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urdes Theater
ㅂㅅ님 커미션/뮤지컬 <더 픽션> 그레이 헌트 드림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당신은 모른다. 당신의 짙은 흑발이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빛나는 것을.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무수한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감탄한다는 것 또한. 당신의 눈동자는 땅속 깊게 뿌리 내린 나무처럼 생명력 있고, 자아내는 눈빛은 어찌나 단단한가. 당신은 고작 소설의 실패로 비탄에 빠져 세월을 허비하는 나보다, 더욱 절망적인 생에서도 꿋꿋하게 견뎌왔고 그 힘으로 이뤄낸 것들이 많으며, 앞으로 이뤄낼 것 또한 무수하게 펼쳐져 있다. 당신이라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할 삶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일 뿐이며, 어쩌면 당신과는 별개로 떨어져도 다르지 않을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와이트 같은 번듯한 남자를 두고도 나를 선택한 당신이. 당신의 글은 무엇보다 훌륭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누구보다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이렇게 빛나는 당신을 받침 하는 데는 와이트처럼 안정적인 직업에, 나보다 훨씬 젊은, 당신과 같이 살아갈 날이 더 많고, 당신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또래의 남자를 만나는 것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그래,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당신에게는 얼마든지 있다. 이미 이혼이나 당해 궁상이나 떠는 추한 나 따위를 만나는 것은 나이를 막론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겨우 글을 쓰며 먹고 살아가는 작가이니, 당신에게 풍족한 삶도, 따뜻한 가정도 쥐여주지 못할 것이다. 그녀 또한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당신을 나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글’이라는 것의 숙명을 알지 않는가. ‘작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텐데. 지금은 이리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던가.
이미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당신을 밀어내면서도, 당신의 앞에만 서면 나는 또 바보같이 웃고 당신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는 것이다. 이마를 맞대고, 입술을 맞추고, 몸을 섞는다. 달뜬 당신의 숨결이 피부에 스치고, 나는 사랑을 속삭인다. 당신이 신음 섞인 목소리가 겨우 사랑을 토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가 된 듯 웃는다. 당신의 하얀 배 위에 흰 욕망을 토정한다. 이렇게 당신을 전부 탐해 놓고서 이런 말을 내뱉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은 내 마음이 가벼운 불장난이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감히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내 생명보다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있으니, 나는 마침내 당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잡는 것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온갖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사랑이라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토록 어린 나이에도 죽음을 결심하지 않았으리니. 와이트가 들으면 작가님은 생각보다 낭만에 빠져 있다며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이런 나에게 당신이 먼저 질릴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사랑을 내가 붙잡고 싶어서, 받고 싶어서 믿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어야 마땅한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니 참 이상한 일이지. 내가 당신에게 매 순간 진심인 것처럼 당신도 마찬가지로 내게 건네는 그 마음들이 다 진실로 진실이기를 바란다.
아. 내가 당신을 탐한다는 것은 우리아의 아내를 탐낸 다윗의 죄와 같다. 아무도 더럽고 추악한 나를 모른다고 해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의 본질은 영원할 것이고,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일 것이다. 회색 헌트. 그것이 저주받은 내 이름이니.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눈보다 희리다. 고백하는 다윗과 달리 나는 회개할 신조차 없다. 애초에 신을 신뢰했다면, 나는 ‘그림자 없는 남자’를, 블랙을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물들었으니, 당신이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면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가만 내버려두지 못한다. 그랬기에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차지하였으며, 나 또한 당신을 놓을 생각이 없다. 그런데도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내버려두지 않는가. 절망에 빠지도록 내버려두면서도 칭송받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은 이기심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나를 선택해 불행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이는 당신 앞에 없기를 바라니 이기적인 신의 모습과 닮았구나. 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인 것을 아는가. 나는 이토록 당신을 사랑해서 한 번도 빠짐없이 죄를 짓기를 반복하니, 정말 신이 있다면 영원히 타는 불에 던져져야 마땅한 사람이다. 이런 이가 당신의 온기와 사랑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두렵다.
호재. 백호재.
호재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가슴은 뛰기를 그만두지 않아. 마치 태초의 카오스가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그래, 호재를 만나고서 내 인생은 호재를 중심으로 송두리째 바뀌었으니 어쩌면 그 말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르지. 지구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중력에 이끌리고,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태양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나는 호재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일 테지. 혹자는, 와이트를 만나 나의 작품이 재연재 될 수 있었던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떠들어 대는 것을 알겠지.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호재. 나는 당신을 만나 빛나기 시작했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목표는 얻었으나 행복은 모르는 허황한 삶을 걷고 있었을 텐데. 그것이 참으로 기쁘다고는 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는 당신이 없다면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고, 그저 글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인생은 잃은 자가 되었겠지. 글은 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글은 나를 모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감사한 것은, 내가 그런 글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트리뷴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야. 호재를 만나서 나는 이생에서 스스로와 행복을 찾았으니. 내가 호재를 사랑하는 것처럼 호재도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가장 두려우면서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 이런 모순도 모순이 없겠지.
호재는 극작가이니 부조리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테지. 불합리 속에서 존재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니 우리는 얼마나 허황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니. 호재, 나는 늙고 모자란 내가 당신이라는 빛나는 존재의 사랑을 받는 이 불합리 속에서 나의 존재를 깨닫는다. 알면 알수록 호재를 사랑하는 것 외의 것들이 전부 부조리하게만 느껴져.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하여서 믿는다고 했지.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조리하여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호재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확신할 수 있어. 여전히 나와 호재 사이에는 불합리한 이유가 가득하지만, 그것이 호재를 사랑하게 하는 힘이라면 차라리 눈을 돌리고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당신이 내 품에 안겨, 나를 바라고, 나를 통해 살아가기를 바라고 욕심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당신의 사랑을 소원하고. 당신을 가지길 원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좋은 것만 보고, 느끼고, 가지길 원하니 당신이 내가 아닌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라다가도 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한낱 인간이라서.
호재. 호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여기에 있어. 이 숨이 멎는 날까지 호재의 곁에 있을 거야. 이내 더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순간에서도 내 마음을 당신 곁에 둘게.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드는 이 모든 감정과 나를 이루는 이 모든 것들을. 그러니, 생각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구나. 속으로만 삼켜내기로 해야지. 호재.
사랑하는 호재. 결국, 나는 당신을 꽉 안은 이 팔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떠나도 좋아. 어떤 이유로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당신을, 호재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영원토록 나의 것이니. 그것이 나의 본질이고 근원이자 원죄이니.
이 연극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 인물의 이름을 불러줘. 나는 기꺼이 무대 위로 올라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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