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
ㅎ님 커미션/드라마 <응답하라 1988> 김정환 드림
그러니까 이건 이상한 일. 이상하다는 말 외에는 이 느낌을, 이 마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평소와 별 다른 것 없는 날. 다만 날이 쌀쌀해지고, 추위가 온몸으로 스며들던 계절.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보라가 넌지시 물었어. 최인화. 너 정환이 좋아하냐? 그런 폭탄 같은 말을 던져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봤어. 내가 개정팔을? 어이없어. 말도 안 돼. 웃어넘겼지만. 걔 말로는 내가 자기 집에 놀러 오기만 하면 들어오면서, 나서면서 너희 집 파란 대문을 그렇게 뚫어져라 돌아보더래. 누가 오지 않을까, 하는 얼굴로. 그렇게 힐끔힐끔 보다가 누군가 오면 그렇게 살갑게 인사하면서 정환이 너일땐 고개를 홱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굴었다는 거야. 그런데, 꼭 도망치는 내 얼굴을 보면 새빨갛다고. 금방이라도 활활 탈 것 같은 색이었다고. 말하기 싫음 말고. 하는 보라의 그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어. 돌이켜보면 그렇게 말도 안 될 것도 없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지. 그래. 순간 미쳤던 거야. 보라야,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진짜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네가 파란색 대문을 열고 나왔고. 나는 그 자리에 빳빳하게 굳은 채 서 있었어.
널 좋아하냐는 말을 들어서 자꾸 의식하게 된 걸까. 그날부터. 틀림없이 그날부터야. 너랑 눈만 마주쳤다 하면 손끝이 발끝이 간지러워지는 게. 괜히 누가 오해라도 할까 봐 의식하다 보니까. 그것뿐이야.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신경 쓰일 리 없지. 그야, 물론 김정환 너 꽤 반반하긴 해. 아. 그치만 성격이 개 같아서 탈이지.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고, 운동 신경도 좋긴 한데. 입만 열면 완전 깨. 가만 있으면 그래도 꽤 좋아할 애들 많을 것 같기도 하고? 여자 좀 울렸겠다, 싶을 때가 한둘이 아니었는 걸. 그래, 주변에 너 좋아할 어리고 예쁜 애들이 널렸는데 나 같은 대학생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어렸을 때부터 봐온 네가 나한테 그런 마음이 들기나 하겠냐고. 한 동네 사는 건 너무 지겨워. 이렇게 속속들이 서로를 알게 되잖아.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조금 속상한 거 있지. 나 그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편인데. 예쁘다는 말도 자주 듣고, 우리 과 여신이야. 여신. 뭐. 공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넌 단 한 번도 내가 여자로 보인 적 없어? 정말 단 한 번도? 그런데 저번에 있잖아. 버스에서 마주쳤을 때. 누나는 이 날씨에 치마를 다 입고 춥지도 않냐고 덮으라고 준 자켓은 무슨 의미였어? 그냥 정말 추워 보일까 봐? 다른 의미는 정말 없었어? 아니, 그렇잖아. 추울까 봐 신경 쓰인다는 건, 조금은 다른 의미가 섞여 있을 수도 있잖아. 그만큼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던가, 밖에서 맨다리 내놓고 다니지 말라던가. 그런 건 정말 아니었지. 그치.
왜 자꾸 그 일들이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어. 보라 말도, 널 볼 때면 자꾸만 간지러워지는 손끝도, 네가 아무 의미 없이 건네줬을 자켓도. ……있잖아. 내가 정말 너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라면 어떡해야 해?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맞지, 맞는데. 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아. 괜히 보라 때문에 네가 신경 쓰인다던가, 괜히 자켓 때문에 심란하다던가. 그거 정말 아닌 것 같아. 복잡하고 어려운 거, 작가의 숨겨진 의도 찾기 같은 거 나 딱 질색인 거 알잖아. 딱딱 계산하면 정답이 나오는 게 좋다고. 공식에 대입하면 값이 나오는 그런 거. 그러니까. 그냥. 그냥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환아.
그런데 이 말. 안 하는 게 좋겠지? 지금처럼 동네 누나. 동네 친구. 딱 그 정도 선이 좋겠지? 괜히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속상하고, 진짜 사귀면 또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잖아. 사람 마음 변하는 거 한 순간인데. 같은 동네 사는데 얼굴 붉히기 싫어. 애초에 네가 나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모른 척할까? 그치, 모른 척하는 게 낫겠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꽁꽁 숨기는 게 더 나은 거겠지. 도롱뇽한테 들어가면 이 동네 애들 다 알게 되는 거 순식간이고, 보라한테 말하면 덕선이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러면 너도 알게 될까 봐. 괜히 나 보기 껄끄러워질까 봐.
아니면 눈 딱 감고 말할까? 그렇잖아. 너도 나 아예 신경 안 쓰는 거 아니고 조금은, 그래도 조금은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안 그러면 너도 추운데 막 자켓 벗어주고 그랬을 리 없잖아. 아무리 동네 누나라고 해도. 너도 추울 텐데, 쉬운 일 아니잖아. 그거. 보통은 관심 있는 사람한테 그러는 거지. 드라마만 봐도 그렇잖아. 아닌가. 그래도. 말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깝잖아. 네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고 내 속에만 꽁꽁 담아두면 정말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잖아. 그러다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고. 아, 그때 고백할걸.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 그러면 나 말할까? 너한테 좋아한다고 해도 될까?
김정환. 너 정말 밉다. 미워.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차라리 남자답게 네가 눈치채고 먼저 고백해주면 안 돼? 너도 그냥 나 좋아해주면 안 되냐고, 이 바보야. 그러면 그 말은 왜 했어. 저번 겨울처럼 감기 독하게 걸리지 말고. 그 말만 안 덧붙였어도. 내가 이런 고민 안 하잖아. 내가 아팠던 것도 기억하는구나, 신경 쓰이는구나. 그런 온갖 생각까지 하게 되잖아. 날 이렇게 만든 건 넌데. 나만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불공평해. 너 정말 얌체 같아. 사람 마음 이렇게 뒤집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거. 이 최인화 마음 홀랑 가져가 놓고. 바보, 멍청이, 김정환. 그런 널 좋아하는 나도 바보야. 멍청이. 이상하기만 한 우리니까, 제법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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