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트릴로지 모르가나] Flashback
※ 2018 연극 <벙커 트릴로지 모르가나>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이며 주관적인 캐릭터 해석 및 상상을 포함합니다.
※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 有.
그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어릴 적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같은 학교를 다니고, 빌어먹을 교장의 다디단 선전문구와 애송이의 치기로 함께 입대한 친구들. 모두 동갑인 건 아니었으나 툭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던 열세 명의 친구들에게는 각각 별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혼자 조금 특별한 지위의 별명을 가진 녀석이 있었다. 역할이든 이름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먼저 집어간 사람이 임자가 된 것이 어느 새 굳어졌는지 아니면 무리 중에서도 유난히 어른스럽던 애라서였는지, 이제 와 그 유래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자꾸만 시선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 이름은 모르지만 오가며 마주치다 얼굴은 익혀 기회가 된다면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어지는 아가씨. 어느 날 친구들끼리 다 같이 모여 놀다 술을 깨기 위해 잠시 걷던 중 유리창 너머로 그 아가씨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쑥스러워 하는 아더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이때다 하고 가서 둘 사이에 넉살 좋게 섞여드는 대신 가게에서 튼 음악 소리와 흥이 오른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뒤섞인 자리로 돌아가 가득 찬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야 아더! 이리 와봐! 가레스가 노래 부른대! 기분 좋게 취해 있던 가레스도 마침 기분 좋게 한 곡 뽑을 준비를 해주어 술기운에 치는 장난 반, 친구를 향한 어쭙잖은 질투심 반으로 바깥까지 들리도록 부러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나는 그웬을 좋아하지 않아. 랜슬롯이 사랑하는 사람은 귀네비어. 그웬이 아더에게 쓴 편지에 닿았던 손을 애써 말아 쥐었다. 먼 길을 오느라 이미 흩어졌을 터인 그웬의 체향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았다.
둘이 만나는 장면을 처음 목격한 이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안감은 애석하게도 정확히 들어맞고야 말았다. 아더와의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한 그웬에게 그는 소꿉친구들 간의 같잖은 놀이를 여태 이어나가고 있는 아더의 친구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서 열세 명의 친구들이 함께 입대하기로 결정했을 때 오히려 내심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그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아더와 다정한 말을 나누는 걸 보는 것은 더더욱 괴로웠으니까.
랜스. 그웬 좋아해? 아니. 그냥 말해. 너도 알잖아! 네 입으로 듣고 싶었어. 궁금증이 아닌 확신이 담긴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가웨인. 클리포드. 잠깐 나가만 본다고 했었는데 정신이 들었을 때는 비틀비틀 참호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줄곧 환영에 시달리다 가버린 그 녀석 뒤를 좇기라도 하듯. 나 죽을 수도 있어. 이제는 사실이 되어버린 가웨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돈다. 어쩌면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가레스에게 평화를 준 그 날 이후로 너는 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레스의 처참한 모습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그 날, 친구의 죽음을 보고하지 않고 어둠을 틈타, 아더와 둘이서 몰래 조명도 없이 무인지대에 시신을 옮겨둔 그 날 군번줄이라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아더는 참호 속 우리들만의 작은 사회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나는 입을 다물기도 벅찼다. 고작 넷 남아 있던 무리가 셋이 된 그 날 이후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레스의 모습이 떠오를수록 요정의 힘을 빌려 가시처럼 박힌 죄책감을 귀네비어의 환영으로 덮으려 애썼고, 그 노력은 또 다른 악몽으로 돌아왔다. 진흙탕에 빠져 죽어간 건 퍼시벌뿐만이 아니었다. 거친 산을 등반이라도 한다는 생각으로 입대한 그 순간부터 우리 모두 발을 잡아끄는 진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죽을 거야. 그러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오기 전에 끝내 붙잡지 못하던 그 놈 원래 이름이라도 한번 불러줄걸. 이렇게 혼자 두 발로 지탱하고 서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그 동안 다른 열두 명의 버팀목까지도 되어야 하는 기분은 어땠을까.
아더. 나의 왕, 나의 친구. 절망적인 전장의 참호에 갇힌 윌리엄에게는 기댈 사람과 생존 의지를 불러일으킬 원동력이 필요했고, 전설 속의 랜슬롯 경에게는 곤경에 빠진 기사들을 구원해 줄 왕과, 충성을 바쳐야 할 왕을 시기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귀네비어가 있었다. 그렇기에 네게는 윌리엄이 아닌 랜슬롯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에 너는 더더욱 굳건한 나의 아더 왕이 되어주어야 했다.
탕. 적군 진영에서 움직이는 인영을 예리하게 잡아낸 독일군 저격수의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다. 주마등도, 모르가나의 환상도 스쳐갈 새 없이 순식간이었다.
꺼져라, 꺼져라, 찰나의 촛불이여.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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