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밤빵] 당일 마감 타입

[일반] SAMPLE_006

GL / 당일 마감 타입 / 9천자

 

 

 

 

서로를 향한 마음

ⓒ 왕밤빵(@Big_Bam_Bread)

 

 

 

 

 

흙먼지가 나뒹굴던 풍경 속, 트레일러에서 대기하던 아린의 두 눈동자에는 파리하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항상 그녀를 바라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쉴 새 없이 곱씹었으나 이런 순간엔 아린의 눈동자에서 유독 하트가 통통 튀는 것만 같았다. 맡은 일을 무던히 수행할 때 보이던 연인의 모습은 충분히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아린은 ‘역시 최고야!’라는 생각으로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모르는 이가 봐도 푹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 그렇게 파리하를 바라보는데, 그러다가도 이따금 파리하가 곤란하거나 위험해질 상황이 오면 아린의 표정에 걱정이 한가득 아른거렸다. 위험해! 라는 생각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파리하가 다시 전방에 나서는 걸 보고선 발을 동동 굴려야만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항상 전선에 앞장서던 파리하는 임무 중에 조금씩이라도 상처를 달고 오는 경우가 잦았다. 어쩌다 그런 거냐 물으면 파리하는 별거 아니었다는 양 답했으나 하루 이틀이 넘어가니 자연스레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파리하가 알아서 잘 하리라곤 믿었으나 아무래도 불안함과 초조함이 쌓이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본인 몸을 소중히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린이 그런 생각을 곱씹던 차, 끝내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파리하가 어떻든 자신은 파리하를 믿어줘야만 했다. 본인이 다치거나 아파하면 자신이 힘들어하리란 걸 파리하도 여실히 알고 있을 터였으니. 조심히, 안전하게 임무에 임하라던 제 마지막 바람을 파리하는 절대 잊지 않을 테였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아린은 마음이 조금 진정될 수 있었다. 자신이 너무 과보호인 걸까. 계속 이러지 말고 잠깐 환기라도 해볼까- 싶어 이윽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둔 그녀였다. 너무 파리하만 쳐다보다 보니 자꾸 불안한 마음이 쌓여서 어쩔 수 없었고,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하던 때 아린의 두 눈에 들어온 건 한 어린아이였다. 멀리에서 공놀이하던 아이가 실수로 공을 놓친 뒤 그 공을 따라갔는데, 그 위치가 하필이면 차도였던지라 당장에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던 것이다.

 

“아가야!!!”

 

깜짝 놀란 아린은 바로 아이에게 달려갔다. 무슨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지금 당장 나서지 않는다면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제 눈앞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본능이 그녀의 몸을 차도로 이끈 것이었다. 다행히 아린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를 확인한 운전자는 속도를 낮췄고, 깜짝 놀란 아이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동차와는 살짝 스칠 만큼이 되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달려 나간 아린이 아이를 끌어안은 채 바닥을 한 바퀴 굴렀으니. 흙먼지가 가득한 곳을 구른 터라 아이도 아린도 얼굴과 옷에 흙먼지가 가득 묻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

 

아린이 서둘러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곤 물음을 던졌다. 아린 덕분에 아이는 아무런 부상도 없이 무사할 수 있었고, 이후에 헐레벌떡 달려온 아이의 부모는 아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고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아린은 그리 말하곤 웃으며 아이를 보내주었는데,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잠시. 우악스러운 힘이 아린의 어깨를 붙잡곤 그대로 홱 돌려버리기에 이르렀다. 아린이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그곳엔 파리하가 있었다.

 

“어? 임무는 어쩌고? 벌써 끝난-.”

“방금 뭘 하신 겁니까?”

 

아린이 침착한 어조로 물을 찰나, 그에 반해 파리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린의 말을 끊고 물음을 던졌다. 뭘 한 거냐니. 아린은 가만히 파리하를 바라보곤 이내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파리하가 이걸 물었으리라 확신한 눈치였고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차근히 대답해 보이자 이내 파리하는 또다시 아린의 말을 끊고선 그녀의 어깨를 여지없이 억센 힘으로 붙잡아 보였다.

 

“그 질문이 아니잖습니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건지를 묻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모한 짓이라니?”

 

아린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드리우고선 파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는데, 이윽고 파리하가 말을 이었다.

 

“트레일러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곳을 빠져나오신 거죠?”

“말했잖아. 아이가 위험했다니까? 위험에 빠진 사람을 가만 놔둘 순 없잖아.”

“그건 당신의 역할이 아닙니다. 본인의 역할을 잊으신 겁니까?”

 

파리하의 말에 아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제 역할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제 역할이란 말인가. 가만히 트레일러에서 다른 이들의 전투가 끝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곤 위험에 처한 이를 무시하는 것? 장담하건대 그건 절대 제 역할이 아닐 터였다. 애초에 ‘역할’이라는 것 자체가 지나칠 만큼 편협한 생각이었으며 이런 순간에 그런 걸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던 터였다.

 

“내 역할이 뭔데? 생명을 수호하고 사람들을 지키는 거잖아. 눈앞에서 아이가 위험한데 그걸 잠자코 보고 있으란 말이야?”

“저나 다른 이들한테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기엔 너무 늦어!”

 

아린은 이전보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말에 틀린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다급한 순간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아이를 구해줘요!”라고 말하긴 쉽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내기엔 이미 다른 이들이 모두 바빠 보이던 터였다. 파리하도 열심히 전방에 나가 싸우고 있지 않았던가. 어떻게 그런 상황에 다른 쪽도 신경 쓰라고 외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던지라 아린은 지금 파리하의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 역시 파리하가 전방에 나갈 때마다 괜스레 불안해지고 초조해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파리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괜찮았다는 걸, 파리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에 대해 그 어떠한 믿음도 갖지 않던 걸까? 아린은 괜한 억울함과 서러움에 말문이 막히는 걸 경험했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지적하는 건지. 엄밀히 따진다면 자신은 늘 걱정에 파묻힌 사람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주시죠.”

“어떤 걸?”

“그냥 절 믿지 못해서 부르지 않은 거 아닙니까? 제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차마 신경 쓰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거겠죠. 그래서 혼자 그 위험에 뛰어든 거고요.”

 

파리하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바로 파리하의 말을 부정했으나 그렇다고 파리하의 얼굴에 깃든 씁쓸함을 지울 순 없을 것만 같았다.

 

“왜 말을 그렇게 해? 애초에 못 믿는 쪽은 너잖아. 내가 아니라. 넌 내가 바깥에서 사람이 죽어가더라도 트레일러 안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곤 얌전히 지원이나 치료만 해주길 바라는 거야?”

“송아린.”

 

평소엔 못해도 ‘아린’이라고 부르던 파리하가 그녀를 이름 전체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아린은 이를 눈치채긴 했으나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려 하진 않았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파리하 아마리’ 라고 부르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유감이네. 난 그런 인형 같은 존재는 전혀 되고 싶지 않거든.”

“인형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네 말이 내 귀엔 그런 식으로 들리는데, 그럼 이것도 내가 이상한 거야?”

 

아린과 파리하 사이로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파리하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밝혔으며 아린은 맥락 사이에 숨은 맥락을 찾노라면 그렇게밖에 들리진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네가 한 말에 무의식이 담겨 있다고. 그리고 그 무의식이 곧 자신에 대한 생각인 것이라 이야기했고 파리하는 왜 굳이 자신이 하지 않은 말까지 언급하며 이런 불필요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테였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제 위주로 해석하기 바쁜 상황 속에서 타인의 말과 행동을 곱씹고 제 행동을 돌아본다는 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두 사람의 대화가 좋게 풀릴 순 없었으며 당연히 대화의 끝은 서로를 향한 매서운 눈빛과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듯한 서러움만이 가득했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렇게 이야기 나눠봤자 도돌이표가 될 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바보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만큼, 딱 그만큼의 무게로 상대가 미워졌다.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은 왜 곁에서 나란히 붙어 있는 건지. 한 번도 서로를 미워한 적이 없던 두 사람은 어떻게 돌아서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바라만 보다가 다른 이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파라, 잠시 이쪽으로 와! 아린, 여기 치료 좀 부탁해! 두 문장이 겹쳐 들리자 두 사람은 가차 없이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한 번쯤 뒤를 돌아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러기엔 이들의 자존심이 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지던 걸음 뒤로, 두 사람의 마음엔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고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자꾸만 갈대같이 흔들려, 제 행동에 대한 후회와 함께 상대에 대한 미움과 서운함이 차곡히 쌓여갔다.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주눅이 드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왜 본인이 먼저 사과하고 다가가야 하는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내가 잘못한 건 맞았나? 그런 생각을 곱씹노라면 당연히 이 상황을 좋게 넘어가기란 쉽지 않았고 끝끝내 무거운 마음을 짊어진 채로 입을 꾹 다무는 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저 둘 말이야, 아무래도 그날 싸운 것 같지?”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태도 변화는 다른 이들에게도 여지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항상 너무 티 내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붙어 다니더라니, 지금은 또 너무 티 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로를 외면하고 있으니까. 철천지원수라도 그렇게는 대하지 않을 터였다.

 

캐서디가 파리하에게 다가가 먼저 화해를 제안하는 게 어떻겠냐고도 이야기했으나 파리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자신이 말한 것 중에 잘못된 부분은 없었으니까. 인형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내놓은 적도 없는, 아린이 혼자 오해한 부분이었으니 그런 것까지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을 테였다.

 

“왜 제가 먼저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런.”

 

파리하의 완강한 태도에 캐서디도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거기에 무어라 덧붙여야 할지. 네가 좋다면 그러라는 식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캐서디는 파리하가 멀어지는 걸 보며 여전히 어리긴 어리구나, 라는 생각을 곱씹었다.

 

이는 아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던 메르시가 아린을 바라보며 파리하에게 먼저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떻겠냐 물었는데, 이에 아린은 그러고 싶지 않다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직도 서운함이 가득 쌓인 아린은 좀처럼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고. 메르시에게 그날 있었던 일과 대화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던 아린은 정말 자신이 사과해야 할 부분이냐고 물었다.

 

메르시는 사과까진 아니더라도 먼저 손을 내밀 순 있지 않겠느냐 물었으나 아린은 파리하가 제 손을 내쳐버릴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서운함과 미운 감정 역시도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쌓아지는 것들이었고, 메르시는 이를 잘 알았던지라 두 사람의 관계가 금방 다시 회복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린과 파리하는 여전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들의 자존심을 챙기느라 괜찮았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공연히 만날 수밖에 없던 둘이었고 그럴 때마다 서로 미묘한 불편함을 안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아린은 파리하가 임무에 나갈 때면 항상 그녀를 꼬옥 안아준 뒤 응원의 말을 건네곤 했다. 안아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손이라도 잡아서 제힘을 나눠주었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던 안부 인사까지 잊지 않고 전해주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파리하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누그러졌기 때문이었는데, 냉전 상태를 꽤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것들도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야 괜찮았다만 지금은 퍽 신경이 쓰였다. 혹여라도 자신이 응원하지 못한 순간에 파리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 어딘가에서 저 몰래 아파하거나 다치곤 힘들어하지 않을지. 그런 생각을 곱씹으면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그러다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파리하에게 상처라도 보일 때면 ‘역시!’하고 생각해 버렸다. 이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거냐고. 거기서 무슨 위험한 일이 있었던 거냐고. 파리하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물어보진 못했기에 그저 끙끙 앓던 아린이었으니 이는 파리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임무에 나갈 때마다 항상 아린이 해주던 것들이 있었기에 버릇처럼 괜히 힐끔 아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게 됐다. 혹시 그녀가 제게 오진 않을까 했으나 아린은 등을 돌리고 있었고, 멋쩍어진 마음에 괜히 기대했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릴 때면 캐서디가 더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는 게 보였다. 손도, 품도, 도통 그녀를 붙잡질 못하니 마냥 허전할 뿐이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걸 잊은 것만 같은 기분. 그게 무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으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은 공허함이 좀처럼 자신을 떠날 줄 몰랐다.

 

아린의 하루가 궁금했다. 자신이 임무에 나가 있는 동안 무얼 했는지. 항상 밤마다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자신은 그냥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뜬눈으로 아침이 오는 걸 보고서야 뒤늦게 잠이 든다고 하면 미련하다고 이야기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라도 달게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아린의 목소리와 눈빛이 제게 닿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먼저 다가갈 자신은 없었기에 그저 멀찍이에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자신이 아닐지. 파리하는 괜히 고개를 떨구곤 발끝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과해도 아린이 받아주지 않을 거란 확신. 이미 아린은 제게서 마음이 떠났으리란 슬픔. 그 모든 것을 사로잡는 불안한 애정. 그런 것들이 돌돌 말아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만약 아린이 제게 이별을 고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상상만으로도 저릿해지는 가슴에 파리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떨궜던 고개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으니까.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또다시 아린은 의료팀으로서 임무 지원에 나가게 되었다. 이전과 크게 다를 건 없었으나 마음만큼은 그 여느 때보다도 싱숭생숭했다. 파리하는 오늘도 제게 다가오지 않던 아린을 씁쓸히 바라보다가 임무에 돌입했고, 아린도 제게 말 한마디 걸지 않는 파리하를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주변인들이 보기엔 답답했으나 서로의 마음을 모를 만큼 확신이 없던 이들은 그저 전전긍긍 앓는 게 고작이었으니. 아린의 눈에는 파리하가 계속 잡혔고 파리하의 머릿속에도 아린을 향한 생각만이 가득 차올랐다.

 

역시 자신이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걸까.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떠올렸음에도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던 건 단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렇게 매몰차게 말한 뒤 돌아섰는데 상대가 상처받진 않았을지. 상처야 당연히 받았을 텐데 그걸 자신이 이런 식으로 휙 넘어가 버려도 괜찮을지. 먼저 사과한다면 정말 상대가 받아줄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마땅히 입술 밖으로 토해지지 않았고 그럴 때면 결국 사과하려는 마음도 슬픈 감정 속에 묻히고야 말았다.

 

이대로 끝인 건 두려웠다. 더는 서로가 없는 하루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심으로라도 상대를 붙잡아야 할지 아니면 놓아줘야 할지. 기어이 두 사람의 생각은 사랑의 정의로까지 나아갔으며, 아무래도 머리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아린은 더 이상 파리하를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쪽을 둘러보았다. 혹여라도 또 어딘가 위험에 빠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때 아린의 눈에 비친 건 뚜껑이 열린 맨홀 쪽으로 달려가던 푸들 한 마리였다.

 

“기다려! 거긴 위험하다니까!”

 

뒤쪽엔 푸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이가 헐레벌떡 달려가고 있었다. 목줄을 놓아버린 탓에 푸들이 멋대로 질주하는 듯 보였고, 저대로 가다간 맨홀에 빠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보호자가 다급히 외칠 무렵, 아린은 재빠르게 트레일러를 빠져나가고선 푸들이 있는 곳에 달려간 뒤 이내 두 팔 안에 푸들을 붙잡았다. ‘잡았다!’라고 생각한 그녀는 제힘에 못이겨 바닥을 몇 번 굴렀고, 그대로 안심하고선 주인 쪽으로 푸들을 보내주고 나니 아린의 머리 위로 크나큰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 피하세요!!!”

 

푸들 보호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던 아린의 시선은 보호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푸들도 잡았는데. 아린이 그리 생각할 무렵, 그녀는 뒤늦게 제 위로 넘어지던 큼직한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 이것 때문에 그런 거구나. 아린은 바로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조금 전에 바닥을 구르며 발목이 나간 것 같았다. 당장 굴러서라도 피할 수 있었겠으나 공교롭게도 누군가가 제 몸을 꽉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본인조차도 당혹스러운 순간, 이대로 죽는 거구나 생각하던 아린이 파리하를 떠올리니 놀랍게도 그녀의 코끝에 파리하의 향기가 맴돌았다.

 

“아린!!!”

 

이윽고 그녀의 귓가에 너무나도 익숙한, 그토록 바라고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닿았다. 아린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뜨자 자신을 안고 있던 파리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린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던, 다급한 표정과 함께 땀을 흘리며 아린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만, 저번에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그때 파리하가 어떤 표정이었지? 아린이 그 생각을 떠올리니 이윽고 파리하는 아린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선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아닙니다. 제가 조금 더 빨랐더라면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 두 사람은 잠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순간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자신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크게 성을 내듯 싸우곤 다신 안 보기라도 할 것마냥 홱 돌아섰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고 있으니 조금 멋쩍을 수밖에 없기도 했는데. 지금이 바로 사과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마른 입술을 혀로 훑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저번엔…….” / “저번 일은…….”

“아, 먼저 말해!” / “먼저 말하세요.”

“…….” / “…….”

 

서로 동시에 말하던 두 사람은 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진짜 바보 같다. 아린이 운을 떼어 이야기하자 파리하는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해 보이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너무 말이 심했던 것에 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 봐 걱정되는 바람에 말이 제멋대로 나가버렸어요.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지만, 괜찮다면 꼭 사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냐, 파리하가 날 걱정했던 건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잘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나도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해 버린 건 맞으니까.”

“아닙니다. 영웅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게 문제인 거죠.”

“아냐, 과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던 문제라고 생각해. 내가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아.”

“아뇨, 제가…….”

 

파리하와 아린은 서로 양보도 없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앞다투어 설명했다. 혹여라도 상대가 제게 헤어지자고 말할까 봐, 저에 대한 마음이 식었을까 봐, 이를 돌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잘못했음을 마음속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곱씹던 둘이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서로 사과만 하는 기계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씩 내뱉어야만 했다. 나중이 되어서야 결국 서로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뒤늦게 웃음을 보였다.

 

“그럼 우리 화해하는 거 맞지?”

 

아린이 말하자 파리하는 “용서해 준다면요.”하고 답했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이 당장이라도 화해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자신이 그동안 말 걸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아냐고 말하던 아린은 볼에 바람을 크게 넣곤 속상하단 표정을 드리웠다. 그러자 파리하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며 다시 사과의 말을 읊었는데, 애초에 사과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던지라 아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파리하는 잘못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중 잘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다만 서로를 너무 격하게 생각해 버린 탓에 그 마음이 커져 버려서 각자의 상황을 보지 못했을 뿐이니 말이다.

 

“이제 걱정 끼칠 일은 안 할게. 그리고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 네 말마따나 나도 엄연한 오버워치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상황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어드는 건 삼가주세요. 다른 것보다도 스스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럴게.”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리하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헤실헤실 미소를 보였으니, “화해의 키스라도 할까?”라고 농담 삼아 묻던 아린은 당연히 파리하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요구랄 것도 없었고 다른 이들이 볼 수도 있었으니까.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기에 파리하도 장난으로 받아주길 바랐으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장난이란 걸 모르는 이 중 하나였다. 아린의 말에 파리하는 곧장 그녀의 이마 위로 입을 맞췄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아린을 두고 “나머진 밤에 이어서 하죠.”라는 말을 건넸다. 항상 무뚝뚝하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굴던 파리하가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니 아린의 두 뺨은 순식간에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바, 바, 바, 방금 그거 뭐야!?”

“별로였나요?”

“그럴 리가 있겠어?! 아니, 너무 좋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아린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파리하는 자신이 그랬냐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기억에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며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파리하의 다른 모습을 보고 나니 아린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태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파리하를 잘 안다고 감히 자부했는데, 어쩌면 본인보다도 더 잘 알지 모른다고 몇 번씩이나 생각했는데. 그 모든 생각이 무색하게 아직도 파리하에게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던 다른 모습이 있었다. 아린은 또 한 번 파리하에게 반할 것 같다고 생각하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화해했구만.’

‘드디어 화해했네.’

‘화해했구나.’

‘이제 눈치는 좀 덜 보이겠어.’

 

이들 주위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다행이네…….’ 라고 생각하며 한숨 돌렸으니. 이후 며칠 뒤,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은 채 입 맞춘 모습을 봤다던 SNS의 한 글이 화제가 되곤 그 사진이 한참 떠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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