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밤빵] 기본 타입

[일반] SAMPLE_008

HL / 기본 타입 (14일) / 2만자

 

 

 

 

 

WIND BREAKER

ⓒ 왕밤빵(@Big_Bam_Bread)

 

 

 

 

 

 

입학식에서 마주한 벚꽃은 저문 지 오래였다.

 

중간고사가 한참인 5월의 하늘. 유난히 푸르른 하늘을 눈에 담자 이따금 바람이 불었다. 사쿠라는 옥상으로 올라와서 하지메를 마주했다. 평소라면 그의 흰 티셔츠엔 흙먼지가 한가득 묻어있을 테였다. 뺨이나 팔, 심지어 이마까지도 흙이 묻어서 한 번씩 시선이 흘러가야 마땅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선지 하지메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상태로 깔끔하게 교복까지 갖춰 입은 상태였다.

 

뭐지?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가? 사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을 품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 학년들은 전부 하지메의 갑작스러운 태도가 의아한 눈치였다. 평소처럼 해맑게 인사를 건네지도, 순수하게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던 하지메였다. 갑자기 그의 태도가 이렇게나 변하다니. 며칠 사이에 고작 무슨 바람이 분 거란 말인가. 그저 멀뚱멀뚱 눈을 가만히 뜨고 있을 뿐인 일 학년들은 의문을 품었다. 반면 일 학년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하지메가 저러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날인가 보네.”

“안 봐도 뻔하죠.”

“시간 꽤 빠르구나-.”

 

저들의 말에 사쿠라는 되레 관심이 생겼다. 그날? 그날이 뭐지? 다른 학교와 단체로 패싸움이라도 벌이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이 빠질 순 없었다. 드디어 싸움 다운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기대도 있었기에 사쿠라는 냉큼 이, 삼 학년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날이 무슨 날인데? 싸우는 날인 거야?”

 

사쿠라가 흥분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꼭 ‘기다려’라는 말을 듣고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 같았다. 다른 이들은 그런 사쿠라를 보고선 잠시 ‘응?’하고 생각하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싸우는 날이냐고? 그렇게 묻던 저들의 목소리에 사쿠라는 괜히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아니, 맞으면 맞다고 대답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하면 될 텐데. 굳이 저렇게 웃어야 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저들의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사쿠라는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완-전 달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의 날이지?”

“뭐- 아무래도 그렇지-.”

“……사랑?”

 

저와는 전혀 거리가 없을 것 같은 단어였다. 사랑이라니. 후우린에, 하지메에게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란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사쿠라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단 사쿠라의 뒤에서 스오가 미소와 함께 물음을 던졌다.

 

“어쨌든, 꽤 중요한 날이란 이야기죠?”

“그래. 아마 보면 알 거야. 이제부터 자주 볼 수도 있으니 꼭 기억해 둬.”

“대체 뭔 소릴 하는 건지…….”

 

저들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던 사쿠라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보면 알 거라는 말부터가 심상치 않았기에 사쿠라의 얼굴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일 학년들은 각자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사랑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렸다. 각기 생각한 바는 달랐으나 그 누구도 하지메와 연애를 엮진 못했다. 연애 감정은 아니라고 한들 코토하의 존재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코토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당연히 다른 여자가 더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못한 눈치였다.

 

“…….”

 

그리고 이 모든 관심사를 한 몸에 받던 하지메가 모두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밭 관리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곤 탁, 탁, 탁.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그가 핸드폰을 보던 것도 잠금 화면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기에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대상이 누구일지. 생각이 빠르게 나아간 일 학년들은 거기까지 떠올렸으나 사쿠라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싸움과 연관 지어 생각하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생각이 그 주위를 벗어나진 못한 눈치였다.

 

“곧 연락할 거다. 성급하게 생각하진 마라.”

 

보다 못한 히이라기가 하지메에게 다가와 말했다. 하지메는 응, 하고 대답했으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잠금 화면만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어떤 변화 하나 나타나지 않았으며, 하지메도 그 상태에서 몇십 분이 지나고 나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아닌가……. 그리 중얼거린 하지메는 밭이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곱씹곤 교복 재킷을 벗어두곤 핸드폰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어딜 가는 거냐던 사쿠라의 물음엔 “토양 가지러-.”라고 대답까지 해 보였다.

 

뭐야, 결국 싸움은 무산된 건가? 사쿠라는 내심 아쉽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얼마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아쉬웠을 테였다. 하지만 사쿠라나 다른 일 학년들과 달리 이, 삼 학년들은 아직이네- 라고 말하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다를 거 없다니까,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히이라기는 괜한 말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뒤 바닥에 놓인 하지메의 재킷과 핸드폰을 집었다. 나 참, 이걸 여기에 두면 누가 밟을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던 히이라기는 하지메를 챙겨주는 어머니라도 된 듯했다. 하지메가 오면 돌려주기 위해 그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선 재킷을 털어주는데, 때마침 핸드폰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온 거야?”

“드디어 온 거예요?”

“……그런 것 같네.”

 

이, 삼 학년들이 흥분해서 물음을 던지자 히이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필이면 하지메가 토양을 가지러 갔을 때 전화가 오다니.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아슬아슬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으리란 생각에 모두 아쉬워했다.

 

“뭐야, 누군데? 어느 녀석이야?”

 

그러나 사쿠라는 여전히 싸움으로만 아는 눈치였다. 싸우는 게 아니라잖아- 라고 스오가 말했으나 이미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히이라기는 이 전화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이 전화를 받기로 했다. 저와 모르는 사이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후우린에서 하지메 다음으로 친하다고 가히 자부해도 될 법했다. 그러니 충분히 전화 받아도 상관없으리란 생각에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른 그였다. 스피커 너머에선 익숙한 세이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청아하면서도, 물빛만큼이나 맑은 목소리였다.

 

“어, 나다.”

- 응? 하지메는 지금 없나 봐? 토마가 받는 걸 보니.

“그래. 타이밍도 나쁘지.”

- 후후, 하지메가 들으면 슬퍼할 거야.

“자업자득이지, 뭐.”

 

세이텐의 목소리가 조용했기에 구체적인 통화 내용까지 들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히이라기가 다른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퍽 신기했다. 하지메 외에도 저렇게 편하게, 일상을 공유하듯 대화하는 상대가 있었구나. 일 학년들은 그런 생각으로 히이라기를 바라보았다.

 

- 지금 후우린으로 가는 중이야. 옥상으로 바로 갈게. 마을을 지나는데 배터리가 없으니까 아마-…….

 

세이텐이 한창 말하던 중 갑자기 통화가 끊겼다. 아. 하고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던 히이라기는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종일 핸드폰을 하는 인물도 아니면서 왜 배터리가 없는 건지. 의문이긴 했다만, 생각해 보니 핸드폰을 많이 쓸 일이 없던 게 문제일지 몰랐다. 그만큼 충전의 필요성도 딱히 느끼진 못했을 테니까.

 

“지금 오는 중이래?”

“그래.”

“근데 전화는 왜 갑자기 끊은 거죠?”

“아, 그건 저 녀석 배터리가-…….”

 

히이라기가 말하던 사이, 옥상 문이 덜컥 열렸다. 그 앞으로 토양을 어깨에 한가득 멘 하지메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메는 히이라기가 제 핸드폰을 들고 있던 걸 보고선 토양을 옆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곤 꽤 빠른 걸음으로 히이라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온 거야? 전화?”

“그래, 왔다. 지금 여기로-…….”

 

히이라기가 한창 말하던 중에 하지메는 제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연결음도 들리지 않은 채 바로 안내메시지가 울렸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신호에 하지메는 충격받은 얼굴로 히이라기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지메가 묻자 히이라기는 제 이마를 짚었다.

 

“내 말을 좀 듣-…….”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디쯤이래? 위치는 정확히 들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배터-…….”

“납치? 설마 납치는 아니지? 아니지, 아니야. 돈을 노렸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어…….”

 

히이라기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그의 말은 하지메의 뒷말에 파묻히고야 말았다. 처음엔 잠자코 이야기하려던 히이라기였으나 계속 이렇게 무시당하니 더 가만히 있을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히이라기는 제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메가 발을 동동 굴리며 당장 가겠다고 하니 히이라기가 그를 붙잡았다.

 

“배터리!!!”

“응? 배터리? 그런 녀석이 데려간 거야?”

“아니!!! 배터리가 없을 뿐이라고!!!”

 

히이라기가 답답하다는 듯 높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갈라져 버린 참이었다. 주변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선 히이라기를 안쓰럽다고 생각했는데. 와중에 하지메는 제 머릿속에서 히이라기가 한 이야기들을 조합하곤 “아!”하고 크게 소리냈다. 그렇구나.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가 안 되는 거구나. 이제야 이해한 하지메는 히이라기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목이 나가 버린 히이라기가 “지금 여기로 온대.”라고 말하니 하지메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끝났나 보구나!”

“그렇겠지. 그러니까 오는 걸 거 아냐.”

“근데 왜 나한테 바꿔주지 않았어? 내가 전화하고 싶었던 건데.”

 

하지메가 서운하다는 듯 부루퉁한 표정을 드리웠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히이라기는 품에서 꺼낸 위장약을 제 손바닥에 탈탈 털었다. 정량을 넘어간 것 같았으나 이 정도가 아니고서는 괜찮아지질 않았으니. 결국 그는 제 손바닥에 털어놓은 위장약을 입에 집어넣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일단은 그 녀석 친구라고……. 히이라기가 작게 읊듯이 말하자 하지메는 “그건 그래!” 하고선 해맑게 웃었다. 어째 하지메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히이라기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누가 오는 건데?”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사쿠라는 그저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나 난리란 말인가. 이 정도의 난리를 피울 정도라면 정말 엄청난 인물이 와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전혀 납득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얼추 눈치챈 것 같았으나 오직 사쿠라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드리웠다. 정말 눈치가 없는 편이구나……. 사쿠라를 바라보던 모두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문맥을 파악하라고, 문맥을……. 너 국어 점수 최저 아니냐?”

“가, 갑자기 성적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사쿠라가 꽤 다급하게 화를 내니 다들 깔깔 웃기 바빴다. 그들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기에 사쿠라는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도대체 뭐냐고……. 사쿠라는 답답함이 극치를 넘어섰으며 이에 보다 못한 다른 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하고 말해주었다.

 

“……좋아하는 사람? ……누가?”

“누구겠어. 그야 당연히 하지메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쿠라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드리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기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절대 그런 인물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랑’이란 게…… 그럼…… 그런 의미였단 건가? 이제야 사쿠라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스오와 니레이를 비롯한 모두가 ‘느리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가만 생각하던 사쿠라의 머릿속에 흐릿한 형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지더라니 이내 무채색 속에서 제 모습을 드리웠다.

 

‘우메미야 하지메의 사랑.’

‘그가 좋아하는 사람.’

‘그런데 이제 싸움을 잘하는……?’

 

사쿠라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정답의 힌트 속에서 헷갈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상황 속에서, 기어이 사쿠라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잘 생각해 보자. 우메미야 하지메라는 인물은 후우린을 비롯한 근방에서 가장 강한 사람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런 그가 좋아하는 인물도 당연히 그만큼 강할 테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 차이가 있으니 여자는 가능할 리 없었기에. 결론적으로 사쿠라는 제 머릿속에서 하지메의 옆에 나란히 선 또 다른 남자 하나를 만들어냈다. 얼굴도, 체형도, 절대 알아낼 순 없었으나 그저 정체 모를 의문에 휩싸인 그 남자는 이제 사쿠라의 머릿속에서 하지메의 연인으로 낙인찍혔다.

 

‘그런 거였냐……!!!’

 

사쿠라는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왜 다들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시시덕거렸는지도, 자신이 무얼 놓치고 있었던 건지도. 왜 이렇게 상황이 흘러간 건지도. 모든 게 전부 완벽하게 이해된 순간, 사쿠라의 머리 위로 전구가 하나 켜진 것 같았다. 어어- 하던 스오가 그 전구를 톡톡 건드리자 사쿠라의 시선이 하지메에게로 향했다.

 

“난…… 난…… 이해한다.”

“어? 뭘 말하는 거야?”

 

사쿠라의 말에 하지메는 되레 의중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드리웠다. 그건 하지메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사쿠라가 내뱉은 정체 모를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대충 들은 적이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음- 뭘 말하는 걸까-.”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라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이해해……!”

 

사쿠라는 퍽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다른 이들은 뒤늦게 사쿠라가 무얼 말하려는 건지를 파악했다. 아, 알겠다.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구나. 오해를 바로잡아준다면 좋겠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편이 더 재밌지 않던가? 혼자 저렇게 세이텐을 ‘남자’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도. 그 덕에 하지메가 게이가 되어버린 건 더더욱 즐거운 요소이기도 했다. 사쿠라가 나름대로 논리를 담아 생각하려던 게 티가 났기에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 확실히 그럴 수 있지. 하지메는 워낙 강하니까.”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하죠.”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은 사쿠라의 편에 서는 것만 같았다. 하지메는 자신만 모를 이야기에 “뭐야- 무슨 말을 하는 건데?”라고 하다가도 세이텐에게 보여주고 싶단 생각에 다시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쿠라보다 늦게 옥상에 도착한 스기시타는 뒤늦게 이 상황을 보게 됐다. 무슨 얘길 했던 거지? 그가 그리 생각하니 이윽고 니레이가 말을 걸었다.

 

“아, 곧 소중한 사람이 온대요.”

 

소중한 사람? 스기시타는 누구의 소중한 사람인지 묻는 표정을 드리웠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하지메에게 향했다. 그제야 스기시타도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했다. 당연히 그게 연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인 거지?”

 

우메미야 씨의 소중한 사람을 내가 모르다니. 라는 얼굴의 스기시타가 물음을 던졌다. 코토하라는 여자가 아니냐고 물었으나 다들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스기시타는 고민을 시작했으니. 정답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해서 입이 근질근질한 사쿠라가 ‘특별히 알려줄까’라는 표정으로 스기시타를 바라보았다. 스기시타는 필요 없다는 듯 굴었으나 다른 이들은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쿠라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들이 말하던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걸 꼭 알아야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말이다, 바로…….”

“…….”

“……남자 애인이다.”

“……!”

 

남자 애인. 두 단어가 들려주던 충격이란 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몰랐었다. 하지메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는걸. 어째서 자신이 그걸 몰랐던 건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벙쪄있던 스기시타가 정말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쿠라는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입이 가볍다거나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성격은 아니었다만, 이건 확실히 미리 알아둬야 할 부분인 것 같았다. 자신은 동성애니 뭐니, 그런 거랑은 딱히 연을 만든 적은 없었으나 그래도 괜한 오해로 실수하면 곤란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던 사쿠라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거로군.”

 

스기시타는 사쿠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메에게는 그만큼 강한 인물이 어울렸기에 여자와의 교제는 쉬이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메를 위해서라도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스기시타는 열의를 가졌다. 그는 유독 하지메의 일과 관련해서 열의를 가지는 일이 잦았다.

 

저 멍청이들……. 두 사람을 보던 히이라기는 한숨을 내쉰 뒤 이마를 짚었다. 이번 일 학년에는 바보가 왜 이리 많은 건가 생각이 들었다. 반면 스오는 이 모든 상황이 재밌다는 듯 후후 웃어 보였고, 니레이는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저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는데.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려고 하지 않으니 자신도 잠자코 있는 걸 택할 수밖에 없던 그였다.

 

 

그 무렵, 세이텐은 후우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찰랑거릴 때마다 곱디고운 꽃향기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 누가 봐도 참하게 생긴 미인상이었기에 이따금 사람들이 쳐다보는 일이 잦은 편이었다. 불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타인의 시선에 쉬이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기에 한결같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던 세이텐이었다.

 

오늘 본다면 하지메와 마지막으로 본지 약 2주 정도가 지나는 셈이었다. 2주라니.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며 거의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기에 더더욱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하지메가 많이 기다렸을까. 세이텐은 그런 생각을 곱씹곤 제 머릿속에서 하지메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 강했던 하지메는 오랫동안 만나거나 연락이 되지 못했을 땐 늘 ‘보고 싶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세이텐은 하지메의 그런 솔직함을 좋아했다. 다들 자기 이익만 챙기고 이득만 생각하면서 표정이나 말투 등을 확 바꿔버리기 바빴는데, 그런 사람들과 다르게 하지메만큼은 언제나 항상 올곧고 정직할 것만 같았다. 하지메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함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곱씹던 세이텐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에 길을 걸을 땐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다소 차갑게 보였었던 만큼. 지금 세이텐이 보이는 미소는 확실히 보기 흔한 것은 아니었다.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일단은 텃밭 상황에 대해서도 물어볼 거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만, 그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하지메가 매일 같이 연락을 보냈기에 잘 알았다. 세이텐의 답장이 늦거나 연락이 없더라도 하지메는 꼬박꼬박 제 하루를 브리핑 해주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텃밭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일 학년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메시지를 읽다 보면 하지메가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다행이야, 하지메. 세이텐은 하지메의 메시지를 보며 항상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메는 행복해야 할 자격이 충분했다. 감히 그러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그처럼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고 다정한 인물은 늘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세상에 하지메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이텐이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걸음을 내딛던 찰나, 저 앞에서 세이텐을 바라보던 양아치 세 명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봐, 저거 비싼 학교 아니냐?”

“맞네. 딱 봐도 명문고잖아.”

“돈도 많게 생겼고 얼굴도 반반하면 꽤 공주 대접 받고 살았겠네.”

“건방진 여자를 가만둘 순 없지.”

 

양아치들은 세이텐을 두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당연히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세이텐의 눈에도 그들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안전하게 돌아서 가고 싶었으나 분명 하지메가 자신을 기다릴 거였다. 게다가 이미 자신이 타겟으로 찍힌 것 같았기에 오히려 여기에서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한다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세이텐은 꾹 참은 채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최대한 저들을 무시하고 나아가려던 때, 그들은 세이텐을 먹잇감 삼고선 다가갔다.

 

“어-이, 잠깐 멈춰 보지 그래?”

“꽤 먼 학교인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대?”

“걸음이 왜 이렇게 빨라. 잠깐 시간 좀 내달라니까?”

“…….”

 

저들의 끈질긴 이야기에도 세이텐은 확실히 거부하고 거절하려는 양 걸음을 더욱 빠르게 내디뎠다. 섣부른 말들로 대화에 참여하면 안 됐다. 무시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무정한 태도로 앞서 나가던 세이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양아치들의 눈엔 그런 세이텐이 영 아니꼽게 여겨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손을 들어 올린다면 한주먹거리도 안 될 여리고 여린 여자면서, 건방지게 사람이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묵묵히 걸어 나간다는 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 대뜸 머리채부터 잡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 명문고 학생인 만큼 콧대가 높은 건진 모르겠으나 그만큼 해롭다는 걸 몸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한 이들은 다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고, 세이텐이 코너를 돌아서 나가려고 하자 그사이에 양아치 중 한 명이 세이텐의 손목을 낚아챘다.

 

“윽, 놔주세요!”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니잖아? 그냥 얘기 좀 하자니까 그러네?”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이 지나칠 만큼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저 표정이 ‘얘기 좀 하자’라는 표정이라는 건지. 세이텐이 양껏 쏘아보기 시작하자 그런 세이텐의 눈빛에 양아치들은 오히려 우습기만 하다는 듯 연신 킥킥거리기 바빴다. 저걸 지금 무서워하라고 짓는 표정이냐고 말하곤 세이텐의 표정을 따라 했다.

 

야, 봐봐. 무섭냐? 이거 무서워? 세이텐은 양아치들이 자신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타부타 말을 얹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괜히 자극시켰다가 더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기에 그런 것만큼은 삼가야 했고,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이 세이텐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가만. 얘 이름…… 너 세이텐이냐?”

“아- 이게 그렇게 읽는 거였어?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아는 애야?”

 

다른 양아치의 물음에 세이텐도 덩달아 그 양아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싶었으나 당연히 이런 질 나쁜 인물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르는 게 분명했을 얼굴인지라 세이텐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어째선지 그 양아치는 세이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여잔데? 라고 생각하던 그는 이내 정답을 알았다는 양 웃음을 터뜨렸다.

 

“씹, 난 또 뭐라고! 세이텐! 너 여자였냐?!”

“뭐야. 너 미쳤냐? 누가 봐도 여자잖아. 그럼 얘가 남잔 줄 알았던 거야?”

“아니, 후우린의 우메미야 하지메 있잖아. 걔가 못 먹어서 안달이라던 세이텐이라는 이름을 몇 번 들었는데, 그게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후우린의 우메미야 하지메가 못 먹어서 안달이라던 세이텐.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놀랍게도 그 수식어는 세이텐을 향하던 게 맞았다. 다들 으레 남자라고 생각하던 세이텐의 정체는 평범하게 어여쁜 여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세이텐은 저들이 자신과 하지메의 관계까지 알아버린 이상, 이다음으로 가게 된다면 분명 하지메에게도 피해가 갈 거라는 슬픈 확신에 사로잡혔다. 가뜩이나 하지메가 싸움에 휘말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하지메의 폭력성보다 그의 다정함을 응원하고 싶었던지라 세이텐은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메를 끌어들일 순 없다는 의미였다.

 

“이야- 난 또 뭐라고. 근데 진짜 여자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어어?! 야! 도망친다!”

 

양아치들이 긴장을 푼 채 깔깔 웃던 사이, 세이텐은 자신을 붙잡았던 손을 뿌리치고는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름 육상 부분에선 뒤처지지 않던 세이텐이었다. 남자들을 힘으로 상대할 순 없겠으나 속도로 이곳에서만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곧 후우린에 도착하기에 조금만 가면 되었다. 조금만 힘을 내어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테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공교롭게도 상황이 마땅치 않았다.

 

핸드폰은 전원이 꺼진 상태였으며 길가에는 사람들도 보이질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 귀찮은 일만 더 늘어나리란 생각에 세이텐은 팔과 다리를 더욱 빠르게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질주로 인해 숨이 턱턱 막히면서 온몸이 바짝 긴장했으나 그럼에도 중간에 멈추어 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뒤에 있던 양아치들은 포기하지 않은 채 세이텐을 향해 달려왔다.

 

세이텐은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리려 했다. 후우린의 교문이 저 앞에서 보이던 차, 이 정도면 후우린과 가까웠기에 안심이라고 생각해 버린 건지 세이텐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걸 잊은 세이텐은 끝내 양아치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허억, 헉…… 존나 빠르네, 진짜…….”

 

양아치들은 숨을 헐떡이고선 세이텐을 옆쪽 골목으로 잡아끌었다. 세이텐이 발버둥 치며 저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성인 남성 여러 명을 상대로는 무리였다. 그들은 여기가 학교 교문 근처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놔주세요! 세이렌이 목청 높게 외쳤다. 끌려가며 거세게 반항하던 탓인지 세이텐의 가방과 핸드폰이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지고야 말았다.

 

“……어라?”

 

그리고 그때, 뒤에서 걸어오던 후우린 학생 중 한 명은 누군가가 골목 쪽에 끌려가는 듯한 실루엣을 목격하게 됐다. 처음엔 깜짝 놀라긴 했으나 설마 후우린 근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싶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인으로 보이던 남자들 몇 명이 여학생의 사지를 붙든 채 옷을 벗기려 하고 있었으며 두려움이 엄습하던 세이텐은 최대한 티 내려고 하지 않은 채 그들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뺨을 맞아서 입술 안쪽에 피 맛이 나긴 했어도 차마 벗어날 순 없는 상황이었으니, 괜히 더 큰 소리를 냈다가 다른 곳에서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세이텐은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저를 도와줄 사람이 지나다니진 않을까 생각하던 때, 세이텐의 눈엔 후우린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뭐라고 말하는 거지……?’

 

세이텐이 입 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자 남학생은 가까이 다가가진 못한 채 숨어서 그 언어를 해석하려 했다. 줘, 도, 도와, 도와줘. 그렇게 한 글자씩 해석하며 단어를 조합하다 보니 ‘도와줘’란 말이 만들어졌으며 이내 세이텐은 ‘하지메’라는 단어도 읊었다. 뒤늦게 세이텐이 읊은 단어가 ‘하지메, 도와줘’라는 걸 안 남학생은 당장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양아치들은 세이텐의 교복 재킷을 벗기고는 스타킹을 부욱 찢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벗기려고 했으나 그 위에 신발과 양말을 신은 탓에 벗기는 건 쉽지 않았으므로 다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야 좀 얌전해졌네. 거 봐, 말 잘 들으니까 좋잖아.”

“오빠들도 바쁜 사람들이거든? 그러니까 빨리빨리 끝내고 각자 갈 길 가자. 알겠지?”

 

양아치들은 이따금 옷깃 사이로 세이텐의 살결이 드러날 때마다 오오, 하는 저급한 감탄사를 흘렸다. 세이텐은 불안했으나 차마 그 감정을 드러내려 하진 않고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이 상황을 직면하고자 했다. 괜찮았다. 괜찮을 거였다. 조금 전에 후우린의 학생이 자신을 발견했으니 금방 하지메가 달려와 줄 거였다. 그런 굳센 믿음이 있었기에 세이텐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후우린의 옥상에는 미묘한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까 세이텐이 제 학교를 나오자마자 연락한 거라고 해도 지금까지 오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도중에 누군가를 만나서 도와줬다거나 잠시 어딘가에 들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세이텐은 필시 어떻게든 하지메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거였다. 잠시 핸드폰을 빌려서 메시지라도 보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알렸을 거였다. 하지메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게 싫어서 나름 그런 방법을 고려했을 세이텐이었는데. 그런 그가 지금까지 연락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게 기묘했다.

 

‘많이 늦는군. 심각할 정도로.’

 

히이라기는 그리 생각하고선 슬쩍 하지메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하지메 역시 히이라기처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퍽 진지한 얼굴로 교문 부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드리워진 나무 때문에 하필 세이텐이 교문까지 달려오던 장면과 누군가에게 끌려가던 장면은 보이질 않았다. 정말 정직하게 교문 앞 부근만 보이던 위치였기에 하지메는 다른 위치에서 봐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설마 후우린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다소 안일하게 생각해 버린 감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으음- 너무 늦지 않나요?”

 

적막을 뚫고 스오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락이 온 지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이렇게나 안 올 이유가 있는 거냐고. 너무 늦는 것 같다던 눈치에 하지메는 자신이 직접 세이텐을 데리러 가야겠다고 곱씹었다. 이대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중, 1층으로 나가려던 차에 누군가가 모퉁이를 돌다가 하지메와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하지메가 빠른 반사신경으로 그를 붙잡았지만 말이다.

 

“복도에서 그렇게 뛰면 위험하지-.”

“크, 크, 큰일났어요! 교문 앞에서 어떤 학생이……!!!”

 

남학생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학생이, 뭐? 하지메가 그 남학생을 붙잡은 채 물음을 던지자 너무 열심히 달려온 탓에 숨이 턱 막히던 남학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딱히 진정되진 않았으나 그나마 상태가 조금 나아지는 걸 느끼던 그였다.

 

“어, 어떤 학생이 끌려가서 이런저런 짓을 당하는데. 거기서 우메미야 선배 이름을 불렀어요!!!”

“제대로 봤어? 머리색이나 눈 색은? 이름은?”

“그, 그건 어두워서…… 아! 이게 같이 떨어져 있었어요!”

 

남학생은 아차 싶은 얼굴로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그 가방과 핸드폰은 당연하게도 세이텐의 것이었다. 세이텐이 괜한 놈들에게 끌려갔다는 걸 넌지시 알리는 의미이기도 했던지라 이내 모두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세이텐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후우린 앞에서 감히 세이텐을 붙잡다니. 아니, 이건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들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남학생은 하지메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보곤 혹시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건 아닐까 싶어서 잔뜩 긴장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자 하지메는 별안간 손을 들어 올리더라니 그 남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만졌다.

 

“고맙다.”

 

그 이야기를 전한 하지메와 주변인들은 전부 교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메와 히이라기는 그 여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달려갔고 그 뒤로 사쿠라와 니레이, 스오와 스기시타가 달려갔다. 당연히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던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하지메의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거나 혹은 더 강한 상대를 만나 고전하는 것이리라 확신했다. 그 정도로 강하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상대일지. 사쿠라는 그런 생각을 곱씹었으며 스기시타는 감히 우메미야 씨의 심기를 거스른 녀석이 있다는 걸 용서하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야, 거긴 그만하고 옷이나 좀 어떻게 해 봐!”

“아니, 이거 셔츠 단추가 잘 안 풀어진다니까?”

“그보다 다리 좀 봐라. 진짜 매끈하지 않냐? 어디 보자 팬티는-…….”

 

그러는 사이, 양아치들은 여전히 세이텐을 붙잡은 터였다. 한두 명이 아니다 보니 서로 은근하게 손발이 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퍽 즐겁다는 눈치였으며 세이텐은 한 명의 손에 입이 막힌 터라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온몸에 힘을 줄 뿐이었다. 어떻게든. 정말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야 했다.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버텨야 했기에 최대한 저들의 뜻대로는 행동하지 않으려 노력한 세이텐이었으니. 기어이 양아치 중 한 명이 세이텐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톡톡 풀기 시작한 순간, 세이텐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려 하자 저 앞에서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 모두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엔 하지메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버젓이 서있는 게 보였다.

 

“하아, 하…… 하아…….”

 

숨을 거칠게 내쉬던 하지메는 지금 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이텐이 양아치들에게 사지가 붙잡힌 그 상황을 말이다. 스타킹은 찢어지고 재킷은 떨어졌으며 셔츠 단추는 일부가 풀려 있었다. 하지메를 발견하자마자 세이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도 잠시, 그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스쳤다. 하지메의 눈빛에 남아있던 그나마의 이성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 쟤 후우린의…… 억!!!”

 

양아치 중 한 명이 하지메의 얼굴을 기억하며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하지메가 양아치의 턱 쪽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양아치가 날아가며 세이텐은 한 손에 자유를 얻게 됐고 이내 그는 양아치 무리로부터 몸부림치고 벗어났다. 하아…… 하고 한숨을 쉬던 히이라기는 세이텐을 붙잡아 괜찮은지를 물었다. 세이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데 그의 옷깃 사이로 살갗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히이라기는 바로 세이텐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뭐, 뭐야! 후우린?! 여기 후우린 근처였냐?!”

“아씨, 진짜였어?!”

 

양아치들은 다급한 표정을 드리우는가 싶더라니 이내 헐레벌떡 자리에서 도망쳤다. 혹여라도 누군가가 쫓아올세라 황급히 달려가는데, 그 모양새가 조금 전과 다르게 마냥 우스울 뿐이었다. 뒤늦게 사쿠라와 스기시타가 양아치들을 쫓으려 했으나 이는 하지메가 저지했다. 그가 손으로 두 사람의 가슴팍을 붙잡아 말리니, 그때 보이던 하지메의 눈동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텐쨩.”

 

하지메는 히이라기의 옆에 있던 세이텐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텐쨩? 그럼 저 사람이……. 사쿠라와 스기시타가 세이텐을 제대로 보려는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하지메가 세이텐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해했어. 그때 네가 말한 게 이런 거였구나.”

 

하지메의 말에는 과거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세이텐으로 인해 하지메가 크게 다쳤던 사건. 그 사건을 덩달아 떠올린 세이텐은 하지메에게 안긴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다가 이내 하지메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울고 싶지 않았다. 고작 저런 놈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제 눈물은 그들보다 더욱더 가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흘리고 싶었으니까.

 

“미안해.”

 

하지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당연하게도 하지메의 잘못은 없었다. 하지메가 사과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던지라 세이텐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메 잘못이 아니잖아. 세이텐의 나긋한 목소리가 하지메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굳이 말한다면 자신이 사과해야 할 건 없었으리라. 하지메도 그걸 어느 정도 인지했으나 그럼에도 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 녀석들이 조금 더 머리가 좋았더라면, 서로 간의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세이텐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랐다.

 

자신이 없던 사이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를 사이에 세이텐에게 몹쓸 일이 벌어진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세이텐을 지키고 싶었다. 매 순간 세이텐의 곁에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도 한심했다. 게다가 이런 생각까지 떠올리자 자신이 더더욱 싫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이텐은 이 마음을 이해할까. 하지메는 그리 생각하다가 아니라며 마음을 접었다. 세이텐은 굳이 이 마음까진 이해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신도 딱히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정말 괜찮아. 네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나도 너랑 마찬가지야, 하지메. 안 떠날 거야. 절대로.”

 

세이텐의 말이 하지메에겐 마냥 큰 위로였다. 영원히 저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 제겐 당연했던 그 행동이 세이텐에게도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게 더없이 행복했다. 고맙다는 말은 차마 목구멍에 걸려서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하지메는 세이텐을 더욱더 꽉 끌어안았을 뿐이었고 세이텐은 그런 하지메의 등을 토닥였다.

 

‘응? 응? ……응?’

 

그러던 와중,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대충 이해했다. 지금 우리가 구한 사람이 저 여자라는 건. 그렇다면 도대체 우메미야 하지메의 남자 애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꼭 한 번 그의 힘과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던지라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굴 찾는 거냐며 니레이가 질문하자 사쿠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 우메미야의 애인은 어디에 있나 싶어서.”

“어? 지금 보고 있잖아? 저기.”

“뭐?”

 

니레이가 손으로 세이텐을 가리키자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세이텐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바보 아니야? 어딜 봐도 여자잖아. 아니면 여자만큼 예쁜 남자라는 거야?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만큼 예쁜 남자라고 해도 교복 치마까지 입는 취향이라는 건 쉽지 않았을 거였다. 애초에 우메미야 하지메의 취향이 여장 남자라는 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던 사쿠라의 말에 니레이 역시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드리웠다. 그러자 스오가 큼큼, 하고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진실을 알려줘야겠지? 짜잔- 지금 보는 세이텐 씨가 바로 애인입니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여자잖아?”

“응, 여성분이지.”

 

스오가 당당히 대답하자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둘이었다.

 

“애인이 두 명이란 소리냐?”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이 오해했다는 거야.”

 

사쿠라의 질문에 스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해했다니. 무얼 오해했다는 건가 싶던 스기시타가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중간에 성별이 바뀐 건가?”

“아니, 처음부터 여자였어.”

 

……아?

 

두 사람이 의아해하던 순간, 이윽고 이들의 시선은 세이텐에게 향했다. 하지메와 세이텐이 서로를 놓아주니 세이텐이 일 학년들을 보고선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안녕, 난 세이텐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세이텐이 말하자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바짝 굳는 걸 느꼈다. 여성에 면역력이 있던 둘도 아니었으며 애초에 저렇게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는 저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하듯 시선을 휙휙 돌리자 하지메가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얘길 하던 중이야? 남자? 남자 애인?”

“아- 두 사람은 세이텐 씨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대요.”

“뭐어-?”

 

스오의 설명에 하지메가 그럴 리 있겠냐는 표정을 드리웠다. 세이텐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던지 조금은 놀란 표정을 보이다가 웃음을 보였다. 그렇구나, 하긴. 가끔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곤 해. 세이텐의 말에 하지메는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으며 와중에 그는 어떻게 이렇게 예쁜 텐쨩을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냐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멋쩍어하다가도 스오를 노려보듯 했으니, 스오는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네-.”f며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세이!”

 

이윽고 이들은 코토하가 일하던 식당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함께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시시콜콜 이야기도 나누자 분위기는 금세 소란해졌다. 세이텐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듣던 코토하는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다.

 

“다친 곳은?!”

 

코토하가 묻자 세이텐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폭력에 휘말리진 않았기에 다친 곳은 없다는 의미였으나 공교롭게도 그의 손목은 양아치들이 잡아버린 탓에 살짝 부어 있었다. 살이 원체 연한 편이라 그게 더욱 티가 나는 것 같았다.

 

“기다려. 구급상자 좀 가져올게.”

“괜찮은데…… 고마워.”

“텐쨩, 많이 아픈 거야?”

“걱정하지 마, 하지메. 정말 하나도 안 아파.”

 

세이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하지메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세이텐은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으나 정작 하지메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역시 붙잡고 주먹이라도 날렸어야 했다던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바삐 오므라이스를 먹어댔고. 두 사람이 체한 듯 가슴을 붙잡고 콜록거리자 니레이가 이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토마는 아직도 약 먹는 중이야?”

“그래…… 누구 때문에 말이지.”

 

세이텐이 묻자 히이라기가 피곤하다는 얼굴을 드리웠다. 이에 아무것도 모를 하지메가 “너무 약에만 의존해도 안 좋아!”라고 이야기하자 히이라기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마냥 즐겁던 세이텐은 쿡쿡 미소를 터뜨렸다.

 

하지메는 세이텐의 미소가 좋았다. 그 미소를 보노라면 마치 모든 게 편안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이텐의 저 미소를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으니. 이는 비단 하지메만이 느끼던 감정은 아니었을 거였다. 세이텐과 친한 코토하와 히이라기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며 이제야 만나긴 했으나 일 학년들도 전부 세이텐의 미소를 보면서 마음이 한결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후우린과 하지메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건 여느 모로 보나 자명한 사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므라이스를 먹고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이들은 가게에서 나오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도 끝났기에 무얼 할까 고민하며 히이라기와 세이텐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차, 하지메가 세이텐을 바로 붙잡았다.

 

“텐쨩은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갈 거야. 그렇지?”

 

하지메가 조금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자 세이텐은 그런 하지메가 귀여웠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니 하지메가 세이텐의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대형견 같다고 생각한 세이텐은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물론 하지메의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된 일 학년들은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가, 강하긴 한 것 같다. 여러모로…….’

 

사쿠라는 비록 세이텐이 남자도 아니었으며 그리 힘이 세지 않다는 것도 알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힘과 근력만이 강함의 척도는 아니었다. 강함에는 여러 가지 척도가 존재했고 적어도 세이텐에겐 어느 척도가 꽤 높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하지메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함께 집으로 향하던 와중에도 이들은 서로의 곁에서 떠날 줄 몰랐다.

 

“어쩐지 오랜만이네-.”

 

하지메의 집에 들어온 세이텐이 방안의 풍경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방문했던 건 약 2주 전이었을 거였다. 시험 기간 때문에 내내 공부에만 몰두하느라 이곳에 놀러 올 일도 마땅치 않았던 게 원인이었으니. 하지메는 “그렇지?”하고 읊고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언젠간 세이텐을 위해 사 두었던 우롱차가 있었다. 세이텐이 좋아하니 자신도 좋아해 보려고 늘 먹기 시작하던 것을 이제는 물처럼 마시는 기분이었다.

 

‘……아.’

 

문득 우롱차를 꺼내려던 하지메는 손짓을 멈추곤 세이텐을 바라보았다. 세이텐은 탁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액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옛 추억이 물씬 담긴 액자 속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앳된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텐쨩, 시원한 걸로도 괜찮아? 아니면 따뜻한 걸로 줄까?”

“시원한 게 좋아. 날씨가 조금 더웠으니까.”

“알겠어!”

 

하지메는 고개를 끄덕이더라니 곧장 우롱차를 꺼내곤 컵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세이텐은 2주 전과 딱히 달라질 게 없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매번 오고 매번 보는데도 어째 볼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었다. 집안에서 익숙하게 풍기던 하지메의 향기도 마냥 좋았다. 눈을 감은 채 그 향을 만끽하던 세이텐은 이윽고 하지메가 다가오자 그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았다. 고마워. 세이텐이 인사하니 하지메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드리웠다.

 

“아, 텐쨩! 같이 영화 볼까? 저번에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사뒀는데.”

 

무얼 해야 세이텐이 기뻐할까 생각하던 하지메가 곧장 답을 내놓았다. 다행히 정답이었던지 세이텐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으며 이내 세이텐이 보려고 했던 영화가 화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어깨는 바짝 붙어 있었다. 딱히 세이텐을 그렇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적은 없긴 했으나 이런 순간엔 괜스레 의식하게 된 하지메였다. 세이텐이 알게 되면 저질이라고 말할까? 조금 걱정되긴 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이텐이라면 그런 말을 꺼내기보단 그냥 웃으며 하지메의 손을 잡아줄 테였으니까.

 

“하지메, 시작한다.”

 

세이텐이 가볍게 말하자 하지메는 세이텐에게만 오롯이 향해있던 모든 시선을 다시 화면으로 돌렸다. 흘끔흘끔 세이텐을 바라보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정작 세이텐 본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괜히 멋쩍어진 하지메는 헛기침을 두어 번 정도 해 보인 뒤 영화를 보았다. 세이텐이 보고 싶다고 해서 구매해 두긴 했으나 무슨 영화인진 잘 몰랐다.

 

그런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내용이 꽤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완벽하게 하지메의 취향인 영화였다. 어라? 텐쨩이 나랑 영화 취향이 같았던가?! 뭐가 어떻든 간에 다행이라고 생각한 하지메는 꽤 집중한 상태로 영화를 시청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세이텐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만 같았으며 기껏 준비해 놓은 팝콘만 입에 조금씩 넣고 있었다.

 

힐끔, 세이텐은 그런 하지메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그다지 세이텐의 취향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하지메의 취향만 고려해서 선택했던 영화였는데. 함께 영화 볼 때마다 늘 제 취향만 고려하던 그였기에 이번엔 세이텐이 하지메를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다행히 제 예상대로 하지메의 취향에 걸맞았던지라 그는 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던 그 표정이 예전과 전혀 다를 게 없어서 괜히 더 웃음이 나온 세이텐이었다.

 

“영화 재밌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세이텐이 하지메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 하고 고개를 돌린 하지메는 그제야 세이텐과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내가 너무 영화에만 집중했구나! 뒤늦게 제 상황을 파악한 하지메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혹시 세이텐이 너무 외로워했으면 어쩌나 싶던 그는 뒤늦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그가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세이텐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사과할 거 없잖아? 그보다 오늘따라 사과가 잦네.”

“그렇네…… 텐쨩한텐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야.”

“그건 나도 그래.”

 

세이텐과 하지메가 서로를 눈동자 안에 담은 채 미소를 그렸다.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게 이상한 느낌이었다. 손끝은 저릿했고 손바닥은 간지러워서, 감히 이 감정을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영화는 어느덧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려 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점점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아……. 머릿속엔 오로지 서로에 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하지메는 부드러운 손길로 세이텐의 어깨를 안았다. 너무 세게 안으면 부서지거나 망가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행동한 그였다. 세이텐은 그런 하지메의 배려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제 어깨를 깃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을 만큼 조심스럽게 안은 그 손길이 마냥 귀엽기도 했다.

 

하지메다워. 세이텐은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의 입술은 가볍게 서로에게 맞닿아선 조금씩 움직였다. 고개가 한 번 꺾일 때마다 입맞춤의 깊이도 유난히 깊어졌다. 좀 더, 더 가까이.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닿고 싶다는 생각이 하지메의 머릿속에 간절했다. 하지메의 입술은 세이텐의 입술을 위아래로 가볍게 물었고 혀도 살살 얽힌 채 서로에게 맞닿았다. 기분 좋은 감각이 둘 사이로 넘실넘실 피어오를 찰나,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나니 주위가 어두워졌다. 커튼까지 쳐둔 탓에 미약한 빛만이 집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묘한 기분의 연속이었으며 평범한 남자라면 이대로 관계 속도를 더 이어갈 수도 있을 테였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보이던 하지메의 발그레한 표정에 세이텐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메는 평범한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오직 저만을 생각해 줄 것처럼 행동하곤 했으니까. 애초에 입술이 맞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나 발갛게 변한 사람이 무슨 짓을 더 할 수 있을까. 세이텐은 하지메의 순수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텐쨩, 나…….”

 

하지메는 세이텐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겨우 말을 읊기 시작할 찰나였다. 정말 분위기 없이, 무드 하나 없이, 대뜸 하지메의 뱃속에서 꼬르륵― 하고 기나긴 고동이 울렸다.

 

“……아.”

 

두 사람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고 이 적막을 처음으로 깬 건 세이텐이었다. 하지메의 얼굴이 이전보다 더 붉어지니 세이텐은 “역시 뭐라도 좀 먹을까?”라며 웃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밥을 먹는 것도 깜빡해 버린 터였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하지메는 괜한 상황에 조금 창피해졌고 세이텐은 그런 하지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집안은 금세 환한 불빛으로 가득해졌으며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각자 샤워를 끝마친 이들은 한 침대에 올랐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다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서로의 코끝에 닿는 향기가 마냥 좋았다. 영원히 이 향기를 잊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꽉 안아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번쩍 눈을 뜬 하지메는 제게 안긴 세이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세이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쩜 잠이 든 모습도 이렇게 한결같이 천사 같을까. 하지메는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고선 세이텐을 꼭 끌어안았다.

 

당연하다는 듯, 세이텐은 하지메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 얇고 고운 머리칼이 콧가를 간지럽히자 자연스레 바보 같은 웃음이 나왔다. 행복을 정의한다면 이런 순간이 아닐까. 은은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좋았고 세이텐도 좋았다. 그를 위해 엊그제 미리 세탁해두었던 이불에선 뽀송한 아침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오늘 세이텐과 어떤 걸 하면서 하루를 보낼지 생각하자 하지메의 얼굴엔 즐거움이 번졌다. 시험도 끝났겠다. 함께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다. 날씨도 좋으니 근처 공원에 피크닉을 가자고 해볼까? 내내 실내에만 있었을 테니 활동적인 걸 제안해 볼까? 함께 맛있는 걸 먹을까? 여러 가지를 떠올렸으나 분명 어떤 걸 하든 즐거울 것만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이텐인데 그 무엇이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꿈속에서 만나도 반가울 세이텐인지라 하지메는 콧노래까지 절로 흘러나왔다.

 

“음- 음-♪”

“하지메…… 일어났어……?”

“아, 텐쨩! 좋은 아침!”

 

세이텐이 잠에서 깨어나곤 하지메의 품에 안긴 채 크게 하품했다. 하지메는 그런 세이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라니 그 모습이 또 귀엽다며 세이텐의 품에 와락 안겼다. 너무 좋아서 감히 어쩌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달래야만 할까? 커다란 덩치가 제게 안기는 감각은 일상에서 쉽게 조우할 수 없던지라, 세이텐은 잠결에 하지메를 토닥였다.

 

띵동―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하지메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지? 싶던 하지메의 머릿속엔 익숙한 후우린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답이 정해진 문제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제집에 찾아올 이들은 그들뿐이었으니까.

 

그리고 하지메의 예상대로 문 너머에는 후우린의 학생들이 있었다. 히이라기와 스기시타가 문에 가까이 있었으며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따라온 스오가 그 뒤에 있었다. 그리고 스오의 손에 이끌려 온 사쿠라와 니레이마저 함께 하지메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주말에 가끔 찾아오곤 하던 히이라기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게 화근이었다.

 

평소라면 단둘이 오붓하게 데이트할 수 있도록 놔두었겠으나 어제 하지메가 세이텐을 데려가 버려서 남은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게 히이라기의 안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초인종 한 번에 일어날 법했음에도 문 안쪽에선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히이라기는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러야만 했다.

 

띵동, 하는 소리가 또다시 울리자 하지메는 일단 문은 열어줘야겠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불이 두 사람의 몸을 엮어버린 것도 모자라, 세이텐과 꼭 끌어안고 있었던 탓에 둘의 몸이 엉켜버리기에 이르렀다. 아, 잠깐만……! 세이텐이 무어라 말하려던 차에 두 사람이 함께 침대 아래로 넘어져 버렸고. 혹여라도 세이텐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까 싶어서 하지메가 손을 뻗고선 세이텐의 머리를 감쌌다.

 

‘방금 안에서 무슨 소리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집안에 울리자 문 너머에 잇던 이들의 감각이 문 안쪽에 집중됐다. 설마 무슨 일이 생겨버린 건 아닌가? 불안해진 히이라기가 초인종을 한 번 더 누르니 안쪽에서 희미하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텐쨩, 아프진 않아?”

“응, 괜찮-…… 근데 나 그만…….”

“잠깐만. 아직……조금만 더…….”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론 말이 중간에 끊긴 게 문제였다. 이불이 두 사람의 몸에 얽힌 탓에 읊어진 이야기들이었으나 당연히 다른 이들이 이를 알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히이라기가 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바로 열렸다. 역시 누가 침입이라도 한 걸까! 모두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선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자 이들의 눈에 비친 건 침대 아래에서 세이텐을 덮치는 듯한 자세로 옷(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이불자락)을 끌어당기는 듯하던 하지메의 모습이었다.

 

그런 와중에 세이텐의 웃옷도 크기가 큰 탓에 어깨가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며 짧은 반바지도 자세로 인해 허벅지가 노출되었다. 게다가 방금 막 하품하며 일어난 탓에 세이텐의 눈가가 유난히 촉촉하기도 했으니. 그 모습을 보던 히이라기가 “너 지금…….” 하면서 말을 읊자 하지메는 그런 게 아니라며 손사래 쳐 보였다.

 

그러나 이미 모두의 눈에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사쿠라와 스기시타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니레이는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으며 스오는 입을 가린 채 상황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또다시 난리가 부려질 것 같은 상황 속.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보던 세이텐은 괜히 웃음이 나와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문득, 하지메와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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