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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님 고백 커미션(인물 이니셜 처리)

2023년 작업

연습장 by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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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그-M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얼마든 거짓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건 그녀-K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는 어떤 일면에선 자신과 닮은 그녀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았고, 이것은 평범히 그들을 동경하던 학생 사이에선 기묘한 신뢰의 표시로 내비쳐지기에 충분했다.

“두 분, 잘 어울리지 않아?”

M가 회랑을 지나던 때에 우연히 들은 문장은 퍽 이상한 단어로 조합되어 있었다. 우선, K와 M는 단순히 ‘두 분’으로 엮일만한 사이가 아니다. 물론 수석과 차석, 남자와 여자, 엮을 구실이 많다는 건 사실이나, 이 또한 M의 ‘합리적인’ 사고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라니. 눈엣가시 같은 그녀를 치워버리고 단 하나로서 존재하고 싶어 얼마나 아득바득 노력하는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아둔한 것들. 감히 나를 짐승 짝을 찾아주듯 그것에 덧붙이다니. 그는 당장 그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망치고 싶었으나 그 대신 고요히 분노하는 걸 택했다. 말을 섞는 건 귀찮고 번거로운 짓이었다.

하여 그는 침묵을 지키고 그림자처럼 서서 상관을 기다렸다. 휴게시설을 겸한 회랑은 넓고 이야기는 바람결을 타고 번진다. 서류철을 움켜쥔 M의 손등에서 혈관이 두드러졌다.

“난 두 분의 사고방식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

슬슬 짜증을 참기 힘들어졌을 즈음일까.

“쯧.”

“아….”

“그런 쓸데없는 이야길 나눌 생각이 있다면 전술이나 머리에 넣는 것이 좋을 것을.”

“그…죄송합니다.”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를 깨부순 건 얼음장 같은 K의 시선이었다. M가 무엇보다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그녀의 날카로운 존재감이 이럴 땐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알만하군.”

굳게 다물린 고집스러운 입매가 차가운 조소를 머금자, 그들을 구경삼아 어수선하게 몰려있던 인파도 다시 흐름을 되찾아 회랑의 시간은 흘러갔다.

“이걸 내가 이야기해야 하나? 불쾌한 건 나뿐이 아닐 텐데, M.”

“우리 동기님은 엄격하셔서 좋다니까. 나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런 잔챙이를 상대할 수 없지 않나.”

그가 엷게 웃으며 대꾸하자 K는 대꾸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사라졌다.

“하. 늘 한결같으시군. 우리 동기께서는.”

멀어지는 몸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즈음일까, M의 머릿속에서 기묘한 감상이 스쳤다.

‘지천으로 널린 어중이떠중이, 멍청한 것들보다야 저 여자가 훨씬 낫지 않나?’

다시 짚어보자. 단언컨대 그-M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얼마든 거짓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건 그녀-K도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그는 어떤 일면에선 그녀와 공명했다. 자신과 닮은 그녀의 뛰어난 자질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 번 말을 걸어볼까….”

본래 마음 없는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는 권력과 비즈니스의 상징이다. 불현듯 M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대상이 K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랬다.

“뭐, 일그러질 그 낯짝도 궁금하고.”

분명 그런 것이었을 터다….

2

넓은 건물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구석지고도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는 법이다. 벌써 해가 중천에 뜬 시각임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교실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M은 벽에 기대앉아 이 적막한 장소에 서 있었다. 오래지 않아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지르밟으며 한 여자가 등장했다. 검은 머리칼, 뾰족하고도 오만함이 엿보이는 시선이 인상적인 여자. K였다.

“어서 와, 초대에 응하다니 기쁜걸, 우리 자랑스러운 수석 동기님.”

“그런 인사는 집어치워. 시험이 끝나자마자 이런 곳에 날 불러낸 용건이 뭐지, M.”

“시시한 용건이라면 사양하지.” K가 팔짱을 끼며 매몰차게 대꾸했다. 반면, 그녀의 딱딱한 반응에도 M는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자신이 뱉을 말이 진정으로 불쾌한 여파를 가져옴을 알기 때문일까? 기이하게도 반응을 가늠하자니 즐거운 마음이 깃들어 사라지지 않았다.

“동기님은 겁도 없으시지. 이런 곳에 무장도 없이 혼자 오다니.”

“그래봤자 제한된 교내일 뿐이지. 무얼 할 생각이라도 들었나? 너는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당연히 용건이 있으니 불렀지.”

“그래서, 그게 무슨 용건이지? 난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나와 교제하지 않겠나, K.”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째서일까. 가장 먼저 예상한 건 그녀의 일그러진 낯이었는데도 막상 말을 내뱉자니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게 된 것 같았다. 고백이란 가짜라도 불쾌히 떨리는 법이었던가. 이 말이 진심이라 가정하기 때문에? 갖은 생각이 스친다.

“허. 교제라고?”

의외의 일은 비단 자신에게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K가 M를 보고 있었다. 비웃지도,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않은 단정한 무표정으로 얌전히. 이유나 듣겠다는 듯 차분히 눈짓을 보내는 게 아닌가. 결국, M는 이 말도 안 되는 교제 신청에 살을 붙여야만 했다.

“너도 알 텐데. 세계는 지금까지 기혼자에게 유한 태도를 보이지. 특히 우리 같은 자들에겐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수준이고.”

“묶을 만한 구실이 생기기 때문인가….”

“그것도 있지만, 본론은 다르지. 뛰어나신 동기님. 너도 말조차 통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와 한 지붕 아래에 있긴 싫을 텐데.”

“너는 다르다고 말하는 배짱이 대단하군.”

“아니진 않지. 무엇보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안 그런가?”

“흠….”

K의 미간이 구겨지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언갈 깊이 고려할 때의 모습을 내비치며 그녀는 M의 ‘제안’을 고려했다. 청혼은 아니며 단순한 ‘교제 신청’이다. 맞지 않는다면 끊어내면 된다. 무엇보다, M는 다소 귀찮은 면이 있어도 그런 쪽으로 말을 옮길 자는 아니다. 사고는 빠르게 돌아간다.

“좋아. 받아들이지.”

“알고 있어. 동기님께도 이건 내키지 않는 말이겠…뭐?”

“교제 신청을 받아들이겠다. 네 말대로 다른 멍청이들보다야 말이 통하니…왜 그런 얼굴이지?”

“아니. 아니야. 조금 놀랐어.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런 시선들을 한 번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더군.”

“이야…우리 동기님은 뼛속까지 군인이야.”

“너도 그렇지.”

얼떨떨했으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지고 만 후였다. M는 악수를 청했다.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K가 싫은 기색을 숨기며 맞잡았다.

댕-댕-댕─

기묘한 교제를 알리듯 정오의 종소리가 울리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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