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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late, nor too early

마글로르 드림 | 라임 님 커미션 :3

rhindon by 댜

외로운 섬 동쪽 해안에 세워진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지만,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을 마르 티알리에바 곧 ‘기쁨의 집’이라 불렀다. 그게 임라드리스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임라드리스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곳이었고, 그 비밀이 공공연한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제3시대의 끝자락에 가서야 일어난 변화였으니까.

그러나 이름의 기원을 아는 사람들은 저택의 주인 또한 알고 있었고, 이날 그 깊은 곳의 서재에 모인 세 요정도 운 좋은 소수 중 일부였다.

“늦으시는군요.”

정적을 깨며 글로르핀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세 사람 중 이 자리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것 역시 그였다. 발리노르로 돌아온 후 그는 더는 엘론드의 가신이 아니었지만, 엘론드와의 친분은 여전했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일 또한 잦았다. 엘론드가 어떤 일을 의도할 때 글로르핀델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면 다른 둘 중 하나로 말하자면, 그는 초대에 응한 지금까지도 자신이 여기 불려온 이유를 궁금해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창틀로 비쳐드는 햇빛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약속한 시각은 아직 지나지 않았소만.”

“그러니 말입니다. 엘론드 공은 항상 먼저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희게 센 눈썹 하나를 추켜세웠던 키르단은 글로르핀델의 대답에 흠 소리를 냈다. 엘론드와 키르단은 오랫동안 비슷한 의무를 지켜 왔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직접 대면한 적은 잦지 않았다. 적어도 이제 키르단의 손이 대양을 건널 선박을 건조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의 굳은살은 전과 다름없었고, 어지간해서는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엘론드의 청 정도가 아니었다면 키르단은 항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더 설명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글로르핀델 대신 키르단은 마지막 한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 여기에야말로 정말로 만나기 쉽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잡담에는 끼지 않은 채 서재의 책장을 훑어보던 갈라드리엘이었다.

발리노르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갈라드리엘은 오래 만나지 못했던 딸과 지내기 위해 엘론드의 집에 눌러앉다시피 했었지만, 몇십 년 뒤 재회의 기쁨이 누그러지고 켈레보른도 돌아오자 발리노르 대륙으로 떠나갔다. 이곳에서 갈라드리엘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었으나 그에게서는 글로르핀델의 초조함도, 키르단 자신이 느끼는 묘한 불안도 엿볼 수 없었다. 갈라드리엘이라면 이 회담의 목적을 알고 있을까? 적어도 짐작했을 것은 분명했다…….

결과적으로는 키르단이 옳았다.

집주인은 늦지 않았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막 다 울렸을 때 서재의 문이 열리고, 그들 모두가 익히 아는 요정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모두 도착하셨지요?”

인사도 없이 출석부터 확인한 엘론드는 세 사람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더니, 서재 한가운데 놓인 둥근 탁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손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당황을 감추며 그를 따라 탁자 주위로 둘러 자리를 잡았다.

회의를 주재하는 것은 엘론드의 특기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리는 원탁이었을지 모르나 좌장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모인 이들을 향해 엘론드는 간결히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발리노르에 도착한 지도 이백 년이 되었습니다.”

세 요정은 각자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단은 내심 엘론드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긴장한 듯 보인다고 느꼈다. 엘론드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계속했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지막 배는 항해하지 않았지요. 가운데땅에는 지금도 우리 동족이 남아 있고,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서녘의 안식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란두일 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로르핀델이 물었다. 하지만 예리한 눈빛으로 엘론드를 바라보던 갈라드리엘은 거기에 덧붙여 지적했다.

“그리고 마글로르 또한 그대의 염두에 있지 않습니까?. 그대가 F 카나핀위엘(Kanafinwiel)을 만나려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엘론드.”

“한 번만 듣지도 않으셨겠지요.”

엘론드는 꺼릴 것 없다는 듯 순순히 인정했다. 지난 이백 년간 그는 몇 번이고 마글로르의 딸을 만나려 시도했었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건 핀웨 가문 요정들은 대부분 모르는 척해 주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갈라드리엘은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았는데, 순전히 그가 핀로드의 누이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아만에서 핀로드만큼 F를 신경 쓰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핀로드는 입이 가볍지는 않았으나 갈라드리엘을 신뢰했고 때로는 조언자로 삼았다. 자연히 갈라드리엘은 F에 관해서도 꽤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 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갈라드리엘에게는 마글로르에 대한 애정이 그리 깊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한때 멜리안의 제자였었고, 님로스는 켈레보른을 통해 그의 조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갈라드리엘은 핀로드를 사랑했다. 핀로드가 F를 염려한다면, 갈라드리엘 역시 조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핀로드는 F를 염려했다.

“그래, 여러 차례 들었답니다. 마글로르를 데려온다면 F가 포르메노스 밖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핀로드와 비슷한 계산을 하셨군요. 아니면 그와 이미 이야기된 일인가요?”

대답 대신 엘론드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일 뿐이었다. 갈라드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엘론드,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요. 난 그대 계획을 짐작할 수 있고,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성공한다면 다른 일은 몰라도 최소한 핀로드의 고민은 덜어지겠지요.”

엘론드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은 착각의 여지 없이 선명한 안도였다. 뒤이어 고개를 돌린 그는 어렴풋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을 지켜보던 글로르핀델을 향해 물었다.

“글로르핀델. 자네는…….”

“핀로드 전하를 돕는 일이라면 저는 찬성입니다.”

글로르핀델은 가볍게 말했지만, 잠깐의 정적 뒤로 이어진 말에는 옅은 연민이 섞여 있었다.

“저는 마글로르 페아노리온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운명에는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기도 하고요.”

사실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서녘 요정들이 마글로르에 관해 지니고 있는 견해였다. 고개를 끄덕인 키르단은 그제야 뒤늦게 물었다.

“좋소. 그래서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요?”

그러자 엘론드는—그가 고귀한 엘론드 공이자 여름처럼 다정한 현자만 아니었다면—사악하다고 불러도 좋을 미소를 지었다.

 

 

키르단은 직항로를 거슬러 항해할 배를 건조해 주기로 하기는 했지만, 이 동의는 조건부였다. 만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하지 못할 항해이니 (여기서 나머지 세 요정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일단 만웨부터 만나고 오자는 것이었다.

뭐, 그쯤이야.

“가운데땅에 남아 있는 요정들 또한 당신의 백성이 아닙니까? 만웨 술리모, 아르다의 군주여.”

엘론드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거기 담긴 대담함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타니퀘틸의 두 왕좌 앞에 서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그 수가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축복받은’ 에아렌딜과 엘윙의 아들이 그로부터 제외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들이 숲의 그림자로, 아득한 기억으로 희미해지는 것을 당신이 원하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초록숲의 스란두일을 말하는 것인가?”

숲의 옛, 그리고 되찾은 이름을 말하는 만웨의 목소리에는 태초의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엘론드는 여느 요정을 대하듯 태평하게 웃었다.

“그의 아들은 이미 이곳에 있지요. 그의 가족들도 모두 여기 있습니다. 없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가 돌아오지 못할 이유뿐이지요.”

‘그’와 ‘그의 아들’은 스란두일과 레골라스를 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겠지만, 엘론드의 말을 듣던 글로르핀델은 그 모호함에 묘한 재미를 느꼈다. 뒷사정을 깊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엘론드가 가운데땅에 남은 또 다른 요정을 아버지로 여긴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기도 했고.

곁눈질로 바라본 갈라드리엘의 입술 역시 웃음을 참으려는 듯 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갈라드리엘은 곧 엘론드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서녘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지 않았습니까? 발라르의 은총 아래에는 용서가 있고요.”

비꼬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갈라드리엘의 말에 뼈를 심었다. 갈라드리엘은 짧게 숨을 내쉬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만웨를 향해서는 아니었다.

“오래전 만도스는 우리 비탄의 메아리조차 당신들에게 닿지는 않으리라 말했지요. 하나 이제 심판은 거두어졌습니다. 당신에게는 놀도르의 애가(哀歌)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바르다 틴탈레, 별들의 군주여?”

그러자 만웨 곁에 말없이 앉아 있던 바르다가 눈을 떴다.

가운데땅을 떠돌던 망명 놀도르는 바르다를, 엘베레스 길소니엘을 노래했다. 그건 그들이 만웨를 칭송하길 꺼렸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바르다가 그들 목소리를 들을 것을 안 까닭이기도 했다. 세상의 동쪽 끝에서 꽃봉오리가 오므라드는 소리마저 바르다는 천둥만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거친 해안선에 흐르는 놀도란테가 바르다에게 닿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갈라드리엘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바르다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그 앞에 선 네 요정은 바르다의 눈시울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눈물로 젖은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달 이전, 두 나무보다도 오래된 시대에 세상의 등불들로부터 샘처럼 솟아 나오던 빛이 바르다의 뺨에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들리지.”

바르다의 목소리에는 바람 대신 밤의 적막뿐이었다. 만웨는 두 왕좌의 간격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엘렌타리.”

밤하늘의 모든 별을 밝히던 손길이 만웨의 독수리 발톱 같은 손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돌아오게 하세요.”

숨 죽은 영원이 흐르는 동안 바르다의 얼굴을 살피던 만웨는 다른 손을 들어 바르다의 손등을 덮었다. 아르다의 군주들을 흔한 이웃처럼 상대하는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의 태도가 경탄을 끌어냈다면, 아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친밀한 부부처럼 행동하는 만웨와 바르다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글로르핀델은 다시 한번 동행들을 바라보았다. 엘론드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은 채, 갈라드리엘은 씁쓸함과 조소가 뒤섞인 얼굴로 두 발라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키르단은 그러나 지레 포기한 얼굴이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만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들을 돌아오게 하라.”

짧은 말이었지만 그들은 심판의 종소리를 들었다. 엘론드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하여 어느 화창한 여름 아침, 키르단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은 선박은 톨 에렛세아의 항구를 떠나 가운데땅으로 향했다. 이스타리의 출항 이래 이천 년 넘는 세월 만에 성사된 첫 동녘으로의 항해였다.

 


 

타니퀘틸에서도, 톨 에렛세아에서도 며칠은 여행해야 할 만큼 떨어진 곳에는 외딴 장원이 하나 있었다. 혼인하여 떠나가는 여동생에게 잉궤가 지참금으로 넘겨주었고, 다시 놀도르의 옛 (또 은퇴를 간절히 희망하는 피나르핀의 주장에 따르자면 ‘차기’) 대왕인 핀골핀이 물려받은 장원은 지난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망각 속에 버려진 처지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지금, 이곳에서는 이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탄식 같은 질문도 포함되었다.

“오늘도 다녀온 거니?”

대답이야 불 보듯 뻔했다. 카란시르의 얼굴은 아직도 불그죽죽했고, 그 원인은 부끄러움만은 아닌 게 분명했으니까. 그의 왼쪽 뺨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던 것이었다. 카란시르는 장성한 어른답지 않게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니스티르.”

네르다넬은 한숨과 함께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네르다넬의 교육 원칙은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라’라는 것이었다. 가만 내버려 두어도 말이 많은 다른 아들들과 달리 카란시르에게는 어느 정도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원칙이었다.

“그래요, 어머니.”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울하기 짝이 없어서, 네르다넬마저 더 타박할 마음을 품지는 못했다.

살벌한 언쟁을 벌인 끝에 다시 한번 결혼 생활을 시도해 보기로 한 네르다넬과 페아노르나, 아예 이혼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은 쿠루핀과 달리 카란시르의 부부 관계는 아직 어느 쪽으로든 해결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페아노르와 그 아들들이 어찌어찌 발라르의 용인을 얻어 재육했다고는 하지만, 산 사람들의 세상에서 흘러간 몇천 년의 세월은 사회와 관계를 복잡하게 얽어 놓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들이 티리온 왕궁에 머물거나 아만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한 번 호된 맛을 본 텔레리는 페아노르가 다시 티리온에 발을 들일지 모른다는 소식만 접해도 봉기를 일으킬 태세였었고, 발리노르를 떠돌 가능성에는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다시 포르메노스로 보낼 수도 없었다. 그곳은 이미 마글로르의 딸 F의 소유였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페아노르 가문은 결국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핀골핀이 그들에게 머물 땅을 내어주리라고 누가 짐작했겠는가?

새로 세워진 저택의 돌들은 아직 모서리가 날카로웠고, 발밑의 땅은 주인들을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곳에는 평화가 있었다. 또 페아노르가 있었고, 일곱 아들 중 여섯이 있었다. 비탄 속에 세 시대를 지새웠던 네르다넬은 이제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카란시르는 그러기 어려운 모양이었지만.

“오늘은 얼굴은 봤어요.”

“그리고 네 얼굴이 값을 치렀구나.”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은 아니나 다를까 페아노르였다. 막 대장간에서 돌아왔는지, 땀과 쇠 냄새를 덮어쓴 페아노르는 예의 그 무심한 듯 다정한 손길로 카란시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다시 물러나 말했다.

“차라리 아타린케의 아내가 나은걸. 이렇게 질질 끌지는 않았으니.”

네르다넬은 페아노르를 한 번 흘겨보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지요.”

“그러고 보니, 마칼라우레의 아내는 어찌 되었습니까?”

화제를 돌리려는 게 뻔한 질문이었다. 네르다넬은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다시 달싹거렸다. 황당무계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F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집안이 발칵 뒤집힌 지 며칠 후에는 네르다넬에게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을 들을 차례가 돌아왔다.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핀로드가 페아노르 가문의 반(半) 유배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바르다와 만웨는 이미 그들의 허락을 내렸어요.”

핀로드는 차분한 어조 아래 일렁이는 감정을 감춘 채 말했다.

“물론 명시적이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반대하지도, 방해하지도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세상의 권능들에게 있어 그건 권유나 다름없지요.”

식은 찻잔을 내려놓은 네르다넬은 한참 침묵한 끝에 물었다.

“그들이 성공할 것 같니?”

핀로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단언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도 누군가 성공할 수 있다면 그건 그들일 겁니다.”

모호한 말은 발라르만의 특기가 아니었다. 핀로드가 이렇게 이야기한대도 엘론드 일행은 몇백 년간 소득 없이 해안을 떠돌다 돌아올지도 몰랐고, 감히 바랄 엄두를 내 본다면 며칠 만에 찾으려는 사람을 마주칠지도 몰랐다. 어쨌든 핀로드는 자신의 말마따나 이런 불확실한 조건 속에서 단언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신 그는 단순한 사실만을 덧붙이며 말을 마쳤다.

“이 시대에 엘론드만큼 마글로르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고, 갈라드리엘은 가운데땅의 군주 중 하나였으며 다른 두 사람도 위대한 요정영주니까요.”

“헛된 희망을 품고 싶지는 않구나. 하나…….”

하지만 마글로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아무리 작더라도 강렬했다.

네르다넬의 일곱 아들들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아는 이들은 대개, 일곱 중 여섯을 되찾았으면 네르다넬이 충분히 행복해하리라 여겼다. 금화 한 무더기를 가졌으면, 한 닢쯤은 잃어버린대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아, 그자들은 틀렸다. 네르다넬은 마글로르의 부재를 칼에 찔린 상처처럼 날카롭게 느꼈다. 마글로르가 살아서든 죽어서든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물지 못할 아픔이었다.

“그리 느끼시는 것도 당연해요.”

핀로드는 손을 뻗어 네르다넬의 손등을 덮었다.

“그래도 전 그들이 해낼 거라 믿습니다. 저는 불가능해 보이던 많은 희망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지요……. 먼 옛날 가운데땅에서 마글로르는—더해 마에드로스는—저와 함께 너른 대지를 누비던 친족이었었고, 저는 마글로르가 영영 저쪽 해안을 헤매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리고 너는 F를 몹시 아끼지.”

“언제나 그렇듯 백모님께서는 지혜로우시군요! 맞아요, 저는 F를 아끼고, 그 아이가 치유를 찾기를 바랍니다. 치유가 필요 없더라도 최소한 더는 외롭지 않기를요.”

F는 아이 취급을 받을 나이가 아니었다. 실은 그럴 나이가 지난 지도 몇천 년은 되었다. 그러나 F의 친족들이 그를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은 F가 스스로 선택한 고립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 그 작은 소녀는 자신만의 방에 갇혀 영영 성장하지 않기로 한 듯했다. 부모를 일찍 잃은 요정의 아이들에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대개의 경우 그런 아이들은 가족을 되찾았을 때 어느 정도는 세상에 발을 내디디게 되기 마련이었다. 핀로드가 염두에 둔 것도 그런 결과일 테다. 네르다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단다.”

“하지만 백모님께는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이제 핀로드는 약간 멋쩍은 기색이 되었다.

“제 사촌들도, 페아노르 백부님도 이제는 F의 존재를 알고 계시더군요. 켈레고름과 쿠루핀이 F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었거든요.”

얼마 전 네르다넬이 뒤늦게 F의 소식을 전한 후, 저택에는 한 차례 파란이 일었었다. 마글로르를 그리워하는 것은 네르다넬뿐만이 아니었던지라, 마글로르의 형제들도, 페아노르도 F를 만나러 갈 계획을 짜는 데 열심이었다.

네르다넬이 F의 상황에 관해, 다시 말해 F가 페아노르 가문에 호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전했기 망정이었다. 그런 만류 없이는 일곱 명 모두 지금쯤 포르메노스 문밖에서 진을 치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핀로드는 아직도 네르다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은 한 층 더 진지했고, 조금은 절박하기까지 했다.

“F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그 아이는 포르메노스에 틀어박혀 누구도 만나지 않으려 할 겁니다. 시대가 또 한 번 바뀌기 전에는요.”

네르다넬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 F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가운데땅으로 간 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요.”

지혜로운 네르다넬에게 거짓말을 요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그게 선의의, 그리고 누락에 의한 거짓말이라 한들. 핀로드는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었고, 네르다넬 역시 핀로드가 스스로 무엇을 청하는지 이해하면서도 결국 이런 말을 입 밖에 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핀로드가 잔뜩 긴장한 채 바라보는 앞에서 네르다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그리고 내 남편과 아들들도 내게 맡기렴. F에게 함부로 다가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어.”

양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양심은 네르다넬을 휘두르지 못했다. 사람들이 또 한 가지 착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네르다넬은 페아노르보다 신실했기 때문에 서녘에 남은 것이 아니었다. 페아노르와 혼인했을 때도, 그를 떠났을 때도, 가족을 저버리고 발리노르에 머물기로 결정했을 때마저도 네르다넬은 그저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바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페아노르를 다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이 순간 네르다넬은 F를 위하고자 했다. 거창한 이유 없이, 오직 그가 F를 연민했기 때문에.

핀로드는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제는 티리온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오래된 예법이었다.

“감사합니다, 백모님.”

“그러기에는 때가 이르구나.”

네르다넬은 조용히 말했다.

“우선 떠난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야겠지…….”

 


 

핀로드와 네르다넬의 기원이 무색하게도, 가운데땅의 마지막 현자, 황금숲의 옛 주인, 고대의 조선공, 그리고 이름난 발로그 살해자까지 힘을 합쳤으나 추격에는 결국 한 해가 다 걸렸다.

꽁꽁 묶여 백사장 한가운데 앉혀진 요정을 보며 갈라드리엘은 복잡한 감회를 곱씹었다.

한때 마글로르는 티리온의 왕자이자 놀도르의 가장 위대한 가수였었다. 그러나 지금 갈라드리엘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인간 거지라 해도 좋을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꼭 너덜너덜한 망토라든지, 발싸개나 다름없는 신발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글로르가 스스로 취하는 태도부터가 바뀐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오랫동안 갈라드리엘은 도리아스의 장막 속에 머무르며 친형제가 아닌 이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었다. 멜리안이 떠나고 장막이 사라진 뒤에는 그 역시 도리아스를 벗어났기 때문에, 페아노르의 아들들이 도리아스를 공격했을 때도 그들과 직접 마주칠 일은 없었다. 분노의 전쟁 때조차 그들의 행로는 엇갈렸다. 그러니 마지막이라면…… 메레스 아데르사드, ‘화해의 연회’.

그때 마글로르는 동부변경의 지휘관이었었고, 벨레리안드 동부에서 가장 뛰어난 기마대를 이끌었으며 한 치 망설임 없이 다에론과 노래를 겨루었었다.

“마글로르.”

엘론드의 한마디가 갈라드리엘의 상념을 흩뜨렸다. 마글로르는 묶인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엘론드가 다가서자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몸짓은 글로르핀델의 다리에 가로막혔고, 글로르핀델은 모래 위에서 꿈틀거리는 동족 살해자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마글로르!”

다시 한번 부른 엘론드는 서둘러 마글로르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해초처럼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마글로르의 얼굴을 드러내고는 조용히 물었다.

“다쳤어요?”

“조심했습니다.”

도통 입을 열지 않는 마글로르 대신 글로르핀델이 답했다. 어쩌다 보니 추격대의 무력을 담당하게 되었던 게 글로르핀델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산발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듭지어 묶으며 글로르핀델은 몇 마디 더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물을 가져오는 건데.”

엘론드는 잇새로 숨을 내쉬었다. 타박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아니, 수고했습니다. 마글로르, 우리가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 거예요.”

엘론드가 말하는 것은 지난 한 해의 추격만이 아니었다. 분노의 전쟁이 끝나고, 마에드로스의 최후가 알려진 후로 엘론드는 꿋꿋이 마글로르를 찾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몇 년, 혹은 몇십 년씩 손을 놓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의도만큼은 결코 흔들린 적 없었다. 육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마글로르는 그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을 시간에 매달려, 결국에는 옛 인연을 붙잡았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걸 그리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마글로르는 참다 못한 갈라드리엘이 입을 열기 직전에야 비로소 정적을 깨뜨렸다.

“너는.”

이번에는 갈라드리엘이 놀랄 차례였다.

금빛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마글로르에게서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은 그 겉모습이 아니었다. 오래전 그에게 ‘카나핀웨 마칼라우레’의 이름을 부여했던 아름답고도 강력한 음성은 이제 까마귀처럼 거칠고, 미약해진 뒤였다. 갈라드리엘은 태양 아래 세 시대를 보낸 요정이었다. 이런 쇠퇴와 손실은 갈라드리엘의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지 못할 연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너는 바다를 건넜다고 했는데.”

두려워하는 것일까? 먼 옛날 그가 보호했던 아이가 서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것을?

“제 소식을 듣고 계셨어요?”

엘론드가 당황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마글로르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지만, 엘론드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건넜어요, 그리고 다시 왔죠. 당신을 데리러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니니까! 만웨 술리모가 허락한 일이라고요. 명목은 스란두일 왕을 데려가는 거지만……. 도리아스와 시리온의 원한이 잊혔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스란두일 역시 눈감아 주겠다고는 하더군요.”

“서녘의 모두가 옛 학살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리 쉽게 눈감아 주지도 않을 테고.”

말을 계속할수록 마글로르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질 뿐이었다. 마글로르는 눈을 굴려 글로르핀델을 바라보더니, 갈라드리엘에게도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먼저 답한 것은 여전히 마글로르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글로르핀델이었다.

“내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한 이들을 당신은 쉽게도 살해했으나…….”

짧은 한숨.

“나는 복수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마글로르 페아노리온.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 또한 존재함을 알 만큼 지혜로워졌거나, 최소한 나 자신이 그리되었노라고 믿고 싶어 하지요.”

“나는 핀다라토를 위해 온 거야.”

갈라드리엘은 퀘냐로 바꿔 말했다. 더 부연할 생각은 없었다. 마글로르는 왜 핀로드가 거론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에 관해 묻는 대신 다시 엘론드에게 말했다.

“게다가 서녘에 남은 것 중 내가 마주하길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어. 그곳에 무엇이 있지? 내가 거부한 권능들, 내가 지은 죄의 피해자들, 날 평생 쫓을 죄책감?”

자신이 있을 거라는 대답은 엘론드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갈라드리엘이 보기에 그만큼 명확한 답은 또 없었는데도. 대신 엘론드는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마에드로스는 돌아온걸요!”

마글로르의 얼굴이 충격으로 돌 가면처럼 뻣뻣이 굳었다.

“마에드로스도, 당신 다른 동생들도요. 당신 아버지까지! 이제 그들 모두 발리노르에 머물고 있어요. 네르다넬 님도 그들과 함께이시고요. 그리고, 그리고…….”

“딸이 있지.”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키르단이었다. 놀도르에게 사적인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는지, 그들과 거리를 둔 채 파도만을 살펴보고 있던 키르단은 이때에야 일행에게 돌아왔다. 갈라드리엘은 한때 ‘불의 반지’ 나랴가 키르단에게 맡겨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는 나랴를 가장 훌륭히 다룬 것은 미스란디르였었지만, 키르단 또한 나랴의 정당한 소유주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키르단의 말에 새로운 지지대를 얻은 것처럼, 엘론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몰랐겠지만, 당신이 떠나고서 당신 아내는—아, 유감이에요, ‘전(前)’ 아내죠—아이를 낳았어요.”

“아이라고? 딸……?”

마글로르는 황망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론드가 그답지 않게 성급히 전한 이혼 소식은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한 투였다. 엘론드는 자신의 이야기가 마글로르에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갈지 모르는 것처럼, 아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름은 F이에요. 다들 그러기를 그분은 핀웨와 미리엘을 빼닮았다더라고요. 미리엘 세린데처럼, 자아낸 은실같이 희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핀웨 놀도란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요. 지금은 포르메노스에서 살고 있다는데, 저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은 그분의 아버지고…….”

“어떤 느낌이 있기는 했어. 내 착각이리라 여겼었지. 설마…….”

그 순간 갈라드리엘은 가슴 속에서 어떤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은 단지 핀로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마글로르의 귀환을 용납하고 심지어는 바랄 수까지 있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 역시 딸을 두었고, 딸을 만나기 위해 서녘으로 항해했었으므로.

갈라드리엘은 엘론드의 옆으로 붙어 서며 마글로르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에도 친밀했던 적 없고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어야 할 친족이었다. 하지만 갈라드리엘은 복수의 맹세 대신 설득을 이야기했다.

“서녘에 무엇이 있냐고? F가 있지. 당신 형과 동생들이 있고, 부모가 있어.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적어도 그건 영원한 어둠도, 공허도 아닐 거야.”

가시 돋친 말이 엘론드에게는 조금 못마땅했던 모양이지만, 엘론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갈라드리엘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갈라드리엘은 한 번 뜸을 들인 다음 마침내 쐐기를 박았다.

“우리와 돌아가자, 마칼라우레. 가서 당신의 의무를 다해.”

 


 

“마지막 요정이라고요?”

“그래, 조카님. 함께 나가 그를 맞이하지 않겠어? 외출하지 않은 지도 한참이잖아.”

F는 고민했다. 웬만하면 이런 식의 초대는 거절했겠지만, 이번에는 초대의 주체가 핀로드였다. 지난 몇 년 유독 F에게 신경을 써주던 핀로드. F는 핀로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조건을 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잠깐만 보고 돌아오는 거예요. 아시겠지요?”

그렇게 F는 늦봄 어느 날, 핀로드 내외와 함께 알쿠알론데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지막 요정의 귀향을 맞이하는 것치고 인파가 크지는 않았다. 하긴 알쿠알론데로 오는 배는 톨 에렛세아를 거치기 마련이었으니,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귀환자를 맞는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톨 에렛세아로 건너가고는 했다.

누구도 페아노르 가문 사람을 배에 태우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배는 돛에 그려진 문양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온 뒤였다. F의 시력은 청력만큼 예민하지는 않았으나, 뱃머리에서 서 양팔을 벌린 요정의 모습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받아 휘날렸다. 그 위로 쓴 장신구는—관이라고 해야 할까?—생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모양이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거기 달린 열매는 막 딴 것처럼 생생하고 싱그러웠다.

“스란두일 왕이겠구나.”

핀로드는 해설해 주듯 말했다.

“지난 시대 가운데땅에서 그는 숲요정들의 왕국을 다스렸었지. 엘론드는 그를 찾으러 갔었단다.”

“엘론드요?”

F는 당황해 되물었다.

여기서 엘론드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핀로드를 거절했을 텐데! F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망칠 길을 찾으려는 본능이었을 테다. 하지만 F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안타깝게도 퇴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그건 과거에서 튀어나온 유령에 가까웠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요정이 불신과 기쁨이 어린 얼굴로 F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F!”

“……할머니?”

아, 이제는 정말 달아나고 싶었다. F는 더는 다른 곳을 보지도 못하며 여우 앞의 토끼처럼 굳었다.

어릴 적 자신을 보살펴준 네르다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모두가 그와 네르다넬을 보고 있을 테고, 그들이 나누는 모든 대화, 모든 몸짓을 분석하려 애를 쓸 텐데. 게다가 이런 곳에서라면 F는 그런 수군거림을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역시 네르다넬과는 마주치지 않는 편이, 이미 마주쳐 버렸다 해도 오래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 편이 나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서야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F의 눈에 그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네르다넬을 쫓아 온 또 한 명의 요정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이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F와의 혈연을 부인하려 해야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성난 듯한 눈매도, 열렬한 분위기도 골격과 이목구비 자체의 유사성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 옆에 거울을 세워둔다면 거울에 비친 F의 모습은 남자와 부녀처럼 빼닮아 있을 게 뻔했다.

F는 자신이 핀웨와 미리엘만을 섞어 만든 아이 같다는 수군거림을 질리도록 들어 왔었다. 이 순간 심상찮음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아, 형님!”

그리고 이런 식의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땅에서 솟은 듯 나타난 피나르핀이 네르다넬 곁의 남자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피나르핀이 ‘형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단 둘뿐이었고, 이 자는 어딜 보나 핀골핀이 아니었다…….

그때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저만치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F에게는 사냥개 한 떼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당당한 체격의 남자들 사이에서도 유별나게 키가 큰, 그리고 네르다넬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요정이 F와 네르다넬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어머니, 방금 F……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둑이 터진 듯 나머지 요정들도 한꺼번에 묻기 시작했다.

“F?”

“마칼라우레의 딸?”

“둘째 형네 따님?”

이젠 주변 시선이야 어찌 되든 여기서 달아나야만 했다. 그러나 확 몸을 돌리려던 F는 왼팔을 붙잡는 손에 제지당했다.

“아마리에 님!”

핀로드의 오랜 약혼자이자, 이제는 아내가 된 요정은 햇살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바냐르가 온화하다고 했지? 아마리에는 강철 같은 손아귀로 F를 붙든 채 상냥하게 물었다.

“벌써 가려는 건가요, F? 배는 정오에나 도착할 텐데요.”

“하지만……!”

F는 도움을 구하려 이번에는 핀로드에게 눈길을 던졌다. 핀로드는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가와 F의 오른팔을 덥석 잡았다.

“자자, 그러지 말고 인사하자. 조카님,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페아노르. 그리고 이쪽은…….”

 

 

워낙 인원이 많았던 탓에, 또 그중 말수가 적다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적어도,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F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좋다고 웃고 있는 네르다넬과 핀로드, 아마리에, 피나르핀이 얄미워 팔짝 뛸 지경이었지만 F는 주변 인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때 페아노르의 아들 중 한 명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외쳤다.

“배가 곧 정박하려나 봅니다!”

그러자 모두가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았다.

뱃머리에 서 있던 스란두일 왕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대신 그 자리에서는 네 명의 요정이 F는 알아볼 수 없는 수신호를 의기양양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의 정체는 명백했다. 금발의 여인은 핀로드와 피나르핀의 가족이 아닐 수 없었고, 은빛 관을 쓴 남자는 어느 모로 보나 루시엔의 후손이었다. F는 곧장 이 사태의 원흉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F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아도, 핀로드는 모르는 척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거기엔 심지어 적잖게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마저 깃들어 있었다.

“갈라드리엘과 엘론드지. 옆에는 조선공 키르단과 황금꽃의 글로르핀델이고.”

F의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말거나, 핀로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조카님은 만나본 적 없겠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대꾸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F는 정말로 엘론드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핀로드는 배신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없다는 듯, 배를 가리키며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F는 핀로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핀로드에게 속은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귓가에 울리는 파도 소리가 점점 커져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르다넬 한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운 평정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을 텐데, 페아노르와 그 아들들까지 한자리에 있자 F는 온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고 해서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 몇천 년간 페아노르 가문은 F를 포르메노스에 가두어둔 위협이었고, 그런 상대를 마주하기란 F보다 백 배는 용감한 전사에게도 힘겨운 일일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F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핀로드의 말소리마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주먹을 꾹 말아쥐자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F는 오직 그 감각에 의존해 가까스로 제 발로 선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마지막 남은 거리를 거침없이 좁힌 배는 나루에 닿았고, 곧 하선용 널빤지가 내려졌다.

가장 먼저 달려 내려온 것은 (뱃머리에 서 있지 않았던 덕분인지) 스란두일 왕이었으나 그는 곧 겅중겅중 달려가 환영 인파 사이 섞여 있던 또 다른, 그리고 생김새를 보아서는 아들일 게 분명한 젊은 요정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자 엘론드 일행도 하나둘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핀로드가 언급한, 그리고 핀로드도 이전에 소문으로 접한 적 있는 글로르핀델이 먼저였다. 그는 핀웨 가문 요정들에게 다가오는 대신 가볍게 예만 표하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다른 때였다면 F가 부러워했을 만큼 잽싼 행동이었다. 그다음 차례인 키르단 역시 이쪽에 인사를 보내기는 했지만, 곧 다가온 선원들에게 휩쓸려 모습을 감추었다. 갈라드리엘과 엘론드는 나란히 맨땅에 발을 디뎠는데, 움직이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서로 무언가 논의하는 듯했다.

묘한 감정이 F 안에서 깨어났다. 핀로드의 누이동생, 그리고 마글로르의 양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종의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 생각에 부러움의 결이 섞여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스스로를 포르메노스로 치워 두었듯, 이 생각 역시 머릿속 깊은 구석으로 내쳐 버리고 싶었다. 꺼내지도, 손대지도 않아도 되는 곳으로.

할 수만 있다면, 페아노르와 그 아들들까지도.

그런데 네 요정이 다 내리고도 핀로드는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언가 예감한 F는 핀로드를 흘깃 노려보았다가, 다시 배를 응시했다. 뭐지? 대체 무엇이 남았길래?

“F.”

핀로드는 진지해진 목소리로 불렀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불안에 떨기에는 F는 이미 너무 많은 기력을 써버린 뒤였다. 대신 F는 뻣뻣하게 굳은 그대로 서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실은 핀로드의 부름을 들었다는 티조차 내지 않으면서.

“F.”

다시 한번 핀로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때, 보는 것보다 먼저 F는 가벼운 발소리를 들었다. 다친 사람이 걷는 것처럼 흐트러진 걸음이었다. 해어져 부드러워진 천이 스치는 사그락거림은 그다음으로 찾아왔다. 반 박자 빠른 예감이 F를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요정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였지만, 품에는 낡은 하프를 안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아래로 F는 뻣뻣이 긴장한 입매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들었을 때 F는 비로소 마주쳤다.

지독히 낯설고도 익숙한, 잿빛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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