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ater weather
나우플리온 드림 | 삐쭈 님 커미션 ;))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바람은 긴 머리카락을 휘감아 돌았다. 춤을 추자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거슬리지 않았다. 바람과 머리카락이 스텝을 밟도록 내버려 둔 나우플리온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몸을 굽혔다.
“봄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우플리온은 섬의 추위가 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온화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뿐이랴, 렘므의 겨울도 이곳에 비하면 선선한 셈치고 넘어갈 지경인걸. 4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도 옷을 충분히 껴입지 않는다면 아침 날씨를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쭈그려 앉은 나우플리온은 손끝으로 연둣빛 새싹을 쓰다듬었다. 분명, 봄은 이미 도래했다.
그건 꼭 여기 텃밭에 돋아난 약초라든지, 군데군데 떨어져 짓물러 가는 꽃잎으로만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허공에 떠도는 꽃가루에는 봄기운이 섞여 있었고 태양의 고도는 긴 낮을 예고했다. 요즘 들어 오후쯤 지나면 섬의 기온은 곧잘 따스해졌다. 하루 안에도 급하게 오르내리는 날씨 탓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까지 여럿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없나…….”
이름 모를 허브 옆, 검고 부드러운 흙을 한 번 긁적인 나우플리온은 곧 손을 털며 아예 자리를 잡았다. 막 움튼 새싹들은 피해서, 긴 다리를 경첩처럼 접으며. 어쨌든 야단을 듣기는 그로서도 두려운 까닭이었다……. 나우플리온은 뒤를 꼼꼼하게 살핀 뒤에야 등까지 흙에 붙이며 드러누웠다. 그리고 챙 달린 모자를 얼굴에 덮은 다음, 길지 않을 기다림을 시작했다.
그런 사정으로, 일을 마치고 온 S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한 쌍의 무릎이었다. 돛단배의 삼각돛처럼, 텃밭을 바다 삼아 불쑥 솟아 있는. 산 중턱의 외딴집에 찾아올 사람은 하나뿐이었거니와 장소가 달랐다 하더라도 밭이랑 사이에 저 꼴로 구겨져 낮잠을 잘 사람도 달리 없었다.
깨울까, 말까.
바구니를 집에 넣어두는 게 먼저였다. S는 보지도 못할 사람에게 눈을 한 번 흘긴 다음 몸을 돌렸다.
코흘리개 어린애들과 기껏 또 한 번의 겨울을 버텨낸 노인들 사이로 다시금 시련이 번지는 계절이었다. 모르페우스가 S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섬은 좁았고 병은 반드시 몰려다녔다. S로서도 품삯을 겸해 기호품에 가까운 것들을 몇 얻을 수 있었으니 완전히 귀찮은 일만은 아니었다.
예컨대 개암을 갈아 넣은 버터, 엘더베리 잼. 작년 여름 섬을 찾아들었던 철새 고기로 만든 햄. 섬에서는 귀한 밀만으로 반죽해 구운 흰 빵과 라벤더를 말린 꽃차도 있었다. ‘전리품’을 부엌 탁자에 올려놓은 S는 열린 뒷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불청객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고, 그가 깨어나는 것을 S가 듣지 못할 리 없었으니, 좋아.
찬장에서 산양유 치즈를 꺼내고 햄을 썰었다. 화로에 불을 붙이고 묵은 호밀빵을 굽다가, 물을 담은 냄비로 바꾸어 올렸다. 호밀빵 사이사이에는 치즈와 햄을, 흰 빵에는 버터와 잼을 발라 접시에 올려두고는 깨끗한 찻주전자에 꽃차를 덜어 넣었다. 좁은 부엌에서 부산스러워졌을지도 모르는 행동들이었지만 S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오래 살아온 집이었다. 이제는 몸의 연장선처럼 익숙했다.
끓는 물을 찻주전자에 담고, 나무 잔과 식기,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과자가 든 유리병까지 챙겼다. 준비한 모든 것을 다시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쌓은 S는 발소리를 죽이며 뒷문으로 빠져나가, 남의 텃밭에 멋대로 드러누운 남자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배 위로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번개처럼 튀어 오른 두 손이 바구니를 붙들었다. 접시가 깨지기는커녕 찻물 한 방울 넘치지 않았을 만큼 안정적으로. 곧이어 얼굴을 덮은 모자 아래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 알아챘어?”
“당신이 깨어난 거요?”
S는 어깨를 으쓱이며 몇 가닥 날리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어느새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이었지만 산에서는 바람이 꽤 불었다.
“처음부터.”
“그런데도 모르는 척했단 말이지……. 윽, 도와줘야 할지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한 번 ‘도와주고’ 나면 집안 물건이 죄다 찬장 꼭대기에 가 있잖아. 안 돼요.”
집이 작은 것을 어떡하냐 투덜거리면서도—그야, 모든 것이 S에게 맞추어진 곳이었으니까—나우플리온은 휘청휘청 두 발로 일어서더니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는 S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럼 갈까, S?”
봄은 고된 계절이었다. S는 겨울의 막바지에 발이 걸려 넘어진 사람들을 돕느라, 나우플리온은 섬의 경비를 재차 점검하고 제자까지 돌보느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임은 늘어났고, 그들은 어린 시절의 자유와는 한 해 한 해 멀어져 갔다. 아무리 아이였을 적이라 해도 진정 자유롭지는 못했었지만…….
그러나 산기슭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데 뒤섞어 놓을 때면, 그 모든 짐은 잠시 잊어도 좋은 것이 되었다.
그도, S도 아침 식사는 걸렀던 참이었다. 둘 사이를 몇 번 거친 바구니는 어느새 텅 비었고, 남은 것은 접시에 남은 잼 자국과 병 바닥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 마지막 남은 차를 반씩 나누어 따른 나무 잔 두 개뿐이었다. 어쨌든 처음부터 제대로 된 피크닉은 아니었었다. 알록달록한 보자기 대신 옷자락을 깔고 앉아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S는 고개를 젖혔다. 백금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그 위로 빛이 희게 산란하는 것을 지켜보던 나우플리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금발 몇 올이 자신의 짙은 머리카락과 엉킨 곳을 집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묶인 것을 비벼 풀고 있으려니 S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응?”
“여기가.”
S는 반쯤 눈을 내리감으며 웃었다. 숨에서는 라벤더 향이, 손끝에는 빵과 과자 가루의 단내가 묻어나는 채로,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바위 위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며. 그 곁에 나란히 자리한 나우플리온은 S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햇빛이 그 위로 새하얀 윤곽을 덧그리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누군가 본다면, 농담일망정 어찌 의무를 저버리고 이러고 있냐 하겠지.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섬에서, 헛된 간식거리를 사방에 벌여놓고 봄바람이나 쐬고 있다고. 하지만 나우플리온은 S의 머리카락을 마저 다 풀어내 손가락에 감으며 생각했다. 이 순간을 유리에 굳혀 간직할 수 있다면 그건 만 세기가 지나도록 몸에서 떼 놓지 않을 정표(情表)가 될 텐데.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비로소 S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대답하는 대신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나우플리온은 S의 어깨 위로 뺨을 얹었다. 체중을 실어 기대려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만 붙어 있고 싶었다.
잠시 뒤 S는 한쪽 팔을 그의 옆구리에 둘렀다.
“차 남았어?”
나우플리온은 자신이 쥔 잔을 S에게 건네고, 빈 잔을 넘겨받았다. 찻물 대신 S의 손이 남긴 온기가 나무에 아직 스며 있었다. S가 식은 차를 홀짝이는 사이 나우플리온은 미지근한 잔에 무심코 입술을 가져다 댔다.
웃었다.
S의 말이 맞았다. 그도, 이곳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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