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이카루스

베른 단편 소설 : 주제 - 우울증에 걸린 우주인


처음부터 이 정도로 우울했던 건 아니었다. 나보다 앞서 우주로 나갔던 우주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주에서의 고립감을 조심하라고 이르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잘 이겨낼 줄 알았다. 난 원래도 혼자서 잘 지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광막한 우주에서도, 지구와 멀리 떨어져 나 이외의 생명체가 없는 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괜찮을 거라 믿었다. 수많은 정신 감정을 거쳤고 일반적인 우주비행사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었다. '나'는 돌발 상황에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일이 적었다. 극한의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내가, 그리고 모두가. 그래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있는 것이라곤 인공지능 로봇 한 대가 전부인 우주선을 타고서, 이 우주로.

나를 포함해서 7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이 넓은 우주에 흩뿌려졌다. 기술은 어느 때보다 더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며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기술로도 지구를 구할 수는 없었다. 해수면은 매년 그 전 해보다 2제곱 센티미터 만큼 올라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전망에 따르면 수십 년 안에 대륙의 표면적 중 1/4이 물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스콜 현상이 일어났다. 다만 그 현상이 지속되는 시간이 일반적인 '스콜'보다 조금 더 길었다. 10시간 이상 최소 50mm의 비가 내렸다가 그 후로 몇 달 동안 가뭄이 지속되는 것을 반복했다. 사람들은 물을 두려웠다. 자신이 사는 곳이 물에 잠겨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 더는 발 디딜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사람들에게 전염병처럼 옮아갔다. 가뭄 이후의 비는 달가웠지만 거센 파도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돌발성 폭우는 비를 마냥 기쁘게 여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인류는 지구인들이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 바다 아래에 거대한 기지를 설치해서 사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고 기술력도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물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해 있던 때라 그런지 사람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물은 너무나 많은 변수를 몰고 오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전문가들도 아무리 인공 햇빛을 만들어 쬐어도 해수면 아래에서 사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차라리 바다 아래로 내려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우주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이 있어서 불안한 바다가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나도 안다.

내가 도착한 행성은 트랜시터스라는 이름의 웜홀 너머에 있었다. 그 행성이 있는 행성계는 그곳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카르티나 행성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매일 같이 새로운 발견이 있었고 그만큼의 실패나 실망이 뒤따랐다. 대부분의 행성들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 되었다. 메탄으로만 이루어진 행성이거나 지면이 있지만 사람이 호흡하기에 지나치게 부적합한 유독성 물질이 공기 중에 80퍼센트를 이루고 있는 행성인 경우도 있었다. 다른 행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구보다 중력이 너무 강하거나 또는 너무 약한 행성들, 유기체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 행성들이 매일 새로운 실망을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그 실망에 점점 지쳐갔다.

그때 카르티나 행성계 중 한 행성에서 유기체가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로 새롭게 실망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음에도 실망스럽지 않은 지표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드디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라 환호했다. 인류가 이곳에서 절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인류 전체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카르티나 행성계로 우주인을 보내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가 절반을 지나왔을 즈음, 토성 근처에서 웜홀이 갑자기 나타났다.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언론에 보도 되지 않은 상태로 웜홀에 대한 연구를 착수했고 웜홀 너머에 태양계와 아주 유사한 행성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태양보다 3배 더 큰 항성을 중심으로 12개의 행성이 공전하고 있었고 그 중 5번째 행성이 지구와의 유사도가 95퍼센트가 넘었다. 지표면이 있었고 지구보다 1.5배 더 컸으며 대기 중에 유독성 물질이 없고 산소 농도가 지구보다 다소 높았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러므로 카르티나 행성계로 이주하려는 프로젝트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돈과 인력, 기술을 동원해야 할 곳이 카르티나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물리학자이자 우주 비행사로 카르티나에 갈 운명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새로운 웜홀 너머의 행성보다 내가 갈 행성이 더 인류에게 적합한 곳일 것이라고 설파했다. 만약 새로운 웜홀 너머의 행성이 인류에게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 나면 인류는 존망의 위기에 놓일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이주 계획은 두 갈래로 나뉘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나의 선택지보다 두 개의 선택지가 더 낫다고.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프로젝트 지휘관이었던 매건 박사는 내가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했고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판단력을 잃고 틀린 판단을 했다는 건 아니었다. 매건 박사는 결국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프로젝트를 두 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카르티나 행성계로 떠나는 이카루스 프로젝트, 다른 하나는 새로운 웜홀 너머로 향하는 살루스 프로젝트다.

나를 제외한 5명의 연구원들은 살루스 프로젝트에서 우주로 떠나게 되었고 나와 나의 동료였던 사라는 이카루스 프로젝트를 통해 우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내 행성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라 역시 이카루스 프로젝트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인격체를 따진다면, 우리와 함께 비행선에 탑승한 인공지능 로봇인 베이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주로 떠나기 하루 전날 사라가 실종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는 새벽 1시 경 자신의 침실에서 나와 연구 기지 밖으로 나갔고 CCTV의 사각지대로 걸어갔다. 그 후로 사라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라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예정되어 있던 출발을 미루거나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웜홀까지 이동하기 전 자동운항을 설정해두고 나는 끊어낼 수 없었던 생각을 다시 머리 속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사라는 카르티나 행성계에 희망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판단으로는, 그 행성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사라는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라는 망망대해에서 우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안고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행성에 고립된 채로 죽어갈 것을 두려워 했을 것이다. 나는 바다에 잠겨 죽느니 우주로 떠나고 싶었다. 지구는 더는 인류의 행성이라 할 수 없었다. 살루스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게 되는 것일 테니 나쁠 것이 없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믿는 것이 중요했다. 나를 믿고, 미래를 믿어야 했다.

그러니 내가 도착한 행성이 인류가 살기에 완전히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행성은 호흡이 가능한 정도의 대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발을 디딜 땅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기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행성에는 약간의 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지만 행성 기준으로 1년에 비가 4번 이상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매일 베이와 함께 행성을 시찰했다. 그러다 지구에서 가지고 온 농작물을 지표면에 심을 수 있을지 연구하기로 했다. 지표면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바다 주변은 암석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농작물을 심을 만한 흙이 없었다.

식물이 싹 트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상당히 한정적이다. 그중에서 흙은 식물에게 적절한 양분을 공급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아무런 모래나 자갈 밭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별로 없다. 특히 사람이 먹을만한 농작물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바다 근처의 땅에 심은 감자는 싹을 틔우지 않았다. 애초에 바다가 근처에 있는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의 땅을 부수고 개간해서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다. 하지만 싹이 나오지는 않았다. 감자는 상하지도 않았다. 공기 중에 미생물이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미생물도 살지 않는 곳에서 작물을 키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는 것을 잠시 보류해두고 행성 전체에 지구에서 가져온 효모나 세균 등의 미생물을 퍼트릴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미생물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한정적인 공간은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으로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배양접시에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을 소분하여 공기가 통하게 두고 각각의 미생물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조절한 후 결과를 기다렸다.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모든 미생물들이 배양접시 위에서 죽었다.

그날의 오후 일정은 베이와 함께 동쪽으로 설정한 좌표로 시찰을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내가 배양실에서 나와 동면 장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베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젠, 탐사 나갈 시간이에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베이가 잠시간의 침묵 후에 다시 말했다.

"건강 상태에 이상이 생겼나요?"

베이의 음성 신호를 알리는 불빛이 초록색으로 반짝거렸다.

"아니. 나는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요."

그 말에 나는 베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안 좋은가 보군요."

"...네가 기분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

"저는 인간에 대한 것이라면 '거의 모든' 걸 알아요."

"전부는 아니지."

내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베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표현은 부적합하다. 베이는 입이 없으니까. 그는 내장된 스피커로만 말을 할 수 있다. 행성 탐사에 용이한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지 않았다. 지구에는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한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많지만 베이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깊게 안도하고 있었다.

만약 베이가 인간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말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베이에게 그 어떤 의미도 되지 않겠지만 나에겐 의미가 있었다.

베이는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다른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베이의 말대로 기분이 안 좋았다. 단순히 안 좋은 것을 넘어서 심각한 수준의 무력감과 우울을 느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강렬하고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소위 말하는 '낙담'이 이런 것이겠거니 싶은 가벼운 마음이 한 켠에서 일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거친 손바닥이 그보다는 부드러운 얼굴 피부를 쓸며 자극했다.

"...베이, 너는 인간에 대한 거의 모든 걸 안다고 했지."

"네, 젠."

"그러면 너도 정신 감정을 할 수 있나?"

"할 수 있어요. 필요하신가요?"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가 이내 길게 내쉬었다. 베이의 데이터 안에서는 이미 감정이 시작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 베이는 나에 대한 '모든' 걸 기록하고 저장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모든 파악이 끝나 있었던 걸 수도 있다.

"정신 감정을 부탁해."

"알겠어요. 데이터를 분석하겠습니다."

"네 계산으로는 이미 진작에 끝났을 거잖아."

날카로운 말에 베이의 음성이 끊어졌다. 가끔 이럴 때마다 베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문맥과 분위기를 읽고 대화에 적합한 반언어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건 우주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와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우주 비행사를 위한 사소한 설정이겠지만 그 설정이 나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젠, 당신은 지금 우울증에 걸렸어요."

"연구 결과가 이따위인데 우울한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젠. 당신은 우주선에 승선할 때부터 이미 우울감이 높았어요. 다만 그로 인한 판단이나 행동의 제약이 적을 것으로 보여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베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공지능 로봇 따위가 우주선의 선장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안됐다.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론은 내가 내려야 했다. 고작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일하는 뇌를 가진 내가.

"그걸 왜 독자적으로 판단했지?"

"저는 이카루스 프로젝트의 성공만을 위해 움직여요."

"그럼 나는?"

"젠은 이 프로젝트의 일환이기 때문에 당신도 저의 계산에 포함됩니다."

"웃기는군."

베이의 말은 거의 모독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래서는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꼴이지 않는가.

"그럼 말해 봐. 네가 봤을 때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젠의 현재 우울 에피소드의 원인은 연구 실패에 대한 절망감과 프로젝트를 홀로 수행하는 중에 생긴 고립감 때문이에요."

"내 연구가 실패했다고?"

"그래서 여기에 앉아서 탐사도 나가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요?"

베이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고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베이가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분노에 차면 아주 냉정해지고 감정이 사라진 양 구는데 지금의 베이가 꼭 그랬다.

아니... 아니다. 베이는 살아있지 않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

"연구는 진행 중이야. 아직 실패 여부를 따질 단계가 아니야."

"하지만 이때까지의 연구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앞으로의 연구 성과가 기대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네가 내린 결론인가?"

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딴 종류의 설정값은 누가 넣은 거지?

"물었어. 이 프로젝트의 실패가 네가 내린 결론이냐고."

"...유의미한 연구 성과가 기대되지 않습니다."

나는 단전 부근에서부터 심장으로, 그리고 머리로 혈류가 솟구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주먹을 지나치게 세게 쥔 탓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프로젝트를 철수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저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지휘하지 않아요. 젠은 프로젝트를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마음 같아서는 밖에 일군 밭에 너를 파묻고 가버리고 싶어."

"제가 없으면 항해가 원만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나열할 수 없는 그저 부정적이기만 한 감각이 내 몸을 중력처럼 바닥으로 끌어 당겼다. 이 행성의 중력이 지구의 2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 우울 역시 지구에서보다 2배 무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내 판단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가?

"베이. 너는 내가 무슨 명령을 해도 따르나?"

"젠이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이상,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오늘 탐사는 너 혼자 다녀 와."

"젠-"

"명령이야."

베이의 기체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도 베이의 음성 신호를 알리는 초록색 불빛이 깜빡댔다. 저 로봇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신호에 잡히는 걸까? 나는 스스로 조소했다.

"탐사 예상 시간은 5시간입니다."

"알아."

"젠은 무엇을 하고 있을 건가요?"

"이때까지의 연구 결과를 정리할 거야. 다른 시도를 해봐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베이가 기지 밖으로 연결된 통로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는 우주선 내부로 들어갔다. 밖이 보이는 창문 너머로 베이가 동쪽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베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다 우주복을 꺼내 입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우주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도 베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면 베이는 이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겨지겠지.

미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나는 베이를 믿을 수 없었다. 베이는 이미 독자적으로 움직인 전적이 있었고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내가 프로젝트에 방해가 된다면 나에게 위해를 끼칠 수도 있다.

나는 조종석에 앉아서 엔진을 가동했다. 기지와 이어진 통로의 연결부를 해제하고 엔진을 점화하자 큰 진동과 함께 매서운 소리가 우주선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나는 조금 웃었다. 우주선이 하늘을 향해 몸을 띄웠다. 대기권을 외부를 향해 날아가며 창밖을 확인했다. 아주 작게 베이의 모습이 보였다. 베이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인간의 명령이 닿지 않는 곳에 혼자 남은 로봇은 무엇을 할까? 아마 인간이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을 수행하며 그저 기다릴 것이다.

우주선이 행성의 중력권을 벗어나자 기체의 흔들림이 멎었다.

베이가 없는 것을 알면 연구원들이 데이터를 확인하겠지. 베이와 내 대화를 듣는다면 단순한 기물손괴죄가 아닌 더 중한 처벌이 내려질 지도 모른다. 내가 정신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라 말한다면 믿어줄까? 우울은 판단력을 흐리지만 베이와의 대화에서의 난 이성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한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으니까. 베이를 행성에 버리고 떠나는 짓이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트랜시터스 웜홀까지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 나는 그 동안 동면을 해도 되고 연구를 정리해도 된다. 아마 정리를 하다 보면 베이의 말대로 이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지만, 그리고 이미 그 결론은 내가 지구를 떠나올 때부터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구로 돌아가는 이 모든 결정과 행위 자체가 외면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지구를 떠나오던 순간부터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나아가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나아간 방향이 틀렸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옳은 길만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인류는 그런 식으로 '틀림'을 반복해왔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동면을 한다면, 어느 날 나를 이 우주에 버렸던 인류가 나를 다시 찾아내 주지 않을까.

나는 자동운항으로 설정을 맞춰두고 나와 우주복을 벗고 동면복으로 갈아입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대로 아주 긴 잠이 들어도 괜찮겠다. 그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나아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동면 기계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아주 느린 죽음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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