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병상에 누운 지 사흘이 지났다. 사냥을 나섰다가 곰을 마주쳤다고 했던가, 그와 함께했던 정예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소식을 들으며 멜레아강은 앞뒤 상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은 개나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그에게 으레 순하게 굴었듯 곰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깊은 숲속에서도 홀로 마음을 놓고 방심
모처럼 시내 나들이에 신이 난 앤은 피앙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룻배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새로 갖춰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산뜻하게 휘날린다. 앤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혼자서 외출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상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기분이 안 나니까. 기왕이면 배를 타고 나오는 편이 더 근사하기도 하고.
명렬은 연구실 한켠의 해골 모형에게 습관적으로 말을 붙인다. 명순아, 나 왔어. 이름까지 지어 두고 정성스레 닦아 가며 관리하는 모형과의 대화는 늘 이렇듯 간단한 안부 인사로 시작된다. 실은 일방적인 토로에 가까운 그 대화란 것이 날마다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렬 혼자서만 모르는 일이다. 얘깃거리야 항상 시답잖은 것들뿐이지만 달리 털어놓을 데도 없
살리에리는 작은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그가 마차에서 안전히 내릴 수 있도록 한다. 화가로서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문인 만큼, 살롱에 발을 들이며 그는 제법 긴장한 것도 같다. 시종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살롱의 문 너머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늘어져 다과를 즐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봄밤 내리는 부슬비에 젖어든 옷자락을 알아채듯이. 에릭은 문득 그의 연인이 베풀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매번 숨 쉬듯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무거운 증명이었는지. 에릭은 약지에 자리잡고 있는 반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내리깔린 그의 시선이 품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앤에게로 옮겨 간다. 세상모르고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당신은 모른다. 당신의 짙은 흑발이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빛나는 것을.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무수한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감탄한다는 것 또한. 당신의 눈동자는 땅속 깊게 뿌리 내린 나무처럼 생명력 있고, 자아내는 눈빛은 어찌나 단단한가. 당신은 고작 소설의 실패로 비탄에 빠져 세월을 허비하는 나보다
몇 차례 노크에도 응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자리에 있을 법도 한데, 그새 또 밖으로 나간 걸까. 잠시 고민하던 한스는 조용히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업무에 집중했을 때의 콜린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쁜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새로 쓴 원고
힘차게 이어지던 뱃노래가 이제는 다 끝나 간다.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노래였으나 그 즈음 에르위나는 자신감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유령을 묶은 매듭은 세상 무엇보다도 튼튼하다. 그가 아무리 힘세고 난폭하다고 한들 제 머리통 만한 그녀의 밧줄을 단번에 조각내지는 못할 것이다. 축 늘어진 유령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책상에 걸터앉은 에르위나는 스스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 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카미유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아침 출근길, 로랑은 대수롭지 않게 조간신문을 펼쳐보고 숨을 참았다. 실종되었던 카미유 라캥, 센강 변으로 떠밀려온 시체가 그로 밝혀져…. 로랑은 신문을 구기고 뒤돌아 달려갔다. 집 앞으로 신문이 와있을 것이다. 라캥 부인이 봐서는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 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로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덕에 눈을 떴다.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는 침대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와 옷을 대강 꿰입기 시작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셔츠 단추를 다 잠그지도 않은 채 로랑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내달리려다 가장 중요한 걸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 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주었던 총을 존은 줄곧 간직하고 있었다. 총을 건네받고, 그 쓰임을 묻자 죽이는 것, 이라고 그는 말했다. 무엇을 죽이느냐는 물음엔 답하지 않았다. 예의 그 미소 – 존을 놀리는 웃음 같다가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가,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 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존, 낙원을 떠나게 된 아담과 이브 말이야. 그 이야기를 믿어? 존이 그레첸의 말에 재킷을 벗다 말고 그레첸을 바라봤다. 그레첸은 사과 하나를 흐르는 물에 씻고 있었다. 존은 그 새빨간 것을 흘긋 보고는, 넥타이를 풀며 대꾸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래.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호프는 가죽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봉투는 기나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헤질 대로 헤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호프는 이것 하나 때문에 결국 그 재수 없는 - 예전의 사랑이자 개자식을 떠올리게 하는 - 변호사에게 다시 찾아가 부탁했다. 원고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남자를 좋아한다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어디서 들었어? 그냥, 밀라노를 돌아다녀보면 들려. 그래서, 들릴 때까지 돌아다녔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됐어, 아무래도 좋아. 사실이니까. 다빈치는 항상 분주했다. 얼마나 바쁜지 식사는 허구한 날 감자 스프였다.
※ 2019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을 기반으로 한 창작물이며 주관적인 캐릭터 해석 및 상상을 포함합니다. ※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 有. ※ 특정 캐스트의 노선을 참고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 날 이후로 고이 챙겨두었던 붓을 꺼냈다. 제 명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나버린 벗의 유일한 유품. 남의 손을 타기 전에 제 손으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