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뮤지컬

로랑의 첫경험

뮤지컬 테레즈 라캥 초연 기반 |뮤지컬 기반, 날조 연성...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 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로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덕에 눈을 떴다.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는 침대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와 옷을 대강 꿰입기 시작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셔츠 단추를 다 잠그지도 않은 채 로랑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내달리려다 가장 중요한 걸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과 연필을 낚아챘다. 로랑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되었다. 그녀가 나오는 시간과 맞추어야 한다. 그녀를 보기 위해 나오는 거니까. 로랑은 힘이 바짝 들어간 다리에 힘을 더 주었다. 들판으로 끝없이 내달렸다. 바람이 로랑에게로 시원하게 불어왔다. 머리카락, 옷가지와 함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이 펄럭였다. 로랑이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멈춰 섰을 때, 로랑의 시야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테레즈였다.

*

로랑은 매일 아침 들판으로 나와 그녀를 바라봤다. 가장 처음 들판에서 그녀를 본 날도 여느 날과 같이 아버지와 싸우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날이었다. 그날은, 정신을 차려보니 들판 위에 앉아있었다. 애꿎은 풀을 잡아 뜯으며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에겐 제대로 되먹은 가정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새파란 풀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들었던 그 순간, 저 멀리에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바람결에 그 아이의 머리칼이 날리고 있었고, 그 아이의 옆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 아이가 고개를 돌려 로랑을 바라봤다. 어쩌면 착각일 지도 몰랐다. 로랑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까, 망설이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 아이를 부른 듯했고 아이는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로랑은 그날 뒤로 그 아이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데도 왜인지 풀냄새가 근처에서 나는 듯했고…. 그 긴 머리칼이 제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느 날 밤에 로랑은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기억에 의존해 그 아이를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왜일까, 그렇게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그 아이를, 막상 표현해보려 하니 연필 끝은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스케치북을 덮어버렸고, 로랑은 다시 아침 일찍 들판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날도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섰다.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가느냐 고함치는 아버지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서 로랑은 뜀박질을 해댔다. 마침내 들판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도 들판에 있었지만 낯익은 남자아이가 보였다. 카미유 라캥. 로랑은 숨을 몰아쉬며 그 둘을 바라봤다. 여자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카미유는 뒤를 돌아보았고 로랑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로랑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침 일찍부터 여긴 무슨 일이냐고, 오히려 로랑이 카미유에게 물었다. 바보 같다고 로랑은 생각했다. 카미유는 어깨를 들썩이며 여기 있는 테레즈 때문이야, 하고 웃어댔다. 테레즈가 글쎄 아침마다 이곳을 산책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려대기에, 엄마가 유일하게 허락한 거야. 카미유가 덤덤하게 설명해주었지만 로랑은 그 아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로랑의 시선은 오로지 테레즈의 뒷모습에 붙박여있었다. 카미유는 그런 로랑의 눈치를 보더니, 테레즈의 팔을 잡아당겼다. 테레즈가 아무 말 없이 뒤돌았고, 로랑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숨이 멎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들이켠 숨이 나올 줄 몰랐고, 테레즈는 놀란 눈의 로랑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로랑, 이쪽은 테레즈. 테레즈, 이쪽은 로랑이야. 인사해. 카미유가 둘을 서로에게 소개해주었고, 로랑은 그제야 숨을 조금 내뱉을 수 있었다. 숨을 다시 들이켜자 묘한 냄새가 그 아이에게서 났다. 수박 냄새? 의문을 가진 찰나 그 아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로랑도 고개를 살짝 숙여 그 아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테레즈. 겨우 내뱉은 인사말이었다. 테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인 그 아이에게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로랑은 테레즈, 라는 이름을 속으로 열심히 곱씹었다. 로랑의 옆에서 카미유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라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랑은 그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테레즈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새파란 눈동자 앞에 있으니 왜인지 로랑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분명 주변은 모든 게 트여있는데. 로랑이 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둘러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직이 테레즈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카미유의 엄마였다. 어째선지 테레즈는 대답하지 않고 카미유가 ‘가요, 엄마’라고 답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로랑. 카미유는 그렇게 인사하며 테레즈의 손을 붙잡고 그의 엄마에게로 갔다. 테레즈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로랑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수박 냄새가, 났다.

*

테레즈가 집으로 돌아갔다. 로랑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걸로 대체 몇 번 그녀를 그린 걸까. 스케치북을 뒤로 넘겨도, 넘겨도 테레즈뿐이었다. 스케치북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스케치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매일 로랑의 옷가지는 아침이슬 냄새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몇 번 그를 윽박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집을 뛰쳐나가는 로랑을 포기한 듯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정확히 자라나는 아이에게 필요한 관심 같은 건 아니었다.

테레즈와 말을 나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덕분에 다리 힘이 길러지는 것 같아 좋다고 생각해야 할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뒤에서 로랑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돌아보니 카미유였다. 카미유! 웬일이야? 로랑은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고, 또 반사적으로 테레즈라면 아까 집으로 가던데, 라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카미유는 웃으며 오늘 저녁 식사에 로랑을 초대하려고 한다며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저녁? 로랑이 되묻자 사양할 것 없다며 카미유가 손사래를 쳤다.

내 친구라고 했더니, 엄마가 흔쾌히 허락했어. 엄마는 항상 날 걱정한단 말이야. 과보호가 따로 없어. 너도 기억하지? 아홉 살이 되던 날. 그때. 내가 그놈들한테 흠씬 얻어맞은 날 말이야. 로랑 너도 그 뒤로 날 도와주기 시작했고…. 하여튼 그 뒤로 – 원래도 나 아픈 것 때문에 감싸고 도시는데 말이야 – 엄마의 과보호가 심해져서…. 엄마는 나한테 친구가 있다는 게 기쁜가 봐. 어쨌든 로랑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 사양하지 마.

늘 카미유는 묘하게 날 선 말투를 하고 있었다. 이 아이의 이런 모습은 로랑에게 있어 낯선 것이 아니었기에 로랑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오늘도 로랑은 집에 돌아가는 것이 싫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집으로 가면 테레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로랑은 스케치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미유의 집 앞에 서서 로랑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제 문만 두드리면 되는데 손에 쥔 스케치북이 영 신경 쓰였다. 테레즈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싶어서 들고 온 건데 생각해보니 이렇게까지 자신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말도 안 섞어본 남에게서 받게 된다면 어딘지 무서울 것 같았다. 첫 만남 – 따지자면 두 번째 만남이지만 – 부터 나쁜 인상을 심어주긴 싫었다. 로랑은, 그 아이의, 뭐랄까. 그 아이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웃기는 일이라고 자신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아이의 파란 눈동자라던가, 그 긴 갈색의 머리칼을 떠올리면 도저히, 숨이 안 쉬어지는 게…. 들판에서 눈을 감고 기쁜 듯 웃는 얼굴로 심호흡을 하는 그 아이를 보면 로랑은, 자신의 숨통도 트이는 것 같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래서 어쩌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랑은 여태까지 누군가를 이토록 맹목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약속한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아있었다. 집에 다녀오기엔 충분했다. 로랑은 뒤돌아 자신의 집으로 뛰어갔다. 스케치북은, 그냥, 자신만의 보물로 삼기로 했다.

 


테레즈는 울고 있었다. 로랑은 직감적으로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테레즈 미안해, 라는 말이 혀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로랑이 테레즈에게 키스했다. 충동적으로, 한 일이었긴 한데. 그는 그녀가 울 줄은 몰랐다. 코끝이 새빨개진 채 테레즈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로랑의 두 손은 애매하게 테레즈에게 뻗어있었고 테레즈는 로랑에게서 반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 뒤에 서 있던 카미유는 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카미유는 ‘와, 로랑. 남자답네.’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겨우 그런 거였다. 로랑은 테레즈에게서 팔을 거두고 카미유를 한 대 칠까 망설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로랑은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를 향해 뻗어있던 손가락도 조심히 접었다. 테레즈는 고개를 숙인 채 로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우는 걸 바라보고 있자 로랑은 숨이 막혔다. 미안해, 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신 카미유에게 테레즈를 달래 달라고, 부탁했다.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그 뒤로 로랑은 카미유의 집을 좀처럼 찾아가지 않았다. 카미유의 어머니인 라캥 부인이 간곡히 부탁할 때면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찾아갔다. 테레즈를 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그 가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로랑은 들판에 가 테레즈를 그리는 것을 관두었다. 테레즈를 그리던 스케치북을 상자에 집어넣고 다신 꺼내지 않았다.

로랑은 그렇게 영영 테레즈를 만나지 않겠다고, 아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로랑은 파리에 서 있다. 파리로 이사 온 라캥 가족의 집 앞에, 서 있다. 카미유 말고는 이 가족을 다신 볼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카미유에게 일자리를 추천해주는 것까진 좋았다. 그 뒤에 카미유가 보답으로 저녁 식사에 자신을 또 초대하리라곤 생각 못 한 것이다. 그래, 사실, 초대에 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로랑은 파리에서 성공적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정착하지 못했다. 미술 작품의 모작이나 팔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은 채, 집도 똑바로 못 구해서 이리저리 전전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집을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었다. 한심한 놈이라고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버지가 뭘 안다고. 속으로 그렇게 뱉어내고는, 로랑은 손에 쥔 이젤을 고쳐 쥐었다. 로랑은, 라캥 가족을 위해 꽃다발도 사 왔다. 그렇게 특이한 꽃은 아니었지만, 나름, 예쁜 것으로 골랐다. 그래, 테레즈가 들면 딱 어울릴, 아름다운 파란색 꽃으로.

유독 오른손에 땀이 많이 났다. 몇 번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로랑은 심호흡을 했다. 그날 뒤로 테레즈의 얼굴을 본 지가 아득하게 멀었다. 테레즈는 어떻게 자랐을까. 달라졌을 테레즈가 너무 궁금했다. 테레즈의 목소리,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은, 또 몸은, 어떻게 변했을까. 분명, 아름다우리라.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로랑은 그들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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