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커미션

우리의 낮은 너무도 붉고 밤은 새하얗다

24.08.05 ㅂㄷㅈ 님 운문 커미션 (총 1,887자)

우리의 낮은 너무도 붉고 밤은 새하얗다

그때 친구는 알록달록한 물감통을 가지고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물감에서는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서 나는 그만 교문을 뛰쳐나가버리고 싶었다

주머니 속엔 쫄깃한 인연이 들어 있다 친구는 인연을 쪼개어 두 사람에게 인연을 나누어 주었다

인연을 쪼개면 인연이 되고 나는 늘어난 조각을 씹으며 밤이 익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스피커에서는 늘 탄산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헤드셋을 벗어야만 끝나는 간지러운 소리 나는 하루종일 커다란 모니터 안에서 총을 쏘았고 총알은 빠르게 회전하며 머리에 박힌다 목표물을 가리키는 빨간 표시와 표시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것 총알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총을 쏘는 것은 종일 휴대전화를 쥐는 것과 같고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정적

헤드셋을 벗자 마침내 귀는 인류가 살아온 아기자기한 발전의 과도기를 듣는다 잠깐 귀를 막고 가려둔 약간의 아날로그 하지만 진짜 아날로그 시대는 지나갔고 인류는 발전을 계속하고 신인류들은 헤드셋을 벗지 않고 아날로그의 사람들은 귓속에 물감을 가득 채우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고 하던데

헤헤

나는 휴대전화를 켠다

하얀 화면에 가득 한 사람을 보고는 나도

같이 해맑은 바보가 된다

우리의 낮은 너무도 붉고 밤은 새하얗다

나의 마음은 노랗게 물든 밤의 까까머리

자꾸만 굴리다 보면 손바닥이 까슬거리고 도화지를 붉은 색채로 물들이고 싶다

친구가 쪼개어 준 것처럼 쫀득한 그 애 눈에선 색이 없는 액체가 자주 흐르곤 했다

그 애의 눈물은 보석도 아니고 꽃도 아니다 그 애의 눈물은 생명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 애의 눈물은 반짝

지나가버리는 혜성이 아니다

그저 반짝반짝반짝한

투명빛

색과 빛

예쁜데?

음, 가끔은

스피커에서 네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어떨까 상상했다

땀을 흘리며 크루저 보드를 타면 머리 위에서 투명한 햇빛이 어깨를 주물렀다

가끔 손등 위로 볕이 닿으면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는데 잡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해바라기처럼

해를 볼 수 없는 건 사실 해가 투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직각 모니터 속에서 총을 끼고 달리다 보면 가끔 딴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프로그램 된 인공 태양을 향해

총을 쏘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밤이 무르익었을 때

내 얼굴은 낮처럼 붉었다

나는 밤이 하얗다는 것을 깨달았다

색과 빛

섞일 수 있을까

내가 멍청했어 내가 좀 생각이 없고 말도 막 잘 못하고 소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애는 빛인데

어떻게 섞여버렸지

사실 나의 밤은 아직도 노랗다 이거 비밀인데 너는 몰랐지? 너도 머리 색은 그렇지만 몸은 뜨겁다 역시 태양이라 그런가 전엔 가까이만 가도 녹을 것 같았어 고등학생 땐 어떻게 널 보고 멀쩡할 수가 있었지 어떻게 해맑은 숨을 그렇게 내쉴 수가 있었지 기억하니 내가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 네가 먼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반짝반짝반짝 나는

문득 내 눈에 물감을 부어버리면 어떨까 상상했다

아주 어릴 때 산 노란 물통을 들고 있던 결전의 날을 기억한다 물감 냄새는 끈적이고 지독했다 커다란 물통에 물감을 가득 채워넣고 물을 부어 저었다 손이 사라질 때까지 저었다 소매가 젖고 나는 최면에 걸려버렸고 눈을 뜨자 네가 서 있었지 헤헤 사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태양이 기울고 심장 소리가 혈관을 타고 내 몸을 울리는데 혹여라도 새어나갈까 잔뜩 겁을 먹고 무서운 밤을 생각하며 떨었는데 그때

네가 새콤달콤을 씹었어

나는 기지개를 켜고 공원으로 나간다

부드러운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이것도 간지럽다 공기는 끈적하고 후텁지근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 분홍빛 보드를 타고 달린다 그러다 땀이 바람에 씻겨나갈 때쯤 멈추면

일찍 왔네

헤헤

밤이 덜 익어도 뭐 어때

멀미하지 않는 총알처럼 날아가면 되지

입에서는 새콤달콤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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