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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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섬 동쪽 해안에 세워진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지만,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을 마르 티알리에바 곧 ‘기쁨의 집’이라 불렀다. 그게 임라드리스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임라드리스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곳이었고, 그 비밀이 공공연한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제3시대의 끝자락에 가서야 일어난 변화였으니까
“힝, 더워…….” J는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밤공기가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덥기만 하면 몰라, 당장 수영을 해도 좋을 만큼 습하기까지 하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연신 부채만 부쳐주던 암굴왕은 J의 안색을 살핀 끝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인, 좀 쉬겠나?” “그래도 간만에 나왔는뎅…….”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무도회라는 건 J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꽤 지루한 행사였다. 그야 날이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화창한 오후가 저물며 찾아든 저녁은 유난히 부드러웠고, 봄바람은 따스했으며, 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반면 무도회장 안은 음악으로 가득할지언정 그 밑바닥에는 사람들의 소음이 깔려 있었던 데다 공기도 그리 맑다고는 못할
“아이가?” 네르다넬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라곤 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네르다넬 님,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엇지만, 네르다넬의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네르다넬의 주의는 여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에게 못박여 있었던 까닭에. 아주 갓난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김이 자욱하게 서린 욕실 안으로 가냘픈 인영(人影)이 들어섰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흰 가운을 걸친 여자였는데, 가운 자락은 여자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소리 없이 흔들리고 벌어지며 깎은 상아 같은 종아리와 날씬한 발목을 드러냈다. 그 아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욕실 바닥에 낮게 깔린 물기가 걸음걸음마다 작게 찰박거리는 소리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바람은 긴 머리카락을 휘감아 돌았다. 춤을 추자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거슬리지 않았다. 바람과 머리카락이 스텝을 밟도록 내버려 둔 나우플리온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몸을 굽혔다. “봄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우플리온은 섬의 추위가 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저녁의 티리온은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민돈 엘달리에바 꼭대기를 태양의 배가 스치고 지날 때쯤 피나르핀은 마지막 접견자를 물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알현실에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 아래, 늘어선 열주의 기다란 그림자뿐이었다. 금빛으로 물든 대리석을 한 발짝씩 디디며 피나르핀은 조용히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빛이 돌아온 이래 닫힌 적 없는 문을 지나
프로아울리아 섬의 혼례는 겨울에 치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백금빛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은 나우플리온은 조심스레 은으로 된 가위를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S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몽글몽글하게 솟아올랐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희끄무레했지만,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만이 제단 앞에 선 네 사람을 휘감고 돌았다.
늦저녁 찾아온 손님은 S가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익사형은 신속하게 집행되었었지만, 소문의 속도는 그보다도 빨랐다. 마침 모르페우스의 연구실에 들렀던 S는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서 사정을 분별해 냈다. 온 섬을 들었다 놓은 화재 사건이 곧 막을 내릴 모양이었다. 그것도 퍽 극적인 형식으로. 그러나 S는 익사형을 구경하러 가지는 않았다. 사람
“이걸 다 먹을 수 있기나 한가?” “에헤이, 모르는 말씀!” 유쾌하게 대꾸한 J는 테이블 위에 과자를 와르르 쏟아놓았다. 그리 좁지 않은 테이블이 과자 봉지로 반 넘게 차자 암굴왕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은 자리에 자신이 들고 있던 봉투까지 내려놓으니 테이블은 정말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멀뚱멀뚱 바라보는
이인일묘 가정의 평화가 깨진 것은 어느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도 얼마간 암굴왕은 J의 고양이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키라가 유독 암굴왕에게 경계심을 품는 까닭도 있었고—암굴왕이 보기에 미인의 반려로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기는 했다—그가 고양이란 생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탓이기도 했다. 물론 고양이는 선원의 훌륭한 벗이다!
늦저녁, 운 나쁜 당번들이 접시를 씻으러 간 사이 S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에는 나로 배를 채워도 좋아.” 아스타리온은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의례처럼 변한 말이었지만, 사냥감 삼을 만한 짐승이 죄다 흉측하게 변형되어 있던 그림자 땅을 지난 뒤 한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S는 눈썹을 찌푸리더
“우리가 해냈어, 솔져. 이제 도시는 괜찮을 거야.” 붉은 석양이 아득히 지고 있었다. 나루터 끝에서 카를라크는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던 중 비로소 카를라크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았다. “너도 그렇고.” 불길이 솟구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사태를 짐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야 않을 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약혼자를 얻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어찌 됐건 그는 대단한 부를 소유한 남자였고, 과거가 비밀스러울지는 모르나 박식하며 정중한 인물이었다. 그에 더해 상당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감춰진 과거 정도야 신비주의를 심화해주는 요소로 볼 만도 했다. 그런 그에게 약혼자라고? 파리 사교계가 뒤집히진 못할망정, 한 번 크게 흔들
“멋지당!” J는 탄성을 질렀다. 암굴왕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J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마음에 드나?” “엄청! 암굴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을 이곳, 이 시간에 떨군 것은 성배의 힘이었지만, J를 샹젤리제 거리의 저택으로 데려온 것은 암굴왕이었다. 발코니 난간을 짚으며 정원을 향해 쭉 손을 내밀던 J는 다시 빙글 돌아
최후의 빛 여관에 도달한 다음에야 일행은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자헤이라와 하퍼들이 그들을 완전히 믿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자 저주에 휩싸인 바깥보다는 어둠을 염려할 필요 없는 이곳이 백 배 나았으니까. 반가운 얼굴들까지 있으니 실은 기대치 못한 행운을 맞은 셈이었다. 이 땅에 발을 들인 후 잠시 중단했던 기록을 그가 다시 떠올린 것도 여관에
“□□□□ 님.” 정중한 인사에 S는 고개를 숙여 묵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청년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전부터 나우플리온의 집에는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한 명씩 머물고 있었다. 낮에는 가벼운 말 상대 노릇을 하려 들다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저물녘이 다가오면 나우플리온도 그들을 대개 내버려 두었다. 오늘의 청년이 문간 안쪽
“휘핑크림 올려 드릴까요?” “뭐래?” J는 무심코 물었다. 암굴왕은 J를 흘낏 내려다보고는 친절하게 되풀이해 주었다. “휘핑크림을 올리겠냐고 물었다.” “많이 달라고 해줘. 엄청 많이.” 얼굴에 못 미더워하는 빛이 비치기는 했지만, 암굴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 데 정신이 팔린 J는 암굴왕이 직원에게 말을 옮기는 것도, 직원이 미소를 숨기며 주문
5월. 달의 섬을 돌아보는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기원섬으로 복귀한 나우플리온은 마을 사람들과 서클릿의 사제에게 몇 가지를 물어본 후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 어귀를 떠날 무렵은 이미 늦은 오후였지만, 그는 한 시도 미뤄서는 안 될 용무를 가진 사람처럼 움직였다. 혹은, 미뤘다가는 영영 처리하지 못할 일을 아는 사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고 난 후에는 내용도, 의미도 기억나지 않는, 오직 꺼림칙한 뒷맛만을 남겨놓는 꿈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앉으려니 식은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벽난로는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여관방 안에는 늦가을의 싸늘한 공기가 술렁거렸다.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은 아직 이 밤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만을 일깨워 주었다. I는 한 손
청색산맥 기슭에서 일몰을 기다리던 중, 잉귀온은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낼 화젯거리라도 내놓듯 말했다. 머잖아 이 산맥이 가운데땅의 서쪽 경계가 될 거라더군요. 이쪽에는 해안만 좀 남기고요. 과연, 본인의 심성이야 어떻든 엘다르의 영원한 왕자란 화술을 공부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당장 피나르핀조차 저 말에 뭐라고 해야 부드러운 대답이 될지 머리를 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