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이율배반

Sit down beside me - IF


*

진혁은 폐부로 급격하게 들어차는 공기에 크게 기침했다. 컥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숨을 가다듬으려 애쓰다 가슴팍을 잡아 쥐고 겨우 진정했을 무렵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창문과 그것을 막고 길게 늘어진 커튼, 하얀색과 연한 미색의 사이에 있는 벽지, 그리고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상과 책장. 진혁은 멍한 와중에도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대학 때에 살던 자취방. 문제는 왜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느냐는 거다.

진혁은 자리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침대를 짚은 손에 닿는 감촉이 익숙했다.

죽음 너머로 떨어지던 감각이 선명했다. 총알이 심장을 꿰뚫고 구멍을 내며 지나갔던 흔적이 아직도 몸에 선연하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심장은 여전히 맥동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진혁은 살아 있었다.

천국인가? 그런데 천국이면 좋은 것들만 가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대학 시절이 천국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진혁은 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단 답답하게 막힌 목을 축이려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당연하게도 별것이 없었다. 몇 가지 반찬과 김치, 술, 소주, 맥주, 어라. 미니 위스키까지. 진혁은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학 때라고 해도 현재의 나이로 따지자면 한참 예전이었던 터라 그 시절의 기억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로 드문드문 기억이 조립되고 있기는 했지만 진혁은 자신이 이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의 기억이고 자신의 삶이었는데도 그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큰 컵에 한 잔 따라서 마시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하는 울림이 귓속까지 직선적으로 꽂혀 들어왔다. 진혁은 이 소리를 싫어했다. 감각이 예민한 편이라 이런 날카로운 종소리는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그래서 문 앞에 [초인종 고장. 문 두드리세요.] 하는 종이까지 붙여놓았던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당연하다. 진혁은 이사할 때마다 그 짓을 반복했다.)

진혁은 현관문을 열어주려다 멈칫했다. 첫째로 밖의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고, 둘째로 자신이 지금 어떤 몰골인지 모르고, 셋째로 죽음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외부의 자극이 모두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현관에서 다시 살금살금 걸어 나와 책상 옆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진혁은 23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 프로 리그에 들어가지 못했던 어린 대학생. 선수 생활을 책임지던 다리가 부러져서 인생이 구렁텅이로 꼴아 박히기 전의 앳되고 아무것도 모르던 진혁이 거기에 서 있었다.

진혁은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세게 문질렀다.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꿈은 아닌 것 같고, 천국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지옥인가? 진혁은 종교를 믿지 않아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허무맹랑한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천국이나 지옥의 단편적인 이미지는 알고 있었다. 아, 그건가? 주마등이라고 하는 거? 근데 그건 굉장히 짧게 지나가는 데다가, 내가 본 주마등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아래로 쑥 꺼지며 가라앉았다. 밖에 누가 있든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이 현관문을 열기 위해 열림 버튼을 누르기 전, 다시 한번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진혁은 밖의 인물이 초인종을 또 누르기 전에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진혁 쌤, 문을 왜 이렇게 늦게 열어요. 잤어요?"

진혁의 입과 눈이 벌어질 수 있는 최대의 크기로 벌어졌다.

"류낙화...?"

"왜요? 저 숙제 했거든요."

어안이 벙벙한, 다르게 표현하자면 멍청한 표정을 한 진혁을 밀치고 낙화가 안으로 들어왔다. 낙화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등 뒤로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혁 쌤 뭐해요?"

"어? 어어.."

진혁은 황급하게 문을 쾅 닫고 바닥에 앉아 있는 낙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낙화는 '이 인간이 왜 이러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혁은 그런 낙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양 볼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너 진짜 낙화냐?"

"그럼 뭐, 가짜도 있어요? 꿈 꿨나... 왜 이래, 진짜?"

낙화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면서도 진혁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진혁은 낙화의 얼굴이며 목, 팔을 살폈지만 그가 익숙하게 보던 흉터 자국은 하나도 없었다. '사냥개'로 사람을 물어 뜯다, 손톱에 쥐어뜯기거나 칼에 찔리고 그인 상처들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낙화의 얼굴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아직 젖살도 채 다 빠지지 않은 덜 여문 어린아이 같은 얼굴.

진혁은 낙화를 놓아주고 자리에 철퍽 주저앉았다. 낙화는 진혁을 미친놈 보듯 보다가 책상과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미니 테이블을 가져와 펼쳤다. 그는 진혁이 미니 테이블과 낙화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뭐해?"

"진혁 쌤은 뭐해요? 저 숙제 다 했다니까요?"

"너 왜 나한테 존대 쓰냐? 그리고 무슨 숙제?"

진혁은 낙화의 행동과 언행들 중에서 어떤 지점에 의문을 표해야 할 지 몰라 맥을 잘못 짚은 듯한 질문만 내놓았다. 낙화는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덕분에 시선이 낮아졌다.

"저 반말해도 된다는 얘기예요?"

"그거야... 네 마음이지. 한 번도 존대하라고 한 적 없었잖아."

낙화는 눈썹을 위로 한 번 크게 들썩였다.

"그만 해요. 재미 없거든요?"

"뭐가?"

"지금 이거. 나 놀리는 거죠? 아니면 진짜 꿈이라도 꿨나? 됐으니까 오늘 수업 시작해요."

진혁은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낙화와 면대하며 앉았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에 낙화도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진혁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천국도 지옥도 꿈도 아니라면. 어쩌면 내게 새로운 기회가 온 거라면?

"낙화야."

"네에."

"오늘 수업하지 말까?"

"왜요?"

"공부만 하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잖아."

"그럼 나 대학은 어떻게 가라고?"

진혁은 뒤늦게 낙화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넥타이는 어디로 빼먹었는지 없었고 셔츠 단추는 죄다 풀려 있어서 안의 검은색 티셔츠가 훤히 보였지만 교복 차림인 것이 확실했다.

"너 고등학생이냐?"

"진혁 쌤 혹시 치매 걸렸어요?"

낙화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한 얼굴로 진혁을 살폈다.

"아니면, 열 나요? 어디 아픈가?"

그는 진혁의 이마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열을 재고 자신이 이마로 그 손을 가져다 대며 온도를 비교했다.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며 "아닌데. 열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며 진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낙화는 진혁을 보고 조금 겁먹은 기색이 되어 몸을 뒤로 쑥 뺐다.

진혁은 끅끅거리며 웃어댔다. 한참을 진정하지 못하고 들썩거리던 몸이 아래로 늘어지고 나서야 입 밖으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새 기회를 줄 거면 제대로 줄 것이지, 기억도 없는 과거 속에 나를 던져 놓았다고? 진혁은 신이 있다면 멱살을 잡아 쥐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오늘 무슨 요일이야?"

"뭔... 금요일이요."

낙화는 진혁의 이상한 모습에 더 반응하기 보다 그냥 맞춰주기로 결정했는지 얌전히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내일 학교 안 가겠네?"

"그렇지...요?"

"놀러 가자. 강릉으로."

"강릉?"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낙화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여기의 너랑은 간 적 없나? 내가 한 번도 안 데려갔어?"

"살면서 강원도 간 적 한 번도 없는데요."

"인생 절반 손해 봤네. 인천은?"

"거긴 친구들이랑 몇 번 갔죠. 바다 보러."

그렇구나. 진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의 낙화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어쩌면 누군가를 해친 경험 자체가 한 번도 없는 평범한 아이인 듯했다. 그러니 인천 바다에 사람 담근 드럼통을 빠뜨린 적도 없고, 그래서 인천 바다를 싫어하게 되지도 않은 것이다. 원래의 낙화는, 인천에서는 회도 먹지 않는다. 시체 썩은 물에서 살던 물고기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죽인 시체를 먹고 자란 물고기는 더욱 싫다고.

"그럼 오늘 가자. 차로 가면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진혁 쌤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그리고 지금 6신데? 집 돌아오면 한 밤일 거 아니에요."

"거기서 하루 자고 오면 되지. 아니면 새벽에 돌아와도 내가 집 앞까지 데려다 줄 거고."

"음... 부모님한테 허락 맡아야 되는데... 진혁 쌤이 전화해주면 가고."

이곳에선 낙화의 부모님도, 그의 동생도 죽지 않은 듯했다. 강도가 집에 들어서 낙화를 제외한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한 비극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래서 복수를 위해 강도와 그 패거리였던 조직을 말살하고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고, 감옥에서 만난 조직원을 따라 조직에 들어오지도 않은, 그러므로 자신을 만날 일도 없었을 낙화의 이상적인 세계였다. 아니, 어쩌면 이건 진혁의 이상이 실현된 세계일 지도 모른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죽이지 않은 평범한 삶이 자신과 낙화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도 낙화와 다시 만난 것은...

진혁의 상념이 끊어진 것은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낙화의 얼굴 탓이었다. 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낙화가 답답한 기색의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전화 해준다고요?"

"그래. 허락 맡아줄게."

그 말에 낙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낙화는 가방에 문제집을 다시 집어 넣더니 진혁의 옆으로 바짝 붙어왔다.

어리구나. 아직.

진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에서 [낙화 어머님]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낙화 어머님. 저 권진혁입니다."

-어머. 진혁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낙화가 수업 안 갔나요?

"아뇨. 지금 낙화랑 같이 있습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낙화 데리고 강릉에 드라이브 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강릉이요?

이런 반응을 보면 모자가 맞긴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진혁이 말을 이었다.

"수험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거 같아서 한 번쯤 바람 쐬어주면 좋겠다 싶어서요. 늦으면 내일 돌아올 수도 있는데 제가 잘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진혁 선생님은 믿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네요. 낙화 잘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강릉 도착하면 다시 연락 드리라고 말해놓겠습니다."

낙화는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진혁 옆에 귀를 대고 붙어 있다가 허락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기쁜 소리를 내며 "앗싸" 하고 외쳤다.

"그런데 뭐 타고 가요? 기차?"

"차 끌고 갈 건데?"

"진혁 쌤 차 있어요?"

"나 차 없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근데 면허는 있다면서요. 그럼 차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대학생이면 차가 없을 거 같은데."

진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낙화가 어깨를 아래로 툭 늘어뜨렸다. 진혁은 낙화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 없으면 렌트하면 되지."

*

진혁은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낙화를 곁눈질 했다. 잠이 많은 건 똑같구나. 그런 감상과 함께 입꼬리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자신이 왜 강릉으로 떠나는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죽기 직전 그곳에서 낙화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발광 플랑크톤이 있는 몰디브의 바다에 가자고 했었지. 그곳까지 데려가 줄 수는 없으니 다시 한번 강릉의 바다에 발을 담그고 어둑한 밤바다를 걸어 다니고 싶었다. 그 어떤 죽음도 녹아들지 않은 맑고 어두운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진혁은 운전석 쪽 창문을 내리고 흘러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모르는 계절의 바람이 어딘가 서늘했다. 봄일 수도, 가을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늦여름의, 그때와 같은 계절일 수도 있고.

바람이 차 안을 휘저으며 들어차는 것에 낙화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크게 하품을 하고 앞으로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등받이에 늘어졌다.

"깼어? 아직 좀 더 남았는데, 더 자도 돼."

"얼마나 남았어요?"

"15분 정도?"

"밖에 바다 보여요?"

"어두워서 잘 모르겠는데."

낙화는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손 차양을 만들어서 불빛도 몇 없는 어두컴컴한 바깥을 내다 보았다.

"너무 깜깜해서 모르겠어요."

"불빛이 하나도 없으면 그쪽이 바다에 면한 방향이 맞을 걸?"

"저 어두운 데가 다 바다라고요?"

낙화는 저도 모르게 "와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진혁은 그런 낙화를 보고 조금 웃음 지었다.

"신기해?"

"동해는 와본 적 없거든요. 밤바다는 완전 처음이고."

진혁은 다시 운전대 너머를 보며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어딘가 부서진 곳 하나 없는 세계인데도 왜인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서해보다는 동해를 더 좋아하는, 인천에서는 식사하기도 싫다고 하던 낙화. 일을 마치고 나면 몇 번이고 갔던 강릉으로 가자고 조르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건 다 없는 기억이 된 걸까 싶어서 마음이 헛헛했다. 강릉에서 회를 먹자고 해놓고 구태여 또 하와이안 피자를 먹겠다고 말을 돌리던 얄미운 모습까지도 그리운 기분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진혁과 낙화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고 밤처럼 낮은 침묵 속에서 서늘한 바람만이 둘 사이를 오갔다.

해변 가까운 길로 들어서자 바다의 짠 내음과 함께 쏴아쏴아 하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늘 차를 주차하던 해변가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차에서 내렸다. 찌뿌둥한 몸이 결리는 것을 느끼며 기지개를 켜는 사이 낙화가 신난 소리를 지르며 해변으로 뛰쳐나갔다.

"위험하니까 뛰지 마!"

"뭐가 위험해요? 진혁 쌤도 빨리 와요!"

낙화는 그 자리에서 콩콩 뛰어댔다. 그 탓에 신발 아래로 자갈이 뒤섞인 모래가 펄펄 날렸다. 진혁은 피식 웃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뛰어가는 낙화의 뒤로 걸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진혁은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기를 바랐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낙화도 평범하고 그저 그렇게 무난한 삶을 살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낙화를 배신하고서라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낙화의 삶 역시 바뀌기를 바랐는데, 그 방식이 잘못 되어도 한참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조직을, 낙화를 배신했다. 그것이 구원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진혁에게 주어진 구원이었고 반짝이는 기회였다. 진혁은 아쉬움을 느낄 자격이 없었다.

낙화는 느리게 걷는 진혁을 두고 신발을 내팽개치듯 벗고는 바지를 대충 접어 올리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진혁 쌤도 들어와요. 완전 시원해."

낙화는 그의 신발 옆에 선 진혁을 향해 물을 튀겨댔다. 물방울은 진혁에게 닿지 못하고 젖은 모래와 자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진혁은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선 낙화를 눈에 새기듯 오래도록 바라보다 운동화를 벗어서 낙화의 운동화 옆에 나란히 둔 후 파도가 밀고 들어오는 바다로 천천히 들어갔다. 발등을 간지럽히는 감촉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종아리 중간까지 물이 차올랐다.

낙화는 진혁에게 또 다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며 웃었다. 진혁은 낙화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듯이. 낙화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 손을 보다가 바닷물에 젖은 손으로 진혁의 손을 잡았다.

"진혁 쌤 오늘 진짜 이상해요."

"낙화야."

"왜요?"

"너한테는 후회하지 말라고 했는데, 난 후회했나 봐."

진혁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잠겨 사라질 것처럼 작았다. 진혁은 낙화가 그 말을 들었기를 바라기도 했고 못 듣기를 바라기도 했다.

"내가 널 두고 그렇게 가서는 안 됐는데..."

진혁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지자 낙화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낙화는 진혁에게로 반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후회해요?"

"...!"

진혁은 낙화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녀석이어서 언제나 표정이 쉽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낙화의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을 아무리 해도 읽을 수 없었다.

"후회하지 말라며. 진혁 씨.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 그런 얼굴이면 어떡해?"

낙화가 옅게 웃었다. 진혁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나는..."

진혁이 말을 잇기 전에 낙화는 그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진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낙화의 뒤를 쫓아 들어갔지만 물살을 가르고 걷기가 쉽지 않았다.

"낙화야...!"

"진혁 씨, 여기서 안녕이야.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낙화야, 나와."

"진혁 씨가 알던 류낙화는 이제 없어. 여기는 진혁 씨가 죽었던 세계가 아니야."

"그럼 넌 뭔데?"

진혁의 말에 낙화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후회."

낙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이내 눈을 둥글게 뜨고 진혁을 향해 다시 되돌아 걸어 나왔다.

"이제 나가요, 진혁 쌤. 생각보다 춥다."

"낙화야..."

"왜요? 헉. 아래에 해파리 있어요!"

낙화는 물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진혁은 발밑을 내려다 보았고 해파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낙화는 양손으로 팔을 쓸며 어깨를 한 번 크게 떨고는 진혁을 지나쳐서 밖으로 나갔다.

"낙화야, 너 하와이안 피자 좋아해?"

"좋아해요. 사주려고?"

"먹으러 가자."

"근데 지금 시간에 연 가게 있어요?"

진혁은 신발을 손에 들고 발을 탈탈 털고 있는 낙화에게로 다가갔다.

"24시간 여는 가게 있어."

"발 좀 말리고 가요. 축축해서 신발 못 신겠어요."

"그럼 조금 걸을까?"

낙화와 마찬가지로 손에 신발을 든 진혁이 앞장서서 해변길을 따라 걸었다.

진혁은 도망쳤던 것이 자신에게 구원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는 걸 알았다. 도망쳐서 도달한, 바라왔던 세계에서는 그가 알던, 그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낙화는 없었다. 어떤 것은 새겨진 상처의 모양 그 자체로 완성된다. 진혁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흠집 하나 없는 이 세계에서 완전한 이별을 하게 될 것을.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을.

진혁은 후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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