채워져 있었(었)다. 나르비의 잔에서는 아직 도르위니온산 포도주가 검푸른 빛깔로
그는 언젠가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적 있었다. 굽이치는 단발이 보기 좋았던 런던의 어느 소녀에게서, “군인에게 마음 주어선 안 돼요, 알죠?” 라고. 침침한 조명 속에서 중위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무대 위에 뛰어올랐다. 반쯤 그림자에 묻힌 입매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던 것도 잠시였다. 잿빛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내리깔리는 것을 지켜보며 글로르핀델
기반 “글람호스.” 보드 위에 검은 말 열여섯 개를 내려놓으며 켈레브림보르가 말했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의 손등에서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는 곳에서 가는 뼈가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모습이 악기를 타는 움직임처럼 부드러웠다. 사슴 가죽을 씌운 사각형 나무판에는 붉은 실로 여든한 개의 정사각형이 수 놓여 있
이제 베렌은 그 땅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손에는 펠라군드의 빛나는 반지를 끼고 있었고 자주 이렇게 외쳤다. '여기 오는 것은 방황하는 오르크나 첩자가 아니라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이고, 한때 바라히르는 펠라군드의 총애를 받았었노라!' 그렇게 그는 검은 바윗돌 위로 포말을 일으키며 노호하는 나로그 강의 동쪽 강변에 다다랐고, 녹색 옷을 입은 궁수들이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후린의 아들은 사납게 쏘아붙였다. ‘난 벨레그 곁에 머물 겁니다. 신실치 못한 목소리여, 내게 그를 떠나라 하지는 마십시오. 만사가 허무하군요. 아 검은 손의 죽음이여, 그대 내게로 가까이 오라! 후회가 그대를 감화할 수 있다면, 나를 애도에서 해방시켜, 패배한 채 그의 차가운 가슴에 안기도록 하라!’ 그러자 귄도르의 공
“하지만 아이를 낳을 마음은 없는 겁니까, 페아나린케?” 묻는 바부터 그 끝의 호칭까지 완벽하게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이다. 켈레브림보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나타르를 노려본다. 이 무렵의 그는 아직 안나타르를 친구처럼 여기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몇몇 장인들이 그러듯 숭배하지도 않기에. 두 나무의 빛 아래에서 자란 그에게 서녘의 사자는 그 신분
그러고 나서 카란시르는 인간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고 할레스의 명예를 크게 높여 주었다. (중략) “당신 일족이 여길 떠나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서 살겠다면, 그곳에서는 엘다르의 우정과 보호를, 그리고 당신들만의 자유로운 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레스는 자존심이 강하여 남에게 이끌리거나 다스려질 뜻이 없었고, 할라딘 일족 대다수도 비
안드레스 | 희망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확실치는 않으나 알려진 것에 기반을 둔 기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핀로드 | 그것은 인간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를 암디르 곧 ‘올려다보기’라 부르지요. 하지만 더 깊은 곳에 기반한 또다른 희망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 곧 에스텔이라 칭합니다.
힘라드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 아레델의 흰 사냥복에는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엉겨 있었다. 아레델이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그림자는 눈 녹은 물처럼 흘러 떨어졌다. 켈레고름은 요새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레델은 고삐를 쥔 채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켈레고름의 입꼬리가 조금 삐뚜름했다. 말소리가 들릴 거리의 다시 절반까지 다가가니
“이게 난쟁이들이 하는 놀이라고?” 핀곤은 핀로드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다가 곡주를 쭉 들이켰다. 핀로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왜 하필 페아노르의 아들들이야?” 아란디스가—아니지, 이제는 켈레보른이 지어준 이름대로 갈라드리엘이었다—불만스레 물었지만, 핀곤이 있는 자리였기에 동족살해자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핀로드는
빛의 속도를 재어 보았느냐고, 언젠가 안나타르 아울렌딜이 그에게 물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고개를 저었다. 기예란 극한으로 치닫을수록 모순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요정석은 재료의 합보다 무거웠지만, 이제껏 광속을 재려 해 본 적은 없었다. 이유를 꼽기는 어려웠다. 힘링에서 타오른 봉화가 단 몇 분 안에 바라드 에이셀에 닿는 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아마
“사람들이 너를 멜리안에 비견한다더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흘러나온 한 마디는 허공에 나른하니 흩어졌다. 안나타르는 씩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순백의 예복이 몸 아래에서 구겨지며 바스락거렸다. 작업실에야 온갖 미완성작과 도면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켈레브림보르의 침실은 그리 넓지도 않을 뿐더러 책상 하나 없이 단출했고, 가구라
At the beginning of the Second Age he was still beautiful to look at, or could still assume a beautiful visible shape—and was not indeed wholly evil, not unless all “reformers” who want to hurry u
안장 밑에서 군마가 거칠게 요동쳤고 손에 쥔 창자루는 피에 젖어 미끄러웠다. 비라도 한바탕 뿌려준다면 좋으련만, 고작 며칠 전 지난 난 둥고르세브에서마냥 어두컴컴하게 드리운 그림자는 전의를 지독히도 갉아먹었다. 무뎌진 손가락에서 창이 한 번 훅 튀어오르기가 무섭게 갑옷이 찢긴 자리를 향해 도끼날이 닥쳐들었다. 그는 가까스로 허리를 젖혔다. 기괴한 투
“우르웬!” 다급한 외침이 방 안에 울리기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나동그라진 수틀이 저만치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잘못 가눈 바늘에 가운뎃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으로 달려든 형제의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눈을 맞추었다.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오라버니, 이게
늦은 아침, 엘렘마킬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끔벅거렸다. 주변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끝에 그는 제가 두 번째 관문의 숙소에 놓여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내렸다. 숙소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태반이 돌의 관문의 제복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엘렘마킬은 머릿수를 거듭 어림해, 잠든 이들의 수가
광기와 이성 사이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있어, 세상의 적과 싸우는 이라면 누구든 그 선 위를 걷게 된다 했더랬다. 그러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에레이니온. 초반에는 분명 잔뜩 달구어졌던 야영지의 공기는 하루하루 식어내렸다. 치료사들이 마에드로스가 죽지는 않을 거라 장담한 탓도, 기운을 차린 핀곤이 여느 때처럼 임무에 복귀한 탓도,
외로운 섬 동쪽 해안에 세워진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지만,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을 마르 티알리에바 곧 ‘기쁨의 집’이라 불렀다. 그게 임라드리스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임라드리스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곳이었고, 그 비밀이 공공연한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제3시대의 끝자락에 가서야 일어난 변화였으니까
“아이가?” 네르다넬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라곤 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네르다넬 님,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엇지만, 네르다넬의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네르다넬의 주의는 여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에게 못박여 있었던 까닭에. 아주 갓난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