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 (1)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리엔시에. 오늘이 코니엘님께서 놀러 오시는 날인 건 알고 있겠지.”
“네, 어머니.”
“네가 같은 여성으로서 잘 돌보아드리렴.”
“...네.”
코니엘 루 뷔에르 쏠레오 라흐벤시아. 라흐벤시아 현 황제의 제7황손녀로, 리엔시에보다 한 살 어린 황녀님이었다. 리엔시에를 꺼려하는 외부인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언젠가 가족 이 되어 유레이토 가문의 일원이 될 동생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무려 태중 약혼자로, 유레이토 공작과 현 황제 뤼비아나의 젊은 시절 약속으로 맺어진 혼인 동맹의 일종이기도 했다.
유레이토 공작가는 예로부터 황가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 피를 섞는 것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리엔시에는 코니엘을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뾰족하게 솟은 귀와 날카로운 동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치던 모습을 기억한다. 질리도록 겪어온 반응임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고, 늘 상처가 되어 리엔시에의 심장을 후벼팠다. 리엔시에의 눈동자는 코니엘의 작은 입 모양을 주시했다.
‘괴물...’
구순술을 할 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귀하신 입이 그런 단어를 저도 모르게 내뱉고 있었다.
‘...코니엘님, 이쪽은 제 여식인 리엔시에랍니다. 리엔시에, 인사 드리렴. 제7 황손녀이시자 이 나라에서 가장 자애로운 햇살의 축복을 받으신 분, 코니엘 황녀님이시란다.’
‘안녕하세요, 황녀님.’
‘......아, 안녕.’
자애로운 햇살의 축복이라. 그 자애가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가 보다. 리엔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꾸만 자신의 귀에 시선을 주는 어린 황녀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라에서 제일 귀하신 분들도 다 똑같구나.
리엔시에는 여전히 이 나라의 이방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세계의 이방인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라흐벤시아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고. 저 먼 이국에는 이종족들도 많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리엔시에. ...는 건 어떠니?”
“...네... 네?”
“잘 안 듣고 있었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코니엘님께 환영의 의미로 드릴 화관을 만들어드리는 건 어떨까 해서.”
리엔시에는 후원의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도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거나 화관을 종종 만들기도 했다. 꽃을 엮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부드러워진다. 자신이 이종족의 외모를 가지고 있던 말던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네, 알겠어요. 화관을 만들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앞으로 반 시각 내로 오신다니 서둘러야겠구나.”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 사라지는 어머니의 뒷모습 저 너머로 레니발렌의 작은 머리가 보였다. 모퉁이에 서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엔시에는 동생을 무시하고 저도 뒤를 돌아 후원으로 향했다. 화관을 만드는 것쯤이야 금방 한다. 코니엘이 온다면 그도 올 확률이 높았다.
‘그’말이다.
코니엘의 이란성 쌍둥이 형제, 제5 황손자이자 현재 가장 유력 한 차기 황제 후보. 마지막 황태자 로드릭의 아들, 라히안. 그의 적금발과 붉은빛 도는 갈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심장이 서 늘해질 정도였다. 저랑 동갑임에도 위압감을 내뿜던 어린아이였다. 리엔시에는 고개를 도리질 쳐 생각을 지워내고는 후다닥 후원으로 이어진 복도를 뛰어갔다.
*
“휴... 내일이면 이제 여기도 끝인가.”
세라엘이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침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쨍하니 밝았다. 기분 좋은 정오였다.
세라엘은 제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제 방─이라고 하기에도 뭣 한 창고 같은 공간─의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이 먼지 냄새나는 곳도 이젠 안녕이다.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떠나기가 아쉬웠다. 제가 수년간 살았던 곳이니 어련할까.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로 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성녀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보잘것없고 낡은 방이었다. 물론 자신은 아직 성녀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귀하신 분 운운하는 것 치고는 너무 지저분한 상태 아닌가. 세라엘은 자신이 가진 것에 불만족한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없는 자식 취급할 것이 아니면 번듯한 방 한 켠 정도는 내어줘야 할 거 아냐. 그래도 뭐, 이런 취급도 이제는 끝이겠지. 성녀로 신전에 가게 되면 삶이 달라질 것이다. 반드시 달라져야 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제 방에 굳이 노크를 하면서까지 찾아올 사람은… 세라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후작 부인이었다.
“...내일 떠난다지.”
“...네.”
“독한 것. 그렇게 이 집에서 버티더니 드디어 내 눈앞에서 사라 지는구나.”
“...”
세라엘은 여전한 폭언에 그러려니 하며 아무 말 없이 후작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일 텐데, 어째서인지 눈빛에 증오가 아닌 회한이 서려 있었다.
“...?”
“그래, 네가 드디어... 아니지, 성녀가 되실 분이니 내가 존대를 해야 할까.”
“아니... 편히 말씀하세요.”
“...내가 이 집에 온 너에게 못되게 군 것을, 일단 사과하고 싶구나.”
“......”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세라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후작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은 젊었다. 젊은 부인의 얼굴에는 뉘우침의 빛과 나이 든 사람 특유의 분위 기가 묻어났다. ...아직 젊은 데도 부인은 이미 나이가 들어있었다.
“로니안 대신 성녀로 신전에 가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도 모자랄망정, 너에게 괜한 화풀이를 해왔지. 미안하다.”
“...부인.”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소리 지른 것도 미안하다.”
“...”
“그땐 내가... 버질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만나 낳아왔다는 소식에 눈이 뒤집혀 있었단다.”
후작 부인, 기요메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 지난 과거를 어느 정도 후회하는 모양새였다. 어린아이에게 화내고 모나게 대한 것이 인제야 마음에 걸렸나. 아니면, 이제라도 깨달은 건가.
세라엘은 후작 부인 기요메트에게 기묘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안타까움도 분노도 아닌 동정의 감정이었다. 감히 후작 부인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고명한 후작가인 벤씨엘라의 장녀로 태어났음에도 라헤니오 후작가에 시집와 자기 삶을 살지 못했던 기요메트에 대한 동정이었다.
동시에 남편에게 제 모든 것을 바쳐왔으면서도 제대로 보답받지 못하고 사생아라는 결과로 돌려받은 한 여성에 대한 동정이기도 했다. 세라엘은 어린 나이이면서 꽤 일찍 사회를 깨우쳤기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아무튼, 내일이면 떠난다니 아쉽게 되었구나. 신전에 가서도 잘 지내렴. 후작저의 교회당에서 가끔 너를 생각하며 기도를 올리마.”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역시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기요메트는 열려있던 문을 향해 성 큼성큼 걸어가 방을 나갔다. 세라엘은 그동안 제가 후작 부인에게 느꼈던 약간의 분노가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제가 그녀의 처지였어도 저를 미워했을 것이다. 성녀가 될 어린 소녀가 커다란 침대에서 훌쩍 내려왔다. 창가로 다가가자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눈가를 덮었다.
밖은 화창하고 맑았다. 하늘이 푸르렀다. 세상이 밝게 활짝 열린 가운데 저 혼자 더러운 방안 태양 아래 서 있었다. 가장 높은 후작저의 가장 낮은 곳에 선 성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름을 자랑하는 하늘을 보며 금기를 맹세했다.
자신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것이다. 성녀라고 해서 붙잡힌 삶을 살 생각은 없다. 처음으로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성녀가 되어 저만의 삶을 살 것이다. 마흔 아홉 번째 성녀’가 아닌 ‘성녀 세라엘’로서.
바깥에서 후원의 라일락 향이 새어 들어왔다.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성녀에게 있어서 죄악인 꽃이 내뿜는 천애(天愛)의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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