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의 소녀
마글로르 드림 | 라임 님 커미션 :)
“아이가?”
네르다넬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라곤 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네르다넬 님,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엇지만, 네르다넬의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네르다넬의 주의는 여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에게 못박여 있었던 까닭에.
아주 갓난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를 가누는 것 같았고, 곱슬거리는 은발이 손가락 한 마디 길이로 난 데다 눈에는 제법 초점이 잡혀 있었으니까. 그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네르다넬의 가슴을 칼날처럼 찔렀다. 아이가 물려받은 것은 마글로르의 눈도, 네르다넬 앞에 선 여자의 눈도 아니었다. 작금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된 고인(故人)이 이 아이의 얼굴을 빌려 네르다넬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감상은 곧 지나갔다. 네르다넬은 아이에게서 간신히 눈을 떼어 여자를 마주 보았다. 네르다넬의 표정 역시 심상치는 않았던지 여자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네르다넬 님, 전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하겠어요. 아이를 낳도록 해준 것만으로 제 가문은 저를 충분히 도와준 셈이지요. 어떻게 그 이상 손을 벌리겠어요? 그리고 이 애가 제 가문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남들 시선은 나빠지기만 할 거예요…….”
네르다넬은 막연히 생각했다. ‘네’ 가문이고 ‘이’ 아이구나.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다. 적어도 여자는 아이를 낳았고, 짧은 시간이나마 돌보았다.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떠나간 제 아들에 견주자면 그나마 책임을 다한 셈이었다.
“내가 맡아주었으면 하는 거냐?”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파리하게 질린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네르다넬은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여자가 거의 한계까지 내몰려 있음을 간파했다.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아이와 어머니 양쪽에게 해가 되는 일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네르다넬은 거울 앞에서도, 떠나간 아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었다.
네르다넬은 별수 없이 양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곧 무너질 듯 바들거리며 아이를 안겨주었다.
아이는 작았고, 따끈했고, 아직 젖내가 풍겼다.
아이를 건네자마자 여자는 몸을 돌렸다. 문제를 떠넘기는 데 성공했으니 한시 빨리 도망치려는 듯한 태도였다. 역시나 넋이 나가 있던 네르다넬은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여자의 등에 대고 외쳤다.
“이 아이, 이름은 뭐지?”
그렇게 F는 네르다넬의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원래 마흐탄 일가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네르다넬이 페아노르와 별거한 후 마흐탄은 저택을 통째로 네르다넬에게 내어주었고, 이후에는 오직 네르다넬의 소유였다. 마흐탄에게 형제자매와 자식, 조카들이 제법 있었던 만큼 저택도 그리 작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쓰임이 충분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간 들인 제자들은 저마다 방 하나씩을 차지했고, 암라스가 놀러 올 때만을 위한 침실도 하나 있었다. 암라스만큼 어머니에게 매달리지는 않는대도, 나머지 여섯 아들들도 종종 네르다넬을 찾아와 며칠 머물다 가고는 했었다. 또 네르다넬의 작업을 구경하거나 사들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두 나무의 빛이 꺼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네르다넬의 아들들은 모두 떠났다. 제자들도 대부분이 페아노르를 따라 여정길에 올랐었고, 그러지 않았던 소수는 티리온으로 돌아가 체처럼 구멍이 난 도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손님들이 찾아올 일도 없었다. 네르다넬은 저택에 홀로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참이었다.
다행히 다락에는 요람이, 장 깊숙한 곳에는 요람에 깔 만한 이불이 남아 있었다. 엿새에 하루씩 저택에 식료품을 배달해 주는 요정은 네르다넬이 아이에게 먹일 만한 양젖이라든지, 빻은 곡식을 요구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르다넬에게도 아이를 길러 본 경험은 있었다. 실은 이 땅의 누구보다 많다고 해도 좋았다.
정신없는 몇 주가 지난 후, F가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네르다넬은 비로소 한숨 돌렸다.
그즈음에는 네르다넬의 일상에도 어느 정도 새로운 규칙이 잡힌 뒤였다. 작업실 한쪽, 어린아이용 의자에 F를 앉혀 두고 나무 조각이나 천 인형을 쥐여주면 F는 혼자서 곧잘 놀았다. 그동안 네르다넬은 묵묵히 돌에 끌을 내리쳤다. 무언가 만들어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가 움직였고, 그럴 때 드는 생각이라고는 온통 음울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어른 요정만 한 대리석을 멋대로 흠집 내던 네르다넬은 문득 F가 옹알이라도 하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F.”
네르다넬은 시험 삼아 불러보았다가, 자신의 목이 꽉 잠겼음을 깨달았다. 돌먼지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목구멍에 생겨난 응어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너무 오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F는 말간 눈으로 네르다넬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어느새 제법 시력이 자리잡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F의 은빛 머리카락은 자그마한 머리통을 다 덮고 있었고, 인형을 쥐는 손동작도 아주 어설프지만은 않았다. 네르다넬은 새삼스럽게 F를 뜯어보았다. 젖살은 여전히 통통했지만 그 아래로는 제법 얼굴이랄 게 보였다. 돌덩이에서도 형체를 찾아내는 조각가인 네르다넬은 이 아이가 누구를 닮게 자라날지까지 예측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핀웨겠지. 마글로르보다도, 네르다넬의 다른 여섯 아들 중 누구보다도 이 아이가 더 핀웨 놀도란을 닮았다.
하지만 아이에게서 엇비치는 분위기는 조금 다른 듯했다. 정확히 어떻다 짚어내기에는 막연하지만, 네르다넬은 아이를 감싼 공기에서 묘한 감상을 느꼈다. 오래전 잠시 만났을 뿐인 지인을 다시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F.”
이번에는 입안에서만 맴돈 부름이었다.
모계명에 예지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상당 부분 미신이 가미된 이야기였다. 당장 네르다넬도 일곱 아이들의 이름을 지으며 오직 마지막 쌍둥이에게 이르러서야 불길한 예지나마 담게 되지 않았던가. 그조차 나중에는 바꾸고 말았었고.
왜 이 이름을 지었냐 묻기에는 아이의 어머니는 너무 멀리 있었다. 끌과 망치를 내려놓은 네르다넬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고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네르다넬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고는 하던 아들들과 달리 F는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너는 카르니스티르보다도 조용하구나.”
중얼거린 네르다넬은 말 끝에 세 번째로 이름을 붙였다.
“F.”
누가 어떤 이유로 지은 이름이건, 누구에게서 따온 이름이건 당장은 상관없었다. 적어도 아이가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알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르거나 늦는 경우가 흔했지만 아이들은 대개 생후 첫 수태일이 돌아올 무렵에는 말문이 트였으니까.
네르다넬은 닦은 손으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F는 말이 늘었고, 네르다넬은 말수가 늘었다. 통통한 팔다리로 온 집안과 정원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떠나간 자식들도 조금은 잊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F의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F에게 향하는 시선도 늘어났다. 네르다넬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얘야.”
마흐탄은 무겁게 운을 떼었다. 네르다넬은 마흐탄을 힐끗 바라보고는 식탁에 찻주전자와 잔을 내려놓았다. 좀처럼 찾아오는 일이 없던 아버지는 보름 전에 한 번, 다시 사흘 전에 한 번 집 앞을 지나치더니 오늘은 기어이 문턱을 넘은 참이었다. 반가워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네르다넬은 마흐탄의 표정이 어쩐지 불길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네르다넬은 다과를 찾으려는 척 마흐탄의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물었다. 마흐탄은 직접 차를 따르고는 한 모금 마신 다음에야 대답했다.
“그 아이는…… 보이지 않는구나.”
“작업실에 있어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부엌 창문에서는 뒤뜰이 내다보였고, 뒤뜰 건너편에는 저택에 딸린 헛간 같은 작업실이 있었다. 고함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대화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다. 네르다넬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수틀을 꺼내 주었더니, 요즘은 수 놓기에 열심이더라고요.”
마흐탄은 끙 소리를 냈다.
“네가 마칼라우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안다……. 하지만 네르다넬, 언제까지 저 애를 대신 맡아줄 셈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애 어머니가 네게 아이를 떠넘기고 갔다고는 들었다. 도로 데려가려 하지는 않을 테지. 그렇다고 네가 계속 고생할 필요도 없다.”
네르다넬의 머릿속으로, 그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F는 네르다넬의 손녀인 동시에 페아노르의 손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페아노르를 지지하던 요정들은 대개 바다를 건넜다.
대양 이쪽에 남은 것은 놀도르라 할지라도 발라들에게 신실한 이들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페아노르의 전 아내라면 몰라도, 피를 이어받은 손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잖아도 네르다넬은 마을에 들를 때마다 듣게 되는 수군거림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마흐탄에게서까지 이런 말을 들으니 그저 황망했다. 마흐탄이 페아노르를 그리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
네르다넬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애는 여기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요. 제 아들의 아이예요. 어디로 보내란 말씀이세요…….”
“페아노르의 유산이 있지 않더냐?”
네르다넬은 창백하게 질렸다.
죽지 않은 사람을 두고 유산이니 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식의 언사에는 지난 몇 년간, 이 땅의 모두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네르다넬은 마흐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 포르메노스는 냉궁이나 마찬가지예요. 저 어린애가 버틸 수 있을 리 없다는 것, 아시잖아요.”
마흐탄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네르다넬은 그를 배웅하지는 않았다. 마흐탄이 떠난 자리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았고, 네르다넬은 자신에게 남은 가족이 마흐탄 쪽밖에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쪽밖에 없었다, F를 제외하고는.
빈 찻잔과 주전자를 치운 네르다넬이 부엌 뒷문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수 놓은 손수건을 든 F가 있었다.
“다 들었니?”
네르다넬은 당황해 무심코 물었다. 분명 작업실에서는 손님이 왔는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어야 했는데……. 하지만 F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네르다넬 역시 말문을 잃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냐 추궁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F는 잿빛 눈으로 네르다넬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손수건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별 모양 자수를 구겨 쥐며 네르다넬을 지나쳐 걸어갔다.
몇 년 뒤, 작은 배낭 하나에 옷가지를 접어 넣고 떠나는 아이를 바라보던 네르다넬은 낮게 읊조렸다.
“미안하다.”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사과였다. 아이는 자박자박 걸어 멀어졌고 네르다넬은 저택 울타리 앞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은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에 네르다넬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길을 떨구었다.
한숨을 쉬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었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