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존림, 셔우드

2. 아무렴 어떨까.

- 공방 내부, 숲 내부.

 말재간이 없었던 탓일까, 아는 한도 내에서 말해줄 만한 부분을 어찌어찌 추려내는 중이었던 탓일까. 셔우드는 검은 꽁지머리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검은 머리는 제풀에 지쳐 먼저 떨어져 나갔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성격 뻔히 다 알면서도 캐물어 본 제 잘못이지. 대답하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신부 측 지인이 결혼 기념으로… 아니다. 역시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됩니… 네? 둥근 안개꽃 하바리움을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던 검은 머리가, 새파란 잉크 한두 방울을 떨군 물처럼 맑고 푸른 눈을 둥글게 뜨고 놀라 돌아보았다. 또는 그런 척을 한 걸지도. 손바닥이 기울어진 탓에 미끄러져 나무 탁자에 부딪힌 그것은, 용케도 깨지지 않고 데구르르 굴러가다 공구 담긴 유리병에 부딪혀 멈췄다. 약하게 찰랑거리는 소리와 속 빈 유리구슬 구르는 소리가 유리끼리 서로 강하게 맞닿는 소리를 끝으로 멎을 때까지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다. 바람이 다시 한번 나뭇가지를 헤집으며 지나갔다. 셔우드는 그동안 눈을 느릿하고 길게 한 번 깜박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그는 눈앞으로 미끄러내린 새까만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윤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퍽퍽한 빛깔이다.

 검은 머리의 그, 시스 프라이쉬츠는 셔우드가 만든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다. 가끔 모르가나를 통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을 빼고서는 이것이 또 처음이었다. 언제나 외부인에게는 알려줄 수 없다며 말을 돌리던 사람이 약간이나마 이야기를 흘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좀 더 자세히 들어보려는지 그는 평소대로 능청스럽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결혼 기념품이라, 진짜 의외시군요? 평소 모습만 보면 남의 연애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았는데.”

“글쎄, 일이니까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거지. 굳이 찾아 들으면서까지 얻을 것은 없으니.”

“그건 그렇죠? 굳이 남들끼리 연애질하는 이야기 따위 기억해 두어도 어디다 써먹을 만한 것도 아니고. 어디서 본 것에 얄팍하게 꽂혀서 그대로 따라 했다가는 어설프다고 욕만 먹고 말 테고.”

“말하는 게 수상한데, 본인 이야기인가?”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떨까요? 하지만, 저는 절대 아니다에 한 표."

 그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지. 능청스럽고 모호한 답을 내놓는 시스를 외면하며, 셔우드는 하바리움을 벽 한편에 기대어 서 있는 붙박이 서랍장의 두 번째 서랍에 고이 집어넣었다. 빈 상자 안에 넣어두기라도 한 건지 서랍을 다시 밀어 닫는데도 굴러가는 소리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노을이 비쳐 더 붉게 보이는 서랍을 대강 밀어 넣고 뒤를 돌아보니, 탁자 근처에 둥근 나무 의자 하나가 새로 놓여 있었다. 시스는 어느새인가 그것에 앉아 머스킷과 거의 똑같이 생긴 팔 하나 정도 길이의 마법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을 보아 서랍 소리에 의자 끄는 소리가 밀려났거나, 양손으로 들어서 옮겼거나 중 하나일까. 심지어는 바로 옆에 앉기에는 부담스러웠는지, 원래 있던 의자의 맞은편으로. 보통은 저걸 더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던가? 셔우드는 그를 잠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시스가 능청스럽게 싱긋 웃으며 말을 꺼내자 곧바로 시선을 약간 돌려버리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제가 굳이 이 바쁜 수요일에, 굳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더 중요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저는 공간 돌파를 쓸 줄 알아서 1분이면 도착하지만! 와, 재능도 이런 재능이 또 없다, 안 그런가요?"

 말을 잠시 끊고는 지팡이를 곁눈질하고, 말을 마치고는 잠시 앞을 바라보고,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며 그것을 다시 슬쩍 들어 올려 가볍게 빙글 돌려 보이고는 눈앞에 조금 더 가깝게 들이대었다가 도로 세워놓는 것을 보아하니 저것 때문이 분명하다.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다기보다는 5도 정도 기울어져 보이는 것이, 또 손잡이에 문제가 생겼나.

 완전히 갈라지고 깨진 손잡이를 수리받으러 왔던 것은 언제였을까. 셔우드는 아마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에 보이는 모습- 또는 지금 같은 저 행동거지와는 또 다르게 제법 신중한 성격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는 평가를 자주 듣는지라, 망가뜨릴 일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쥐여줬는데도 그리 처참한 몰골로 돌려보내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어도 말을 안 하고 능청스레 둘러대기만 하여 아직도 진상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행동하겠지. 시스는 한참을 그렇게 깐족거리다 그것을 탁자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너스레 떨기는. 이번에는 또 뭐가 말썽이지?”

“에이. 딱 봐도 뭐가 문제인지 아시잖습니까. 설마 본인 작품의 어디가 어떤 방식으로 문제인지 모르시진 않겠지. 안 그러십니까?”

 바로 알 수 있으면 그걸 물어봤을까. 셔우드는 건조한 말투로 그리 답하며 복잡한 모양새의 공구 몇 개를 병에서 꺼내 손 닿는 곳에 크기순으로 죽 늘어놓았다. 얼굴의 오른쪽 반과 달리 긴 귤색 앞머리에 덮이지 않은, 숲을 녹여 넣은 왼쪽 눈이 얼핏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잘못 건드리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한 것은 시스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것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갸름한 턱을 비스듬하게 괸 채 가만히 밑준비를 지켜보았다. 내려놓은 지팡이를 빼앗듯이 끌어당겨 바로 앞에 놓아둔 뒤, 끌을 닮은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옆면의 홈에 끼워 넣고 조심스레 몇 차례 문질러 엄지손톱 하나쯤 되는 크기의 새파란 광석을 분리하는 행동에 군더더기는 아직 없었다. 긁어내듯이 뽑아낸 광석은 쨍한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동시에 가장 뾰족한 모서리부터 슬며시 부스러지기 시작하니 언제 꺼내 왔는지 모를 흰 손수건 위에 올려두고서, 홈 안에 가볍게 한 번 숨을 불어보았다. 자잘한 파란색이 흐름을 따라 흩날리기에 미묘하게 변질되는 공방 안의 공기. 맞은편의 시스를 잠시 쏘아본 뒤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다시 집중하여 훑어보는 것을 보면, 약간의 먼지는 당연히 그리 큰 문제가 못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시스가 갑자기 찾아오게끔 만든 문제는 무엇일까.

 셔우드는 은근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냥 모르가나의 짧은 흑단 지팡이처럼 평범하고 무난한 지팡이를 써도 될 것을, 굳이 머스킷 모양으로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던 걸까. 굳이 머스킷과 거의 똑같게 만들어달라고 했던 그의 잘못도 있지만 장인 정신을 꺾지 못하고 굳이 옆 부분의 홈에 정제된 마나석, 그의 표현으로는 ‘마력 덩이’를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든 그의 탓 또한 있지 않을까. 시스는 그런 기능을 요구한 적 없이 외관만을 원했고, 이쪽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으니. 결국엔 둘 다 잘못한 셈이다. 과거와 다시금 마주한다면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이질적인 형상의 지팡이는 만들지 말아 달라고 전하지 않을까. 애초에 요즘 마법 지팡이 대부분은 한 손으로 쓰는 짧은 것이라고 하던데. 긴 건 낡은 이들이나 쓰는 것이며, 수틀릴 때에 물리력을 행사할 때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도 있다고.

“더 짧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어떻나. 쉘비의 것처럼. 진짜 총도 아니고, 단순히 그렇게 생긴 지팡이이니 일에 지장은 없을텐데.”

“확실히 효율을 따지자면 그게 낫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특무정예팀 지정사수인데 평범한 지팡이는 뭐랄까, 멋이 안 산달까. 아직 총기 사용 허가증도 없고 위험도 높은 사냥에서는 후방 배치라지만서도 말입니다. 텔 후배님이 지시 받는 그 순간에 안경 벗으면서 저격태세 취하는 걸 보고만 있자면 좀 부럽기도 해서.”

“겉멋 챙기다 걸레짝 되는 수가 있다.”

“제가 지금 대장님 앞에 있는 건지, 재정비를 하러 온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하시는 말씀이 대장님 그 자체시니 못난 최연소 대원 머리에 피가 싹 마르는 것 같기도 하고…. 대장님이 무슨 부탁이라도 하신 건 아니겠죠?”

 내부 기밀을 아주 중요시한다는 신비주의자께서 어련히도 그랬겠군. 그리 읊조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천천히 돌려보던 찰나, 작지만 선명하게 갈라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위치는 얼핏 보아서는 잘 모를 안쪽 끝부분. 정도는 훨씬 덜했지만, 지난 달에 부서진 부분과 아주 같은 곳이었다. 분명 새것으로 갈아 끼웠을 텐데 또다시 이렇게 갈라지다니. 지난번에는 분명 ‘사냥감’이 예측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근접하는 바람에 손잡이로 내리찍었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얼마 못가서 얼룩덜룩하게 변한 손잡이는 소각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 들고왔다가 그에게 낙엽으로 맞고, 내부에서 처리할 물건을 협력 업체에 가져갔다는 이유로 대장에게 고드름으로 또 맞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탓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때가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그때 손잡이 없는 지팡이와 함께 돌아온 그의 머리카락에는 서리가 끼어있었다.

“찾았다.”

“그것 보세요. 금방 찾으셨네. 그 정도는 돼야 공방 장인이죠. 솔직히 이쯤 되면 좀 경이롭기도 하고…….”

“허튼소리는 이제 그만. 또 손잡이를 부숴 먹었군. 지난 번이랑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잖습니까. 그냥 좀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떨까요.”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속에 널브러져 있던 거치대를 들고 온 셔우드가 혀를 찼다. 한 번만 더 망가트리면 고쳐주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며 접힌 거치대를 탁자 위에 펼쳐 지팡이를 거꾸로 뒤집어 올려둔 뒤, 찬장에서 병 몇 가지를 꺼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걸로 메우면 임시방편은 되겠지.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각각 다른 굵기의 공구 하나씩을 끼우며 셔우드가 다시 중얼거렸다. 대강 눈대중한 크기에 맞춰, 병에서 꺼낸 점토 같은 질감의 무언가를 떼어내어 그 공구들로 모양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붙였다 떼어내면서. 고작 임시방편밖에 안 됩니까? 손가락을 들어 어느덧 어스름해진 창밖을 가리키니 걸고넘어지려던 시스는 잠시 조용해졌는데, 그 잠깐에 공구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창밖의 어스름을 피해 눈을 돌렸다가, 소리 하나 없이 까치발을 들고 살짝 열린 문틈에서 빛나는 연분홍색 동그라미 둘과 엷은 박하색 동그라미 둘을 마주쳐버렸다.

 너희 둘은 또 거기서 뭐 합니까. 그러는 형은 거기 앉아서 뭐 해요? 아니,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건 민폐라고 생각지 않슴까?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죽치고 있으면 그쪽 대장님이 안 혼내심까? 음, 혼나겠죠. 아마 숨은 적당히 붙어있을 정도로? 그럼 제발 좀 가십쇼. 나도 이제 좀 가고 싶네요. 그럼 보름치 님이 화내기 전에 돌아가면 되잖아요?

 좁은 틈새로 눈살과 오르내리는 눈꺼풀을 통해 주고받는 소리 없는 대화에 약간의 눈짓이 더해졌다. 투명한 파란색이 잠시 탁자에 놓인 지팡이 쪽으로 굴러가자, 연분홍과 박하색은 두 번 빠르게 깜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얄따란 붓을 들고 메워진 부분을 주변과 같이 어두운 쪽빛으로 덧칠하던 셔우드는, 반대로 지팡이에서 맞은편의 시스를 거쳐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 녀석들은 언제부터 저러고 있나. 작은 원형의 그늘진 숲이 반 조금 안 되게 접혔다. 에라, 나는 모르겠다. 즐거운 상담 되십쇼. 연분홍색은 그리 말하듯 한번 찡긋하고는 슥 사라졌다. 빠른 발소리에 이어서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참 요란하기도 했다. 엷은 박하색도 그녀를 뒤따라 사라졌다. 앞선 소리보다는 조용했다.

“우선 갈라진 곳은 적당히 메워두었으니 다음에 조금 더 일찍 와서 제대로 확인을, 아니. 그냥 지금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낫겠지.”

“굳이 지금요? 이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괜히 수리 끝나고 얼마 안 돼서 썼다가 아주 박살 나는 거 아닐까요.”

 돌려받은 지팡이를 들고 공방 밖으로 나서던 시스에게 그리 말하던 셔우드는, 대답도 않고 먼발치에 이파리가 풍성한 덤불 하나를 순식간에 길러냈다. 시스가 막 고쳐진 지팡이 손잡이를 매만지는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인지, 슬쩍 다가가 과녁이랍시고 얄팍한 나무판 몇 개까지 달아놓는 것을 보니 정확한 확인이 필요한가 보다. 아니, 뭐… 써보라면 써야겠죠? 평소 방식 그대로? 머뭇거리던 시스는 지팡이를 평범한 머스킷이 그러하듯이 조심히 들어올려 눈앞의 덤불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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