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존림, 셔우드

1. 어딘가 미묘한.

- 공방 내부.

 작은 광석 조각이 서로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작은 방 가득히 울린다. 손가락 크기의 투명한 청록색 광물로 낸 가루가 투명한 유리병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쌓이고 쌓여서 병이 가득 차자 다른 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시금 병이 채워지고, 또 다른 병이 대신하고, 다시 병이 채워지면……. 그렇게 얼추 열 병이 채워지자 갈아낼 것이 더는 남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새어든 아침 햇살에 병 밖으로 조금씩 비껴 떨어진 가루가 은은하게 빛났다. 광물을 갈아내던 이는 마지막 병을 뺀 나머지를 모두 선반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이 한 병만 써도 충분할 것이라고, 오랜 경험으로 다져온 직감이 알려주었다.

 그는 낮게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어 미약하게 반짝거리는 끝자락을 살짝 훑었다. 훑어내는 손가락 사이에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가루 몇 톨이 슬며시 묻어났다. 탁자에 쓸리면서 떨어진 가루가 조금 묻어난 모양이다. 이 정도는 일상인지라, 그는 손을 가볍게 털어내곤 허리까지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다시 높게 올려 묶었다.

 풋풋한 숲 내음으로 가득한 바람이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저 바람에 색이 있다면 숲보다는 옅은 투명한 녹색이 아닐까. 맑고도 흐린 초록빛 눈동자에 그런 공상이 살며시 어렸다. 귤색 머리칼 틈새로 슬며시 보이는 오른쪽 눈에는 공상을 가장한 애수가 스며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 사소한 것일 터였다. 열린 창 앞에서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그는 다시 무언가로 눈을 돌렸다. 찬장 안에 고이 놓인 투명한, 어항과 비슷한 모양새의 수정구. 내부가 텅 비어있는, 사과 하나와 엇비슷한 크기의 그것. 엷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던 때에, 답지 않게 손이 미끄러졌다. 그는 수정구가 떨어질 자리에 급하게 이파리 무성한 덤불 하나를 만들어냈다. 잎이 바스락거리며 수정구를 담아냈다. 매끄러운 표면에는 여전히 생채기 하나 없었다. 안심하고 집어 들려던 때에 누군가가 대신 주워들어서는 말을 걸었다.

“셔우드 대장, 또 스노우글로브나 만들고 계심까? 좀 다른 것도 만들어 보십쇼. 이번 달에만 벌써 3개째지 말임다. 아스터, 너도 뭐라고 좀 해보십쇼.”

“도로시, 고객님 요청이라잖아. 선생님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때보다야 낫잖아?”

“그때라고만 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슴까. 좀 똑바로 말해보십쇼.”

"아이, 그러니까 내 말은……."

 은백색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양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엷은 햇살에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마치 진주 같은 여자아이. 금빛에 언뜻 남색 몇 가닥이 섞여 바람에 부스스하게 날리는 모습이 마치 민들레 홀씨 같은 남자아이. 둘 다 공방 안에 있던 셔우드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작았다.

 둘이서 티격대는 모습을 바라보던 셔우드는 한숨을 쉬었다. 묘하게도 사이가 나쁜 것 같지만 좋은 아이들. 하루가 멀다하고 다퉜다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이해하기 힘든 작은 아이들. 어디서 배웠는지 날이 갈수록 더욱 독특해지는 말투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던 셔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더 깊게, 더 조용하게.

"그러면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아스터, 밖에 나가서는 이렇게 좀 풀어서 말을 해보십쇼."

"그건 싫어. 하지만 노력은 해볼게."

"도로시. 싸우는 건 좋지만, 그건 내려놓고 싸웠으면 좋겠구나."

 주위를 빙 둘러본 도로시는 그제야 손에 들린 수정구를 보았다. 방금 덤불에서 주워 손에 든 뒤로 지금까지 계속 쥐고 있는 그것. 도로시는 멋쩍은 얼굴로 그것을 셔우드에게 돌려주었다.

"아. 들고 있었다는 걸 까먹었슴다."

"맙소사."

 셔우드는 돌려받은 수정구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처음 그대로의 상태였다. 작은 흠집 하나라도 있었다면 새것을 찾느라 그만큼 시간을 소모했을 테니 아주 다행이었다. 이제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겠어, 나직한 셔우드의 혼잣말 뒤로 도로시가 황당하다는 듯 무언가 외쳤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셔우드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작업대에 붙여둔 쪽지를 확인했다. 

 '스노우글로브, 사과 정도의 크기, 흰 장미가 만개한 덩굴, 희고 푸른 시계탑, 구름 낀 맑은 밤하늘과 눈보라. 가능하다면 시곗바늘은 움직였으면 함.' 이번 고객이 남겨둔 요구사항은 그 몇 가지가 전부였다. 옛 친구에게 줄 선물이니 부디 잘 부탁드린다는 당부의 말과 구구절절한 추억 이야기는 덤으로. 하지만 그 추억 이야기가 오히려 셔우드의 관심을 끌었을 테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이 물건의 주인이 될 사람을 직접 만나보지 못해 아쉽지만, 이렇게 세세한 요구라면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올 듯했다. ‘구름 낀 맑은 밤하늘’이라는 모순된 표현이 약간 걸리긴 하지만, 분명 제작 중에 어떻게든 되리라.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언제나 다양한 시도가 가장 처음에 왔고, 수정과 교정은 그 뒤에 겨우 따라붙곤 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만들 물건은 묵직한 금화 자루, 값비싼 보석, 높은 지위나 고귀한 명예보다 더욱 중요해야 하니까. 늘 그래왔던 것이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이번 봄의 시작은 제법 무거웠다.

“일단 한번 해보고, 안되면.”

“예? 방금 일 때려치운다고 하셨슴까?”

“해보고 안 되면 마는 거라고 하신 게 아닐까?”

“의뢰 주신 분께 다시 연락드려야겠다는 말이었다. 이건 안될 것 같다고.”

“그런 건 좀 제대로 말해주십쇼. 괜한 오해 불러일으키지 마시고 말입니다.”

“맞아요. 보름치 님이 원래 사람 말은 끝까지 듣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건 이쪽에서 해야 할 말 같은데, 그런 건 또 기막히게 외워서는. 앞으로는 혼잣말도 못 하겠다.”

 하기 싫으시면 하지 마십쇼. 맞아요, 하지 마세요. 같은 말을 톡 던지며 아이 둘이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지금 시간과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맨 것을 보면 지각하기 전에 등교하려는 것이리라. 혹여나 무슨 일이 생겨도 둘이 알아서 잘 헤쳐 나가겠지. 그래서, 구름 낀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얼마나 필요할까? 셔우드는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이른 오후가 될 때까지 작업대 앞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문을 빠르고 명랑하게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도구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다행히도 아직은 단 한 명뿐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가 짜자잔. 저 많이 보고 싶으셨죠?“

 옆트임 있는 무릎길이의 검은 긴 소매의 원피스와 그 속에 겹쳐진 희고 프릴 달린 원피스로 구성된 드레스가 나풀거렸다. 아니면 그냥 흰 원피스 위에 검은 원피스를 껴입은 것일지도. 무늬 하나 없이 수수하지만 특이한 옷차림의 소녀는 그 위에다 짧은 잿빛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얼핏 보아 두 꼬마들과의 나이 차가 네다섯 살은 될까. 일주일 중 내키는 요일을 골라서 네다섯 번, 언제나 이른 오후. 모르가나 리페이카 쉘비는 항상 이 시간대에 고즈넉한 숲속으로 출근을 했다.

“그래, 쉘비. 왔으면 좀 도우렴. 우선 저 책장에 놓인 책갈피부터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구나.”

“대체 그놈의 책갈피가 뭐길래 자꾸 늘어나는 건데요. 플라나리아라도 돼요? 이거 어차피 다른 거에 비해 잘 팔리지도…….”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만든 거다. 처음에는 손재주 기르는 용으로 시켰던 건데, 요즈음 재미가 들렸는지 알아서들 만들어오더라.”

“볼 때마다 이렇게 숨은 멋이 드러나는 훌륭한 작품들이 책장에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것은 예술의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사장님, 얼른 전용 보관함을 하나 마련하시어 길이길이 보존하시죠. 꼬마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신가요?”

“그래. 말 나온 김에 저기 책장 옆에 달린 칸에 크기순으로 정리해서 넣어다오.”

“이거 하면 추가수당 주실 건가요? 최근 최저임금이 조금 올랐다던데. 요즘 학업에 집중하느라 돈도 조금 더 필요하고.”

“넌 왜 돈 문제만 얽히면 사람이 변하는지 모르겠구나.”

“아니, 들어보세요? 마법학이라는 게 원래 돈을 포대 단위로 먹고 자라는 학문이잖아요. 뭐, 실용마법학은 이공계 과목이랑 이것저것 결합했다 보니 좀 덜하다지만 순수마법학은 아직도 미개하고 미련한 것이 아주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전 뭐다? 돈을 정말 많이 잡아먹는 우매한 순수마법학 생도다. 그 말인즉슨?”

“학업은 그만둔 거 아니었나? 3년 전에 학교 때려치웠네 뭐네 하면서 잡일이라도 시켜달라더니. 다시 말하는 거지만, 비아가 소개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 학교를 그만둔 거랑 학문을 그만둔 것은 다르죠! 말을 끊어낸 모르가나는 그렇게 시작되는 아주 장황한 자기주장을 열렬히 펼쳤다. 그래, 그래. 그렇구나. 알겠다. 셔우드는 감정은 하나도 싣지 않은 말투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스노우글로브를 만들 때는 작은 장식 하나하나와 투명한 물로 내부를 채워가는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번 내부를 채우고 나서 어딘가를 수정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보니 우선 장식의 배치를 신중히 정하는 것이 우선이니, 지금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그가 성심성의껏 대답해줄 겨를은 없었다.

 모르가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나는 말하게 시켜놓고는 자기는 일만 하시네. 그렇게 투덜거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명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거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시스는 아직 안 왔나요? 걔 얼굴 보는 게 내 인생의 낙인데.”

“한 주에 평균 한 번, 많아 봐야 세 번, 목요일에는 고정적으로 방문. 덧붙여서 오늘은 수요일. 3년이나 지났으면 외울 때도 되지 않았나?”

“어디 사람이 정해진 계획 다 지키고 살면 그게 사람인가요. 가끔씩 변수가 생겼으니까 그러죠. 단조로운 일상에 약간의 변수가 얼마나 큰 영향을…….”

“시키는 일이 하나같이 단조로워서 미안하구나. 내킨 김에 그 말을 프라이쉬츠의 앞에서 해보렴. 상황이 참 재밌게 돌아갈 것만 같은데.”

“아니, 맙소사. 저렇게 평온한 말투로 자폭을 요구하시다니. 이래서 요즘 어른들이란.”

“요즘 어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세대 차이가 몇인데.”

"이래서 오래 묵은 영적 종족들이란. 다들 하나같이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모른다니까."

"옳지. 잘한다. 이제 보름치한테 가서 똑같이 말해보련."

"특공대 대장한테 그런 말을 하라니, 가서 죽으라고요? 이 악덕 사장. 월급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요즘 최저 임금이 살짝 올랐던데, 혹시 저도 월급 올려주실 생각 없으신가요?"

"아까 한 말을 또 반복하다니, 속이 훤히 보이는구나. 지난주에 이미 올려놨다. 아마 두 배 정도로. 내가 지난주에 이미 말해줬을 텐데. 벌써 잊어버렸나?"

"사장님, 사장님의 은혜가 하늘 같으시니 이 못난 직원이 충성하는 수밖에요. 전 분부하신 대로 보름치 님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빌어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대충 적당히 건조한 어조로 대답한 셔우드는 다시금 작업에 들어갔다. 과장된 행동을 하던 모르가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덤덤하게 말하시면… 저 지금 무시하세요? 진짜 너무하네. 그리 소란을 피우면서도 착실하게 일에 집중하는 모르가나는, 지금 당장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투덜대면서도 할 일은 다 하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근데 전 오늘 뭐 해요? 모르가나의 질문은 적막 속에 묻혀버렸고, 셔우드는 탁자 구석으로 밀려난 작은 병을 집어 들었다. 머지않은 작업의 마무리를 위하여.

사과만 한 유리구슬 속, 장미 덩굴이 휘감은 시계탑, 얼음과 푸른 유리로 이루어진 희고 푸른 탑. 서리에 덮힌, 마찬가지로 유리로 된 시곗바늘은 열두 시까지 조금을 남겨둔 채로 얼어붙었고, 창가 난간에 쌓인 눈은 푸르스름한 그림자 아래에서 반짝였다. 탑 곳곳에 만개한 흰 넝쿨장미는 눈보라가 몰아쳐도 떨어지지 않도록 굳세게 얽혀서는 곱게 피어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작고 둥근 세상 속의 하늘은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 맑은 하늘이. 보름달 못지않게 환한 초승달 너머로 총총히 빛나는 뽀얀 별들이 회전하고, 청록빛 오로라가 너울거리는 하늘. 드문드문 낮게 퍼져있는 흐릿한 먹구름은 빛나는 것들을 위한 들러리인지, 걸맞는 나름의 자리를 찾아간 것인지.

 그 작은 겨울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자, 들러리 신세였던 먹구름은 두둥실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시계탑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도 금방이었다. 달빛에 녹아내리고 갈라지던 시계탑은 눈보라가 지나고 다시금 견고함을 되찾고, 시곗바늘은 달과 별의 온기에 녹아 뒤로 돌아가고, 찬 바람에 얼어붙으며 다시 앞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구조임이 드러났다.

 모르가나는 그것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몇 배로 높은 완성도를 지닌 그것은, 고객이 요구한 것은 다 들어가 있으면서도 정성을 들인 티가 선명한 물건이었다. 평소의 셔우드는 단순히 공간을 꾸미기 위한 공예품에 저렇게 큰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그의 모든 작품이 숲 바깥의 수많은 장인의 것과 같은 섬세함과 품질을 자랑하지만, 저렇게 섬세하고도 자연스럽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따로 상담을 신청한 고객이 그의 흥미가 동할 이야기를 해준다면 또 모를까. 아무래도 이번 손님은 셔우드가 흥미를 가질 이야기를 잔뜩 남기고 떠난 모양이다. 유리 표면에 선명히 비친 셔우드 본인의 모습은 유리 속 풍경에 묻혀 도로 흐려졌다.

"대체 주문서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있었기에 이런 역작이 나온 건가요? 사장님이 만드신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법한데. 제 말에 대답 한 번을 안 해주시더니 이런 걸 만드셨네요."

"평소보다 공들이긴 했지만 이런 게 나올 줄은 몰랐지."

"불이랑 얼음은 죽어도 못 다루시겠다더니, 오늘 보니 아닌 것 같네요. 아니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받으셨나? 그런 김에 저한테도 슬쩍 알려주시면……."

"고객의 사생활은 지켜줘야지?"

"언제부터 우리가 사생활을 철저하게 지켰…….”

“조용히 하렴, 쉘비.”

 셔우드는 자신의 새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만큼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이렇게 괜찮은 것이 나올 줄은 그 또한 몰랐던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하자니 입 아프고. 그러니 어색한 상황에서는 역시 말 돌리기가 최고인 법이다. 아무래도 기분 탓인가 보다. 그는 그렇게 슬쩍 둘러댔다.

“왜 다들 할 말이 없으면 기분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건가요?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서?"

 온화하고 둥그런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셔우드는 살짝 찌푸린 녹색 눈으로 슬쩍 모르가나를 쏘아보았다. 머지않아 큰 신경은 안 쓴다는 듯 다시금 눈 돌리긴 했지만. 유독 완성도가 높게 느껴지는 그 상품의 포장은 모르가나가 맡기로 했다. 온갖 포장지와 상자와 완충재를 들고 와선 격렬하게 우기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요?”

“꼭 해보고 싶다고 해서 맡겼더니 한 시간 동안 상자만 고르고 있었지. 신중한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쉘비네요. 꼼꼼하고 신중한 부분이."

 끝없이 검은 머리칼에 노을이 붉게 반짝였다. 덩달아 붉게 반짝이는 푸른 상자는 덤으로. 창가에 놓인 상자 안에는 그가 하루를 꼬박 바치고, 모르가나가 제법 시간을 들여 포장한 '요주의 그것'이 있었다. 내일 또는 모레에 숲을 떠나갈 상자였으니 이제 더는 큰 의미가 없다. 얼마나 큰 공을 들였든 간에 작품명 하나 지어주지 않은 저 피조물과의 인연은 조만간 끊길 예정이다. 하루 동안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도. 하지만 모르가나가 저것을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지는 그에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에, 셔우드는 드물게도 입을 떼었다.

"포장에는 한 시간이 걸렸지."

"그래도 많이 발전했네. 저번에는 한 시간하고도 반이 걸렸는데."

"그래. 발전했지. 많이 발전했더라."

“비꼬지 마시고요.”

 비꼬는 걸로 들리나? 아쉬워하는 기색의 셔우드를 무시하고 검은 머리의 그는 탁자 귀퉁이에 놓인 작은 하바리움을 집어 들어 투명한 액체 속에서 하얀 꽃이 맥없이 하느작거리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건 왜 풀이 다 죽은 것 같지. 이거 안개꽃입니까?"

"안개꽃이지. 갑자기 만들고 싶어지더라.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건 그거고, 평소 행적 말입니다. 맨날 뭐라고 설명하다가 갑자기 아련해지시더니 말이 툭 끊기고, 뭐라고 하려 했는지 물으면 그냥 옛날 생각이 났을 뿐이라 얼버무리시고. 듣던 제삼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아십니까?"

"개인 사정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라. 조만간 말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봐야지."

"이거 작년에도 들은 얘깁니다, 공방장님. 재작년에도 그랬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아마 적당히 잡아서 40년 정도."

"와, 40년, 짧긴 퍽이나 짧습니다. 저희 기준에선 인생의 거의 반인데."

"미안하게 됐군. 최대한 노력한 게 그 정도라."

 알긴 아십니다. 검은 머리의 그는 대충 대꾸하고 정돈된 공방 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작업대로 쓰인, 깔끔하게 정돈된 긴 탁자에 올려진 푸른 상자와 유리병에 꽂힌 각종 공구. 반구형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해 질 녘의 공기. 벽에 설치된 찬장에 크기순으로 정렬된 유리병 속 내용물은 그늘진 곳에서도 형형색색으로 슬며시 빛났다. 일관적이지 못한 내용물과 색깔을 보며 그는 눈길을 잠시 굳혔다. 정리하는 김에 색깔에도 통일성을 두었으면 더 좋겠는데. 하지만 셔우드는 색깔 구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검은 머리의 그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셔우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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