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er 6
완전히 사라져버린 당신에게 속 시원해 하다가도 그리워하고.
타인과의 관계 라는 건 왜 이리 행복한데 공허하게 만드는 거지.
-맥스! 일어나요~ 밥 먹어야죠~
-ㅎ ㅓ..!
-잘 잤어요?
-응.. 어..? 어... 응..!
맥스는 차가운 공기를 얼굴로 맞으며 따스한 담요 속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둥하다. 아니 이건 찌부둥하다의 수준이 아니라 고통스러운데... 몸이 왜 이러지.
-으... 으아아...
-왜요? 뻐근해요?
-응... ...나 오래 잤어?
-네.. 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차차 알게 될 거에요. 일단은 식사부터 하세요~
-우와... 맛있겠다..
-감자 좋아해요?
-....응!.. 그런 거 같아..
맥스는 잉게르가 가져온 감자 스튜 한 대접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이걸 다 먹으라고?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저 이를 바라봤지만 맛있게 먹으라는 듯이 미소만 지었다.
어쩔 수 없이 스푼을 들고 감자가 잔뜩 들어간 맛있는 스튜를 바라보고 한입 작게 떠먹어봤다.
-...
-...왜요? ...맛없어요...?
-.. ...진짜 맛있어...!
스튜는 정말 맛있었다! 많이 따뜻했다. 손이 많이 간 정성스러운 음식 이었다. 전에도 이런 음식을 먹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나한테 요리 같은 거.. 자주 해줬어?
-어?!.. 어.. 네..? 왜.. 왜요...?
-맛있어서! 전에도 먹어본 거 같아...
-그... 진짜요..?! 기억이 좀 나요..?
-어... 아니..그냥... 이런 비슷한 걸... 이렇게 먹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 그냥..꿈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 그거 꿈 아니에요! 당신이 기억 잃기 직전에 해 준 거 에요! 맥스! 조금만 더 기억해봐요!
-....기억 안나...
-...정말로요..?
-...응...
잉게르는 어쩐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저 이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건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마음 속 한 편으론 기억이 돌아오지 않고 평생 해맑은 멍청이로 두고 부려 먹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론 맥스의 모든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 현재의 기억, 자신과 만난 기억. 그 모든 것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저 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잉..게르...
-아... ..네? 왜요..?
-...조금만.. 더 줘...
-아...
어느새 그 큰 대접에 한가득 들어있던 감자 스튜가 바닥을 보였다. 기절 해 있는 동안 주삿바늘로 영양소는 보충하고 있었지만, 역시 식사가 필요했던 거겠지...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잉게르는 이 얌전한 먹보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대접을 들고 나와 다시 한가득 스튜를 담았다.
이번엔 훨씬 작은 그릇도 하나 꺼내어 제 몫도 조금 담았다. 마치 운동선수와 소형견을 위한 식사 그릇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식기를 챙겨 먹보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더 먹어요.
-잘 먹을게!
맥스는 신난 얼굴로 대접을 양손으로 받아먹었고, 잉게르는 아직도 스튜 한 대접이 들어가는 저 이의 위장을 부러워하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코를 박듯이 대접에 집어넣어 스푼도 없이 스튜를 먹고 있었다. 저렇게 맛있게 먹으니, 열심히 요리를 한 보람이 있었다. 저도 절로 입맛이 돌아 눈 앞의 스튜를 한 입 떠먹어봤다. 그럭저럭 맛있었다. 오래전 유모가 해 줬던 그 감자 스튜가 괜히 더 떠올랐다. 유모는 잘 지낼까..?
-..!
그런 생각은 왜 이리 뜬금없이, 이런 부적절한 상황에서 떠올라선. 나를 불편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지? 짜증나. 내 예전 기억도 모두 지워버릴까.
-이.. 잉게르... 왜 울어..?
-... ... ...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유모는 잘 지내냐고?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하게. 어차피 날 기억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내가 그 기억을 지웠으면서. 뭘 슬퍼하고 뭘 탓 하는 건데?
-우... 울지마.... 내가 너무..많이 먹어서 그래...? 미안해....
-...아니야...
-.. .. ...
-... ...맥스. ...
-왜...?
-... 아니에요...
-무슨일이야...?
-...기억 없는 당신한테.. 어떻게 말 해야 할까요...
-미안..
-..저한테 그만 사과해요.
-...
-맥스. 절 만난 걸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건가요?
-뭐..?
-전...그래왔어요. ...아니, 그렇게 만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조작하면서.
-... ... ..그...그래..?
-...그런 생각도 했어요... 당신의 기억을.. 영영 돌아오지 않게 하고...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그렇게 살자고...
-... ...
-...근데... 짜증 나요.. ...이것도 말 할 생각 없었는데... 당신이랑 엮이면 내 모든 계획이 망하고.. 저도 절 자제할 수 없단 말이에요...
-...미...미안해..
-아이 씨..! 뭘 사과하고 자빠졌어요..! 내 말 못 들었어요!? 당신 기억 안 돌아오게 할 수도 있었다고!
-.. .. 나..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했잖아.. 밥도..맛있게 해줬고... ...기억이 없더라도... 행복하지 않을까..?
-...
-... 내가...기억이 없어서..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지도...
-...참... 겁 대가리도 없네요 진짜...
-어쨌든... ...지금은? 지금도 내 기억.. 찾아주기 싫어..?
-..모르겠어요.
-방법은... 있는 거지..?
-...몰라요...
-어렵네...
-....당신이 진짜.. 싫어요..
-... ... ...잉게르.. 밥 마저 먹어...
-...
-먹고 생각해봐.. 너 엄청 똑똑한 코볼트인 거 같은데..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지금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데요...
-아... 헤헤...
-뭐가 헤헤 인데요...
-어쨌든 난 지금 상태 괜찮은 걸... 배도 부르고... 춥지도 않고... 좋은 친구도 앞에 있는데..
-...친구요?
-응.. 친구 아냐?
-아... 아니에요.. ...친구... 친구 맞아요... 헤헤..
-그렇지? 그러니까 얼른 밥 먹고.. 좀 쉬면서 생각해.. 한번에 너무 모든 걸 하려고 하진 마..
잉게르는 멍하니 이 진지하게 충고하고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식은 듯 따뜻한 듯 미지근한 스튜 그릇을 내려다본다. 힘차게 스푼을 손에 쥐고 그 미운 감자를 크게 퍼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따뜻한 기억, 잊고 싶은 기억, 나를 잊은 자들에 대한 기억. 모두 씹어 삼켜 소화 시키자.
-...잉게르, 다 먹으면..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자...
잉게르는 식사를 마치고 맥스에게 넌지시 말했다.
-맥스 저는... 나가려면 준비가 조금 필요해요.. 당신 옷에도 마법 좀 걸어서 돌려줄게요 잠깐만 줘 봐요..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알았어... 설거지 내가 할게. 준비 먼저 해..
-아..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을 거 같아..
잉게르는 맥스에게 그릇을 닦는 뻣뻣한 수세미를 건내주곤 2층으로 올라갔다. 맥스는 재미있는 질감 놀이라도 하듯이 차가운 물과 부드러운 거품을 즐기며 그릇과 스푼을 닦아냈다. 머지않아 잉게르가 내려왔다. 무섭게 생긴 가면도 쓰고, 후드도 눌러쓰고... 온몸을 완전히 가렸네.. 꼬리는 안 가리나?
무서운 가면쟁이는 맥스에게 겉옷을 돌려줬다.
-여기.. 이거 입으세요...
-응... ...따뜻하다... 이거도... 마법... 걸은 거야?
-네. 그냥 입고 가면 많이 추울 거에요...
-고마워...
-...정말로 나가고 싶으신가요?
-응!
맥스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잉게르의 꼬리를 보며 천천히 그이를 뒤따라갔다. 바깥은 정말 추웠다! 숨을 내 쉴 때 마다 따뜻한 입김이 찬 공기랑 만나 입김이 앞을 가리고. 따뜻했던 집안과 다르게 싸늘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 상쾌해지는 기분까지. 밖에 나오니까 정말로 좋다~!
-우와... 춥다!
-추워요?!
-응!.. 차갑고.. 기분 좋다...
-다행이에요~
-응!
가면 너머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 가면 너무 무서운데...
-...잉게르..
-네?
-그 가면은... 왜 쓴 거야...?
-어... 그냥요...
-진짜...? ... 너무 무서운데... 다른 거 쓰면 안돼...?
-...다른 거요...?
-응...
맙소사. 잉게르는 짜증이 치솟았다. 나한테 이런저런 묻지도 않은 충고를 해 대고.. 내 가면에 까지 왈가왈부 하다니. 그런데도 어쩐지 잉게르는 평소 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에게 하는 것 처럼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내 심기를 건들여? 영원히 만난적 없는걸로 해버리는 대신에, 다음에는 그런 말을 안 하도록.. 내 상황이나 내 기분을 설명해주지.
-싫어요.
-응... ..알았어... ...그거..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눈들이 막... 맘대로 움직이네...
-... 우리 감각을 시각화 한 거 에요.
-...감각? 어떤거? 냄새?
-네 뭐.... 네! 냄새도 있고.. 그러니까...
잉게르는 저의 가면에 달린 눈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맥스와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눈을 가리키며 ‘이건 제 눈을 따라 움직이고요.’ 양 옆의 바삐 움직이고 있는 두 개의 눈을 가리키며 ‘이건 냄새를 따라 움직여요.’ 그리고 각기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다른 많은 눈들을 가리키며 시간, 육감, 기타 맥스가 알아듣지 못하는 마력과 관련된 감각 몇가지를 알려줬다. 그이와 저이는 분명 같은 종족이면서도, 그렇게나 다른것을 보고 느끼며 살고있다. 잉게르는 분명 자기가 똑똑히 보이고 느끼는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도 몇가지 감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맥스를 보며 답답했다. 아, 내가 이래서 나 말고 다른사람들을 싫어했지.
-하아... 그냥 가요 우리...
-응.. 하나도 모르겠어...
-에휴... 저도 이젠 몰라요~...
-... ... ...우리..어디 가는거야?
맥스는 잉게르의 설명을 이해하려 애쓰며 집중하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빽빽하게 솟아난 침엽수들은 밝은 낮인데도 어두침침하게 느껴졌고. 스멀스멀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은 괜히 불안했다.
-저~기요..
-저~기가.. 어딘데..?
-저~ 기요.
-저~기?
-네. 저~ 기요.
잉게르는 짐짓 장난을 치는듯한 말투로 능청스레 대답했다.
-저~기.. 동굴에 갈 거에요.
-동굴?
-네. 어쩌면 당신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내.. 기억..? ...거기에 뭐가.. 있어..?
-음~... 네! 거기가 꽤.. 중요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 가면 팍! 하고.. 뭔가 떠오를지도 몰라요.
-응... ...가자!
잉게르는 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어떤 기분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이 녀석에게 뭘 원하는 걸까?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영원히 내 곁에 있기를 바라는 걸까? 제발 떠나가길 바라는 걸까?
어쩌면. 가까이 지내다가 때로는 멀리 떠나도 결국엔 돌아오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기억 속 한 구석엔 항상 자신이 있기를 바라는 걸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걸까. 친구를 바라는 것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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