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ëanorian star
길갈라드 & 켈레브림보르 | 190606 포스타입
안장 밑에서 군마가 거칠게 요동쳤고 손에 쥔 창자루는 피에 젖어 미끄러웠다. 비라도 한바탕 뿌려준다면 좋으련만, 고작 며칠 전 지난 난 둥고르세브에서마냥 어두컴컴하게 드리운 그림자는 전의를 지독히도 갉아먹었다. 무뎌진 손가락에서 창이 한 번 훅 튀어오르기가 무섭게 갑옷이 찢긴 자리를 향해 도끼날이 닥쳐들었다. 그는 가까스로 허리를 젖혔다. 기괴한 투구 속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이 뒷발로 서 창을 든 오르크를 내리찍었고, 말에서 떨어지다시피 한 그는 등자를 당겨 밟으며 일어서 고삐를 놓은 왼손을 치켜들었다.
“아이야 바르다 틴탈레, 엘렌타리!”
손목에 감긴 가죽끈에서 대롱거리는 여덟 꼭지 별이 눈부시게 번득였다. 오르크들이 주춤한 틈을 타 그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등 뒤로 쿠루핀의 군기를 든 기수가 제 호위와도 떨어져 바짝 따라붙었고 힘라드의 기마병들이 그의 함성을 이어받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 엘베레스 길소니엘, 보라, 불 밝히는 바르다, 별들의 여왕이여. 검은 연기가 자욱한 하늘 아래 요정의 창끝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어디선가 안개를 뚫고 늑대인간의 쇳소리와는 비할 수 없이 청량한 울음이 뿔나팔 소리와 얽혀 난전의 소음을 찢었고, 켈레브림보르는 기어이 켈레고름의 본진을 찾아냈다.
후안의 길게 뺀 울음이 컹컹거리는 소리로 잦아드는 가운데 흰 말을 탄 켈레고름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몇 발짝 뒤 쿠루핀은 검은 들지도 않은 채 흔들리는 시선으로 전장을 훑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아직도 환한 손목의 별을 허공에서 두어 번 돌려 제 위치를 알리고 백부가 선 곳까지의 거리와, 그 사이를 메운 적을 가늠했다. 강변의 적을 기습하려 기마대는 서쪽으로 빙 돌아와야 했지만, 병사들은 힘라드의 패배 탓에 필사적이었고 요정의 군마는 강인했으며 한 번 붙은 속도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는 입안을 짓씹으며 말머리를 틀었고 부대가 유연하게 그를 따랐다.
그들은 적을 시리온 강변에서부터 비스듬하게 몰아붙였고, 켈레브림보르는 적의 의지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을, 그 의지가 그의 목전에서 마모되어 끊어지려는 것을 직업적인 만족감으로 읽어냈다. 켈레고름은 강과 기마대 사이 남은 적을 휩쓸며 능숙한 솜씨로 켈레브림보르의 후미에 붙었다. 매복에서 선봉으로 역할이 바뀌었지만 기마대는 원체 켈레고름과 쿠루핀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고, 그들을 앞세운 페아노르 가문의 군대는 적군을 북동쪽으로 몰아내며 시리온 강물 같은 은백색으로 쇄도했다. 켈레브림보르는 부러진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고, 네 번째로 적의 졸개가 그와 검을 맞대는 대신 허둥지둥 달아났을 때 그는 급기야, 지난 몇 달 그를 옭아매던 절망마저 떨쳐내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텔페린콰르, 이만 돌아오너라!”
켈레고름이 외치고는 퇴각 신호를 보냈다. 켈레브림보르는 칫, 하고 부관에게 손짓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기마대가 넓게 퍼지며 흩어지는 적군을 주시하는 사이 본군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곧장 돌다리를 건너 톨 시리온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크릿사이그림 기슭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데리러 달려갔다. 켈레브림보르는 힘라드의 피난민들까지 모두 다리를 건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정찰병을 지목하고 손목의 별을 풀어 부관에게 건넸다. 머리가 도로 지끈거렸다.
오로드레스는 성문 바로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켈레브림보르는 말없이 그와 손을 마주잡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의 소식을 막 들은 듯, 육촌 형제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켈레고름이 남쪽으로 가지 말고, 굳이 톨 시리온으로 몸을 피하자 주장한 까닭에는 앙그로드의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죄책감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도르소니온에 시체조차 찾지 못한 피나르핀의 아들들. 켈레브림보르는 봄이면 종종 힘라드를 거쳐 옷시리안드를 방문하던, 힘라드와 영토를 맞대고 있던 둘을 생각하며 오로드레스의 등을 토닥였다.
오로드레스는 몸을 떨며 흐느꼈다. 피나르핀 가의 다른 모두가 전쟁을 예측했음에도 고집스럽게 혼인해 딸을 얻은 사람이었다. 오로드레스는 긴 평화와 놀도르의 희망을 진심으로 믿었었고, 켈레브림보르는 그의 처절한 심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오로드레스를 달래는 대신 성문 옆 위병소로 슬쩍 끌어들였다. 다들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인지 작은 건물은 비어 있었고, 켈레브림보르는 오로드레스를 의자에 주저앉히고는 저는 마룻바닥에 앉았다.
“아르타레스토…….”
“괜찮아.”
오로드레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켈레브림보르는 의자 팔걸이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네 아내와 딸은? 아직 이곳에 있나?”
“전쟁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 나르고스론드로 보냈지. 에레이니온은 아직 이곳에 있지만. 아이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기도 했고, 설마 전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이야 했는데.”
“에레이니온?”
오로드레스가 픽 웃고는 내 아들, 이라고 중얼거렸다. 네 백부도 모르던걸. 나는 분명 알렸던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새 가로채인 전갈이 얼마나 많을까. 거기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아서, 켈레브림보르는 그저 오로드레스의 손을 쥐었다 놓았다. 그런데 오로드레스가 뜻밖의 말을 했다.
“네 백부가 그 애도 이제 떠나보내자고 했어. 마침 포위도 풀렸겠다, 그 애도 너랑 같이 팔라스 쪽으로 보내자고.”
“뭐?”
“왜, 애 데려가기는 싫어?”
화들짝 놀라 일어선 켈레브림보르가 고개를 저었다. 오로드레스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백부님께서 나를 팔라스로 보내겠다 하셨다고?”
“모르는 일인가? 하긴, 네가 그런 식으로 가버릴 리 없다 싶었지.”
“전혀.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으셨어. 정말 나를 보내겠다고 그러신 거야? 그럴 리가. 내 아버지께서는?”
“내어준 숙소로 곧장 들어갔었는데.”
켈레브림보르는 방 안을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였다. 켈레고름은 성급할지언정 결국 페아노르의 아들이었고, 그는 그의 백부가 때로 그의 아비보다도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켈레고름은 제 무리에게만큼은 한없이 약했고 켈레브림보르는 그가 어쩌다 백부의 눈밖에 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 조카에 대한 걱정이라 하기에는, 힘라드에서부터 줄곧 그에게 쿠루핀의 기마대를 맡겨온 것이 꺼림칙했다.
그는 오로드레스를 흘깃 쳐다보려다 시선을 거두고는 벽으로 성큼 걸어가 이마를 댔다. 육촌형제를 내버려두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지만 그를 대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로드레스가 제 백성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 위병소 안으로 데려왔었는데, 오히려 그가, 아버지도 숙부도 잃고 아들마저 잃게 될 이에게 추잡한 꼴을 드러내고 만 셈이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그는 비틀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오로드레스가 물었다.
“네 백부에게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너는 어쩌고?”
오로드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옷소매에 언뜻 젖은 얼룩이 비쳤다.
“네 백부에게는 탑 두 번째 층의 방을 줬어. 가장 큰 객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고.”
아이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빙빙 도는 층계를 내려갔다. 지나치는 병사들의 얼굴은 밝았고 종종 노랫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창밖은 여전히 흐릿했고, 에레드 웨스린도, 크릿사에그림도 짙게 깔린 안개에 막혀 보이지 않았다. 옆문으로 탑을 빠져나가 안뜰에 들어섰을 때조차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들린 짐꾸러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과 떨어져도 괜찮으시겠어요?”
누군가 물었고, 또다른 이가 답하려는 찰나 오로드레스가 헛기침을 했다. 흰 말 곁에 서 있던 두 요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치켜올라간 눈매의 키 큰 요정은 바로 시선을 되감아 동행에게 눈짓했으나 그 동행은 그대로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텔페린콰르, 이쪽은 에레이니온.”
“귀여운 아들을 두었어.”
더 말을 이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싱긋 웃어버린 요정은 긴 검은머리를 대충 틀어올리고 헐렁한 회색 옷을 걸친 모습이었다. 목깃 안쪽으로 사슬갑옷이 반짝였지만, 옆의 요정이 망토를 둘러주자 이내 광택은 자취를 감추었다. 요정은 팔뚝 중간까지 올라가는 가죽장갑을 벗으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에레이니온.”
에레이니온. 에레이니온은 낯선 요정의 손을 툭 건드렸다. 높은요정을 감싸는 빛은 마치 달오름 전 비치는 희뿌연 은빛 같다 했던 이가 누구였더라. 미처 씻어낼 짬이 없었던지 손톱 밑에는 까만 때가 끼어 있었고 마디는 이리저리 긁혀 보기 안쓰러웠으나, 에레이니온은 요정의 손끝을 맴도는 먼지 알갱이들은 한꺼풀만 벗겨내면 맑은 아침 같은 빛으로 화사하게 명멸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 아버지나 친척들은 쉬이 빛을 드러내놓고 보이지 않았건만, 이 사람은 그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피곤한 양 일렁이는 회색 눈을 휘어뜨리며 청년이 미소지었다.
“조카님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그 목소리는 유려하고 막힘없이 아름다워서, 에레이니온은 그 질문이 자신을 향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멍하니 청년을 쳐다보았다.
“말 안 했어.”
오로드레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에레이니온은 그제야 자신이 두꺼운 겉옷에 푹 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년이 긴 길을 떠나듯 여장을 꾸린 채라는 것도, 흰 말에 얹힌 안장이 여행용 치고도 크다는 것도. 그의 아버지는 머뭇거리며 허리를 숙여 에레이니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아이야, 하고 그가 운을 띄웠다. 그때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금발의 요정이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는 에레이니온을 번쩍 들어 오로드레스의 품에 밀어넣었다. 엉겁결에 아이를 떠안은 오로드레스가 휘청거렸다.
“사랑한다고만 해.”
오로드레스는 그 요정을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더 말해봤자 소용 없을걸. 너도 슬슬 깨닫고 있을 것 아냐. 사랑한다고만 하면 됐지.”
“켈레고름!”
사납게 쏘아붙인 오로드레스가 어깨에 얹힌 손에 주춤했다. 텔페린콰르, 젊은 청년은 아마 그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을 오로드레스를 망연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에레이니온은 오로드레스가 한숨을 쉬며 그를 꼭 끌어안는 것에 지레 안심해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오로드레스는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에서 금세라도 도로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목소리로 몇 번을 되뇌였다. 사랑해, 사랑한다.
에레이니온은 어리둥절해 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일멘이 좁아 뵐 만큼 사랑한단다, 내 별빛 같은 아이야. 내 빛나는 광휘의 별. 에레이니온…….”
그가 오로드레스의 품에서 켈레브림보르에게로, 다시 안장 앞쪽 자리로 옮겨질 때까지 에레이니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청년이 고삐를 쥐어잡고 말 한 마리가 겨우 지날 정도로만 열린 성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말 위로 가볍게 올라 낮은 속삭임으로 내달릴 것을 명할 때까지, 에레이니온은 결국 잔뜩 찌푸린 겨울 하늘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마 시리온의 한 지류일 얕은 강에는 가느다란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켈레고름의 말, 닝퀠로테를 급히 몰아 다리를 건너고, 그러자마자 길에서 벗어났다. 시리온 통로는 막혔다 해도, 부근을 지나는 모든 적의 하수인을 잡아들이기에는 오로드레스의 힘이 미약했고 어쨌든 야생 지대를 어린아이를 데리고 달려가는 여행자라면 당연히 조심해야 했다. 말의 배까지 스치는 누런 풀을 헤치며 그는 서쪽으로 말두인 강을 만날 때까지 한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잡고 있었다.
전날 밤 켈레고름과 쿠루핀과 논의한 대로 그는 말두인 강변에 붙어 남하했다가 테이글린의 건널목을 통해 탈라스 디르넨, 감시의 평원에 들어설 생각이었다. 그곳까지 간다면 정말로 빈 땅이었다. 행여나 나르고스론드의 병사라도 만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러기에는 테이글린의 건널목은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리고 나로그 강을 지나려면 거의 이브린 호수까지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켈레브림보르는 내심 메레스 아데르사드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적어도 도강할 만한 유역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을 텐데. 한시가 급했고, 아예 이브린을 둘러간다는 것은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선택지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나로그만 지난다면 깅글리스 강은, 어차피 한참 남쪽으로 흘러야 웬만큼 수심을 얻는 탓에 여차하면 걸어서라도 건널 수 있었다. 넨닝이야 발원지인 언덕을 돌아 브리솜바르로 향할 테니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나로그를 어디서 건너느냐가 관건이었다. 켈레고름이야 그까짓 것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는 듯 말했다지만 켈레브림보르는 발리노르에서도, 힘라드에서도 이런 식으로 홀로 길을 찾아야 했던 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이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것은 꼭 그 초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어요?”
에레이니온이 재차 물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앉은 자리에서도 머리가 제 흉골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아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팔로 아이를 끌어앉고 아이의 머리 위에 제 턱끝을 얹었다. 여행식이랍시고 짐가방에 들어 있던 빵은 향긋했지만 딱딱하게 식어 있었고 에레이니온은 몇 입 먹지도 않은 채, 켈레브림보르가 다시 달라 할 때까지 빵을 양손으로 쥐고만 있었다. 닝퀠로테는 터벅터벅 심드렁하게 발길을 옮겼다. 강을 따라 내려갈 수록 공기는 깨끗해졌으나 아이는 점점 우울하게 움츠러들다, 겨우 한 마디 다시 물었다.
“텔페린콰르, 우리는…….”
팔라스로 간단다, 하고 켈레브림보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어린아이가 팔라스를 알까 싶었지만 도무지 그보다 더 상세히 설명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마중조차 나오지 않은 쿠루핀과 아끼는 말은 내어주면서 작별의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켈레고름이 자꾸만 머릿속을 메웠다. 켈레브림보르는 자신이 아버지와 백부를 그리워하고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지쳐 잠들고 난 뒤에도 한참을 달려가다 테이글린의 건널목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서야 비로소 아이를 안고 말에서 내렸다. 동쪽 하늘은 어느새 창백한 푸른빛을 띠었으나 당장 켈레브림보르의 왼편에는 브레실 숲의 나무들이 시커먼 거인처럼 시야를 막고 있었다. 그는 마에드로스의 변경이 있을 곳을 한참 바라보다, 땅바닥에 털썩 누워버린 닝퀠로테 곁에 몸을 말았다. 에레이니온은 새근새근 밭은 숨을 내고 있었다.
그날 정오쯤 에레이니온을 깨워 다시 길을 나선 켈레브림보르는 전날보다 무리해,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그 강변에 도착했다. 강폭은 꽤나 넓었고 그는 어디에서도 다리나 나루터를 찾을 수 없었다. 켈레브림보르는 반쯤 체념하며 상류로 방향을 틀었다. 닝퀠로테가 불안하게 히힝거렸다. 켈레고름이, 조카가 제 말을 그리 혹사시키는 것을 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며 그는 푸스스 웃었다. 온종일 아무말도 하지 않던 에레이니온이 고개를 젖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이의 벽안은 두 나무의 빛 대신 별빛으로 반짝였다. 사슬갑옷 너머, 솜을 누벼 지은 겉옷 너머 체온이 따뜻했다. 아이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조금 벌렸다.
“바다.”
켈레브림보르는 끝내 토해 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앙그반드의 포위는 깨어졌고 왕의 생사는커녕 내 친족들의 안위마저 알 수 없구나. 가는 모래로 성을 짓듯 쌓아올린 요새가 돌을 녹이는 불길에 타올랐으나 달아날 곳 하나 없어 다시, 온 길 되짚어 서녘으로 가련다. 에레이니온, 우리는 여직껏 패배해 물러선 적이 없었다. 내 백부가 적에게 사로잡혔을 때조차 미스림을 지켰음에도 이제는 하염없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간단다. 바다 건너 고향에야 결코 닿을 수 없으되 백사장에 얇은 천 깔고 누워 별을 세면 어떠랴.
“내 아버지께서는, 에레이니온, 모르고스를 두려워하셔. 힘라드를 빼앗기고서 줄곧, 아버지께서 어떤 말씀이라도 하실 때마다 나는 그 공포를 느꼈어. 아마 내가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께서 무엇을 보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끔찍하다는 것은 분명히 볼 수 있어. 하지만 백부님 말씀대로, 그걸 뻔하게 눈치채는 자식이 곁에 있는 것은 그분께 아무 도움이 안 되겠지. 그 자식이 거의 맹세만큼이나 소중하다면 더더욱. 그러니 가자, 바다로. 우리 아버지들이 눈앞의 파멸을 무시할 수 있도록, 감히 그 부재를 믿을 수 있도록.”
나로그 강바닥의 자갈이 닝퀠로테의 발굽에 채였다. 켈레브림보르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에레이니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되돌아가야 하잖아요.”
안장 뒤에 앉은 청년이 움찔했다. 진작 고개 젖힐 생각을 해볼걸, 몸을 뒤틀지 않고도 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에레이니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아무 도움이 못 되지만. 텔페린콰르가 온 날 아버지가 그랬어요. 내 형제는 제 아비를 썩 잘 대신하고 있구나. 텔페린콰르의 아버지가 겁을 먹고 있다면 그의 사람들은 어쩌죠? 텔페린콰르는 당신 사람들을 이렇게 쉽게 버릴 수 있나요?”
“아니.”
청년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백부님께서 계신걸. 그리고 내가 계속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도 문제야. 결국 아버지의 백성들은 아버지를 따라야 하고, 그들의 충성심이 분산되는 것은 곤란해.”
“그들이 오직 한 사람, 모르고스를 두려워하는 이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것은 괜찮고요?”
“그만 하자. 에레이니온, 너는 아직 어려.”
당신도 어려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에레이니온은 켈레브림보르의 말을 따랐다. 닝퀠로테는 꾸준히 걸어 다시 강둑을 올라가고 있었다. 에레이니온은 켈레브림보르의 팔 밖으로 몸을 숙여 나로그 강을, 바람이 흩뜨려 놓은 수면에 비친 별빛을 바라보았다.
사흘이 더 지나서야 둘은 브리솜바르의 흰 성벽 앞에 섰다. 켈레브림보르는 스스로를 앙그로드의 아들 오로드레스의 사자라 밝혔고 성문은 쉽게 열렸다. 말에서 내린 켈레브림보르가 경비병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에레이니온은 아직 말 위에 앉은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성벽에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았어도 바람에 소금 냄새가 실려왔고, 성벽에 걸린 기는 희게 바래 있었다. 그는 창공을 선회하는 갈매기가 크게 우는 소리를, 어디선가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켈레브림보르는 다시 그 곁에 다가서 그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작게 웃었다.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힌 채였다.
“키르단 공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는구나.”
“그럼 어디 계시는데요?”
“그건 내가 물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켈레브림보르는 에레이니온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선이 불편해진 에레이니온은 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텔페린콰르는 전에도 바다에 와본 적이 있죠?”
“그래, 하지만 이 바닷가는 처음이야. 에레이니온, 저기…….”
선원 같은 옷 위로 푸르고 흰 망토를 걸친 요정이 급하게 뛰어와 켈레브림보르에게 무어라 물었다. 켈레브림보르는 다시 낮게, 요정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에레이니온에게 미소지었다.
“이분께서 너를 네가 머무를 곳으로 데려다주실 거란다.”
“텔페린콰르는요?”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에레이니온은 거기서 이미 켈레브림보르가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두건을 뒤로 넘긴 켈레브림보르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세차게 휘날렸고 은빛 눈은 해를 뒤로 한 엷은 구름마냥 환했다. 망토자락 사이로 빗겨찬 검에 달린 보석이 반짝였다. 켈레브림보르는 에레이니온을 가볍게 안아 땅에 내려주었고 저는 닝퀠로테 위로 뛰어올랐다. 에레이니온은 막 도착한 요정을 힐긋 보고 다시 켈레브림보르를 보았다. 그는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왼쪽 손목을 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아직은 바다로 오지 않을 건가 보네요.”
켈레브림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걱정하지는 말아주겠니? 나는 두 나무의 빛을 보고 자란 핀웨의 후손이며, 해와 달 이전 미명에 싸인 가운데땅에서도, 몰락하는 힘라드의 아수라장에서도 살아남았어. 네 아버지를 걱정하지 말라고는 못하겠지만, 그 또한 네가 그저 이곳에서 잘 지내주기를 바랄 것 같구나.”
에레이니온은 마지못해 그러겠다 중얼거렸다. 켈레브림보르는 기쁘다는 듯, 에레이니온이 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의 나이답게 씩 웃고는 허리를 숙여 에레이니온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따스한 손길에 아무렴 괜찮겠다 싶어진 에레이니온도 켈레브림보르를 보며 밝게 웃어버렸다.
“그럼 텔페린콰르는 톨 시리온으로 돌아갈 건가요?”
“어디로든지. 내 아버지와 백부가, 그들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
이제 동쪽으로 말을 달려 서서히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며 린돈의 망루 위에 선 길 갈라드는, 오래 전 켈레브림보르가 했던 말을 기억해낼 터였다.
나는 내 가문의 별을 돌려받으러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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