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뮤지컬

봄, 그리고

호프랑 케이가 꽃놀이 하는게 보고 싶어서 / 약간 스포?

https://les-sanspapiers.postype.com/에서 백업한 글입니다.


호프는 가죽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봉투는 기나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헤질 대로 헤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호프는 이것 하나 때문에 결국 그 재수 없는 - 예전의 사랑이자 개자식을 떠올리게 하는 - 변호사에게 다시 찾아가 부탁했다. 원고는 됐으니 그 봉투만이라도 달라고. 변호사는 눈을 흘겼으나 그렇게 박하게 굴지 않았다. 조금은 멀끔해진 자신의 모습이 일종의 신용을 준 것이라고, 호프는 생각했다.

그걸 되찾은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꽃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호프, 세상은 벌써 봄인데, 나만 혼자 겨울 속에 살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말이 줄곧 호프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므로.

그는 맞는 말을 했다. 그와 함께 저는 줄곧 겨울 속에 지내고 있었다. 수십 번 계절이 바뀔 동안 달라진 것이라곤 호프의 몸뚱이뿐이었고 그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워했다. 되돌려주고 싶었단다, 그녀의 삶을.

"염병하고 자빠졌어."

호프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주변에서 몇몇이 흘긋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 마주쳤던 동네 주민도 있었다. 그는 호프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갔다. 재판이 있은지 열흘이 지났다. 호프는 이제 동네의 '정상의 기준'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호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봄이다, 몹쓸 것아."

가죽 봉투에다 대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은 확실히 봄이었다. 주변엔 이름을 알 수 없는 - 엄마가 이름을 알려줬던 적이 있는 꽃도 보였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가 좋아하던 꽃도 있었다 -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호프는 꽃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코트 안쪽에 품고 있던 봉투를 바깥으로 꺼내 안았다. 그도 이 꽃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봄이구나. 호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프는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그가 멍청한 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바보, 내가 그새 보고 싶었던 거야? 돌려줘도 쓸모가 없네~ 당신 삶 말이야. 이참에 확, 나 다시 데려가지 그랬어."

"…시끄러."

호프는 괜히 투덜거렸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노란, 아주 노란 꽃을 바라보고 앉아있자 그가 호프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고마워."

"뭐가, 이놈아."

"꽃 보여주는 거. 고마워."

"닥쳐."

아이, 호프도 좋으면서.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는 호프를 툭, 쳤다. 호프는 말없이 그를 째려봤고 이내 그의 헤실 거리던 웃음이 멎었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꽃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몇 년 만이던가. 호프의 기억 속에 꽃이란 존재는 없다시피 했다. 꽃이 자리하지 못할 정도로 호프의 기억은 비좁고 산만했다. 아니, 사실 호프의 기억은 거진 하나뿐이었다. 원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원고. 그게 자신의 기억의 전부였다. 호프는 봉투를 안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곁에서 그가 아얏,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었다. 아프지 않은 거 다 안다. 호프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입을 비죽였다.

"호프."

"뭐."

"이 꽃의 이름을 알아?"

앞에 한 아름 피어있던 노란 꽃들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호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잠깐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뽐내는 어린아이처럼 뿌듯하게 말했다.

"개나리야."

"뭔 나리?"

"개나리."

"욕 같네."

"정말, 그러기야?"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마, 호프. 그가 투덜거리며 툭, 개나리의 가지를 꺾었다. 그렇지만, 정말 욕 같은데. 잠자코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호프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그것을 - 개나리를 제 귓가에 꽂아줬기 때문이었다.

"뭔데. 뭐 하자는 거야?"

"당신, 이런 거 해 본 적 없잖아."

"……."

"그리고 개나리, 꽃말이 희망이거든. 당신 이름처럼."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호프는 괜히 귓가에 꽂힌 개나리 가지를 매만졌다. 염병, 귀찮기만 하구만. 호프가 중얼거리자 그가 더 크게 웃었다. 호프는 뭐가 우습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만 놔두었다. 사람들은 으레 봄이 오면 미치고는 했다. 호프도 실실,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딱, 기분 좋게 시원했고, 봄 햇살은 따사로웠으며, 품에는 서류 봉투가 - 비록 비었지만 - 있었고, 곁에는 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는 노란 희망이 걸려있었으니까. 호프는 미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했던 짓거리는 다 뭐란 말인가. 미친 게 아니었나 보지. 그럼 자신은 봄마다 이렇게 미치면 되는 거였나?

호프는 하하, 웃었다. 그와 함께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꽃도 바람에 천천히 흔들렸다. 노란 물결이 호프와 그의 앞에 있었다. 한동안은 거리에 그와 호프, 둘뿐이었다.


호프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먼지 쌓인 텔레비전도, 삐걱대는 낡은 의자도, 테이블도 모두 허전해 보였다. 안녕, 안녕하며 염병 떨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봉투를 얌전히 올려두고, 호프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노란 희망이 꽂힌 채였다.

사실, 봉투 안에는 개나리가 가득했다. 그가 다 들고 가라며 한껏 꺾어다 그 봉투 속에 꽃꽂이 하듯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호프는 그러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야, 이렇게 많이 꺾으면 얘 죽겠는데.'라고 한마디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찮아, 개나리는 많고, 희망은 당신이니까,라는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기에 호프는 말리지 않기로 했다. 더 많은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잠깐 켜지지도 않은 텔레비전의 화면을 빤히 보다가 봉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개나리 말고도 볼 꽃이 많으니, 개나리는 이쯤하고 다른 것도 보고 가라는 그의 말대로, 호프는 혼자서 봉투를 껴안고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돌아다녔다. 세상엔 봄이 만연했다. 호프의 귀엔 희망이 걸려있었고,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좋은 날이었다. 그는 곁에 없었지만, 견딜만했다.

에바 호프로 살기로 한 지 열흘,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테이블 위의 희망이 그걸 증명해주듯 노랗게, 아주 노랗게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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