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내쉬면 죄였고, 들이마시면
ㅁ님 커미션/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서수혁 드림
늘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말하면, 아무래도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겠죠. 마음속으로만 뱉어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는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당신의 그 따스한 눈빛도, 말 한마디는 물론 손길도, 그 어느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말입니다. 이 끓어오르는 마음의 한 조각도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테니 그저 멀리서 이렇게 지켜보았던 것은 죄가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숨을 쉬는 것은 제게 늘 죄였고 이 길을 오르는 것마저 또 다른 죄이나 누군가에게는 속죄이길 빌었던 날들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만이, 제 전부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에게 빌어보려고 합니다. 지난 날의 모든 것을 고백해야만 마지막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늘 신에게 닿지 않듯이, 당신에게 닿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이 달동네에 발걸음한 것은 누군가를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 그랬지요. 다만 그들과 제가 달랐던 점은 저는 이미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은 뒤였습니다. 제가 그 속에 뒤섞여 들어간 것은 처음부터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 소중한 것을 앗아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저 또한 그들이 되었습니다. 이 손으로 수 없이 많은 피를 묻혀오면서도 어째서 그들은 나의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요. 죄 없이 죽어간 것은 그뿐일거라고 단정지은 제가 이제와서는 많이, 많이 우습기도 합니다. 깨달은 뒤에는 이미 늦어서, 한 때는 죄책감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늘 같은 악몽. 지독히도 생을 위해 살을 했던 그 날들, 그 순간의 모두를 기억합니다. 내 손에 숨을 거둔 이들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날, 아버지를 죽인 이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애석하게도 그들은 기억해줄 이조차 세상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생각이 들자 한 평생의 업으로 여겨왔던 짐을 덜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대신에 새로 다짐한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불쌍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내 평생을 할애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본래의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해도, 그것만큼은 이뤄야겠다. 아버지는 이것을 위해, 늘 애써오신 것이 아닌가하는 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당신은 커다란 변수였지요. 평범한 삶을 버렸던 제게, 평범한 사람을 바라게 만드는 존재는 당신이 처음이었습니다. 누가봐도 수상할 정도로 이 달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차림인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경계하기보다 그저 수줍게 웃는 것이 다였습니다. …제 눈에만 그리 보였던 것일까요. 늘 친절하고 상냥한 당신을, 저는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곳을 걸음할 때마다 내가 지켜야할 이들을 떠올리는 것보다 당신을, 당신의 미소를, 걸음을, 말투를 떠올리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난 모든 순간보다 더 분명히 삶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마음을 다잡아도 제자리로 돌려놓는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손짓. 이제야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지난 날 묻혀온 누군가의 피가 끈덕지게 달라붙은 벌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마저 불경하다는 듯, 당신은 티없이 맑고 사랑스러운 이였으므로 곧 접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되려 선물이 아닐까 싶었던 순간들로 가득 채워졌으니까요.
이제와 고백합니다. 당신에게 말한 저에 대한 모든 것은 거짓이지만, 당신에게 주었던 마음들은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입술이 뱉는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해서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전부를 토하고, 무릎을 꿇어 용서를 구하고 싶을만큼, 그동안 끈덕지게도 살아왔던 저를 버리고 살아가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저는 당신을 연모해왔습니다. 허나, 이젠 끝내야겠지요. 날이 밝으면 저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속죄를 위해 당신이 사랑하는 달동네의 일상을, 그들을 찾으러 갈테니까요.
숨을 내쉬면 죄였고, 들이마시면 사랑이었던 날들을 부디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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