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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D

rhindon by 댜

“힝, 더워…….”

J는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밤공기가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덥기만 하면 몰라, 당장 수영을 해도 좋을 만큼 습하기까지 하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연신 부채만 부쳐주던 암굴왕은 J의 안색을 살핀 끝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인, 좀 쉬겠나?”

“그래도 간만에 나왔는뎅…….”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암굴왕의 마음을 굳게 한 모양이었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남편에게 이끌려 걸어간 J는 얼떨결에 벤치에 앉혀졌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암굴왕은 선명한 붉은 눈으로 J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 힘들면 이만 돌아가도…….”

“안 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버린 J는 합,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쓸었다. 겨우 숨을 돌린 J는 입술을 삐죽거리다 웅얼웅얼 덧붙였다.

“아직 별로 놀지도 못했잖아. 응? 난 암굴쿤이랑 불꽃놀이도 보고 싶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싶고……. 불꽃놀이는 환경 파괴지만…….”

“이런. 먹고 싶은 게 있었나?”

“링고아메? 흐응, 아냐 아냐. 다 먹기도 전에 범벅이 되겠다.”

벤치에 등을 기댄 J는 콧잔등까지 찡그려 가며 저만치에서 반짝거리는 부스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등불 사이로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간판 하나를 보고는 단번에 얼굴을 밝혔다.

“빙수!”

J가 기운을 내자마자 반사적으로 따라 미소 지었던 암굴왕은, J가 한 말을 이해한 뒤에는 아예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부인은 잠시 기다리도록. 곧 돌아오지!”

그러더니 암굴왕은 그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리다시피 걸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키득거린 J는 주변을 둘러본 다음 쭉 기지개를 켰다. 유카타의 얇은 소매가 팔꿈치까지 밀려 내려왔다.

축제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나자 살 만했다. 부스 사이를 돌아다닐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인 탓에 오히려 더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급기야 J는 크게 하품까지 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렇게나 더울 줄이야.

“괜히 왔나…….”

하지만 아직 후회하기는 이른걸.

이번 나들이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숨 가쁜 일상을 보내던 J가 우연히 이 지역의 나츠마츠리 영상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일본이야 자주 오갔었지만, 한 번도 여름 축제를 제대로 즐겨본 적은 없었다. 로맨틱한 클리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벤트인데도!

일단 생각이 자리를 잡고 나자 무엇도 J를 막지는 못했다. 유일하게 그럴 가망이라도 있었을 사람, 다시 말해 J의 남편은 J를 부추기면 부추겼지, 말릴 성품이 아니었고. 그런데 알고 보니 안타깝게도, J는 더위에 매우, 매우 약했다.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이것 참. 기대했던 선선한 여름밤이 아니라 J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다.

걱정할 남편이 사라진 새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있던 J는 암굴왕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간발의 차로 허리를 세웠다. 얼마나 서둘러 돌아온 건지, 시럽을 뿌린 카키고오리의 얼음 알갱이 하나하나를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남푠!”

암굴왕이 자랑스러운 웃음과 함께 빙수와 일회용 스푼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장난감을 물고 온 고양이를 연상시켰는데……. 음, 아니다. 잘생겼으니까, 사냥감을 잡아 온 번견쯤이라고 해 주자. J는 헤실거리며 입을 벌렸다.

“먹여줘용.”

“그렇게 나오시겠다?”

물으면서도 암굴왕은 이미 얼음을 크게 한 스푼 뜨고 있었다. J는 장난스레 눈까지 깜박여가며 대답했다.

“으응, 너무 더워서 꼼짝도 못 하겠어.”

그리고 얼음이 한가득 쌓인 스푼이 입술 앞으로 다가왔다. 암굴왕의 흡족한 미소 아래 J는 빙수를 날름 받아먹었다.

찬 기운이 먼저 혀에 닿았다. 시럽의 인공적인 단맛이 느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과일 향을 내려 한 것 같기는 했지만, 설탕과 감미료를 뚫고 그걸 밝혀낼 만한 의지가 J에게는 없었다. 대신 J는 스푼을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암굴왕과 딱 눈이 마주쳤다.

“암굴…….”

입꼬리에 쪽,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물러나는 온기를 반사적으로 쫓으려던 J는 언제 퍼 왔는지 모를 얼음 한입에 가로막혔다.

“아쉽지만.”

암굴왕은 나지막이 말했다.

“부인의 더위부터 해결하지.”

응, 응? 얼이 빠진 J의 입으로 다시 한번 단 얼음이 불쑥 들어왔다. 새끼 새처럼 일단 빙수를 받아 삼키고 난 J는 뒤늦게 입맛을 다셨다. 말마따나 아쉬웠다. 그래도…… 밤은 기니까. 안 그래?

 

 

J가 더위에 약한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여름이면 J는 속절없이 무너지고는 했는데, 단지 밤에 열리는 나츠마츠리라면 그리 걱정할 것 없겠다 싶어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 패착이었다. 오후 내내 뜨겁게 달구어졌던 공기는 밤이 내린 지 몇 시간이 지나서도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나마 햇빛이 사라진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빙수의 냉기 덕분이었는지, 암굴왕의 말로 의지가 샘솟은 탓이었는지, 얼마 안 가 J는 다시 벤치를 떠날 만큼의 기력을 되찾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새 기온도 좀 낮아진 것 같고?

암굴왕의 손을 잡고 축제장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J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게임 부스들이 늘어선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식을 먹어봤으면, 이젠 바가지와 속임수가 가미된 게임을 구경할 차례지! 마침 부스 주인들도 그들을 어떻게든 게임에 끌어들이려 안달이었다.

—아가씨한테 인형 하나 따 줘요!

—거기 젊은이들, 금붕어 선물하면 딱이겠네!

하지만 대부분은 J의 관심도, 암굴왕의 관심도 그리 끌지 못했다. 암굴왕에게야 모든 게 시시해 보였기 때문일 테고, J로 말하자면 역시나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 암굴왕은 여기 있는 게임들쯤 두 손 두 발 묶인 채로도 가뿐히 깨뜨리거나 우승할 게 뻔했는걸. 게다가 상품이라고 내건 것들도 어린애 장난감 내지는 J가 평생 쓸 일 없을 잡화 따위였…….

J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거! 저거 따줘요! 나 저 바보가나지 가질래!”

J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쭉 뻗은 손끝이 가리킨 것은 당연하게도 큼직한 시나모롤 인형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스 벽면에 위태롭게 내걸린, J의 몸통만 한 길이에 서너 배는 될 부피의 인형을 조금 당황스럽게 바라보던 암굴왕은 이내 결심한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둬라.”

당당하게 부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J는 암굴왕의 등을 향해 생글생글 웃고는 후다닥 따라붙었다.

이런 데서 시나모롤이라니! 개바보가나지! 더운 날씨에 속상해하던 마음이 깔끔하게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집에 시나모롤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아무리 많아도 충분하지 않은 게 있는 법이라고!

“암굴쿤, 기다려!”

그리고 마침내 암굴왕을 따라잡은 J는 그에게 찰싹 달라붙……으려다가, 어설프게 암굴왕의 손가락을 잡았다. 부스 주인과 이야기하던 암굴왕의 입가가 웃음을 참는 듯 꿈틀거렸다.

공교롭게도 시나모롤을 내건 곳은 사격 부스였다. J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암굴왕을 올려다보았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손대는 일이라면 뭐든 완벽하게 해 내는 팔방미인이었다. 사격쯤이야 두말할 것 없지! 아니나 다를까, 암굴왕은 흥미와 자신감이 반반 깃든 얼굴로 공기총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려는 듯 총을 두어 번 들었다 내려보더니 다리를 벌리며 서 자세를 잡았다.

땅을 딛은 발부터 곧게 편 다리, 꼿꼿한 허리며 어깨까지 팽팽하게 긴장이 들어갔다. 이어 총을 조준하고 받친 암굴왕이 천천히 손가락을 방아쇠에 얹었다. 겨눈 것이 종이로 만든 과녁이 아니라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열중한 모습이었다.

저절로 J의 입안이 말랐다.

침을 꼴깍 삼킨 J는 부스의 등불이 암굴왕의 옆얼굴에 부드러운 주홍빛을 드리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광대뼈의 굴곡이며 날카로운 콧대가 강조되자 그 순간 암굴왕은 정말로 옛 복수극에서 그대로 나타난 듯한 모습이었다. 북적이는 인파도, 왁자지껄한 소음도 암굴왕의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마법처럼 잦아들었다.

이 석상처럼 엄숙하고 아름다운 남자 앞에서.

그리고 암굴왕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머잖아 털이 보송보송한 시나모롤은 암굴왕의 팔에 끼워졌다.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꼴이 된 남편 곁에서 J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뭐 어쩌겠어? 내가 직접 그 큰 걸 끌어안고 다니기에는 밤이 너무 더운걸?

“너어무 멋있었어. 알죠?”

“그래.”

암굴왕은 떨떠름한, 그러면서도 재미있다는 기색은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나모롤을 안은 팔로는 여전히 (약간 느려진 속도로) 부채를 팔랑팔랑 부쳐주는 중이었다.

“한 방에 탕! 명중! 그리고 타다당! 와, 어떻게 이렇게 못 하는 게 없을까?”

“크하하하! 부인께선 이 내 진가를 알아보는군.”

게다가 이런 반응이 꽤 귀엽기도 하고 말이지. 신이 난 J는 재잘재잘 더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꼭 사격 실력에 대한 것만도 아니었다. 얼굴이라든지, 인품이라든지, 관대함이라든지, 주변 사람이 알아듣는다면 상당히 낯부끄러울 면에 대해서라든지. 암굴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칭찬 세례를 그만둘 수 없었다.

그때 귀에 익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J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반색했다.

“불꽃놀이! 시작하려나 봐용!”

암굴왕이 자연스레 J를 당겨 한쪽 팔로 안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군.”

딱 맞는 타이밍이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입을 다물고 나자 찰나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J는 저도 모르게 암굴왕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다음 순간 색색의 천막과 등불 위로 백금빛 불꽃이 폭발했다. 눈부시게 흩어져 내리는 빛에 J는 놀란 숨을 들이쉬었다. 낯설지 않은 모습, 어디서 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인데도, 단지 함께하는 사람 한 명으로 인해 이렇게나…….

완벽해질 수 있다니.

암굴왕의 옆구리에 파묻히다시피 한 J는 천천히 그의 가슴에 기댔다. 어깨와 몸통이 만나는 오목한 자리에 머리를 대자 암굴왕은 손을 올려 J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더운 공기도, 습한 바람도 이 잠깐만큼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까만 밤하늘에 몇 번이고 솟구치는 불꽃은 눈이 부셨고, 붙어 선 남편의 몸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했으며, 혀끝에는 아직도 달콤한 시럽 맛이 감돌았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직감만으로도 사랑 노래란 것을 알 수 있는 음악이.

“아…….”

J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구한테 미안하다.”

“무드 없군.”

암굴왕은 웃음기 섞인 투로 말하더니, J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되풀이했다. 이전보다 좀 더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주 낭만적이야.”

대답 대신 J는 찬란하게 수 놓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나 암굴왕의 말이 옳다고.

정말로, 정말로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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