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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보폭을 맞추는 사람들(소드/실드 드림)

2022년 작업

연습장 by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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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폭을 맞추는 사람들.

(포켓몬스터-소드/실드 드림)

민.

라이벌.

챌린저.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 열감이 녹아든 무수한 함성을 기억하고 있다. 어두운 수풀을 해치고 겨우 마주한 어스름한 달빛이 마치 섬광처럼 번뜩이듯이, 긴 터널을 빠져나와 세간의 모든 반짝임과 맞이하는 찰나를 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민’에겐 크게 신경 쓸 요소가 아니었을 뿐. 순간에 이끌려 강제적으로 고양되고 끌어올려지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따지자면 그리 좋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선이 모인다는 건 행동을 부르고, 행동이란 곧 소리를 만들어냄이오, 소리가 모이면 요란스러운 소란 또한 필시 생기고 마니까. 그런 이유에서일까? 민은 챔피언이 된 이후 제법 바쁘게 살았다. 생각보다 겹겹이 쌓인 일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제로 그간의 골치 아픈 소동도 일단락. 오랜만에 찾은 간만의 휴식이 달다. 바람에 몸을 내맡기듯 드러누운 민은 눈을 감고, 너른 들판을 느끼며 졸린 눈을 끔뻑였다. 기분이 좋다. 들뜨고 좋은 마음을 따라 살랑거리는 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했다. 어쩐지 그가 애정하는 이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멋진 목도리를 두르고, 커다랗고 아름다운 두 눈을 내리깔며 우산 끝으로 땅을 두드려 나긋하고도 근엄하게 말하는….

탁.

“일어나렴.”

“포플러 님!”

지팡이처럼 바닥을 긁듯 툭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도 모르게 튀어 오른 몸을 추스른 민이 번쩍 뜬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였다. 정말로 그녀의 그림자였다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민의 반응을 즐기듯 히죽 웃은 포플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 이런 곳에서 낮잠이니, 챔피언 아가야.”

“포플러 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럴 땐 제법 날래구나.”

“아….”

민은 허둥거리면서도 정돈된 몸짓으로 포플러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그런 그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들불처럼 민의 뺨에 번진 수줍음을 잡아내었다. 그녀는 목소리에 섞여든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서 후후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의 뺨이 붉게 타올랐다.

“어쩐 일로 왔긴, 갈 곳이 있단다. 챔피언 아가, 잠시 시간 내거라.”

“좋아요.”

“순순하구나.”

“포플러 님 일이니까요.”

“이젠 제법 맹랑하게 말도 잘하고.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가….”

포플러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민은 그녀를 기다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선선한 공기, 온화한 햇살에 포플러의 모자며 목에 휘감은 자줏빛 퍼가 산들거리며 흔들렸다. 그녀가 회상을 마쳤던지 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름이 바람에 흩어지며 볕이 드러났다. 녹음 안에 잠긴 민이 그녀에게 다가서자, 포플러의 주름진 얼굴이 빛에 잠겨 더욱 희게 빛났다.

눈이 마주쳤다.

“─잠시 걸을까요?”

“그래, 택시는 방금 내가 불렀으니까, 조금 걷다가 도착하거든 타자꾸나.”

민이 권유하자 포플러가 받아들였다. 내민 손을 잡으며 민은 맑게 웃었다.

“음, 다음 정장을 보여주게나.”

“네.”

“챔피언 아가, 불편하진 않니?”

“아, 괜찮아요. 그나저나….”

“실례하겠습니다.”

민의 말은 새로운 정장 자켓을 들고 온 점원의 행동에 끊겼다. 포플러가 ‘다른 시도를 하자’라며 처음 골랐던 넓고 넓적한 정장을 벗자니 조금 아쉬웠지만, 새로운 옷 또한 포플러가 권한 것이다. 민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새로운 정장은 어두운 감색이었다. 싱글 버튼, 2개의 뒤트임, 주름 잡힌 바지….

“너무 고전적이구나. 하지만 격식을 차리기엔 이보다 나쁜 건 없으려나.”

포플러는 드물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다음 옷을 건네받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에 몸을 돌려보던 민이 물었다.

“저…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옷을….”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단다.”

“…네?”

민의 둥그런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포플러가 쿡쿡 웃자, 그는 그제야 깨달은 기색이었다.

“알리시려는 거군요.”

“두렵니?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무르마.”

“제가 그러지 않을 걸 아시잖아요. 다만, 포플러 님이 걱정인데….”

“다음 옷입니다.”

“아, 네.”

민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켓을 벗기 시작했다 걱정이 큰 탓일까, 그의 손이 단추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허둥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포플러가 한 마딜 던지지 않았으면 민은 계속 단추와 씨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세를 곧게 유지하렴. 두려울수록 똑바로 맞서야 해.”

“…네.”

그는 짧게 대꾸하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새로 받은 정장을 착의하기 위해 다시 자릴 뜨는 민의 등이 곧게 펴진 채다. 하지만 축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는 두려워하고 있다. 대부분은 포플러가 받을 비난에 관한 걱정이겠지. 어디에도 본인 걱정은 없다. 지나치게 태평한 건지, 아니면 담대한 것인지. 포플러는 잠시 생각했다. 어느덧 옷을 갈아입고 온 민이 있다.

“그러고 보니, 왜 잠시 걷겠냐고 권했더니?”

“싫으셨나요?”

정장 넥타이를 꼼꼼히 매듭지어주자, 가만히 얼굴을 붉히고 있던 민이 물었다. 포플러는 늘 짚고 다니던 우아한 우산 대신 좀 더 고풍스러운 멋이 있는 보랏빛 우산을 짚으며 대답했다.

“마침 그러고 싶었으니 허락했지.”

“음, 그렇죠? 왠지 그걸 바라실 것 같다고,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어요.”

“흐음.”

“하하…너무 넘겨짚은 걸까요?”

그녀는 그의 옷매무새를 점검하듯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민과 눈을 맞추었다.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적막이 그들 사이로 흘렀다. 이윽고 포플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때론 그러한 감각이 요구되기도 하지. 너와 나 사이니 더더욱 중요하다고 본단다.”

포플러의 묘한 대답에 천천히 웃는 민이 있다.

“아까는 영 수심이 깊어 보이더니, 이젠 잘도 웃고.”

“…사실 전.”

민이 머뭇거렸다. 포플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려주자, 그는 용기를 얻은 듯 말을 이었다.

“…두려워요. 포플러 님도, 저도 세간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다지만, 세계는 크고 넓어 때때로 흐름이란 급류로 사람을 쓸어가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일그러지는 듯한 현기증이 덮쳐온다.

그의 이름을 외치고, 또 열중하는 관중.

라이벌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말.

챌린저라고 그를 지칭했던 이들의 함성.

“챔피언 아가.”

일렁거리던 세계 속에서, 다만 눈을 뜬다.

그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 열감이 녹아든 무수한 함성을 기억하고 있다. 어두운 수풀을 해치고 겨우 마주한 어스름한 달빛이 마치 섬광처럼 번뜩이듯이, 긴 터널을 빠져나와 세간의 모든 반짝임과 맞이하는 찰나를 안다. 순간에 이끌려 강제적으로 고양되고 끌어올려지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따지자면 그리 좋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선이 모인다는 건 행동을 부르고, 행동이란 곧 소리를 만들어냄이오, 소리가 모이면 요란스러운 소란 또한 필시 생기고 마니까. 자신에게 향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이러한 듣그러움이 포플러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몹시도 두려워지고 만다.

“….”

민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포플러의 손이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와 민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마주한 눈동자 속에 도사린 의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불꽃과도 같아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민의 행동을 기다렸다. 소년이 움직여 예를 갖춘다. 기사와도 같이 정중하고도 절도있게. 금세 또 자라났다. 유쾌한 감상이 스친다. 하여 포플러는 웃었다.

“알아요. 포플러 님은 무척이나 강하죠. 곧은 자세로, 당당한 시선으로, 모든 소란과 소리 속에서 당당히 걸어가실 거예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할 일은─….”

포플러가 그 위로 손을 얹었다. 낮과 같은 일의 반복, 하지만 분명히 다른 시간과 흐름 속. 소년은 말했다.

“눈을 피하지 않고, 포플러 님과 보폭을 맞추며 살아갈 거예요. 함께 앞을 보며 걸어가겠노라고. 우린 약속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보겠다고.

**

“포플러 님.”

머리를 정돈하고, 새로운 정장을 걸친 민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자세를 낮춰 인사하듯 몸을 움직였다. 포플러는 그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정한 정장의 어깨 폭은 조금 넓다. 허리선은 들어가 몸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불편하진 않은지, 민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었다.

“이대로 괜찮겠니?”

포플러는 자신이 정하는 대신 민에게 물었다. 민이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손등에 입술을 대듯 시늉한 민이 고갤 끄덕였다. 강인한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선홍색으로 타오르는 순간,

“그래, 나도 그렇단다.”

포플러는 결정을 내렸다.

회견장의 분위기는 기이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이다, 모두가 말을 아꼈지만, 회장을 떠돌아다니는 공기는 후끈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민과 포플러는 복장을 갖추어 입은 채 대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게는 포켓몬에 관한 이야기, 크게는 동료며 친구에 관한 이야기….

“시간 다 됐습니다!”

안내음이 울린다.

“제가 모셔도 될까요?”

포플러는 민을 보았다. 잘도 움직이던 평소와 달리 꼼꼼히 갖춰 입어 뻣뻣해진 그의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긴장이 엿보였다. 그러나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눈빛이었다.

“좋지, 이제 슬슬 가자꾸나.”

문득, 그녀는 아주 오래된 구절을 떠올렸다. 민의 말에서 떠오른 구절이었다. 흩어져 반쯤 잊힌 노래의 선율이 가슴 속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그대여, 그러니 두려워 말라.

태양의 번뜩임을 두려워 말라.

포플러는 살짝 미소 짓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꼿꼿이 등을 펴고, 민과 함께 한 걸음을 내딛자 무수한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온갖 소리가 섞여 울려 퍼졌다. 오늘의 세상은 무참할 정도로 눈부시다. 각종 감정으로 들끓는 열기가 마치 작열하는 태양을 담은 창천(蒼天)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포플러는 입매를 끌어 올리며 생각했다. 결국 민과 그녀는 이날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똑바로 앞을 응시한다. 눈부심을 두려워 영영 감아버리고자 한다면 제대로 볼 수 없으므로. 눈을 피하지 않고, 다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갤 꼿꼿이 쳐들고.

외침.

부름.

각종 함의가 섞인 함성.

맞잡은 손은 따스하고, 가슴 속에선 오래된 노래가 그녀를 부축한다.

그대여, 그러니 두려워 말라.

태양의 번뜩임을 두려워 말라.

무서워 떨기엔 별은 오래도록 그대를 비춤이오,

우리가 이 땅에 머물 찰나는 너무나 짧고 눈부시니!

웃는다.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으므로.

외전: 아주 오래된 노래.

아라베스크 마을은 예로부터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마을 분위기가 제법 예스럽고 신비한 마을이라서일지, 아니면 주로 페어리 타입이 서식하는 곳이어서일지는 몰라도 기이하고 신비한, 애틋한 말이 전해진다면 그 근원지는 주로 이 마을이었다.

현 챔피언이자 ‘가라르 생활 동반자 법 제정’의 중추를 맡은 민은 아라베스크 마을에 파트너인 포플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느날, 한 책을 발견한 그는 포플러에게 물었다.

“포플러 님.”

“무슨 일이니? 그건….”

민이 든 책은 시집이었다. 주로 아라베스크 마을에 머물렀던 시인의 시집으로, 시인이 아주 옛날 사람이기에 종종 그 구절이 음악처럼 마을에 흐르는…어쨌든 포플러가 어린 시절에 사두었던 그의 대표 시집이었다. 소년이 한 구절을 짚었다. 신기하게도, 이전 그녀가 떠올렸던 그 부분이었다.

<그대여, 그러니 두려워 말라.

태양의 번뜩임을 두려워 말라.

무서워 떨기엔 별은 오래도록 그대를 비춤이오,

우리가 이 땅에 머물 찰나는 너무나 짧고 눈부시니!>

민이 고갤 기울였다. 미처 정돈하지 못한 아침 머리칼은 부스스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태양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 이 마을이 어둑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시인이 자주 길을 잃어서…?”

“글쎄다.”

“아, 하지만 알 것 같아요. 두려워 눈을 감으면 제대로 볼 수 없잖아요.”

포플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을 보았다. 눈이 마주하자 민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아니, 어쩜 생각하는 것도 닮아가는지 몰라.”

“?! 포플러 님과 제가요…?!”

아니, 역시 허둥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면 포플러와 민은 또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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