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오펜

OC1

Sorcerous Stabber Orphen - Ohphen/Crio * 키에살히마의 종단 이후

회유기록 by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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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꺼벙한 눈을 들어 눈앞에 나타난 깡마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졌다거나 땅에서 솟은 것은 아니고, 평범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서류더미에 가리긴 했으나 질릴 만큼 낯이 익은 얼굴이기도 하고. 저 남자가 시장이 된 이후로는 꽤나 오랜만에 보는 낯이긴 했으나 그래봐야 그의 대응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펜은 쥐고 있던 볼펜을 손 안에서 의미 없이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오, 오랜만인걸. 그럼 잘 가. 문은 닫고."

"보자마자 매정하구만. 손님을 그렇게 대하기냐?"

사루아는 과장되게 어깨를 떨구며 낙담한 체했다. 그러나 숙인 얼굴은 히죽 웃음 짓고 있다-오펜은 한층 더 꺼벙한 얼굴로 답했다.

"넌 손님 아니야. 그리고 근래 들어 니가 들고 오는 건 다 골머리 썩는 것들 뿐이잖냐. 그러니까 나가."

"일은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골치 아픈 일만 들고 오는 건 근래 들어서가 아닐텐데?“

“아하, 그것도 그렇구만. 쫓아낼 이유가 하나 더 늘었는걸.”

“글쎄다. 어째 너 계속 날 내쫓으려하고 있는데 말이지, 내가 들고 온 것에 대해 신경 좀 써보지 그래?"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이 손에 든 것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에 맞춰 오펜은 눈만을 굴려 슬쩍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종이였다. 그냥 얇은 종이는 아니고, 두께에 돌아가는 소리를 봐서는 코팅된 종이다. 봐도 흥미 따윈 전혀 샘솟지 않았지만, 어쨌든 오펜은 코와 윗입술 사이에 펜을 끼우며 김이 팍팍 새는 목소리와 억양으로 요청에 응해주었다.

"오, 신기한 거얼. 그게 뭔데에?"

"너, 사람이 배려와 다정함이라는 걸 좀 알아봐라. 어쨌든 이게 뭐냐 하면- 요런 거지."

그가 히죽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쪼가리를 내밀었다. 형태는 직사각형, 크기는 손바닥 반보다 조금 클까. 오펜은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를 한 글자씩 소리 내어 읽어본다.

"스베덴보리 마술학교 교장 오펜 핀란디. 그 외 원대륙 의원 겸 외교부 장관 겸 전술기사단 외부고문 겸……."

글귀는 아직 더 몇 줄인가가 남아있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그는 더 읽을 필요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손바닥 반 정도나 차는 면적에 빼곡히 적힌 글자를 읽느라 눈을 게슴츠레 뜬 그가 종이를 도로 내던지며 이를 갈았다.

"너는 가독성이란 단어를 모르냐. 그리고 갑자기 뭔데 이게."

"아니, 곧 학교도 완공이니까. 새 명함을 뽑아야하지 않겠냐. 하는 김에 쭉 직함을 나열해서 난 이런 사람이다, 하는 느낌을 살려보는 건 어떨까 했지."

"있겠냐, 그딴 느낌……."

오펜이 신음했다.

"기왕 기를 살려주려면 월급명세서 숫자로 해주지 그래."

"오, 그건 내 관할이 아니라서."

또 히죽 웃는다. 놀리고 있다. 그는 꺼벙하게 눈을 치뜨고서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장님 월급은 역시 다르겠지이. 부럽구마안. 오지랖 넓게 이런 걸 뽑아보는 걸 보면 일도 한가한 모양이고."

"없는 자의 시기는 꼴사나운 법. 뭐, 이해는 한다만. 그리고 일은 뭐, 사무실에 새 타자기를 구입했으니까. 시험용으로 한 장, 싹하고 뽑아봤지."

사루아가 까칠하게 수염이 난 턱을 쓸며 실실 웃었다. 오펜의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그의 집은 새 식구가 늘어난 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다. 당장 오늘도 집에 돌아가면 막 태어난 딸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있을 터. 거기다 아마도, 내년에는 또 한 명이 더 늘 예정이다.

"이야, 어깨의 짐이 무겁구만. 애아빠."

"닥쳐, 나가."

확실히 새 명함을 만들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저딴 걸 쓸 생각은 없다. 오펜은 주저 없이 들고 있던 펜을 내던졌고, 사루아는 “어이쿠야.”하는 소리를 내며 전직 ‘교사’답게 가뿐하게 그것을 피해버렸다. 맞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약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오펜이 게슴츠레 눈을 치뜨고 노려보자 현 라포완트 시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학교가 완성되고 니가 그리로 옮기고 나면 더 이상 얼굴 볼 일도 없어질 테니 말이다. 마지막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마는.”

“필요 없어.”

“매정하구만.”

그렇게 말하며 수염이 난 턱을 손가락 끝으로 긁는다. 다른 볼일이 더 있을까 싶어 별 말 없이 그 모양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자니 예상 외로―정말로 예상외로 사루아는 “그럼 수고하라고.”라며 한 마디를 남긴 채 정말로 방을 나서버렸다. 그러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남겨진 오펜 쪽이었다.

“설마, 진짜로 저것 때문에 온 건가.”

확실히 그의 말대로, 학교가 완공되고 나면 그는 교장으로서 집무실을 그쪽으로 옮기게 된다. 현재 그가 시청에서 이 서류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그저 임시로 쓸 사무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개발 중인 이 곳에서 제대로 된 집무실이 있는 건물은 몇 없다. 오펜은 손가락 끝으로 뺨을 긁적였다.

“하여간 쓰잘데기 없기는.”

불퉁하게 입을 내민 채 투덜거린다. 그래도 학교가 완공되고 나면 저 얼굴을 볼 날도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내던진 명함 시안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오펜은 새 펜을 꺼내들었다.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갔다간 아내의 손에 그대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아직은 신혼인 남편이라, 오펜은 다시 서류더미에 얼굴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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