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230303 편지글 3천자

1차창작

이 편지를 읽을 그대 행복하여라. 그리고 이 편지를 읽지 못할 그대 역시 행복하여라. 이 마음을 그대의 심려 없이 내려놓을 자신이 없기에 나는 먼 길을 떠나려 한다. 가장 먼 곳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을 믿고 싶다.

 

누군가 받아줄 거라 믿고 밖으로 뛰어내렸던 그날의 너처럼, 나 역시 엉뚱한 장난을 해보려 한다. 바로 이 편지를 네가 가장 싫어하는 책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다. 어려운 말과 논리로 허세를 부리는 것 같다며 네가 유난히 싫어하던 책이다. 운명의 장난 또는 가호가 있다면, 이 마음이 네게 닿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채 닿기도 전에 나는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너와 이어지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적어도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물 때문에 적신 종이를 몇 번이나 바꿨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전하기보다 의연하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작별 편지를 적을까도 생각했지만, 네가 말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후회 없이 살기를’. 그 말이 내게 복음이었기에.

 

새벽을 틈타 정신없이 적는 글이다. 두서없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대를 많이 좋아했다. 나로서는 그 마음을 네가 알았을지 몰랐을지 모를 일이다. 만일 알면서도 모르는척 했다면 짓궂음에 헛웃음이 나올 테지만. 너는 내가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질투가 난다고 했지만, 너 이외에 내가 살갑게 군 사람은 없었다. 그저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에 정도를 지켰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내 언행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태도는 예의 차린 거에 불과하다고 쏘아붙였다. 술김에 한 말이지만 정곡을 찔렀다. 얼굴은 아니라고 웃으면서도 부정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누구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내 자아를 구기고 또 구겨 마음속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그런 내게 너는 말했다. 네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다고. 네가 적어도 후회 없이 살기를. 나는 그 말에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말에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너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준 사람이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네게 준 것이라고는 다른 누구라도 줄 수 있는 보잘것없는 마음, 겉치레뿐인 친절, 말없이 담은 사랑. 사랑…그 단어를 입에서 굴릴 때마다 위화감이 일어 참을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로 정해진 것 같다. 그러니 글을 쓰는 나는 제법 용기 있는 사람인가. 금구를 펜으로 굴리며 몇 번이고 녹여내는…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했다. 사랑할 것이다…

 

그립다. 사무치게 그립다. 어떻게 시작하고 끝낼지 모른 채로 편지를 썼다. 한 번은 눈물에 젖어, 한 번은 잉크통을 엎는 바람에, 한 번은 또 바람에 날아가 다시 써야만 했다. 쓰레기통에 구겨 던진 종이 더미가 이 추악한 마음과 닮아 보기 힘들었다. 너를 상처입혀서라도 첫 번째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고 싶다는 마음. 그런 한편 네가 나를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는 마음. 상충하는 마음 사이로 비루한 글들이 새어 나온다. 그 결과물이 이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찢어버리지 않을까. 새벽과 벅차오르는 마음은 예술의 연료라 누군가 말했었지. 그러나 예술 따위 관심 없는 나는 그런 마음을 도저히 모르겠다. 억누르지 못하는 마음은 날 괴롭게 할 뿐이다. 지금 너를 향해 묻고 싶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행한 것으로 인해 후회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와 나를 속이고 싶지 않아 쓴 편지가 나를 이리도 괴롭게 만든다. 이런 말밖에 토해낼 수 없기에, 고개를 들 수 없어.

 

실은 이 도시에 잘 어울리는 우표를 샀다. 언젠가 운하에서 배를 탔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너와 내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기에 네 손을 잡고 운하로 달려갔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으면 해서 사공이 그려진 우표를 샀다. 그러나 그것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나는…이 편지를 끝까지 쓸 수 있을까. 건조한 ‘좋아했다’는 말이, 오히려 네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물을 등진 이 거리는 바닷바람이 차다. 도시 곳곳을 가르는 강 어딘가에는 사공이 노를 젓고 있을 터다. 내가 노를 젓고 네가 노래를 부르던 지난날처럼. 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너를 빼서 운하에 데려간 거라고 답지 않은 거짓말을 했었다. 정말 안 어울려. 주먹을 얻어맞은 내 얼굴에 비비던 달걀을 썩을 때까지 보관할까 고민했더랬다.

 

나 때문에 맞은 거라고 자책하던 네가 사랑스러웠다. 그때만큼은 너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 좋았다. 내가 좀 더 너를 일찍 만났더라면, 이런 사소한 순간이 쌓여 사랑이 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은 좀 더 나은 순간이 되었을까?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얼마 전에 겨우 깨달은 사람들이, 어디든 진흙발로 더럽히려 한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아직 좁은 내 세상에 갇혀있기 바쁜데, 너는 세상 전체를 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전쟁이니 외교니, 머리 아픈 이야기가 바쁘게 오가는 세상이다. 머리 아픈 시대에 태어났으며, 말없이 지나가는 게 상책이라 여기던 내게 너는 고민하는 것이 옳다고 알려준 사람이다. 그렇기에 조국을 떠나려 한다. 너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네가 본 세상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느끼고 싶다.

 

만일 내게 또 편지를 쓸 용기가 생긴다면, 만일 내가 여행 중 너무나도 네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도 될까. 네가 듣고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될까. 엄격한 집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지. 그리 말하는 너를 데리고 어디든 가고 싶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쫓아온대도 이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배의 티켓 시간은 이르다. 조금이라도 자지 않으면 타러 갈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이 편지도 슬슬 끝을 향하는 것 같다. 내 두서없는 이야기가 그대의 심려가 되지 않기를. 그대의 새 출발과 새로운 보금자리가 축복받은 것이기를. 만일 이 편지가 아득히 먼 미래에 발견된다고 해도, 네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좀 더 어른스러워, 네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진다면 좋겠다.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을 담아,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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