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꿈

ㅎㅊ님 커미션/드림/이니셜 공개 요청

방학을 맞은 그 날부터 푹푹, 찌는 날씨가 계속 되었다. 친구들은 전부 바다나 수영장으로 피서를 가고, R은 달리 갈 데가 없어 집에만 틀어 박혀있었다. 이렇게 가만 어쩐지 지루했다.생각해보면 이 시기는 늘 그러했는데, P와 함께 했던 작년 여름이 R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평소처럼 잠에 깊이 들었다가도, 낮이 되면 깨기 일쑤였다. 그가 늘, 이 집을 방문했던 오후 3시 30분. 하지만 이젠 아니지. R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다. 

단 한 계절이었다. P와 연애를 했던 것은. 그리고 그는 우리가 만난 여름이 싫다고 했다. 만날 때마다 그 무더위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며 칭얼대기를 여러번이었다. 방학을 맞이하고 나서는 밤만이 아니라, 종종 낮에도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되어야 했으니. 그 홈메이드 슈트를 벗을 때마다, 온몸을 적신 땀과 그 악취가 불쾌하다고 털어놓으며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을 기억한다. 그는 늘 사랑스러웠지만, 그때는 유독 더 그래보였다. 붉어진 뺨에 살짝 입을 맞췄더니 한참을 얼빠진 채 굳어있다가 어어, 그러니까. 시원하다. R. 하는 엉뚱한 말을 했었지. P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편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그런 점이 좋았냐고 물으면, 아니. 아니었다. 오히려, P의 그런 점이 바보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이미 얼굴에는 괜찮지 않다고 쓰여있는 것이나 다름 없으면서 괜찮아, 하고 애써 웃어보이는 것이 그러했다. 그럴거면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 말지. 그 덕에 P는 늘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 무시받는 일이 허다했다. 집단생활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평범하지 않으면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 P는 후자였다. 하지만 P는 그런 점을 신경쓰지 않았다. P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P가 고민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가지게 된 능력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도울 수 있는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않아도 누구도 그에게 뭐라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이 도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곤 했다.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평범한 P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가하면 P는 혼자 감내하는 것들 또한 많았다. 아마도 m 숙모를 걱정시키기 싫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m는 P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P도 m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둘의 사이는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각별했다. P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m에게 P는 더욱이 자신이 갖게 된 능력을 알리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히어로 일까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늘, 상처도 괴로움도 전부 P 혼자만의 몫이었다. 모든 게 들통난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끙끙 앓곤 했지. 한동안은 내가 그를 전적으로 돕고 있는 상황에서도 머뭇거리며 늘 씨익, 웃어보이는 것이 다였지. 그래, P는 보기드문 '선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 방영하던 애니메이션 속 초능력 소녀들은 설탕, 향신료, 온갖 멋진 것들로 이루어져있다면 P를 이루고 있는 것은 선함, 아주 선함. 그리고 사랑이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P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고, 그 P는 여전히 내 곁에 있지만,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갈 수는 없었다. P는 넘치는 사랑은 나보다는 모두를 향했고, 그것을 간과한 나는 오로지 너를 선택했다. 내가 느끼는 그 괴리감 속에서 너는 밤을 지새우고, 또 혼자 속을 갉아먹었다. 너를 곪게하는 생각들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아주, 아주 어려운 일이구나. 내가 바라는 것과 네가 바라는 것은 달라서, 그것이 너를 망가뜨리는 일이라면 멈춰야했다. 

그래서 나는 너의 손을 놓았다. 대신, 아주 조그마한 소망을 가졌다. 나로써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것은 현실을 모방한 꿈속을 부유하는 것과는 달랐으니까. 내가 아직 네 소매 끝을 꼭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꿈이자 욕심이었다. 

*

P, 다시 장마가 시작된대. 네가 안아주던 여름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는데. 네가 나의 두 귀를 손으로 감싸 막아주고, 부끄러움도 잊은 채 머리 위로 얕은 키스를 퍼부어주던 그날처럼. 이 이불 밖에 다시 네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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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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